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바닷가 외로운 소나무가 되더라도 네 한 길을 가거라”
한 말씀이 그가 걸어갈 한 길을 열었다
해송불교미술원 정경문 원장
지난 4월 30일 조계총림 송광사 부산분원 관음사가 수광보전 삼존불 점안법회를 봉행했다. 대웅전을 새로
불사하여 수광보전의 현판을 걸고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것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9월, 30년간 주지로 관음사를 이끌어 온 송광사 율주 지현스님이 주지 소임을 내려놓고
회주로 추대됐다. 스님은 “지난 30여 년간 인과의 무서움을 늘 생각하며,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부끄러움을 잊지 않았다. 이제 기도 수행에 전념하겠다”고 말했다.그보다 먼저 한 인연이 있었다. 15년 동안 송광사 불사를 책임지고 있는
불화佛畵, 단청丹靑, 개금蓋金장인인 불모였다. 스님은 그에게 불사를 맡기며 “내가 수행자일 때는 석가모니부처
님을 모시는 것이 마땅하나, 이제 나는 불자들을 위해 여생을 기도로 회향하려고 한다”며 아미타부처님 조성을 청했다.
이 불사를 떠안은 것은 전남 화순 해동불교미술원장 정경문 불모였다. 그는 “중생들을 다 극락정토로 이끌겠다는 서원이 담긴 법당이다. 그 뜻과불사금의 무서움과 고마움을 알기에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전남 화순과 부산을 오가며 불사 막바지에 매진하고 있는 정경문 원장을 관음사에서 만났다.
정경문 원장은 관음사 불사 총감독을 맡고있다. 정 원장은 332호 문화재수리기술자(단청), 1097호 문화재기능보유자(화공), 5076호 문화재기능보유자(도금공)이다. 밑그림부터 조색, 조성, 구도, 배치, 디자인 전체를 진두지휘한다. 화공, 석공, 작가들도 직접 섭외한다.
3년 째 불사 중인 26평 규모의 수광보전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고 1300분의 부처님을 함께 모셨다. 공간이 넉넉지 않아 수미단은 곡선으로 조성했다. 수미단의 유려한 곡선을 타고 극락세계를 그린 십육관변상도十六觀變相圖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권위적인 부처님은 모시지 말자, 불자들과 보다 가까운 곳에 모시자고 의견이 모였다. 낮추고 또 낮추어 살짝 고개 들어 예를 표하면 부처님은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지그시 불자들을 바라본다.
부처님을 모시는 데만 2년의 시간이 걸렸다.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자애롭고 성스럽다.
가사색은 황금黃金, 백금白金, 청금靑金, 자금紫金으로 냈다. 청금, 자금은 한국에서 구할 수 없어 일본에 의뢰했다. 안료에 따라 다른 성분과 성질을 고려하지 않으면 불사 가치를 잃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청금, 자금은 처음 사용하는 채료彩料였다. 공부가 필요했고 삼고초려 끝에 일본의 한 도립미술관장을 한국으로 초청해 하나부터 열까지를 다 익혔다. 그런후에 비로소 정 원장은 부처님께 가사를 올릴 수 있었다. 단청을 완성하는데 8개월이 걸렸다. 옻 단청을 했다. 본래 밤색인 옻에는 아무리 다른색을 넣어도 원하는 색을 꺼낼 수가 없었다. 옻의 색깔을 빼내는 연구만 10년을 했고, 성분만 남은 투명한 옻에 아이들이 입에 넣어도 무해한 천연색을 섞어 쓴다. ‘국내에선 처음으로 사용된 안료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만한 수고가 뒤따랐음을 반증하는 말일 터다.
이렇듯 재주가 많아 할 일도 많은 정경문 원장의 불사는 심지어 지독히 고집스럽다. 자연과 전통, 자기 것을 고집한다. 새롭지만 우리 것이어야 하고, 모사模寫는 제일의 수치다. 그는“ 요령부린 부처님은 불자들이 다 안다”
고 했다. 그의 화법은 담백하다. 그래서 더진정성이 있다.
지금은 법당 뒤로 옹벽을 세우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마당까지 법당으로 조성하자는 그의 제안이었다. 옹벽을 세우고 부처님을 모시고 경구를 조각할 것이다. “실은 불사 회향이 1년이 늦어졌습니다. 불사를 하다 보니 제 것도 관음사의 부처님도
아닌 겁니다. 스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여태한 것 다 지우고 관음사만의 부처님을 모시겠다고요. 저를 믿고 기간을 연장해주신 것이지요. 어디를 걸어도 불보살님이 계시는여법한 도량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 때문인지 부족한 부분이 계속 눈에 들어옵니다.” 이 불사가 마무리되는 12월, 낙성법회를 봉행할 예정이다.
석굴법당으로 유명한 함양 지리산 서암정사 대웅전도 정경문 원장이 불사했다. 오랜 우리 고유의색을 재현해내고자 최초로 시도한 불사였다. “삼국시대부터 조선개국 전까지 단청에 써 온 색이 있습니다. 옛 변상도에 그려진 전각에서 찾은 그 색이 붉은색입니다. 붉은색을 꼭 써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어요.”
그때 서암정사 법일스님을 만났다. 스님은“하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물었고, ‘붉은 단청’이라는 정 원장의 말에 “한번 해보자”고 했다. 색을 재현하는 건 모험이었다. 중국의 자금성 같은 색이 나오거나, 일본의 칠문화 를 연상케 할 수도 있었다. 연구와 고민 끝에 1년 만에 고려시대 붉은 단청 법당을 완성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으며 이는 널리보급되기 시작했다.
스님과 정 원장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우리 욕심내지 말자”. 이후로 무수히 많이 의장등록 제안을 받았지만 하지 않았고, 곳곳에서 붉은 단청 법당이 등장했지만 개의치않았다. 그 약속은 지금까지도 어떤 불사에 있어서나 주효하다.
불교미술을 하는 장인으로 35년을 걸어왔다. 세월만큼이나 귀한 인연이 많았다. 그 중 송광사 방장 보성 스님은 그에게 또 한 분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처음 품은 뜻을 잊지 말라고 ‘일화一和’라는 법명을 주셨고, 불모의 길이 마치 바닷가의 홀로 서 외로운 길을 가는 소나무와 같다며 ‘해송海松’이라는 미술원의 이름도 지어주셨다. 이름만 주신 게 아니었다. 불모의 가슴에 금언도 새겨주셨다. “부처님 조성할 때는 네 하고 싶은 대로 하되 뭘 쓸까를 고민하지 말고 가장 귀한 것부터 골라라.” 최상의 재료에 아낌을 두지 말란 말씀이었다. 그것이 바탕이 됐다. 그는 깐깐한 안목으로 최상의 자연재료를 선택해 천년 부처님을 조성한다.
그렇게 가장 귀한 분을 모실 때 필요한 두번째 재료는 ‘자금’보다 ‘몸’이었다. ‘하지 못하는 불사’가 아니라 고되고 힘들어 좀처럼‘ 하지 않는 일’에 투신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그를 만든 원동력인 것이다.
그리고 매우 지극하다. 승가에 대한 정성과경외심은 옆 사람의 행동거지까지 다잡는 힘을 가졌다. 그런 정경문 원장이지만, 실은 그는 불모를 꿈꾼 적이 없었다. 20대 중반까지 절에 가서 부처님 한번 뵌 적 없는 서양화가 지망생이었던 거다.
첫댓글 불사는 '부처님의 일' 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일이란 '중생들을 위한 일들' 이라고 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_()()()_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