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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녀양육
잠언 22:6, 에베소서 6:4
이동원 목사 2006-05-10 오전 10:41:58
[성경 본문]
제목 : 그리스도인의 자녀양육
잠언 22장
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에베소서 6장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설교 전문]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된 우리를 양육하시는 방법을 자주 독수리 양육에 비유합니다. 신32:11을 보십시오.“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위에 그것을 업는 것과 같이”하신다고 했습니다. 보금자리를 어지럽힌다는 말은 잠자는 아기 독수리를 깨운다는 뜻입니다. 아기 독수리의 어린 시절 부모 독수리는 아기 독수리를 둥우리에서 먹이고 재우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가면 날개위에 업어 나르기를 시작합니다. 다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이제 하늘을 나르는 훈련을 시작합니다. 보통 독수리의 집 둥우리는 높은 산정 가까운 비탈 언덕에 위치합니다. 어느 날 부모 독수리는 아기 독수리를 깨워 그의 안전의 상징인 둥우리에서 데리고 나와 낭떨어지 비탈길에 섭니다. 그리고 바람불기를 기다렸다가 아기 독수리를 날개위에서 떨쳐 내립니다. 아직 한번도 날아보지 못한 아기 독수리는 자기가 날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기위해 필사적으로 날개를 퍼뜩여 봅니다. 한없이 공포속에 하강하는 아기 독수리가 결정적인 위험에 처하기 전에 부모 독수리는 재빨리 아기 독수리 밑으로 하강하여 날개를 펴서 업고 다시 집으로 상승합니다. 몇 번씩 이런 훈련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아기 독수리는 저 무한한 하늘의 공간이 자기의 세상인 것을 깨닫고 나래를 펴 비상하는 하늘의 왕자와 공주로 자라갑니다.
오늘의 본문 엡6:4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에게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사용된 ‘교훈과 훈계’, 그리고 ‘양육’이라는 단어는 모두 적극적인 훈련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들입니다. 자녀 양육은 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자녀 양육은 자녀를 낳고 데리고만 있으면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적극적인 교육의 비전을 갖고 양육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의 자녀들은 하늘을 나르는 비전의 주인공들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훈련에 의해서 나르는 존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방금 태어난 독수리를 격리시켜 전혀 나르는 경험을 주지 않자 한 독수리가 닭과 어울리며 평생을 닭처럼 땅을 기며 살아가게 한 실험 결과가 보고 된 사례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우리 자녀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자녀 훈련의 철학과 자녀 양육의 비전을 갖고 자녀를 양육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자녀 양육의 원리는 무엇이겠습니까?
1. 아버지가 양육의 궁극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오늘 에베소서의 본문(6:4)은 ‘아비들아’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왜, 어미들아 하지 않고 아비들아 했을까요? 어미들은 자녀 양육의 책임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이나 이제나 자녀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미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녀 양육의 책임이 어미에게만 있다고 인식하기 쉽습니다. 성경은 이런 전통적인 인식의 패러다임을 깨고 자녀 양육의 궁극적 책임이 아비에게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의 교훈처럼 하나님이 한 가정에서의 지도력을 가장들에게 주신 것이라면 자녀 양육을 포함하여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궁극적 책임이 리더인 아비에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비 여러분, 여러분들은 자녀들의 양육에 얼마나 진지한 관심을 갖고 기도하며 아내들과 협력하고 계신지요?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 바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 너무 바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이 바빠하고 있으신 일들이 내 자녀의 미래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란 말입니까? 요즈음 자녀들은 "우리 아빠는 나빠는 아니지만 바빠”라고 한답니다. 우리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남자들이 직장 상관들이나 동료들에게 저녁이나 주말 시간을 함께 할 것을 요구받았을 때 “난 오늘 저녁에 내 자녀들과 약속이 있습니다”라고 자연스럽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오늘날 가정에서 일어나는 최대의 불행의 뿌리는 가정에서의 ‘아버지 부재 현상’이라고 지적합니다. 동성연애자 자녀들과 알콜 중독자 자녀들의 가장 보편적인 원인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때문이라는 것은 이제는 상식이 되어가고 있지만, 이런 상식적 불행의 끝은 보이지 않습니다. 가정들의 붕괴가 로마 사회의 붕괴로 이어지는 심각한 징후를 절감하던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당시의 사회를 향해 “애국자들이여, 가정으로 돌아가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아버지들이여, 가정으로 돌아가십시오“라고 외쳐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최근 한국의 아빠들에게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독수리 아빠, 기러기 아빠 그리고 펭귄 아빠입니다. 독수리 아빠는 언제나 자녀와 함께 있어주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자녀 곁으로 날아가는 아빠이고 ,기러기 아빠는 일년에 가까스로 두세 번 자녀들에게 얼굴만 보여주는 아빠랍니다. 그런데 펭귄 아빠는 아예 아내와 자녀들에게서 단절되어 팽 당한 아빠들이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아빠입니까? 제발 독수리 아빠가 되십시오.
2.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할일을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바울 사도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라고 권면합니다. 오늘날의 젊은이 세대를 가르쳐 ‘성난 세대’(angry generation)라고 표현한 작가가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성난 세대를 만든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의 자녀들이 그렇게 성난 상태에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원인들을 지적할 수 있다면 저는 세 가지 1)방임과 2)과잉 보호, 3)과잉 징계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우리 가정의 자녀들이 거의 방임상태에 버림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언제 여러분의 자녀들과 진지하게 시간을 함께 보내고 인생을 이야기해 보셨나요? 방임 못지않게 나쁜 것이 과잉보호입니다. 과잉보호의 뿌리는 불신입니다. 자녀들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런 자녀의 눈에 보이는 부모는 자애로운 보호자가 아닌 자신의 인격성을 부정하는 폭군인 것입니다. 그리고 과잉징계는 결정적으로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원인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징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과잉징계를 경계합니다. 그것은 자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잃는 것입니다.
성난 자녀를 만들지 않으려면 어떤 경우에도 부모는 성난 상태에서 자녀들을 나무라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감정이 통제 안 된 상태에서의 어떤 이야기도 그것은 자녀들에게 부모의 교육이 아닌 폭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자녀 양육의 출발점은 부모 자신의 감정의 통제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자녀들을 향한 속상한 마음들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그 성경적 대답은 ‘성령 충만’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가정에 대한 그의 교훈을 시작하며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엡5:18을 기억하십시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 충만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자제력입니다. 술에 취하면 술의 지배를 받고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부모의 감정이 다스려지지 못한 상태는 마치 술 취함과 같습니다. 변덕스런 부모의 감정의 분출을 목격할 때마다 자녀들은 깊은 내적인 혼란과 분노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자녀 양육을 원하신다면 먼저 성령 충만을 구하십시오. 자녀들을 인해 속상한 상태에 계십니까? 그런 상태에서 입을 여시면 안 됩니다. 먼저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성령 충만을 구하십시오. 성령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이 성경적 자녀 양육의 시작입니다.
3. 부모는 주님의 가치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의 본문에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가르칩니다. ‘교양’이라는 단어가 ‘예방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단어라면 훈계는 ‘치료적인 언어’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행위와 말이 주의 뜻에 합당하도록 양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부모들 또한 주님이 기뻐하시는 행위와 말을 매개체로 자녀를 가르쳐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이 기뻐하시는 행위로 가르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부모 자신이 모범을 보이시는 일입니다. 자녀 교육은 결코 잔소리가 아닙니다. 자녀들이 진지한 믿음의 삶을 살기를 소원하신다면 부모가 먼저 진지한 믿음의 삶의 모범을 보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가 진정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면 부모 자신이 먼저 진지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자녀들이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면 부모 자신이 정직하게 사는 모범을 보이십시오. 자녀들은 부모의 앞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뒷 모습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배운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현대 교육에서는 ‘역할 모범’이라고, ‘모델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진지한 훈계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오늘 날의 인본주의적 현대 교육은 거의 훈계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물론 과도한 징계를 주의해야 하지만 인간의 부패성은 우리의 오류를 시정하는 진지한 훈계를 필요로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먼저 성경이 가르치는 가치관을 익숙하게 내면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동일한 가치관을 매우 일관성있게 자녀들과 나누고 말과 행동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라나고 있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요즈음 많이 읽히는 베스트 셀러에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가족 이야기가 나옵니다. 간디 집안의 중요한 가치관이 정직이었다고 합니다. 한 날 간디의 손자 아룬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자동차 정비소에 가서 차를 수리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오후 5시까지 아버지 사무실에 돌아오기로 약속했는데 정오에 도착한 그에게 너무 많은 시간이 있어서 그는 동시상영 2편을 하는 영화관에 들렸다가 아버지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을 넘겨 6시 5분에 아버지 사무실에 도착하자 그 아버지가 묻습니다. “왜, 늦었느냐?”고. 그는 얼결에 “차수리가 늦었다”고 대답합니다. 이때 이미 아버지는 정비소에 전화하여 언제 정비가 끝났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잠시 묵도한 후 “알았다, 너는 네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거라. 나는 집에 까지 걸어가겠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무실에서 집까지는 무려 15km의 거리었습니다. “아니 왜요?”묻는 아들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침착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얼마나 나의 자녀들을 잘못 교육했는지를 반성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아들아 ,나를 용서해다오, 나는 걸어가며 정직의 교훈을 묵상해야 하겠다” 그날 이후 이 간디의 손자 아룬은 어떤 교훈을 배웠을까요? 일생을 통해 그날 이후 그는 다시는 거짓말을 안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치관의 교육인 것입니다.
4. 부모는 자녀를 떠나 보내줄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잠언의 말씀은 우리가 자녀 양육에서 언제나 자녀의 떠남의 순간을 염두에 두고 교육할 필요를 가르칩니다. 다시 읽어 보실까요? 잠22:6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자녀 양육의 여러 가지 교훈을 가르칩니다. 우선 이 말씀은 우리 부모들의 자녀 양육의 진정한 결과는 그들이 부모의 품을 떠나 사회로 들어갔을 때 그들이 어떻게 사는냐로 검증될 것임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의미는 우리 번역에는 이런 뜻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본래의 뜻은 “자녀들에게 [그가]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자녀의 인생을 부모가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녀들이 주께로부터 받은 재능과 은사를 개발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신 그 인생을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떠나보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못다 이룬 인생을 자녀들에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자녀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살아야 할 그들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어느 날 미련 없이 떠나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그 떠남의 날을 생각하며 오늘 당신의 자녀들을 위한 최선의 준비가 무엇인가를 기도하십시오.
저는 오늘의 말씀을 독수리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샌디 워너(Sandy Warner)라는 기독교 동화 작가의 독수리 이야기에서 부모 독수리가 아기 독수리와 작별하는 순간의 묘사로 저는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부모 독수리는 자녀 독수리가 부모의 품을 떠날 때가 가까웠다고 느끼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자녀 독수리를 비상시키는 훈련을 한다. 그리고 아기 독수리 곁을 나르며 이렇게 말한다. “넌 이제 혼자 나를수 있어, 다음에 우리는 네가 나르는 그 멋진 모습을 저 높은 곳에서 지켜 볼 것이야. 아빠 엄마의 도움이 필요하면 우리에게 보내는 특별한 소리와 함께 네 비상 도움을 요청하는 날개 짓을 하면 되는 거야. 아빠 엄마는 언제라도 너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어. 하지만 너는 곧 너의 아기 독수리를 키우기 위해 우리를 당분간 잊어 버려도 될 거야. 그래도 괜찮아.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기 때문이지. 다만 먼 후일 언젠가 우리가 보고 싶으면 넌 저 광야의 골짜기로 내려오면 돼. 거기서 넌 너의 늙은 아빠 엄마 독수리를 다시 볼수 있을 거야. 아빠 엄마는 늙으면 더 이상 이 높은 곳에서 살수 없거든. 하지만 그때에도 아빠 엄마 독수리는 너를 알아보고 저 골짜기에서도 너의 멋진 비상을 응원하며 박수를 보내고 있을거야” 그리고 이 말과 함께 마침내 부모 독수리는 그동안의 익숙했던 자신들의 둥우리를 해체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아기 독수리를 사정없이 밖으로 밀쳐 낸다. 더 먼 곳으로 더 멀리 비상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다시 부모 독수리는 허공을 가르는 큰 소리로 외친다. 그것 봐! 넌 할 수 있어! 넌 할 수 있어! 우리보다 더 멋지게 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