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全羅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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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고산현(高山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남쪽으로 전주부(全州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11리, 서쪽으로 익산군(益山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용안현(龍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19리, 북쪽으로 충청도(忠淸道) 은진현(恩津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15리,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4리이다.【건치연혁】 여량현(礪良縣) 양(良)은 양(陽)으로도 한다. 본래 백제(百濟) 지량초현(只良肖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여량(礪良)으로 고치어 덕은군(德殷郡)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에 전주에 붙였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낭산(朗山)을 겸임하고, 또 공촌(公村)과 피제(皮堤)의 권농사(勸農使)를 겸하였다. 낭산현은 본래 백제 알야산현(閼也山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야산(野山)으로 고치어 금마군(金馬郡)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때 낭산으로 고치어 전주에 붙였고, 공양왕이 여량감무(礪良監務)가 와서 겸하게 하였다. 본조 공정왕(恭靖王) 2년에 두 현의 이름을 따서 여산현이라 칭하였고, 세종 18년에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외향(外鄕)인 까닭으로 군으로 승격하여, 충청도에 옮겨 예속시켰다가 26년에 다시 본도에 예속시켰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군명】 여량ㆍ호산(壺山)ㆍ지량초ㆍ낭산ㆍ알야산ㆍ야산. 【성씨】 여량 송(宋)ㆍ이(李)ㆍ오(吳)ㆍ황(黃)ㆍ최(崔), 염(廉)ㆍ임(林)ㆍ배(裵)ㆍ문(文)ㆍ김(金) 모두 내성(來姓)이다. 낭산(朗山) 오ㆍ조(趙)ㆍ배ㆍ유(兪)ㆍ현(玄), 김ㆍ이 모두 내성(來姓)이다. 장(張) 촌성(村姓)이다. 피제(皮堤) 최ㆍ이ㆍ송, 임 내성(來姓)이다. 공촌(公村) 이ㆍ백(白). 【풍속】 풍속은 검소함을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쓴다. 【산천】 호산 군의 동쪽 5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미륵산(彌勒山)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군입산(軍入山) 군의 남쪽 12리에 있다. ○ 고려 태조가 후백제(後百濟)를 정벌할 때, 여기에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화산(花山) 군의 서북쪽 20리에 있는데, 강에 임하여 우뚝 솟아 자못 기묘한 경치이다. 용암(龍巖) 군의 서쪽 8리에 있다. 작지(鵲旨) 군의 북쪽 12리에 있는데, 충청도 은진현(恩津縣)의 경계이다. 해마다 7월 15일에 가까운 양도(兩道 전라도 충청도)의 백성들이 모여 씨름[手摶]으로 승부를 다툰다. 누항(漏項)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고산현(高山縣)에서 나온 시냇물이 서쪽으로 흘러 호산 기슭에 새어 들어가서 스며 흐르다가 서쪽 산 기슭에 이르러 내가 된다. 굴둘레[穴圓]의 지름은 장(丈)이 넘는다. 전하는 말에, “용추(龍湫)에서 날이 가물면 비를 빈다.” 한다. 내소암포(乃所巖浦) 군의 서북쪽 20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진포(鎭浦)를 통하여 바다에 이른다. 장선지(長先池)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이지(梨池) 군의 북쪽 12리에 있다.【토산】 게[蟹]. 【누정】 세심당(洗心堂) 객관의 동북쪽 구석에 있다. ○ 윤향(尹向)의 시에, “늦은 아침에도 밤 비는 완전히 개이지 않았는데, 연한 풀 새로 핀 꽃 한 뜰에 가득하구나. 담장 동쪽에 섰는 몇 그루의 대나무만 영롱하게 지난 해의 푸른 빛 변치 않았네.” 하였다. 황화정(皇華亭) 군의 북쪽 11리에 있는데, 신구(新舊) 관찰사들이 교대하는 장소이다. 『신증』 청허정(淸虛亭) 객관 동쪽에 있다.【학교】 향교 군의 동쪽 2리에 있다.【역원】 양재역(良才驛) 군의 북쪽 6리에 있다. 보성원(寶成院) 군의 북쪽 11리에 있다. 영녕원(永寧院) 군의 남쪽 8리에 있다.【불우】 도신사(道新寺) 군입산에 있다. 문수사(文殊寺) 호산에 있다. 심곡사(深谷寺)ㆍ 장안사(長安寺) 모두 미륵산에 있다.【사묘】 사직단(社稷壇) 군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호산에 있다. 여단(厲壇) 군의 북쪽 4리에 있다.【고적】 낭산폐현(朗山廢縣) 군의 서쪽 8리에 있다. 토성(土城) 옛터가 있는데, 둘레가 3천 9백 척이고, 안에 샘물이 두 군데 있다. 피제 부곡(皮堤部曲) 군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옛 성터가 있다. 공촌 부곡(公村部曲) 군의 북쪽 10리에 있다.【명환】 본조 선화(宣和) 태종 때에 현감이 되어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행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덕을 사모하였다. 아버지 상을 당해서 직위를 버리고 갔는데, 3년 상을 마치자 읍인들이 나라에 상서하여 다시 임명되었다. 박혈(朴絜) 세종 조에 지군사(知郡事)가 되었다.【인물】 고려 송송례(宋松禮) 원종(元宗) 조에 임연(林衍)의 난리를 평정하였고, 관직은 중찬(中贊)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송분(宋玢) 송례의 아들인데, 관직은 중찬에 이르렀다. 송서(宋瑞) 송분의 아들인데, 관직은 정승에 이르렀다. 본조 송거신(宋居信)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참여하였고, 여산부원군(礪山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송문림(宋文琳) 과거에 합격하여 화관(華官)과 요직(要職)을 여러 번 역임하였고, 나중에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서 여성군(礪城君)에 봉작되었다. 『신증』 송질(宋軼) 송례의 후손이다. 두 번 과거에 합격하였고, 관직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시호는 숙정(肅靖)이다. 송천희(宋千喜)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천성이 강직하고 과감하였다. 일찍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함양군(咸陽郡)에 여자 무당이 있어 스스로 일컫기를, “나는 불제자(佛弟子)인데, 능히 사람의 병을 고친다.” 하니, 원근의 주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쌀과 포목을 다투어 시주하였다. 천희가 무녀를 형장 쳐서 죽이니, 온 지경 안이 숙연(肅然)하였다.【열녀】 본조 송씨(宋氏) 남편 정희중(鄭希重)이 일찍 죽으니 피눈물로 3년상을 마쳤다. 부모들이 그가 젊어서 과부된 것을 가엾게 여겨 개가시키고자 하니, 송씨가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세하기를, “시어머니께서 김제(金堤)에 계시고 다른 자식은 없는데, 내가 만일 시집간다면 시어머니는 마침내 누구한테 의탁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부모들이 듣지 않으므로 송씨는 애기를 업고 시어머니의 집으로 도망쳐 가서 몇 년 동안 친정에 돌아오지 않으니, 부모들이 그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마침내 집 옆에 별실을 지어 살게 하였다. 송씨는 효성을 다하여 시어머니를 받들면서 한 평생을 마쳤다. 일이 나라에 알려져 정문을 세우고 복호(復戶)하였다.【제영】 난산 횡검극(亂山橫劍戟) 성임(成任)의 시에, “대나무 서 있으니 천 그루의 푸른 낚싯대요, 꽃이 피니 백일 동안 환하다. 송사가 한가하니 뜰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시대가 태평하니 고을에는 성(城)이 없다. 멀리 보이는 나무는 연기 속에 아득한데, 기우는 햇빛은 비온 뒤에 더욱 밝구나. 어지럽게 솟은 산 창칼을 비껴 세운 듯한데, 막 갈아 놓은 칼과 같구나.” 하였다. 일대한계 포군류(一帶寒溪抱郡流)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천 봉우리 높은 나무 파란 연기 속에 떠 있고, 한 줄기 차가운 시내 군(郡)을 안고 흐른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高宗)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숙종 25년에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 단종(端宗) 왕후의 관향(貫鄕)이라 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방면】 부내(府內) 끝이 5리. 천동(川東) 동쪽 처음이 5리, 끝이 10리. 서이(西二)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서삼(西三)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서사(西四) 처음이 15리, 끝이 20리. 북일(北一)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북삼(北三)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합선(合先)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피제(皮堤) 원래는 피제부곡 (皮堤部曲)이다. 북쪽은 처음이 15리, 끝이 25리. 공촌(公村) 원래는 공촌부곡이다. 북쪽은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정지】 낭산고현성(朗山古縣城) 토성(土城)으로 둘레는 3천 9백 척이며, 우물이 둘이다. 피제고성(皮堤古城) 북쪽으로 15리인데 유적이 있다.【영아】 후영(後營) 인조조에 두었다. ○ 후영장 겸 토포사(後營將兼討捕使) 한 사람은 본부사(本府使)가 겸한다. ○ 속읍(屬邑)은 여산ㆍ임피(臨陂)ㆍ옥구(沃溝)ㆍ함열(咸悅)ㆍ용안(龍安)ㆍ익산(益山)ㆍ고산(高山)ㆍ진산(珍山)ㆍ금산(錦山)ㆍ용담(龍潭)이다.【창고】 읍창(邑倉), 나암창(羅巖倉) 나암포(羅巖浦)에 있다. 선교(船橋) 읍의 남천(南川)에 있다. 신교(新橋) 남사리(南四里)에 있다.【토산】 대[竹]ㆍ닥종이[楮]ㆍ옻[漆]ㆍ뽕[桑]ㆍ비석(碑石)ㆍ붕어. 【사원】 죽림서원(竹林書院) 인조 병인년에 세우고, 현종 을사년에 사액하였다.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모두 문묘 편을 보라.
ⓒ 한국고전번역원 ┃ 이정섭 (역) ┃ 1969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432년(세종 14) 세종의 명에 따라 만들어진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바탕으로, 1481년 성종의 명령으로 다시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0권을 1486년 수정하여 《동국여지승람》 35권을 간행하였고, 1499년(연산군 5)의 개수를 거쳐 1530년(중종 25)에 이행(李荇) ·홍언필(洪彦弼)의 증보에 의해 완성을 보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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