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사도는 로마서에서 계속 해 왔던 모든 것에 비추어서 이렇게 삶을 영위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본문에서 그 성화의 교리 전체를 서론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 그리스도 삶을 영위하는 전체 비밀, 성화에 대한 전체 비밀이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다. ‘본받아’라는 말의 의미는 밖으로 입고 있는 무엇이라는 뜻으로 그 사람의 내면적 생명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형체’와 같은 뜻이다.
“오직 변화를 받으라” -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 십계명를 받고 내려 왔을 때 모세의 얼굴이 빛나고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과 교통하였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무엇인가를 반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야 한다고 사도는 말하고 있다. ‘본받지 말라’는 말씀과 ‘변화를 받아“라는 말씀은 열쇠와 같은 구절이다. 세상적인 방식으로 산다면 우리의 본질과 존재를 표현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인 양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을 스스로 모순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이미 변화되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이제 그러한 것을 행하라는 명령을 받는 입장에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 권면을 수행해야 할지 숙고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전 행실을 단순하게 수정하거나 개선하는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과 사고방식과 이해의 영역에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세상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떠한 사람인지 인식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사람인지 인식해야 한다. 먼저 어떠한 난제를 거론하기 전에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르게 하라. 전체 관점을 바르게 하도록 하라.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바울은 그 점부터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에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17-24)
첫 번째로 이것이 교리, 본질적인 교훈이다. 기독교에서는 세부 항목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전체(본질)로부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혼동에 빠지고 삶을 실패로 끝내는 것은 바로 그 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심령을 다루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난제들을 장애물 경주의 허들들로 생각해 보면, 허들을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겠는가? 그 허들을 등지고 뒤로 멀리까지 걸어 나가(모든 것을 잊으려는 하는 것 처럼) 허들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거리는 더 멀리해야 한다. 그리고 돌아서서 그 허들을 향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뛰어 넘어야 한다. 이것이 본질적인 기독교 교훈이다
거듭남으로 이지의 능력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하고 논증하고 논리적으로 연결시키는 능력은 여전히 같은 이지의 상태이다. 문제는 그들의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지를 주장하는 것에 있다. 생각의 모든 과정을 결정짓는 내면적인 원리가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지 그 이지 자체가 아니다. 그 이지의 방향이 조정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여러분의 지성적인 사고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시켜 생각해야 한다. 다소 사람 바울은 다른 사람을 능가하는 특이한 능력으로 교회를 핍박하였다. 그는 이제 같은 에너지와 같은 능력으로 복음을 설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열쇠는 그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리로 돌아가라. 그에 대한 답은 ‘타락’이다. 에덴 동산에서 일어났던 진정한 일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과 심령의 변화였다. 단순히 열매를 따먹는 문제가 아니고, 따 먹기 전부터 해로움이 그들의 심령 속에 일어났던 것이다. 먹는 일은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 대한 외부적인 나타남일 뿐이다. 그들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능력을 통제하는 것이 잘못되어 나간 것이다.
행실을 다룰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그것은 바로 거듭남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수 없다. 기독교 교훈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적용시키려 하는 것은 기독교 복음을 크게 부인하는 것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23:7) 그릇된 것을 행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그 사람 자체’가 그릇되어 있다는 데 있다.
거듭날 때 새로운 기능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도하는 원리가 우리 속에 넣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계적인 방식으로 어떤 행실의 본을 좇으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율법주의이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에게 말해야 하는 것은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며, 누구인가를 기억하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이 행한다고 해서 따라서 하지 말라.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삶에 부과시켜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속에 있는 것을 외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기독교와 도덕의 차이는 참된 기독교와 외식의 차이와도 같다. 외식자는 꾸미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부분적인 어떤 부분만 변한 것이 아니라 전체가 변하였으므로 나타난 그대로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서 행실이 바꿨다면 그것은 ‘자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과 세상에서 가장 도덕적인 사람들과 차이는 단순한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적인 차이이다. 때로는 그들이 더 선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겉으로 나타난 면에서만 그러하다.(눅16:15)
여러분을 성가시게 하는 어떤 난제가 있는가?
난제를 바라보는 것을 멈추라. 그리고 그것을 등지고 돌아서라. 그것에서 멀리 떨어지라. 그것을 등지고 영혼을 바라보라. 위대한 목적을 바라보라. 창조의 목적이 어떠하였는지 생각해 보라. 그런 다음에 그 난제를 되돌아보라. 그러면 난제가 쉽게 보이고 난제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방식이다. “너희는 변화를 받으라!” 내면적인 본질을 기억하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행동하라.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셔 여러분을 격려하실 것이다. 또한 인도하실 것이다.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일은 그 성령의 인도하심에 반응하는 일이다. 묵상하며, 기도하라. 그것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