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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독재자와 독재권력을 향한 국민들의 분노
4.19혁명의 초기 마산봉기
4.19 민중혁명 1960년, 이미 86세에 이른 늙은 독재자 이승만! 그는 또 한 번의 집권을 위해 많은 공무원들을 동원한 부정선거를 치럿다. 3월 15일 실시된 정. 부통령 선거. 이승만과 대적할만한 민주당 대선후보 조병옥은 선거를 앞두고 암과 투병하다 미국에서 치료를 받던 중 사망하였다. 이승만의 재선이 확실시되면서, 자연스레 국민들의 관심은 부통령 자리에 쏠리게 되었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장면과 이승만이 밀어주던 이기붕!
1959년 10월 은혼식(결혼25주년) 때의 이승만 부부와 양아들 양 쪽은 이승만의 심복이었던 이기붕 부통령 부부. 방귀뀌자 '시원하시겠습니다, 각하'로 유명
자유당의 강경파와 경무대(오늘날의 청와대) 비서는 늙은 이승만을 막후조정하며 정치를 좌우한다. 희귀병을 앓고있던 이승만은 정권실세들의 인의 장막에 가려진체 장관들도 대통령을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는 비서 박찬일과 협력하여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정보를 차단하고 간혹 대통령 이 확실히 알지 못하는 건에 대해서는 이 승만 이름으로 직접 정책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박찬일이 프란체스카 여사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는 추측된다.”고 당시 미 대사가 보고할 정도였다. 이렇듯 이빨 빠진 호랑이를 뒤에 두고 경찰은 야당 선거운동원들은 탄압하였고, 이승만을 지원하던 수구 꼴통세력인 반공청년단의 폭력단원들까지 가세하여 투표를 감시하였다. 마치 지금의 경찰처럼 당시에도 경찰은 권력의 개 노릇을 하며 공개적으로 자유당후보인 이기붕을 지원했다. 하나마나 한 투표에 의해 이승만은 총 투표수에서 당선에 필요한 1/3보다 2배 이상 많은 표를 얻었고, 이기붕은 180만 표를 얻은 장면을 제치고 840만 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내무장관이던 최인규는 전국의 시장, 군수와 경찰 간부들을 불러 부정투표 계획을 지시했다. 전 유권자의 40%에 해당하는 투표용지를 자유당 지지표로 만들어 미리 투표함에 넣도록 하였으니 선거는 하나마나 한 것 이었다. 1960년 당시의 상황도 지금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가는 오르고, 없는 사람들의 세 부담은 늘어나고, 농촌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는 등 정부와 권력자들 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대학을 나온 실업자 수 증가, 학생운동, 노동운동 탄압, 서민경 제 악화로 국민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경찰과 공권력의 통제 또한 국민들을 옥죄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저지르자 민주당은 선거를 '불법 ,무효'라고 주장했고, 부정선거와 불법선거를 규탄하는 반정부시위가 선거 전후 전국에 걸쳐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랜 독재와 권력의 민중탄압이 심화되며 민심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에 등을 돌렸고, 전국에서 부정선 거를 규탄하는 시민들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일어났다. 3월15일 마산에서는 부정선거를 규탄하던 시민들에게 경찰이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희생자가 속출하자, 이에 분노한 시위대는 남성파출소·북마산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 등을 습격했다. 이 과정에서 870명이 부상당하고 7명이 사망하였다. 주모자로 구속된 26명 은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고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촛불소녀를 연상시키던 어린소년 김주열
당시 고등학교 입학한 17세 소년도 규탄 시위에 참여하였다. 전북 남원군 금지면 용정리 에 살던 김주열군은 마산으로 유학을 하였고,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위도중 행방불명이 되었던 그는 4월 11일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고 한 낚시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채 바다에 떠올랐다.
김주열 학생의 죽음은 4.19 민중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하게 되었다.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는 급격히 확산되었다. 광화문 촛불소녀 항쟁과 비견할 수 있을까? 주로 지방 고등학교 학생들 위주로 주축이 된 불법선거 규탄 과 자유당과 경찰의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김주열 묘소에서 오열하는 어머니 권찬주 여사 배위에 건져 올려진 김주열 시신
박종표는 이후 혁명재판소에서 최루탄을 발사하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유기한 사실을 자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 다시 시신 유기만 인정하고 최루탄 발사는 부인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그는 김주열 열사의 시신 유기 과정에 대해 '3월 15일 밤 10시쯤 교통주임으로부터 최루탄이 눈에 박힌 괴이한 형상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고 손석래 마산경찰서장에게 보고하자, 서장이 '적당히 알아 서 처리하라'고 하자 지프차를 타고 현장에 도착, 시체를 담아 싣고 일단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에서 시체 를 유기하기로 마음먹은 후 다시 월남동 마산세관 앞 해변가로 시체를 가져가 순경 한대진과 지프차 운전 수의 조력으로 시체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졌다'고 자백한다.
그러나 김주열 군의 시체는 그로부터 27일 후인 4월 11일 오전 10시 중앙부두 앞바다에 참혹한 모습으로 주먹을 꽉 진 채 떠올랐고,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이를 촬영함으로써 AP통신을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됩니다.
김주열 학생이 죽기 전 이미 민중혁명의 전조는 학생들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1960년 국회조사단 앞에서 행방불명된 아들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김주열 열사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 권 여사는 특히 경찰이 야밤에 김주열의 시체를 빼돌려 남원에 데려온 후 시체인수증에 도장을 찍으라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시체를 못받겠으니 이기붕의 집에 갖다 주라." 당시 경찰은 김주열 군의 시신을 아무도 몰래 병원에서 빼내 야음을 틈타 고향 남원으로 보내버린다. 주열의 싸늘한 시체를 실은 앰뷸런스가 남원 고향집에 도착하자 경찰은 김군의 모친 권찬주 여사에게 시 체 인수증의 서명을 요구합니다. 마치 용산 철거민 희생자의 시신을 뻬돌린 경찰과 다름없이...
2월 28일 일요일 대구에서는 그동안 관제 시위에 동원되어 오던 고교생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다. 그날 오후 2시에는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선거 유세가 예정되어 있었다. 학생들의 유세장 접근을 차단하기위한 교육당국의 처사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촛불집회에 참가한 학생들을 감시하거나 촛불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처럼 당시 자유당은 각급 기관장들과 학교장을 소집하여 시민과 학생들이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부러 행사를 개최하거나 일요일인데도 학생들을 등교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반대하던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를 벌였고, 경찰과 충돌하여 20여 명이 부상당하고 200여 명이 연행되었다. 3월 5일 서울운동장 민주당 유세 후 학생 시민 등 약 1천 명 ‘학생은 궐기하라’ 외치며 종로에서 시위행진 3월 8일 대전에서도 시위 학생과 경찰이 충돌하여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선거가 있던 이후 3월 15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학원자유화와 공명선거를 요구하는 시위는 계속되었다. 3월 24일 부산에서는 고교생들이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이자 부산시내 중고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3월25일 폭우 속에서도 부산 동성중고, 테레사 여고, 경남공고, 혜화여고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일제 강점기 때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 구금하고 악랄하게 고문하던 일제시대 헌병 보 인 박종표(맨 오른쪽)는 김주열 군의 시신에 돌을 매달아 마산 앞바다에 수장시킨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이었다.박종표는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수많은 촛불을 보고 청와대 뒷산에 올라 자신을 자책 했다던 어떤 인간과 이승만은 닮아도 많이 닮아있다. 이승만은 3.15마산 항쟁을 두고 4월 15일, 그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지금도 촛불시민의 배후 운운하며 빨갱이 타령하던 수구꼴통과 수구당의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 반성은커녕 '젊은 청년들'을 폭동으로 유도·선동하는 '정치적 야심가'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활동에 대하여 경고하던 이승만처럼 현제 권력의 수장은 연일 ‘법과 원칙’만을 되풀이하면서 전문시위꾼 운운하며 수많은 시민들을 연행하고 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오에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경무대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귀교하는 도중 종로5가에서 경찰의 비호를 받는 반공청년단의 습격을 받았다. 이들 반공청년단은 유지광이 이끄는 정치 깡패들로서 기습을 받아 학생들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현제도 이러한 반공청년단을 표방하는 수구 꼴통 깡패조직이 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당시 고려대 학생 기습사건은 지난 2008년 조계사 횟칼 테러와 종로 자동차 뼁소니 사고등과 견줄만한 큰 사건이었다.
4.19 정치깡패 유지광(대졸에 장교출신) 단순 행동대장으로 사형집행을 면제받음 4.19민중혁명
4월 19일 오전부터 10만이 넘는 중고생,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8시 30분 경 대광고 학생 1천여 명이 신설동 로터리를 돌아 서울 시내 중심가로 행진,
9시조금 넘어 서울대 문리대생 선두로 법대, 약대, 수의대, 치대생 등 3천 여 명
9시 30분 서울대 사범대생 1천여 명 상대 2천여 명
10시 고려대생 4천여명
10시 20분에는 건국대생 2천여 명
11시 동국대생 2천여 명, 성균관대생 3천여 명
12시 경 연세대생 5천 명, 홍익대생 1천 명이 시내로 진입
정오를 넘어설 무렵 광화문 일대에는 이미 10만이 넘는 시위대가 몰렸다. 경찰은 시위대에 밀려 효자동 종점에서 시위대와 대치하였다. 경무대 입구 정문과 시위대의 거리는 100여 미터. 경찰은 시위대를 저지하며 소방차로 바리케이드 삼아 시위대를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오후 1시 40분 경 시위대가 소방차 3, 4대를 탈취하여 경찰 저지선을 뚫고 경무대 정문으로 향하였다. 이때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고, 학생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변했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전국에서 186명이 사망하였고 6천 명 정도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승만 경호 책임자였던 곽영주경무관의 사형모습
경무대(=현 청와대) 앞 4.19 시위대에 발포 명령죄로 사형 .사형집행 후 사망 여부 확인 위해 끌어올려져 검진받는 중 곽영주는 정치깡패 이정재와 의형제를 맺어 한시대를 풍미하다가 결국, 모두 사형 당함
희생자는 대학생 22명, 고교생 36명, 노동자 61명, 무직자 33명, 국민학생과 중학생 19명, 화이트컬러 10 명, 기타 5명이었다. 오후 5시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5대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며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송요찬 중장이 서울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날까지도 3·15 부정선거를 모르고 있었다. 오후 8시 월터 매카너기(Walter P. McConaughy) 미국 대사가 경무대를 방문하여 사태 수습을 논의하였다. 밤 10시 경 15사단이 계엄군으로 서울로 들어오고서야 시위가 수그러들었다. 촛불혁명이 일어날 것인가?
그때와 지금의 다른점이 있다면? 정권과 권력자들의 생각과 태도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것이고, 국민들은 무력항쟁보다는 비폭력 투쟁 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경찰과 공권력의 폭력과 탄압이 지속되는 한 이러한 국민들의 인내의 한계점이 언제까 지 지속될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1960년 4.19민중혁명의 잔혹한 4월이 지나가고 5월의 봄을 기대하던 국민들의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또다시 등장한 박정희 군부독재정권과, 연이은 독재정권. 그리고 어렵사리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뿌리내릴만한 시점에 찾아온 소위 1%를 위한 MB정권의 출범, 과연 국민들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얼마나 더 피를 흘리고 죽어가야 하는 것일까?
경무대(=현 청와대)에서 쫒겨나가는 이승만 차량
권력을 빼앗기고 사택인 이화장에서 ...
국민에 의해 재산은 숫가락 정도만 허락되었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가서 교포집에서 무상거주함
남산에 있던 이승만 동상
시민들에 의해 철거되는 이승만 동상
하와이로 망명한지 2년 후인 1962년 병든 사진, 이후,1965년에 죽었다
부통령 이기붕은 국민에 의해 사임당하고 청와대에 숨어있다가 현역 소위인 장남이 권총으로 가족을 몰살하여 시체차량이 청와대를 쫒겨난다
주인 없던 이기붕의 집이 성난 민심에 의해 불태워 지고 있다.
4.19정치깡패 이정재의 법정 모습
성난 민심에 의해 불태워진 이정재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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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직도 매국친일당인 자한당이 있는한 민주주의는 요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