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김정식
얼마 전, 대구에 있는 친구 집에 갔다가 주방에 걸려있는 손바닥만한 십자가가 눈에 뜨였다. 그 순간 내 목에 걸린(프랑스 어느 수도원에서 구한 후 너무나 맘에 들어서 이미 이십년 가까이 하루도 빼지 않고 걸려있는) 나무십자가와의 차별성이 두드러져 보이면서 내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서로 허물없이 친하니까 저걸 달라고 부탁해서 뜻을 이루면, 평소에는 그 동안 걸었던 십자가를 걸고, 대중들 앞에 설 때는 새로운 십자가를 걸면 좋겠다’라고 상대편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혼자만의 계획이 가슴속에서 그렇게 무르익어갔다. 이것이 ‘또 다른 새로운 욕심의 시작’이라는 내면의 안타까운 부르짖음을 애써 모르는 척 외면하면서...
그 때부터 내 관심사는 대화의 흥을 돋우는 와인도 아니고, 친구의 아내가 만들어 내놓은 ‘내가 먹어본 것 중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프렌치 샐러드’도 아니고, 오랜만에 만나서 가슴 깊이 나누던 대화의 내용은 더더욱 아닌, 그야말로 일구월심 ‘벽에 걸린 나무십자가’였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잠깐 중단되는 순간이 포착될 때 마다 주의를 그곳에 집중시키게 되었다.
“형. 저 십자가 어디서 구한거야?”
“나는 잘 모르겠네. 여보. 저 십자가 어디서 샀지?”
“로마에서 샀는데 왜요?”
“로마 어디서 샀는데요? 아주 단순한 세련미가 돋보이는데, 내 눈에는 저런 물건이 왜 안 띄었을까?”
“글쎄요. 어딘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로마라는 건 분명해요. 그런데 그렇게 좋아 보여요? 지금 매고계신 것도 참 좋은데요?”
“저 십자가 여분은 없어요?”
“그 때 두 개를 샀는데 하나는 시댁에 선물 했는데요.”
“그 댁에서 좋아하시던가요? 저렇게 색깔도 문양도 없는 단순한 십자가를 일반적으로는 별루 안 좋아하던데요.”
“글쎄요. 받으실 때는 좋아하셨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후로 시댁에 갈 때마다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럼 형수님. 담에 언제 또 시댁에 가세요?”
“아마도 추석 명절 때 가겠지요. 왜요?”
“좀 날짜가 멀긴 하지만, 다음에 가셔서 별로 안 좋아하시는 거면 살짝 가져오셔서 저 주세요. 저는 요긴하게 쓸 거거든요.”
“그럴 수는 없고 한 번 여쭈어 볼께요. 다른 걸 사다드릴 테니 꼭 필요하다는 사람에게 주실 수 있는지."
“잊지 말고 기억해 두셨다가 꼭 좀 부탁해 주세요.”
몇 번을 다짐하고 대화중에 짬짬이 그 십자가를 여러 번 상기시키고 가져간 디카로 사진까지 두 방 찍으면서 내 스스로에게 감탄하였다. 욕심나는 물건에게 보이는 거의 편집증에 가까운 놀라운 집착과 집중력에.
그 편집증은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며칠 간 계속되었다. 누워 있으면 천장에서 아른거렸고 가끔씩은 그 십자가를 매고 사람들 앞에 서 있는 모습이 환시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내에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내 속마음을 얘기했더니, 내 인생 최고의 날카로운 조언 내조가께서 화살처럼 퍼부었다.
“차~암. 당신은 왜 그럴까? 물건에 대한 욕심이 이제 점점 스캔들(걸림돌)을 지나쳐서 신드롬(증후군)이 되어가고 있네. 당신은 늘 변명하기를 ‘값나가는 보석도 아니니 마치 그런 것은 물욕에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억지로 떼를 써 뺏은 것이 아니라 부탁해서 얻은 것’이라고 하지만, 상대방이 미리 챙겨주지 않은 것이라면 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서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어. 당신 취향이 값나가는 물건이 아니고 소박한 물건들일 뿐,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그거나 저거나 다를 바가 없어. 그렇게 해서 우리 집에 쌓여있는 물건들 때문에 더 이상 복잡하고 불편해서 살 수가 없는데도 끊임없이 얻어오고 주워오니 언제까지 이럴거야? 나는 이런 당신과 더 이상은 못 살겠어. 차라리 저 쓰레기 같은 물건들하고 살아! 당신은 이미 물욕을 스스로 통제하고 절제하지 못하는 환자야.”
“너무 심하지 않아? 내가 귀금속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또 주고 싶지 않으면 부담 갖지 말라고 늘 말한단 말이야. 그리고 대부분의 이웃들이 내가 좋아하면 선뜻 주더라구. 그래서 나 또한 아무리 좋아하는 물건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면 쉽게 선물하잖아”
“또 변명 시작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이든 잘 주는 것은 인정해. 그건 당신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야.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당신의 물욕이나 집착까지 아름답게 보일 수는 없어. 그건 별개의 문제야. 아마도 당신이 늘 아끼고 절약하며 꼭 필요한 것조차 포기하면서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왔던 삶들이 오히려 당신 내면에서는 콤플렉스로 작용하는 것 같아. 이제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얻거나 줍는 일이 몸에 배어서 무감각해지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분명히 밝혀 둘께. 당신의 삶의 모습이 훌륭할 수는 있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야. 그래서 그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버거워.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고 점점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취해서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모든 일들이 때로 이웃들에게 부담을 주고 추해 보이기까지 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심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 기회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 당신 인생의 중요한 고비야. 그걸 해결 못하면 지금까지 당신이 어렵게 쌓아온 모든 가치와 곁에서 보기에도 아름답게만 보이는 삶의 모습이, 그것을 담은 당신의 좋은 노래와 함께 물거품이 될지도 몰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가장 가까운 인생의 내조자로써 엄중히 경고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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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박인숙/이제현/전대식/고태환
그런데도 나는 기어이 그 친구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형네 주방에 걸린 십자가 기억 나? 내가 그 십자가가 눈앞에 아른거려서 며칠이나 잠을 못 잤어. 그러니 형수님께 부탁해서 그 십자가 나에게 선물할 수 있는지 내 대신 부탁해 줘. 거절당할까봐 직접은 못하겠어.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형수님이 안 된다고 하면 그냥 없었던 일로 해 줘. 내 스스로도 왜 이런 욕심이 생겨서 나를 떠나지 않는지 안타깝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거든. 내 맘 이해하지?”
그리고 얼마 후 그 친구 집에 갈 때, 분명 메일에 답장이 없었는데도 다짜고짜 집에 간직하고 있던 어느 도예가의 십자가 작품 두 점을 가지고 갔다. 하나만 가지고 갔다가 거절당하는 낭패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이메일 못 봤어? 왜 답이 없는 거야?”
“응. 오늘 아침에야 열어봤어. 그런데 우리 집에 무슨 십자가가 있다고? 여보 우리 집에 십자가 걸어놨었어? 나는 통 못 봤는데.”
능청도 이쯤이면 수준급 이하인데 나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전혀 감지를 못했다.
“아이고. 우리 형수님. 이런 둔감한 남자하고 사니 얼마나 속이 터질까. 세상에 날마다 주방 식탁에 앉아 밥 먹었으면서, 눈앞에 붙어있는 물건을 한 번도 못 봤다니 말이 돼? 한국 남자들 무심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자~! 형수님. 이 두 개의 작품 중에서 대용품을 골라 보세요. 어때. 형은 어느 것이 더 맘에 들어. 그렇쥐 그렇~쥐이. 내 생각에도 그게 좋아. 혹시 몰라서 두 개를 가져온 것뿐이야. 사람마다 감각이 다르니까.”
특미인 ‘대구 상동댁표 프렌치 샐러드’를 만들다 마지못해서 십자가를 들고 나온 형수님께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어렵게 말을 꺼내신다.
“내가 사실 남편 얘기를 듣고 오늘 아침까지도 결심이 안 섰어요. 아시다시피 나는 갖고 싶어서 지니고 있는 물건이 거의 없잖아요. 그런데 딱 하나, 저 십자가를 보고 간직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드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잘 생각해 보니 내가 유일하게 지니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이 평범한 일은 아닌 것 같더라구요. 아무리 내가 갖고 싶은 물건이라고 해도 ‘주인은 따로 있다’는 생각도 들구요.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 물건이 십자가라는 점이예요. 그토록 간절하게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십자가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드리기로 결정한 거예요. 기쁘게 드릴께요. 어딘가 확실한 곳에 제 십자가가 있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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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김정식(돈암동 소재 '예닮교회') |
갑자기 둔기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아니 이 형수님이 또 사람 잡네. 『십자가의 의미』라~. 그러니까 ‘그 십자가가 바로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된다는 뜻이고, 당신은 기꺼이 지고 싶었던 욕심의 십자가를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내려놓겠지만, 이제 나는 ‘내 십자가는 물론 남이 지던 십자가의 무게까지 빼앗아서 지겠다’는 뜻이며, 이것은 그야말로 내 인생에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미 멀어버린 나의 눈은 아직도 한 밤중이었다.
“역쉬~. 우리 형수님 멋쟁이 천사예요. 주방에 걸려 있으면 누가 봅니까? 이제 제가 걸고 많은 이들 앞에 서면 이 『십자가의 의미』는 백 배 천 배 살아날 겁니다. 그리고 형수님. 이 십자가가 보고 싶으시면 방송을 자주 보세요. 내가 녹화 때도 꼭 이걸 매고 있을 테니까요. 좀 섭섭하시겠지만 대신 주방에는 이걸 거시구요. 이것도 유명한 작품 이예요.”
아이구. 이 쪼다 같은 양반아. 십자가가 사람 앞에 설 때 목에 거는 물건인가. 그건 목걸이지. 하나의 십자가를 지니면서 그 십자가가 주는 의미를 따라 산다면 그것은 ‘그분을 따라 살겠다’는 ‘가치있는 삶의 좌표’가 되어줄 수 있지만 두 개가 되었을 때 이미 그것은 ‘허영과 욕심의 표상인 장신구로 전락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왜 몰라?
(다음으로 한 번 더 이어집니다)
*격월간 <공동선>2010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김정식/가수 겸 작곡가로 생활성가의 개척자이며,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그레고리안과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위한 자선음악회와 환경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예술가요 및 연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우리신학연구소>의 연구위원이며, 가톨릭뉴스<지금여기>의 편집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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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환 시/김정식 곡 「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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