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성경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 것은 우리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항상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 여러분이 세상의 사고방식에 복종하지는 말아야 하지만, 또한 전통주의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전통과 전통주의는 차이가 있다. 전통주의의 잘못은 새로운 것은 모두 잘못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며, 이것은 세상의 사고방식에 복종 시키는 것과 같이 또 다른 극단에 서 있는 것이다.
성경적인 자세를 가지게 되면 어떤 난제들이 항상 존재하게 되며, 모든 일마다 그렇게 간단하게 맺고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커피숍 복음 전도’라고 불리우는 것으로 한 건물을 빌려 저녁마다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초대한다. 차를 대접하면서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말해 준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세상적인 방법이라고 비난을 받고 있다. 우리는 너무 과격한 반작용으로 우리 자신을 영적 탐정이나 추적꾼들로 만드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반응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실 준비가 되어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눅7:34) 라고 말했다. 바리새인이 볼 때는 그 일이 정말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다. ‘유대주의자들’이라 불리웠던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이방인을 만나는 그의 태도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조지 휫필드는 노천에서 설교한 일 때문에 존 웨슬리에게 비판을 받았다. 설교나 전도는 거룩하게 구별된 건물 안에서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곧 그 노천 설교에 대해서 옳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자신도 그러한 방식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견해가 성경적임을 입증할 수 없거든 우리가 말하는 것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
구약 시편 이외의 그 어느 노래도 찬송가도 부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것을 성경으로 입증해야 하지만 그들은 입증할 수 없다. 엡5:19에 ‘신령한 노래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영감 아래서 노래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 오직 자신은 옳아야 하고 정확해야 함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미 우리는 위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영적인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주위에 철의 장막을 쳐 놓을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자신 안에서는 절대적으로 완전하면서도 복음 전도의 일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소용이 없을 수 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고전11:18) 자신들을 보호하고 자기들의 교회와 활동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데만 시간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바깥 세상의 관계에 있어서는 전혀 활동이 없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임무는 복음전도의 사명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 9:22에서 자신의 복음 전도 방식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있다. ‘메시지’에는 조금의 변이가 있어서는 안 되지만 방식에 있어서는 유연성을 보여야 함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고전 9:20-21에서와 같이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말하도록 항상 애를 써야 한다. 모든 선지자는 설교를 할 때마다 자기 앞에 있는 회중들이 성경을 잘 알고, 믿음에 대해서 잘 교육 받은 사람들이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회중을 얻기는 거의 힘든다. 만일 설교자가 자기 앞에 있는 회중에게 설교하는 것이 아니면 그는 강단에서 물러가는 것이 좋다. 그의 임무는 그들을 개선시키는 것이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결코 그들을 돕지 못할 것이다.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장황하게 강론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커피 한 잔을 그들에게 대접하는 일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런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다면, 그들에게 여러 잔의 커피를 주라고 말하겠다. 여러분의 관심은 여러분의 교회의 순결성이나 당신의 순결성인가? 아니면 지옥의 언저리를 서성거리는 주위의 영혼들이 구원 받는 것인가? 여러분의 동기가 순결한 동안에는 그 동기가 여러분의 방식을 통제할 것이다.
그처럼 여러 극단들이 존재한다. 절대적인 규칙들과 법칙들을 설정해 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너무 엄격함! 방종함! 그 둘은 다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것이 참다운 성경적 입장이다.
첫 번째 위험은 세상을 본받지 않을 유일한 방식은 세상에서 벗어나 은둔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은둔주의는 뒤에는 기만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것이다.
두 번째 위험은 율법주의이다. 우리는 법칙이나 규례를 좋아한다. ‘은혜 아래 있는 것’보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이 더 쉽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우리는 장성한 어른들로 대우 받고 있다.(갈3:23-25) 펜실바니아의 메노파는 본문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전기, 전화, T.V, 자동차, 트렉터 같은 것을 허락하지 않고 특별한 옷을 입으며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이 직면한 이 위험은 세상을 본받는 위험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인한 반작용을 나타낸 순진한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위험은 바리새주의의 위험이다. 율법주의(메노파)는 매우 겸손한 사람들이지만 바리새주의는 주로 영적인 교만, 자기 중심적, 자기 만족의 문제라는 것에 차이가 있다. 눅18:21의 바리새인처럼 세상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면 세상적인 그리스도인과 같은 것이다. 바리새인의 또 다른 특징은 항상 비판적인데, 여러분이 비판적인 정신을 가지게 되는 순간 또 다른 극단으로 빠지는 것이다.
네 번째 위험은 도덕폐기론(무율법주의)으로 일단 사람이 구원 받으면 항상 구원받은 상태에 있으므로 행하는 것, 도덕적인 법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세상과 가까워지려는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본받으면서도 복음주의에 관심을 가지는 척하는 것이다.
-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어떤 원리를 제시하려 한다.
첫째,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2:15)
둘째,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12)
셋째, 세상의 지배를 받거나 세대를 따라서 빚어져서는 안 된다. 자신 속에 세상과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어떤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세대를 따라가는 것이다.
넷째, 이 세상의 유행에 지배를 받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언제나 겉치레와 허식의 문제이다.(요일2:16) 어느 정도까지 어떤 사람이든지 유행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론의 지배를 받거나, 내게 미칠 영향에 두려움을 가진다면 여러분은 세대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극단을 피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시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결코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바리새인들은 항상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고 싶어 했다.(마23:5) 그처럼 자신이 세대를 본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도록 과시하고 있다면, 사실상 교묘하게 세대를 본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삶을 영위하는 방식은 항상 자기들의 새로운 성품의 표현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한 그 일을 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1:27)
그리스도인들은 절제(중용)하는 온유한 사람들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면서 행하실 때 아무도 몰라보게 행하셨다. 그러나 언제나 무엇인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사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