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사재는 내금위장을 지내셨는 정수번(鄭守藩)을 기리기위한 정자이고, 정정정(亭"")은
내금위장의 장남 명계공(明溪公)이 강학하시던 정자로 오래되어 허물어진 것을 후손들이
다시 지었습니다,
*영천 북 석동에 있습니다,

*내금위장 鄭守藩1580~1621년,자는 정보(貞甫)로 호수공 정세아(鄭世雅)의 막내아들(4子)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형들은 아버지와 함께 의병으로 출전하자,어린 나이에 가족들을 기룡산에 들어가 돌보며,160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605년에 감포만호,재포만호,를 거처서 무의만호 시에 아버지 호수공의 병환이 깊다는 소식에 사양했고,후에 충좌위 후부장을 거쳐서 용양위부사과 롤도만호를 역임하고 부호군에 올랐고,이어서 내금위장(內禁衛將:종2품)에 승진하여 난공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경상도 순찰사(巡察使)가 공의 실력을 알고 공을 경상좌병영( 慶尙左兵營)으로 전임 시킬 것을 품신(稟申)하여 전임되시다. 광해군13년(1621년) 7월 27일 향년 42세, 등창을 앓으셔서 달성병영(達城兵營)에서 돌아가시다.




현판 글씨소헌(휘 喜永)쓰심

상량문 소헌(휘 희영) 쓰심




위사재를 나와서 담을 따라 뒤로 30보쯤 걸어서 가시면 정정정이 나온다,

*여기서 부터는 명계(明溪) 정호의(鄭好義)께서 강학 하시던 3정 이다,



*정호의(鄭好義1602~1655년) 자는 자방(子方),이고 명계(明溪)는 그의 자호 이다,내금위장 수번(守藩)의 장남으로 용모도 준수했다고 하며 성격 또한 호매(豪邁)하였으며,조부 호수공의 命으로 어릴때는 손모당 문하에서 수학했고,여헌문하에서도 수학했으며,장성하여서는 公이 기거했던 석동 마을 뒤 대추골에 사는 전서강 삼성(西岡 全三省)의 문하에 있으면서,공이 서강선생으로 하여금 그 훈도를 받아 문학과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를 고루 읽어며 향해와 한성시(鄕解:향시,漢城試)엔 18차례 합격했으나,생원시에는 운이 다다르지 못하여 과거에는 꿈을 접고, 집 옆에 연못을 파고,정자(정정정)를 지어 독서와 시작(詩作)을 일삼았다,
公은 또한 천성이 강개(慷慨)하고 기절(氣節)이 있어 정의감(正義感)이 강하여 대의 명분(大義名分)을 지켜 굽히지 않았다, 나라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형 양계(陽溪:好仁)형을 따라 창의 하였다,
유고로는 동생 三休(호신好信)것과 합편으로 상화집(常華集)과 명계일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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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몇년 전에는 호군공화수회가 있어서 후손들이 모여 하루를 즐겼는데 지금은 행사를 하지않으니 아쉽구나!
위사재가 건립되어 몇번의 화수회 장소가 되었는데.....
위의 내용 중 '관찰사의 요청에 의하여 전국의 병영을 순시하던중 .....' 이아니고 '1619년에 본도관찰사가 공의 실력을 알고 경상좌병영으로 전임시킬 것을 품신하여 전임되셨고. 1621년에 등창을 앓으시다 돌아가셨다.'(호군공사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