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2 SIHH가 열린 팔엑스포 전경과 내부.
멈출 줄 모르는 시계 산업의 성장
파텍 필립, 아. 랑에 운트 죄네, 제니스, 레이몬드 바일…. 일찍이 한국에 소개되었으나 추가 딜러 계약으로 또 다른 부티크를 오픈하거나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한국 상륙을 알린 시계 브랜드다. 시계 산업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스위스를 살펴보면, 스위스시계산업협회(Federation of the Swiss Watch Industry)의 스위스 시계 수출 현황(1월 한 달 기준)에 따르면 2012년은 전년 대비 15% 성장했다. 2006년부터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다 2008년 세계적인 경제 위기 때문에 2009년에는 감소세를 보였지만 그 이후 재기해 2011년은 그 전보다 더 높은 수출액을 달성했다. 특히 1천9백30만스위스프랑을 수출한 2011년 4/4 분기는 시계 수출 역사상 최고 수준의 기록을 세웠다. 나라별 수입 현황으로 2012년 1월 기준 30개국의 결과를 살펴보면 홍콩, 미국, 중국, 싱가포르, 프랑스, 일본, 아랍에미리트연합 순으로 한국은 11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스위스가 EU 회원국이 아니라 한-EU 자유무역협정의 혜택을 받진 못하지만 작년 대비 성장세도 매우 높은 편이다. 그런 까닭에 시장에 대한 관심도 높다. 전자식에 비해 기계식은 5분의 1 수준의 물량이지만 동반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시계가 필요 없는 시대에 시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런 까닭에 시계업체들의 투자와 마케팅이 눈에 띄게 활발해지고 있다. 제22회를 맞이한 SIHH에 참가하는 도매상이나 취재진의 수도 늘어나 올해는 1만3천 명으로 작년 대비 10% 증가했으며 그중 아시아인은 6% 증가했다. 1월 제네바에서 행사를 마친 후에 보통 신제품들은 1년 뒤에 소개되는 경우도 다반사였으나 2월 초 오데마 피게, 2월 말 예거 르쿨트르 등이 2012년 신제품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이나 부티크 전시를 가지는 등 고객들을 맞이하기 위한 발 빠른 행보를 보여준 것도 눈에 띄는 변화다.
위대한 유산, 그리고 화려한 부활
과거의 유산은 언제나 현재와 미래에 큰 영감을 선사하는 원천이 된다. 까르띠에 탱크는 1912년에 소개한 모델로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아온 시계다. 오리지널에 가까운 탱크 솔로나 탱크 루이 까르띠에, 케이스와 러그에 각을 넣은 탱크 프랑세즈, 긴 직사각형의 탱크 아메리칸으로 라인업을 구성하고 있었으나 올해 탱크 앙글레즈(영국)를 추가했다. 로마자 인덱스, 철길을 닮은 장식, 블루 핸즈, 카보숑 컷 보석을 세팅한 크라운 등 주요 요소를 그대로 반영했고, 발롱 블루처럼 크라운을 케이스 안으로 넣은 독특한 디자인이다. 기존 6.35mm 수준의 두께를 5.1mm로 줄인 초박형 탱크 루이 까르띠에도 탱크의 부활을 이끌 조짐이다. 오데마 피게가 스포츠 시계의 대명사 로얄 오크를 소개한 건 1972년. 이를 디자인한 제랄드 젠타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올해 탄생 40주년을 맞이해 복각 모델과 40개만 제작한 오픈 워크 엑스트라 씬 로얄 오크 등을 소개해 로얄 오크를 선망하는 고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매년 기존 컬렉션 중 하나를 통째로 재정립하는 방식을 취하는 IWC는 작년 프로토피노에 이어 파일럿 컬렉션을 선택했다. 1936년부터 소개한 파일럿 시계는 실제 비행사들이 조종시 잘 볼 수 있도록 한 커다란 블랙 다이얼에 눈에 잘 띄는 야광 소재의 인덱스와 핸즈, 항자성 케이스 등이 특징적이다. 미 해군 조종사들의 학교로, 캘리포니아 미라마 기지에 위치한 탑건과 손잡고 간혹 한정 생산 시계를 만들어왔는데, 올해는 카키 컬러의 탑건 미라마 컬렉션을 비롯해 빅 파일럿 퍼페추얼 캘린더 탑건까지 컴플리케이션 시계를 추가했다. 매년 SIHH 기간에 개최하는 특별전으로는 ‘제네바의 시계 제조(Watchmaking in Geneva)’란 주제의 전시를 열었다. 제네바예술역사박물관(Musee d’Art et d’Histoire de Geneve)에서 주최한 전시는 오랫동안 주얼리와 시계의 생산과 교역의 장으로 자리 잡은 제네바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전시에서는 16세기부터 사용하던 주얼리와 에나멜, 미니어처, 시계 기술과 도구들까지 선보였다.
- ▲ 3 까르띠에 탱크 앙글레즈. 4 피아제 알티플라노 오토매틱 스켈레톤 무브먼트 1200S.
2012년 SIHH에서는 그간 참여해온 던힐의 불참으로 총 18개 브랜드가 신제품을 소개했다.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세계 최초’나 ‘브랜드 최초’란 수식어가 붙은 아이템은 언제나 주목받는다. SIHH의 주축을 이루는 리치몬트 그룹의 수장 격인 까르띠에는 계속 하이엔드급의 파인 워치메이킹 분야에 대해 아낌없이 투자를 하고 있다. 벌써 인하우스 무브먼트가 12개가 넘는데 올해 또 몇 개를 추가했다. 로통드 드 까르띠에 미닛 리피터 플라잉 뚜르비옹처럼 올해 최초로 미닛 리피터 기능을 갖춘 시계를 소개했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14일이나 동력을 축적할 수 있는 패트리모니 트래디셔넬르 14 데이즈 뚜르비옹 시계를 선보여 그 기술력을 과시했다. 2개 배럴을 한 쌍으로 총 4개 베럴을 탑재했는데, 스프링 길이는 2.2m로 기존 스프링보다 4배 정도 느린 속도로 풀린다고. 피아제는 두께 2.40mm로 아주 얇은 오토매틱 스켈레톤 무브먼트 1200S를 탑재한 알티플라노 시계를 소개했는데, 시계 케이스 두께가 5.34mm로 무브먼트와 시계가 각각 오토매틱 스켈레톤 부문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얇은 것으로 기록을 세워 초박형 무브먼트의 강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그뤼벨 포지는 30도 기울어진 입체적인 투르비용으로 유명한데, 이를 언제나 다이얼 위로 드러냈다. 하지만 올해 소개한 쿼드러플 뚜르비옹 시크릿은 이름 그대로 투르비용을 다이얼 위로 드러내지 않고 케이스백으로만 보여준다. 대신 다이얼에는 4분마다 1회전하는 투르비용의 행보를 가늠할 수 있도록 2백40초 눈금을 따라 1회전하는 핸즈로 표시했다. 스켈레톤 다이얼은 무브먼트의 구성 요소를 다이얼 위로 그대로 드러낸다.
- ▲ 5 예거 르쿨트르 듀오미터 스페로뚜르비용. 6 보메 메르시에 케이프랜드. 7 반클리프 아펠 포에틱위쉬 컴플리케이션.
브랜드들의 주목할 만한 진화
오랜 역사 속에서 굳건히 살아 있는 브랜드는 고집스러운 선대 기술의 전승, 끊임없는 투자 그리고 변화에 순응하는 마케팅 등 여러 활동을 잘 버무린 결과물이다. 특히 여러 분야에서 시시각각 바뀌는 풍토에 적응하려면 때로는 제품만큼이나 브랜드 자체의 쇄신이 필요하다. 로저 드뷔는 IWC의 조지 케른이 대표를 역임하면서 디자인과 컬렉션 라인업 정리에 들어갔다. 기존 컬렉션에서 엑스칼리버만 남기고 작년 라 모네가스크를 더했으며 올해 펄션과 여성용 벨벳이라는 새 컬렉션을 추가했다. RD라는 이니셜을 살린 로고도 더 단순한 디자인으로 바꾸었고, 무엇보다 2005년 회사를 떠난창립자 로저 드뷔가 컴백을 알려 새로운 힘을 더할 조짐이다.
1백82년이란 오랜 역사에도 확고한 정체성 수립에는 다소 미약했던 보메 메르시에는 미국 롱아일랜드 주 바닷가인 햄프턴을 작년에 이어 올해도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장소로 내세우고 있다. 클래식한 햄프턴 시계와 과거 크로노그래프로 유명했던 역사를 떠올리게 해주는 케이프랜드, 그리고 패셔너블한 감각을 깨우는 여성 시계 리네아를 소개하면서 브랜드 이미지와 컬렉션 재정비 작업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시간을 기록하다’라는 의미에서 시계의 크로노그래프 기능에 주력, 1/1000초 측정 가능한 크로노그래프를 소개해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준 몽블랑은 독자적인 5백 시간 테스트를 수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계식 시계는 부품의 생산부터 조립, 완성까지 한시도 방심할 수 없다. COSC나 제네바 인증 등을 수행하는 타임랩 등 특정 기관이나 회사 내 자체 검증 과정을 거치는데,몽블랑도 이를 통해 보다 정확한 시계를 제조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제네바 지역에 있는 시계 제조 회사를 중심으로 1886년부터 시작한 제네바 인증도 작년 1백25주년을 맞이하면서 좀 더 개선한 버전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바쉐론 콘스탄틴, 로저 드뷔, 쇼파드, 까르띠에 등이 이 인증을 받고 있는데, 기존 무브먼트의 마무리에 집중하던 것에서 더 나아가 무브먼트를 케이스에 담은 채로 방수나 압력 저항, 파워 리저브, 정확도를 측정함으로써 시계 자체에 대한 검증으로 확장했다. 이 새로운 인증은 2012년 6월 1일부터 점진적으로 시행해 2013년부터는 모든 제품이 이 새로운 항목을 적용하게 된다.
3D Effect
마치 바로 앞에서 보는 것과 같은 입체적인 영상을 제공하는 3D 영화, 3D TV가 보편화되고 있다. 작년 파르미지아니에 이어 올해 리샤르 밀이 3D 영상으로 신제품을 소개하는 프레젠테이션을 펼쳐 화제를 모았다. 시계에도 3차원 형태의 활약이 대단하다. 시, 분, 초, 날짜 기능만 있는 단순한 다이얼과 두께가 점점 얇아지는 것이 특징인 2차원 형태의 시계가 증가하는 반면 인덱스, 여러 기능을 표시하는 인디케이터를 여러 겹으로 넣거나 그 자체로 입체적인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는 스켈레톤 다이얼, 3차원 입체 부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형태도 눈에 띄게 많아지고 있다. 로저 드뷔가 새롭게 소개한 펄션 컬렉션은 크로노그래프부터 플라잉 투르비용 버전까지 모두 무브먼트의 플레이트와 프레임의 일부 또는 전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인덱스와 핸즈 등을 여러 겹으로 배치한 입체적인 형태이다. 다이얼부터 이너 베젤부터 숫자를 넣은 베젤까지 투명한 판형 크리스털로 덮는 구조가 이를 더 강조한다. 시간과 주요 기능에 각각의 동력을 제공하는 듀얼 윙 시스템을 개발한 예거 르쿨트르는 2007년 크로노그래프를 시작으로 문페이즈, 그랑 소네리 등의 기능을 갖춘 시계를 소개해왔는데, 올해는 듀얼 타임 기능에 3차원 투르비용을 탑재한 듀오메트르 아 스페로뚜르비옹을 추가했다. 이 시계는 2월 말 한국에서도 전시되어 화제를 모았다. 그뤼벨 포지가 소개한 GMT 시계는 시계에 아예 입체적인 지구본을 넣었다. 티타늄 소재로 제작한 지구본이 24시간을 주기로 서서히 돌아간다.
- ▲ 8 파르미지아니의 용과 여의주 오토마통. 9 반클리프 아펠 포에틱위쉬 컴플리케이션.
가장 작고 정교한 예술 공간
하이엔드급 시계를 구분하는 기준은 기술적인 면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면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여러 부품의 조합으로 움직이는 기계지만 그것을 아름답게 승화시켜왔다. 지름 30~50mm의 작은 공간에 펼쳐져 미니어처 예술이라 할 수 있는 회화, 조각, 보석 세팅 등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공예 기술을 전승하는 중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매년 공예 기술을 접목한 예술적인 시계 컬렉션 메티에 다르를 내놓고 있다. 올해는 모자이크 세공(tessellation)을 모티브로 무한 반복, 형태 변형, 착시를 이용한 이미지를 그려낸 모리츠 코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의 작품을 시계에 표현했다. 조각, 에나멜, 다이아몬드 세팅, 기요셰 등의 기법으로 표현한 새, 물고기, 조개와 불가사리 등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까르띠에도 이와 비슷한 까르띠에 다르(Cartier d’Art) 컬렉션을 매년 소개하고 있는데, 색색의 원석을 아주 조그만 정방형으로 잘라 모자이크 기법으로 부착한 산토스 뒤몽부터 모노톤의 에나멜 그리자유 기법으로 정교하게 호랑이를 표현하거나 독특하게 밀짚을 잘라 퍼즐 맞추듯 부착한 마퀘트리 기법의 코알라 얼굴이 들어간 로통드 드 까르띠에 시계를 내놓았다. 예술적인 다이얼로 빼놓을 수 없는 브랜드는 포에틱 컴플리케이션을 내세우는 반클리프 아펠. 에펠탑부터 노트르담 성당까지 아름다운 파리의 모습을 조각한 후 그 위에 에나멜로 채색한 다음, 자개를 입체적으로 깎아 만든 구름을 부착하고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유성을 더하는 등 각각의 요소가 아름답게 어우러지도록 했다. 시간 또한 예술적으로 표현하는데, 5분에 한 번씩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방식이다.
시계 그 이상의 가치, 리미티드 에디션
예전에는 남성들이 조끼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낼 때 여성들은 팔찌나 목걸이 펜던트에 감춘 시계를 보았다. 1904년 까르띠에가 가죽끈을 부착한 손목시계 산토스를 선보인 이래 현대인에게는 손목시계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형태가 됐다. 물론 지금은 휴대폰과 같은 전자 기기와 경쟁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벽시계나 탁상시계가 없어진 건 아니다. 고기능, 고가의 기계식 시계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다른 형태의 시계에서도 이런 버전이 출현하고 있으며 거의 한정 생산이 많아 컬렉터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예거 르쿨트르는 매년 탁상시계를 소개하는 브랜드. 공기 중의 미묘한 온도 변화로 동력을 얻는 애트모스의 2012년 버전은 문페이즈, 레귤레이터 기능을 갖춘 시계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를 마퀘트리 기법으로 제작한 케이스에 담아 10개만 한정 생산한다. 까르띠에는 퍼페추얼 캘린더와 투르비용 그리고 크로노그래프 기능을 동시에 탑재한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스켈레톤을 소개했다. 회중시계지만 수정과 흑요석으로 제작한 받침대를 제공해 그곳에 걸어두면 탁상시계로도 사용할 수 있는데, 15개 한정 생산한다. 매년 일반 컬렉션과 별도로 유니크 피스를 소개하는 파르미지아니는 작년 헤지리언 캘린더 탁상시계에 이어 ‘용과 여의주’란 이름의 탁상시계를 소개했다. 가격이 자그마치 40여억원에 달하는 탁상시계로 용의 해에 맞춰 제작한 시계가 시간을 12간지로 표시하고 있다. 니콜라스 뤼섹 손목시계와 탁상시계의 조합을 보여준 바 있는 몽블랑은 이번에는 손목시계와 해상 시계를 결합한 버전을 소개했다. 빌르레 1858 컬렉션 레귤레이터 노티크 타임피스 세트는 3개의 타임 존과 월드 타임 인디케이터를 갖춘 내비게이션 시계와 2개의 타임 존이 있는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로 구성되어 있고 16개만 한정 생산한다. 그야말로 조각품이라 부를 수 있는 시계들이다.
/글 정희경 (시계 칼럼니스트, <시계 이야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