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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밭에서 바라 본 동점초등학교
낙엽송(일본잎갈나무 단풍이 누렇게~ 보이죠...? 나팔등(喇叭嶝) 비석산 입니다.)
우측으로 흰두리동네가 쪼메 보이네요.
왼쪽으로 파란지붕위 교회가 보이고 그뒤로
나붓고개 즉 나팔고개가 보입니다.(비석산 넘는고개명)
(요즘 학생수는1.2.3.4.5.6학년 다합쳐 40 여명정도라네요)
학교에서 바라 본 앞산의 자작나무
초기 동점초등학교 위치
.
사진 중앙에 흐르는 개천이 마리거랑 또는 말거랑이라고하며
그건너 첫줄 신작로옆에 느와집이 한두채 있었고
두번째줄부터 웅집해 있는동네 앞쪽 넓은터가 초기 동점초등학교 교정이 있던곳이다
학교주변 신작로 쪽으로는 아카씨아나무가 무성 하였고,신장로 굽어지는 오른쪽으로
무성한 숲이었고 서낭당이 있었다. 그 서낭당은 학교 운동장 끝부분 숲속에 있었다.
학교 모양은 기역자 모양이었으나 각각 떨어져 있었고교사사택 한체가
구무소 방향으로 있었던것 같다.
학교운동장옆 동점역 방향으로는 제법 큰 동네가 있었다.(동점(銅店))
동점역 주변과 역 안쪽으로도 (말바드리) 꾀큰 동네 였었다.
구무소 방향으론 말거랑을 건너서부터 인공굴 못미쳐까지 집들이 다닥다닥붙어
술집들과 상가가 있었다.
60년대 구무소 모습이다
인공굴 못미쳐 마지막집이 반정도 보인다.
양조장 방향으로 구무소 다리를 건너 막바로 집이보이고 그 옆으로 몇체 더 있었다.
건널목 전에 큰 양철지붕 집이있었고 그 주변으로 넓은 밭이었다.
건널목 주변에도 큰 동네가 있었다.
동점(銅店)
옛날 퉁점이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동(銅)을 퉁이라 하고 질이 나쁜 놋쇠를 또한 통이라 하는데
고려시대부터 이곳에서 구리(銅)를 생산하였으며 납과 아연도 생산하였다.
처음에는 동점 역 앞 붉은병 밑에서 구리를 캐내어
등짐으로 말바드리(馬坪)까지 옮겨오고
말바드리에서는 말로 운반하였다.
운반된 동광석(銅鑛石)을 퉁점 마을의 점터에서 녹여
아연과 섞어서 놋쇠로 만들어 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방터골에서 구리를 캐내었는데
나라에서 관리(官吏)가 나와 감독하던 관방터가 있었다.
구리를 캐내는 곳이었기에 퉁점 즉 동점(銅店)이 되었다.
고려 때 김해(金海)김씨네가 이주하여왔고
420여년전 선조(宣祖)초에 김녕(金寧) 김씨(金元龍)네가
안동으로부터 이주하여왔으며
영월(寧越) 엄씨(嚴宗漢)네도 같은 시기에 들어왔고
그 전에 삼척 심씨네도 이주하여왔다.
호구수(戶口數)는 단기 4092년에 19호 87명,
단기 4249년에 82호 475명, 4295년에 1,052호, 4,560명,
4313년 1,425호 7,239명, 4322년 1,813호 8,027명이다.
동점은 태백시의 가장 남쪽에 자리한 마을로
퉁점(銅店), 구무안(冗內), 사근다리(沙近橋), 무래이골(水寒村),
고수골(高秀谷), 말바드리(馬坪), 병밑(屛項, 屛下),
방터골(上芳基, 下芳基), 돌꾸지 등 9개 자연부락을 합친 마을이다.
마을의 동쪽은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 석포리에,
서쪽은 장성동과 금천동에, 남쪽은 경북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에,
북쪽은 철암2동에 접해있다.
남쪽에 연화봉(蓮花峰)이 강원도와 경상북도를 갈라 놓고
북쪽의 두골산(頭骨山)이 철암과의 경계에 솟아 있으며
동쪽의 면산(綿山, 免山)은 삼척군 가곡면과 경북의 석포면과
철암동의 경계에 솟아 있고
서쪽의 문암산(門岩山)은 금천동과 접해 있으며
마을 중앙에 소복단(봉황산)이 솟아 있다.
황지에서 내려오는 황지천(黃池川)이 구무소 앞에서
철암천(鐵岩川)과 합쳐져서 경상도로 흘러가니 낙동강의 상류가 된다.
도로는 태백시에서 경상북도로 통하는 35번 국도가 포자되어 있고
철암으로 통하는 2차선 도로가 포장되어 있다.
경북 봉화군 대현리로 넘어 가는 소로(小路)가 있고
동점역(銅店驛)이 있어 영암선(榮岩線) 철도가 마을을 남북으로 통과하여
경북 석포리로 연결된다.
마을의 중앙에 있는 구무소는 천하명승으로
강물이 산을 뚫고 지나가는 기이한 곳이다.
옛날 나라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던 용소(龍沼)가 있고
구무소에는 엄종한(嚴宗漢)의 용궁전설이 있다.
옛날에는 상장면 관내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어,
1동점 2화전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태백시에서 가장 논(畓)이 많은 지역으로
옛날에는 벼농사와 메밀, 조(粟), 감자, 옥수수, 콩 등이 생산되었으나
지금은 고냉지(高冷地) 채소류를 많이 심고 약초(藥草)를 대량으로 심는다.
동점동에서 산출되는 쌀로 밥을 지으면
태백시민(太白市民)이 한끼 정도 먹을 수 있다.
단기 4281년 개교한 동점국민학교가 퉁점에 있다가
단기 4293년에 방터골 맞은편으로 옮겨 갔으며
단기 4287년에 개통된 동점역(銅店驛)이 있다.
퉁점
동점(銅店)이란 지명이 나오게 된 마을로 구무소와 말바드리 사이에 있다.
옛날 이 마을에서 동광석(銅鑛石)을 녹여 구리와 놋쇠를 만들어 내던 점터가 있었다.
금을 캐내는 곳을 금점(金店)이라 하고 은을 캐내면 은점(銀店)이고
동을 캐내니 동점(銅店)인 것인데 퉁은 동(구리, 놋쇠)의 우리말이다
퉁점에서는 따부(소부)가 땅속에서 출토된 적이 있다.
따부는 여자들이 밭을 갈 때 사용하는 보섭 같은 것인데 작다.
그 밖에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놋숟가락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점터
퉁점마을 가운데에 있다.
개안과 포내등 앞의 우묵한 곳이 점터가 있던 곳이다.
꽃밭등과 철길 사이인데 지금도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면 쇳똥이 나온다.
얼마전에 그 부근에서 변소를 지으려고 땅을 파다가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놋숟가락이 출토되었는데
태백문화원에서 보관 중이다.
점터는 대개 지형이 우묵하게 생긴 곳을 택하여
땅에 큰 구덩이를 파고 진흙으로 용광로를 만드는데
참숯 등을 사용하여 쇠를 녹인다.
쇠를 녹이는 일을 전부리 혹은 점부리라 하고
쇠를 녹이는 곳을 점터라 한다.
경상북도 석포면 (舊 小川面) 승부리에 가면
「결둔」이란 곳과 마무이(말문, 馬門)라는 마을이 있다.
그 마을의 유래를 보면 옛날 동점에서 캔 구리를
말등에 싣고 승부리로 운반하였는데
그 말들을 매어 두던 곳이 결둔(結屯)이고,
강원도 태백시 동점동 퉁점에서 캔 구리를 실은 말들이
결둔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마무이(馬門)이라는 것이다.
승부리(承富理)는 퉁점에서 40리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마을인데
그곳에 사는 고로(古老)들이 말하기를 퉁점에서 캔 구리(銅)를
그곳으로 옮겨갔다고 하니 동점은 과거에 경상도 땅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승부리와 석포 땅은 안동군 소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그 접경에 있는 퉁점 땅도 안동에서 관할한 때가 있었던 사실이
몇몇 기록에 단편적으로 보인다.
개안
점터 뒷쪽 강나무골 아래의 넓은 밭이 있는 곳이다.
지형이 키(箕:치)처럼 생긴 곳으로 퉁점에서 가장 넓은 밭이 있다.
개는 포(浦)로서 구무소에서 흘러오는 강물이 퉁점마을을 돌아 흐르는데
그 물 가 (浦)의 안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개안(浦內)이라 한다.
개안목
개안(浦內)에서 말바드리로 넘아가는 목(고개)이다.
절터
개안 안쪽에 있다. 옛날 절이 있던 곳으로 부근에는 돌담이 길게 남아 있다.
말구뎅이
개안 안쪽 삼신봉 아래에 있었다.
우물을 파기 위해 땅을 열 길 정도 파내려갔으나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곳에 망아지가 빠져죽었다.
그래서 그 구뎅이를 메워 버리고 말구뎅이라 했다.
포내등(浦內嶝)
개안과 말거랑 사이에 길게 뻗은 산등을 말한다.
개안등이라고도 불리우는데 개안(浦內)의 산등(嶝)이란 뜻이다.
개안등 → 포내등
꽃밭등
포내등 끝에 약간 볼록한 산등이다.
봄철에 진달래꽃과 철쭉꽃이 만발하여
그 일대가 꽃밭을 이루므로 꽃밭등이라 한다.
꽃밭등 위로는 퉁점에서 마리거랑(말거랑)으로 가는 작은 길이 있다.
서낭독뫼
꽃밭등 앞쪽 34번 국도변에 작은 산이 하나 있었다.
산꼭대기에 서낭당이 있었고 주위엔 몇 아름되는 서낭목(城隍木)이 여러 그루 있었다.
포내등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산이 홀로 솟아 있기에 독뫼라 하였고
그 위에 서나당이 세워지자 서낭독뫼라 하였다.
그 서낭은 몇 백년 된 퉁점마을 서낭당이었는데
10여년전 35번 국도를 확, 포장하면서 서낭독뫼를 중장비로 밀어버렸다.
1년에 한번 음력 정월 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사하던 곳이다.
학교터
서낭독뫼와 꽃밭등 사이에 동점국민학교가 이었다.
단기 4280년 2월10일 장성국민학교 동점분교로 인가를 받아
그해 3월 13일 개교를 하였고 이듬해 11월 16일 동점국민학교가 되었다.
강원탄광이 커지면서 그쪽(돌꾸지) 학생들이 많아지자
참배나무집터 윗쪽으로 단기 4293년에 옮겨갔다.
삼신봉
개안 왼쪽에 있는 작은 산이다.
연일정씨(延日鄭氏)메가 그 산 밑에 살면서
자식이 없어 산 꼭대기에 삼신당(三神堂 : 産神堂)을 세우고
자식을 낳게 하여달라고 빌었다.
삼신당은 태백산을 향하여 망제(望祭)를 지내던 곳이었는데
정씨네는 아들 3형제를 얻었다.
그래서 산 이름을 삼신봉으로 부르게 되었다.
삼신봉에는 옛날 구리(銅)를 캐던 굴이 있다.
장구목이
삼신봉은 봉우리가 둘인데 그 가운데가 장구의 목처럼 잘록하다.
말바드리로 넘어가는 작은 길이 있다.
약물내기
삼신봉 아래에 약수터가 있었다.
삼신봉에서 뻗은 산줄기가 강물 쪽으로 뻗어있고
그 끝은 벼랑으로 되어 있어서 사람이 다니지 못하였다.
단기 4287년 영암선(榮岩線) 철도(鐵道)가 개통될 때
삼신봉 끝을 절개하여 철길을 만들면서 길이 나게 되었고
그때 산을 절개하면서 약수의 물줄기를 건드려 약수가 말라버렸다.
삼신봉은 땅 속에 동광맥(銅鑛脉)이 있고
그밖에 아연, 금, 은 등등 여러 광물이 매장되어 있어서
그 광물들 틈으로 통하여 나오는 약수 물줄기이기에
여러가지 광물질이 녹아 있어서 신비한 효험이 있었다.
삼신봉 끝에 약물 구덩이가 있었고
겨울에는 그 곳에서 더운 김이 무럭무럭 올라왔다고 한다.
약물이 나오는 곳이라 하여 그 일대를 약물내기라 한다.
옛날 약물내기의 약수가 어찌나 효험이 있었던지
속병에는 마시고 피부병에는 바르면 곧 낫는 만변통치의 약물이었다.
그래서 약물의 효험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약물을 마시러 왔다.
그런데 피부병에 좋다는 소문이 나자 경상도 일원의 문둥이들이
몰려와서 그 약물을 몸에 바르며 몇달 몇일을
그 일대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때가 되면 퉁점마을을 비롯하여 인근의 마을에서
동냥을 해다가 먹었다.
처음엔 퉁점마을 사람들이 불쌍한 문둥이들을 위해
십시일반(十匙一飯) 쌀을 모아 큰 가마솥에 걸고 죽을 쑤어
문둥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점차 불어나는 문둥이 떼들을 도저히 먹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문둥이들이 동냥 오는데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순박한 강원도 인심도 한계가 있는지라 마을회의 끝에
약물을 묻어 버리기로 결정하고 약물을 묻어버렸다.
물론 그 후 문둥이 떼도 찾아오지 않았고 약물 소문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약물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게 되니
약물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백 수십년이 지나서 약물을 묻은 곳에서
겨울만 되면 김이 무럭무럭 나기에 어떤 사람이 돌과 흙을 파내서
약물을 다시 찾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영암선 철도의 부설로 인한 삼신봉 절개공사에 의해
약물은 또다시 사라졌다.
지금이라도 약물내기 근방을 정밀조사하여
약물줄기를 다시 찾아 낸다면 태백의 명소가 되리라 생각한다.
강나무골
개안 뒷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강(洛東江)의 남쪽에 있다고 강남(江南)골이라 하다가 강나무골이 되었다.
일설에는 강나무가 있는 골짜기라서 강나무골이라는 말이 있는데
강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모르겠다.
평풍골과 개안 사이가 강나무골이다.
강나무골 평디기
강나무골 부근의 경사 20도 가량의 넓은 땅을 말한다.
삿갓봉
강나무골 평디기에서 쳐다보면 연화봉 중턱에 뾰족한 산봉우리가 있는데
삿갓봉이라고 한다.
산봉우리의 모양이 삿갓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인데
다른 이름으로 갈미봉이라 한다.
갈미는 비올때 갓 위에 쓰는 기름종이로 만든 우산 겸용의 모자이다.
약 20여년 전 삿갓봉 밑에서 장성 사는 사람이 약초 캐러 왔다가
백년 정도 묵은 산삼을 10뿌리 정도 캤다.
그 소문을 듣고 철암, 장성, 동점 일대의 사람들이 몰려와
산삼을 캐겠다고 법석을 떠는 바람에 산이 빨갛게 변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그때 산에 올라간 사람들 가운데 절반 정도의 사람들은
산삼 1뿌리 이상을 캣으니 가히 산삼밭이라 할만하다.
그때 모여든 사람들은 수백명이 되었었다.
갈미봉 → 삿갓봉
평풍골
강나무골 윗쪽 연화봉 아래의 깊은 골짜기이다.
골짜기의 습지에 평풍이라는 다년생 풀이 많이 자라고 있어서 평풍골이다.
평풍잎은 연잎(蓮葉)처럼 생겨서 비가 올 때 꺾어서 들면
우산 대용으로 사용할 수가 있다.
필자(筆者)도 어렸을 때 평풍골에 갔다가 비를 만나 평풍을 꺾어 쓰고 온 적이 있다.
그 잎은 아주 넓어 큰 것은 지름이 50cm정도 되는 것도 있고
대궁이(줄기)는 1m 정도로 우산과 흡사하다.
옛날엔 퉁점 사람들이 평풍을 꺽어다가
대궁이(줄기)를 손질해 김치를 담아 먹었다.
다른 곳에는 없고 평풍골에만 평풍나물이 자라는데
김치를 담그면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참 이상한 풀이다.
고고등
높은 산등이란 뜻으로 포내등 윗쪽 연화봉 중턱에 있다.
고고지 얼개이
고고지등에 크고 작은 돌들이 널려 있는 곳이다.
돌이 얼기설기 널려 있다고 고고지얼기 혹은 고고지얼개이 라 한다.
점심바우
고고지등 왼쪽에 있는 바위이다.
개안에 사는 사람들이 밭을 매다가 이 바위에 해그늘이 비치면
점심 때가 된 것을 알아 점심을 먹게 되기에 점심바우라 한다.
이 바우는 수십m의 깍아지른 절벽인데 그 아래에 두개의 굴이 있다.
6.25사변때 앞의 굴에 동네사람들이 피난을 하기도 하였다.
가래이밭
고고지얼개이와 개안의 절터 사이에 있는 커다란 밭이다.
옛날 어느때 퉁점마을에 사는 여인을 범이 물어 갔는데
이곳에다 다리하나를 떼어 놓고 가서 가래이밭이라 한다.
왜밭
갈미봉 아래에 있다.
범이 사람을 물고 가서 팔 다리는 뜯어 먹고 몸통(왜)만 남겨 놓고 가서
왜밭이라 한다. 왜는 몸통을 뜻하는 말이다.
자드래기
왜밭과 파수골 사이에 있는 산비탈이다
역시 범이 여인을 물고 가서 뜯어 먹다가 이곳에 젓가슴(자드래기)을
남겨 놓았다고 해서 자드래기라 한다.
말바드리(馬坪)
동점역(銅店驛)이 있는 마을을 말바드리라 한다.
옛날 붉은 병골에서 동광석(銅鑛石)을 태내어 사람들이 등짐으로 져서
말바드리로 옮겨왔다.
그러면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말등에다 동광석을 싣고 퉁점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 당시 말바드리의 마장(馬場)에는 수십 마리의 말이 있었다고 하며
동광석을 실어 나르는 말굽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말을 먹이고 키우던 마장이 있던 곳이라고 말바드리이다.
돈다물
동점역 뒤편 언덕에 올라서면 농가(農家) 뒤에
큰 돌무더기(돌다물)가 있는데 돈다물이라 한다.
다물은 돌무더기를 뜻하는 말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돌다물 속에는 돈독이 묻혀 있다는 것이다.
옛날 동광이 번창할 때 누군가가 엽전을 독속에 넣어
이 돌담 속에 묻어 놓았는데 담을 헐면 변괴가 생겨 헐지 못하고
말로만 전해져 와서 돈다물이라 한다.
파수골(把守谷)
옛날 동점에 동광이 성할 때 동을 훔쳐가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이 골짜기 어귀의 산등에 파수대를 설치하여 관에서 파수를 하였다고 한다.
이 골짜기를 넘어가면 경상북도로 갈 수 있다.
파수대가 있던 골짜기라고 파수골이라 하는데 동점역 아래에 있다.
일설에는 이 골짜기 어귀가 말바드리에서 보면
마을 앞을 돌아 흐르는 강물의 파고(破口) 곧 파수(破水)가 되기에
파수골이라 하기도 한다.
재삼밭목
파수골 막바지의 산등을 올라서면 우묵한 밭이 있는 고개마르에 이르게 된다.
이곳이 재삼밭목이다.
재와목은 고개(재)를 의미하니
재삼밭목은 삼밭이 있는 재마루(고개마루)라는 뜻이다.
경상북도와 경계지점인데 옛날 이 우묵한 밭에다 삼(麻)을 많이 심었었다.
파쏘(破沼)
파수골 앞에 있는 소(沼)이다.
구무소에서 내려오는 강물이 이곳에 와서 폭포를 이루며
소용돌이를치다가 흘러간다.
물이 파도치듯 한다하며 파쏘라 하며
또한 파구(破口)에 있는 소(沼)라서 파소(破沼)라 한다.
말씹조개웅뎅이
파쏘 아래에 있는 큰 웅덩이인데
그곳에서 말씹조개라는 조개가 서식하고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말씹조개는 바다에서 나는데 이곳 물웅덩이에도 살고 있으니
이곳 물웅덩이가 바다와 통했다는 말이 있다.
붉은병골
말바드리 맞은편을 쳐다보면 수백m길이에 수십m높이의 절벽이 눈에 띄는데
그곳이 붉은병골이다.
절벽의 상층부에 쇳물이 흘러 벌겋게 녹이 슬어 있어서
그 절벽을 붉은병이라 한다.
병은 뼝대 곧 절벽을 뜻하는 이 지방말이다.
붉은병 아래의 굴에서 옛날 동을 캐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착암기나 다이나마이트도 없었기에
굴속의 광석(鑛石)위에 숯불을 피워 돌을 달군 다음 물을 끼어얹어
돌에 균열이 생기게 하여 캐어 내었다.
벼리쏘
붉은병골 아래의 강가에 높은 절벽이 있고 그 절벽 아래에 깊은 소(沼)가 있다.
절벽(벼리)아래에 있는 소(沼)라서 벼리쏘이다.
그 벼리(벼랑, 절벽) 중간에 세로로 길게 뚫린 구멍이 있는데
말바드리 사람들이 집단으로 눈병을 앓자 그 구멍 때문이라는 말이 있었다.
전나무골
붉은병골 다음에 있는 골짜기이다.
그곳에 전나무가 많이 자생하여서 붙은 이름이다.
집앞쏘
퉁점 마을 앞에 있는 소(沼)이다.
마리거랑(말거랑)
(사진중앙우측 직각방향에서 흘러오는강)
쪽
무래이골에서 흘러오는 개천물이 포내등 북으로 흘러와
남천(南川)에 합류되는데 마리거랑이라 한다.
말거랑(馬溝)또는 마리거랑이라 불리우는 것은
옛날 동점에 동광이 성할 때 동을 실어 나르던 말들이
이 거랑에서 물먹이고 씻기고 하였으며,
이 거랑으로 해서 곳재를 넘어 경상북도로 가는데
항상 말(馬) 행렬이 그치지 않아 말거랑이라 했다고 하며
그 말이 변해 마리거랑으로 변한 것이라 한다.
거랑은 도랑 또는 개울9개천)을 일컫는 말이다.
또 다른 뜻의 유래가 있는데, 옛날 황지에서 내려오던 황지천(黃池川) 물이
사군다리로 돌아 이곳 말거랑으로 흘렀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 동안 이리로 흐르던 물이
구무소의 석벽(石壁)에 구멍이 뚫리면서 유로(流路)가 변천되어
구무소로 곧 바로 흐르게 되었고 이곳의 물은 말라버렸다.
그래서 물이 말라버린 거랑이란 뜻으로 말거랑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옛 사람들도 유로변천(流路變遷)을 알았던 것 같다.
또한 뜻은 머리거랑이란 뜻이 있다.
마리는 머리를 뜻하는 말인데 마리거랑이 낙동강의 가장 윗쪽의
머리거랑이기에 마리거랑인 것이다.
벼락소(霹靂沼)
마리거랑(말거랑)이 남천물과 합쳐지는 곳에 있다.
그곳에는 깊은 소(沼)가 있고 소 주위에 바위가 둘러 있다.
옛날 이곳에서 이무기(이슴)가 승천하려 하자 벼락을 쳤다는 것이다.
그후 가끔 이 소(沼)에 벼락이 떨어지는데 벼락소는 그래서 붙은 이름이다.
이집뒤(예집뒤)
마리거랑과 구무소 사이에 있는 산등이다.
옛날 그 산등 아래에 집터가 있어서 옛집터라 했는데
그 옛집터가 예집터로 다시 이집터로 변하고
그 집터가 있는 뒷쪽 산등이라고 이집뒤라 부른다.
구무소
황지에서 흘러오는 강물이 동점동에 이르러 큰 산을 뚫고 지나가며
큰 석문(石門)을 만들고 깊은 소(沼)를 이루었는데 구무소라 한다.
강물이 산을 뚫고 흐른다 하여 뚜루내(穿川)라고 부르기도 하는 구문소는
한자표기(漢字表記)로 구문소(求門沼)라고 쓰기도 한다.
‘구무’란 말은 구멍의 옛말이니 구무소는 구멍소(沼)라는 뜻이다.
구무소 안쪽에 있는 마을을 구무안이라 하고 한자로(穴內村)이라 쓰는 것을 봐도
구무소는 구멍소인 것을 알 수 있다.
주위의 낙락장송(落落長松)과 어우려져 풍광(風光)이 좋은 구무소는
높이 20~30여m, 넓이 30m정도되는 커다란 무지개다리처럼 생긴
석회동굴(石灰洞窟)로 가히 세계적이라 할 규모이다.
동양 최대라고 자랑하는 삼척군 대이리 환선굴(幻仙窟)입구보다 몇 배나 큰 구무소는
주위가 모두 석회암(石灰岩)으로 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억5천만년에서 3억년 전 사이에 형성되었다고 하는 구무소는
강물이 산을 뚫고 지나간 도강산맥(渡江山脈)이라는 특수한 지형을 갖춘 곳으로
수능천석(水能穿石)이란 말이 실감나는 세계에서도
그 유형을 찾기 힘든 기이(奇異)한 곳이다.
주위에는 기암절벽과 폭포가 어우려져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어
옛부터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구무소는 마당소(廣場沼), 자개문(子開門), 용소(龍沼), 삼형제폭포(三兄弟瀑布),
여울목(灘項), 통소(桶沼), 닭벼슬바위(鷄冠岩), 인공굴(人工窟)혹은 용천(龍泉)
등으로 불리는 구문팔경(求門八景)을 안고 있는데
옛날가물 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던 곳으로
엄종한(嚴宗漢)의 용궁(龍宮)전설이 유명하다.
구무소는신비하고 영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구무소에 사람이 투신 자살한 경우가 더러 있었는데
그러면 몇일 안에 꼭 비가 와서 부정한 것을 씻어 간다고 한다.
구무소의 형성(形成)에는 몇가지 전설이 전해져오는데 그 첫번째는 다음과 같다.
아주 오랜 옛날에 구무소로 흐르던 강물이 사군다리 쪽으로 돌아서 마리거랑으로 흘렀다.
어느때 큰 홍수가 나서 물이 크게 불어 났다.
이때 화전동(禾田洞)의 싸리밭(杻田)골에서 엄청나게 큰 싸리나무가 떠내려 오다가
이곳 구무소의 석벽(石壁)부근에서 사근다리 쪽으로 급히 방향을 틀지 목하고
그대로 구무소의 석벽을 강타(强打)하여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며 큰 구멍이 뚫리게 되었다.
그래서 사근다리 쪽으로 돌아 말거랑(마리거랑)으로 흐르던 강물이
이 구멍으로 곧바로 흐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다.
사실 구무소는 유로변천(流路變遷)의 좋은 본보기이며
사근다리 족의 모래밭은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경북 안동의 영호루라는 정자를 짓기 위해
금대봉에서 베어낸 대들보를 물로 운반하다가 그 대들보가 석벽을 쳐서
구무소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항간에 떠도는데
이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최근에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영호루의 건립이 몇 백년을 넘지 못하고
그 건물의 대들보 때문에 구무소의 굴이 뚫렸다니 우습기도 하거니와
구무소의 형성(形成)이 수억년 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무시한 말장난꾼의 이야기이다.
다만 영호루의 대들보를 운반하다가 구무소의 석굴(石窟)이 뚫렸다는 이야기는
싸리나무 전설을 이용한 안동 사람들이 영호루 자랑을 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두번째 이야기로는
옛날 온 세상이 물바다로 되었을 때 태백산 아래의 황지, 장성 일대도 물에 잠기어 있었다.
그때 하우씨(夏禹氏 : 中國三皇五帝의 한 사람으로 檀君께 治山治水의 法을 배웠음)가 나타나
이곳 구무소의 산을 칼로 찔러 뚫어 물이 빠지게 하였다고 한다.
구무소 옆의 자동차와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뚫은
인공굴(人工窟)윗쪽 석벽에 새겨놓은 우혈모기(禹穴侔奇)라는 글씨가
바로 두번째 전설을 바탕으로 하는 내용이다.
세번째 이야기로는
옛날 구무소네 구멍이 뚫리기 전에는 석벽(石壁)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는 철암천(鐵岩川)이 큰 소(沼)를 이루어 그 소(沼)에 청룡(靑龍)이 살고 있었고,
서쪽에는 황지천(潢池川)이 큰 소(沼)를 이루고 그 소(沼)에 백룡(白龍)이 살았다고 한다.
두 용은 서로 낙동강(洛東江)의 지배권을 놓고 항상 다투었다.
매일 석벽 꼭대기에서 싸움을 하였는데 항상 뇌성이 일고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천지를 분간치 못하였고 좀체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어느날 백룡이 꾀를 내어 석벽 위에 싸우다 내려와 석벽 밑을 뚫으며 공격을 하여
청룡을 물리치고 그 여세로 승천(昇天)하였다고 한다.
백룡이 승천할 때 지나간 산을 용우이 산이라 하는데 구무소 앞에 솟은 산이다.
이밖에도 몇 가지 전설이 더 있으나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전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지금까지 말할 것은 구무소가 형성될 때의 이야기이며
그 밖에 구무소에는 용궁을 다녀온 엄씨 전설과 신라때 효도왕자 전설이 있다.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운곡동에 비녀소(沼)라는 깊은 쏘가 있는데
태백시의 동점도 구무소와 지하로 통해 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의 아들 효도왕자(孝道王子)가 봉화군 재산면(才山面)으로 유람(遊覽)왔다가
백정(白丁)의 딸인 월선(月仙)이란 처녀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
어느날 서라벌에서 사신이 와 선덕여왕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말을 전했다.
효도왕자는 월선에게 금비녀를 하나 건네주며 정표로 간직하라고 말한뒤
다시 데리러 오겠다가 하며 떠나갔다.
그 뒤 소식이 없어 애를 태우던 월선은 혹시 신분의 차이 때문에
왕자가 변심한 것은 아닐까 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이듬해 봄 서라벌의 효도왕자로부터 소식이 왔는데 오월 단오에 동점동에 있는
구무소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월선은 재산면에서 길을 떠나 구무소로 오다가 춘양면 의양리에
비녀소(沼) 가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그곳에서 월선은 왕자가 사랑의 정표로 준 금비녀를 꺼내어 들고 만지며 왕자생각을 하였다.
그때 갑자기 개천물이 소용돌이 치미 바람이 크게 불어서
월선은 그만 금비녀를 물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깊은 소(沼)에 빠진 금비녀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았다.
월선은 하는 수 없이 비녀를 찾지 못한채 구무소로 와서 효도왕자를 만나서
금비녀를 잃어버린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왕자는 정표로 준 물건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는 월선을
원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말없이 돌아서서 가버렸다.
놀라움과 슬픔을 이기지 못한 월선은 죽기로 결심하고 치마를 뒤집어 쓰고
구무소에 뛰어 들었다.
구무소 깊숙히 빠진 월선은 얼마후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가 모래밭 위에 누워있는 것이었다.
그곳은 구무소 물밑으로 수중세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춘양 비녀소에서 일어버린 금비녀가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월선의 지극한 사랑을 하늘이 감동하여 이러한 기적을 낳게 한 것이다.
월선은 금비녀를 건져 품에 품고 서라벌로 효도왕자를 찾아가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
춘양의 비녀소는 월선이 금비녀를 빠뜨려서 비녀소인데
그곳과 구무소는 직선거리로 50리 정도 되는 거리인데
땅 속으로 통하여 있다고 한다.
또한 구무소에는 용궁을 다녀와 부자가 된 이야기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옛날 구무소 옆에 엄종한(嚴宗漢)이라는 사람이 노부모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매일 구무소에 나가 그물로 고기를 잡아 노부모를 봉양하였다.
어느날 그물을 쳐 놓은 곳에 가보니 그물이 없어져 버렸다.
엄씨는 이리저리 그곳을 찾다가 실족하여 그만 물에 빠져버렸다.
얼마후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한 곳에 와 있는데 그곳은 구무소 밑에 있는 용궁으로
용왕이 사는 곳이었다.
용궁군사들에게 잡혀 용왕에게 끌려간 엄씨는 용왕에게 문초를 받게 되었다.
“네놈이 엄종한이냐.”
“예”
“너는 무엇 때문에 남의 닭을 잡아가느냐?”
“소인이 어찌 용왕님의 닭을 잡아 가겠읍니까?, 그럴리 없읍니다.”
“저놈이 발칙하게 거짓말을 하는 구나,
네놈이 아침 저녁으로 잡아 가는 닭을 아니 잡아갔다니 고얀놈!”
엄종한은 그동안 자기가 잡은 물고기가 용궁의 닭이었음을 간파하고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용왕님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오나 그것은 모르고 한 짓이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소인에게는 늙으신 부모님이 계시는데 농토는 적고 식구는 많아 살림이 어려운지라
그만 용왕님의 닭인줄 모르고 그것을 잡아 부모님을 봉양하였아오니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나 용왕님의 화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삼일 동안 잘못을 비니 그제서야 용왕이 노여움을 풀며
“그래 듣고보니 그대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로다.
모르고 한 짓이니 차후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
하며 주연(酒宴)을 베풀어 위로 하였다.
용궁(龍宮)의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맛보고 융숭한 대접을 받던 엄시는
집에 두고온 부모님과 자식이 생각이 나서 먹던 떡 한 조각을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주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용왕(龍王)이 흰강아지 한 마리를 주며
강아지 뒤를 따라 가면 인간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강아지를 따라 물 밖으로 나오니 강아지는 죽어버렸고
구무소 가에는 무당의 굿소리가 어지러이 들려왔다.
그때 무당이 구무소에서 엄씨의 넋을 건지기 위해 닭을 물에 집어 던졌으나
죽지 않기에 살아 있다고 하였다.
그럴 때 물밑에서 엄씨가 살아 나온 것이다.
모여 섰던 사람들은 귀신이 나왔다고 혼비백산하였으나 엄씨는
“나요. 엄종한이요. 귀신이 아니요.” 하였다
늙으신 어머님이 그 목소리를 알아 듣고 내 아들이라 하였다.
엄시가 용궁에서 용왕에게 3일동안 빌며 보낸 시간이
지상에서는 3년이라 세월이 지나간 것이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니 집안에는 웃음꽃이 피었지만 가난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엄종한은 용궁에서 가져온 떡이 생각나서 주머니에서 꺼내어 보니
떡은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는 그대로 굳어 딱딱한 차돌이 되어버린 뒤였다.
엄씨는 그 돌을 무심코 빈 쌀독에 넣어 두었다.
다음날 엄씨의 아내가 쌀독을 열어보니 쌀독에는 쌀이 가득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엄씨의 아내는 쌀을 몇 바가지 퍼내 보았으나
쌀독의 쌀은 줄지 않고 그대로 였다.
아무리 쌀을 퍼내도 줄지 않는 쌀독은 화수분이 되어 있었다.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된 엄씨네는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때 한양조씨에게 시집간 딸이 경북 대현리의 배지미라는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친정 아버님이 용궁 갔다 와서 부자가 됐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왔다.
쌀독에 넣어둔 백병석(白餠石)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을 알게 된 딸은
친정 어머니에게 잠시만 빌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가 알면 큰일나니 안된다고 하였다.
하도 며칠만 빌려 달라는 딸의 간청에 못이겨
친정 어머니는 엄씨 몰래 백병석을 빌려주고 말았다.
얼마후 집안의 가세가 기울자 이상히 여긴 엄씨가 백병석을 찾았으나 딸이 가져간 뒤였다.
친정어머니가 딸의 집에가서 백병석을 달라고 하였으나 번번히 가짜 백병석을 내놓았다.
일설에는 조씨가 엄씨집에 처가살이를 하였다고 하며 백병석을 훔쳐 대현리에 살다가
처가집에서 자꾸 백병석을 찾으러오니 안동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대현리에 살던 딸이 친정 부모 몰래 백병석이 들어있는 쌀독을 훔쳐 이고
구무소 앞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백병석은 다시 용궁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쨋든 조씨네는 백병석을 가지고 안동 땅 모시밭으로 이주하여 가서 잘살게 되었고
엄시네는 몰락하고 말았다.
단기 4318년 7월 태백문화원 이사(理事)로 있는 강원일보 김영훈 기자가
문화원 임원들과 안동군 서후면 전저리로 취재를 가서 조씨네 집안에 보관하고 있는
용궁석(백병석)을 확인하고 신문에 보도하므로써 전설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하게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용궁석은 하나가 아니고 조씨 성을 가진 모든 집안에 용궁석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 용궁석(백병석)을 가지고 있던 엄씨의 사위 조씨에게는 자식이 여럿 있었다.
그래서 한 밖에 없는 용궁석 때문에 형제들 사이에 싸움이 날 것 같으니 개울가에 나가
동그란 돌을 하나 주워다가 분가하는 아들들에게 용궁석이니 잘 간직하라 하였다.
아들들은 자기에게 준 돌이 진짜 용궁석인줄 알고 수중히 보관하게 되었고
그 사람들이 또 자식에게 그런 식으로 용궁석을 물려주니
지금에 와서는 용궁석이 수십 수백 개가 된 것이다.
엄종한이 용궁을 다녀올 때 흰강아지를 따라 나왔는데 그 강아지가 물밖에 나오자 죽어버려
구무소 안쪽 둔산(屯山)이라는 곳에 묻었다고 하는데 삼형제폭포 윗쪽 강건너라 한다.
엄종한은 메밀뜨리 건너편 등골이란 곳에 묻혔는데 엄씨의 묘를 용궁묘라 하였다.
그러나 근년에 강원탄광에서 석탄을 캐기 위해 등골 지하로 굴진을 하기 때문에
용궁묘 부근의 지반이 내려 앉아버렸다.
강원탄광 측에서 이장공고(移葬公告)를 하며 묘를 옮겨갈 것을 요구하여
후손들은 엄씨의 묘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엄씨네는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어 선산(先山) 하나 변변히 갖추지 못한 처지라
엄씨의 유골(遺骨)을 옮겨 갈 곳이 없었다.
그때 엄씨의 후손들은 조상의 유골 하나 모실 땅 한뙈기 없음을 비관하며
이렇게 우리가 몰락하게 된 책임은 용궁석을 훔쳐간 조씨네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편 동점에는 20리 거리에 있는 경북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 배지미마을에는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의 명당이 있고 백병석(용궁석)을 훔쳐간
엄종한의 사위인 조씨가 그곳에 묻혀있다.
그리고 조씨 무덤 아래로는 조씨의 후손들 무덤이 여럿 있어
매년 안동지방에서 조씨들이 모여와 시사(時祀)를 지내는 곳이다.
엄씨의 유골을 옮길 곳이 마땅치 않아 고심하던 엄씨의 후손들 가운데
과격한 사람이 있어 용궁할아버지(엄종한을 부르는 말)의 유골을
대현지 배지미마을 조씨네 문중묘(門中墓, 장군대좌형국) 윗쪽에 묻자고 제의했다.
만약 조씨네가 떠들면 용궁석을 내놓으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그말을 옳게 여겨 엄씨의 후손들은 엄종한 유골을 조씨네 문중묘가 있는
장군대좌형국의 제일 윗쪽에 묻고 무덤을 만들었다.
묘지기의 연락을 받은 조씨들이 몰려와 엄시의 무덤을 파내려고 했다.
그러나 남의 무덤을 함부로 파낼 수는 없는 일이라 조씨네는 안동 법원에 고소를 하여
무덤을 옮겨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때 조씨 문중사람 수십명이 시사를 지내기 위해 왔다가
그 모양을 보고는 대경실색하여 언놈이 남의 문중묘 위에 겁도 없이 묘를 썼느냐고 소리를 쳤다.
묘지기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은 조씨 문중 젊은 사람들이 길길이 뛰며
당장 엄씨네를 찾아 요절을 내겠다고 험악하게 설쳤다.
그 때 문중의 나이 많은 노인이 나서서 젊은이들을 달래며 천천히 말하기를
“그냥 놔둬라. 필시 그 사람들이 여기 와 묘를 쓸 때에는 비장한 각오와
또한 옛날 일을 생각하여 용궁돌을 찾겠다고 그런 모양이니 망할대로 망한 집안 사람들이니
섣불리 건들지 말아라. 사실 따지고 보면 그분(엄종한)은 우리들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분으로
그분의 따님인 우리네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조상들 묘 윗쪽에 모시기로 남도 아닌데 어떠냐.”
하며 무마된 사실이 있다.
지금도 엄종한 무덤은 조씨네 문중묘 윗쪽에 있는데
이 일은 지금부터 30여년 전에 있었던 사실이다.
옛날엔 엄씨의 후손이 안동땅에 가면 조씨네가 후히 대접하였고
갈 때마다 쌀가마니를 말바리에 실려 보냈다고 한다.
구문소(求門沼) → 구무소
천천(穿川) → 구무소
뚜루내(穿川)
강물이 산을 뚫고 지나 갔다고 뚜루내(穿川)라 한다. 구무소를 이르는 말이다.
삼형제 폭포(三兄弟瀑布)
구무소에서 제일 윗쪽에 3개의 폭포가 나란히 쏟아지는 곳이다.
높이 약6~7m로 황지천(黃池川)의 물이
이곳에 와서 세갈래로 갈라지며 폭포를 이루어 떨어진다.
옛날 폭포 윗쪽에서 삼형제가 물놀이를 하다가 떨어져 익사하며
삼형제가 다 용이 되어 승천하였다.
그때 삼형제 용이 승천하며 바위절벽을 치고 올라 생긴 것이 바로 삼형제폭포라 한다.
단기 3904년 선조(宣祖) 4년에 경상감사가 12월 18일 진시(辰時)에
낙동강 상류의 물이 끊어졌다고 장계를 올려 보고하자 이때부터 민심이 흉흉해 졌다.
전하는 말에 낙동강의 물이 끊기면 국가에 큰 난리가 난다고 하였다.
이것을 낙동강(洛東江)의 절류(絶流)라 하며 지금의 용소(龍沼) 위에 있는
삼형제폭포의 물이 끊겨 흐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그후 임진년 왜군이 쳐들어와
강토를 유린하자 백성들은 구무소의 영험함을 확인하였고 신령스런 곳으로 두려워 하였다.
용소(龍沼)
삼형제 폭포가 떨어지는 바로 아래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소(沼)가 있는데 용소(龍沼)라 한다.
용이 살고 있다고 하여 용소라 하며
옛날 나라에서 가물 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던 곳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보면,
『황지의 물이 남쪽으로 30여리를 흘러가서 작은 산을 뚫고 남으로 나오니
뚜루내 (穿川)라고 한다.
뚜루내는 경상도 낙동강 근원으로 관(官)에서 제전(祭田)을 두고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낸다.』
(黃池水南流至三十餘理穿小山南出謂之穿川即慶尙道洛東江之源官置祭田天旱禱雨)
라고 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지금부터 25년 전 마지막 기우제를 지냈는데 그때도 기우제(祈雨祭)를 지내자마자
비가 내린 것을 필자(筆者)도 목격하였다.
용소(龍沼) 위의 삼형제 폭포 가운데 바위 위에 소(牛)를 세워놓고
도끼로 머리를 쳐서 죽인 다음 목을 잘라 피를 바위에 뿌리고
머리는 돌을 달아 용소(龍沼)에 집어 넣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천둥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와서 바위에 묻은 피를 씻어 버리자
모여섰던 사람들이 두려워 하며 용소의 영험함에 탄복을 하였다.
그때 마침 농림부 차관이 장성읍에 시찰을 왔다가 기우제에 참석하였는데
초헌관은 당시 이희준 장성읍장이었고 아헌관에 농림부차관, 종헌관에 삼척군수였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당시 소나기는 장성읍 일원에만 내렸고
다른 곳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옛날에는한발(旱魃)이 들면 삼척부사(三陟府使)가 올라와 기우제(용신제)를 지내는데
얼마나 영험한지 느릅령을 지날 때는 꼭 우장(雨裝)을 준비한다고 한다.
경상북도 북부지방에서 구무소의 용소(龍沼)에 기우제를 지내러 왔었다.
그러나 비는 오지 않았다. 당시 상장면(上長面)인 태백시 일원에는 크게 가물지 않아
기우제를 지낼 필요가 없었으나 다른 지방에서 애타게 비를 기다리며 용소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니 본면(本面) 사람들이 양심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하여
당시 김모 면장이 나서서 십시일반(十匙一飯) 돈을 거두어 기우제를 지내게 되었다.
용소 위에서 소를 잡아 피를 바위에 묻히고 소머리와 네 발을 잘라
용소에 넣으며 제사를 지냈는데 금방 제사상에 빗방울이 떨어지며
제사가 끝나자 큰비(폭우)가 왔다.
그때 기우제를 지낸 소머리와 네 발이 탐이난 김모 면장은
그것을 건져내어 면소사(面小使)에게 시켜 용정(요물)에 사는
자기의 소실(小室)에게 갖다주게 하였다.
그것을 먹고 집안에 우환질고와 화를 당하여 애를 먹은 적이 있다.
25년전 기우제 때도 용소에 집어 넣은 소머리를 그 날밤 몰래 건져 먹은
이덕구 (당시 80세)씨는 그 날밤 부인이 죽고 자신도 몇 일 뒤 죽어버렸다.
이렇듯 용소(龍沼)는 신비하고 영험스런 곳으로 옛부터 신성한 곳이었다.
용소에는 명주실 세 꾸리를 풀어도 끝이 닿지 않는 깊은 곳이라 한다.
여울목
용소에서 흐르는 물이 암반(巖盤) 위를 흐르며 크고 작은 폭포를 이루며
물살이 급한 여울을 이루는데 장관이다. 가물 때는 여울목을 건널 수 있다.
통소(桶沼)
여울목과 마당소(廣場沼) 사이에 위치한 깊은 소(沼)로 깊이 5~6m 넓이 4~5m 되는
암벽(岩壁)이 흡사 소여물통(구요)처럼 생겼는데 그리고 물이 흐른다.
물표면에 나타난 암벽의 높이가 5~6m이지 물 속의 깊이는 알 수 없다.
통처럼 생겼다고 해서 통소(桶沼)인데 통소에는 지금도 1m가 넘는 뱀장어가 살고 있고
엄청나게 큰 메기도 살고 있다.
황지천이 썩어 물고기가 살 수 없는데도 통소에 뱀장어와 메기가 있는 것을 보면
통소 안쪽에 맑은 물이 나오는 곳이 있는것 같다.
통소의 물밑 한가운데에는 촛대바우라는 바위가 물 속에 솟아 있는데
아주 가물면 나타나고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다. 40여년 전 어떤 여인이 비관 자살을 하려고
통소에 뛰어 들었으나 촛대바우에 걸려 살아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몹시 가물어 촛대바우가 물 위에 살짝 나왔는데
물에 뛰어든 여인이 본능적으로 촛대바위를 붙잡고
그 위에 올라 앉아 울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구해 내었던 것이다.
20여년 전 모 신문사에서 통소에 철제(鐵製)구름다리를 가로 놓았었는데 장마에 유실되었다.
20여년 전만해도 낙동강에서 은어(銀魚) 떼가 이곳까지 올라왔고
통소에서 여울목으로 뛰어 오르는
은린옥척(銀鱗玉尺)의 비약은 가히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촛대바우
통소의 물밑에 있는 바위로 길고 뾰족하여 촛대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아주 가물면 물위로 살짝 나타난다.
마당소 (廣場沼)
마당처럼 넓다고 마당소인데 흔히 구무소하면 이곳 마당소를 말한다.
엄청나게 넓어 수백평이나 되며 옛날에는 이곳에서 뱃놀이도 하였다.
엄씨가 용궁(龍宮)으 로갔다 온 곳이기도 한 마당소에는
40여년 전만해도 열목어(熱目魚)가 살았다.
마당소의 천정(天井)에는 크고 작은 석회굴(石灰窟)이있어 굴비둘기들이 서식하고있다.
20여년 전만해도 구무소의 굴비둘기들은 수백마리에 달해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모양이 장관을 이루었으나 근년에는 그 수가
급격히 줄어 보이지 않는다.
마당소의 천정은 큰 무지개 모양의 구름다리처럼 생겨서
그 모양이 천하에 둘도 없는 장관이자 기관(奇觀)인데 옛 문헌에 보면
지부석(地負石)이라 부르기도 하고 부영(負嶸), 석쟁(石崢)이라 하기도 하였다.
구무소의 거대한 구멍을 자개문(子開門)이라 하며 이상향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여겼다.
30여년 전만해도 구무소의 천정에는 큰 구렁이들이 만이 서식하여 굴비둘기들을 잡아먹었다.
어떤 때는 굴비둘기들을 잡아먹던 구렁이가 실수를 해서
천정에서 마당소의 물 위로 털썩 떨어지는 광경을 목격하곤 하는데
물 위에 떨어진 구렁이는 한 동안 움직이질 못하다가
천천히 사라지곤 하였으며 그 길이가 두 발 정도 되는 대형이었다.
통노구굴
마당소 안쪽으로 들어가 오른쪽 석벽(石壁)에 있는 석회동굴이다.
마당소를 헤엄치거나 배를 타고 가야갈 수 있는 동굴로 겨울철 얼음이 얼면 갈수도 있다.
옛날 난리때 그곳에서 피난을 하였는데 동굴 속에다
노구솥(통노구솥)을 걸었던 자리가 있어서 통노구굴이라 한다.
동굴 속에는 백사장(白沙場)도 있고 호수(湖水)도 있으며
각종 석순과 종류석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고 한다.
전하는 말로는 울진 성류굴과 통한다고도 하고 끝까지 가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사다리굴
석회동굴로 구무소 안쪽에 있다.
동굴이 흡사 사다리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굴이 길지 않고 사람들이 즐겨 오르내릴 수있다.
사다리굴에서는 옛날 퉁점마을의 사시랭이 꾼들이 모여 몰래 노름을 하기도 한 곳이다.
자개문(子開門)
구름다리처럼 생긴 구무소의 거대한 석굴(石窟), 곧 뚜루내(穿川)의 지부석(地負石)을
자개문(子開門)이라 한다.
고려시대부터 성행하여 조선시대에는 민중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정감록(鄭鑑錄)이란 도참서(圖讖書)가 있다.
전쟁과 기근(饑饉)과 관리(官吏)의 횡포, 과다한 세금에 핍박받던 민중들에게
아름다운 이상향(理想鄕)을 제시하여 그들에게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 되게한
비전(秘傳)으로 내려오던 비결서(秘訣書)이다.
그 책에 쓰여 있기를, 『낙동강 최상류로 올라가면 더 이상 길이 막혀 갈 수 없는
고세 커다란 석문(石門)이 나온다. 그 석문은 자시(子時)에 열리고 축시(丑時)에 닫히는데
자시에 열릴 때 얼른 그 속으로 들어가면 사시사철 꽃이 피고 흉년(凶年)이 없으며
병화(兵禍)가 없고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오복동(五福洞)이란
이상향(理想鄕)이 나온다.』 라고 하였다.
그 오복동(一名 牛複洞)은 지금의 황지, 장성 땅인 태백시 일원을 말하고
석문은 낙동강이 산을 뚫고 지나간 뚜루내(穿川)인 구무소의
크고 둥근 구름다리 형상의 석굴(石窟)이 바로 석문(石門)인 것이다.
중국의 도연명이라는 사람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라는 책에 보면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나오는데 거기에도 도원향으로 가는 입구는
구무소처럼 생긴 것으로 되어 있다.
이상향으로 가는 곳에는 꼭 석문이 있는데
지리산과 북두류산 부근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구무소의 석문이 대표적인 이상향의 관문으로 알려져 있다.
삼척국기노정기(三陟局基路程記)에 보면, 『...기이한 돌이 있으니 이름하여 지부석이라,
그 형상은 활과 같이 양쪽 기둥이 섰으니 이것이 석문이라, 자시에 열리고 축시에 닫히니
열렸을 때 얼른 그 속으로 들어가면 궁해염지지의 이상향이 있느니라』
(...有奇異石號日地負石其形如弓兩莖立地是石門地子時開丑時闔乘其時入其門則有村日弓海鹽之地)
하였다. 여기에서 자시에 열린다는 자시개(子時開)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자개문(子開門)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혈굴(禹穴窟)
자개문을 우혈굴이라 한다. 전설에 하우씨(夏禹氏)가 뚤은 석굴(石窟)이라고 우혈굴이라 한다.
인공석굴(人工石窟)
(왼쪽)
구무소 바로 옆에 자동차와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인공(人工)으로 뚫은 석굴(石窟)이 있다.
폭 약 4m, 높이 약 6m의 이 석굴(石窟)은 35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으로
장성에 석탄광산이 개발되면서 왜인(倭人)들에 의해 단기 4270년에 뚫은 것이다.
처음에는 길을 사근다리로, 마리거랑으로 돌아서 닦았는데
두께 5m 정도의 석벽(윗쪽은 2m 정도)을 뚫어 길을 낸 것이다.
석굴 상당부의 석벽에 「禹穴侔奇」라는 글씨가 음각(陰刻)되어 있는데
왜인(倭人)들이 석굴을 뚫은 다음 새겨 놓은 것이다.
내용인즉 「하우씨(夏禹氏)뚫은 석굴(구무소)과 기이하리 만큼 가지런하게 닮았구나」하는 뜻인데
구무소(禹穴窟, 禹穴)를 옛날 중국의 하우씨 (夏禹氏; 夏나라의 禹임금)가
9년 동안 치산치수할 때 뚫었다는 구무소 형성전설에 의하여 자기네 (倭人)들도 하우씨처럼
치산치수를 하여 석굴을 뚫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무소의 석굴은 하우시가 뚫고 그 옆에 인공석굴은 자기네(倭人)들이 뚫었는데
그 행위를 같은 차원에서 보는 것이다.
석굴하나 뚫어놓고 중국의 하우와 동격이 되고 싶은 충동과 만용에 사로잡혀
그와 같은 글을 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 왜인(倭人)들이 뚫은 인공석굴(人工石窟)을 자개문(子開門)이라고 하는데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자개문(子開門)은 정감록(鄭鑑錄)의 「子時開丑時闔」이란 대목에서 나온 말로
구무소의 물이 흐르는 석문(石門)을 가르키는 것으로 뚫은지 50여년 밖에 되지 않은
인공석굴(人工石窟)이 자개문라니 지역의 역사를모르는 소치에서 나온 것이다.
어쨋든 이 인공석굴은 영남(嶺南)에서 태백시로 들어오는 관문(關門)으로
태백으로 상징적 가치가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그 생긴 형상이 세상에서 보기드문 묘한 형태로 태백시의 관문으로 손색이 없으니
길이 보전하여야겠다.
닭벼슬 바우(鷄冠岩)
인공석굴 안쪽 남쪽 방향에 높이 약 10m, 넓이 약 6m, 두께 약 0.5~1m 정도 되는
넓적하고 얇은 바위가 우뚝 서 있는데 닭벼슬 바우라 한다.
얇고 넓적한 바위가 윗쪽은 삐죽삐죽하여 흡사 닭의 벼슬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그 바위 밑에서 담쟁이 덩굴이 뻗어 올라가 바위면에 붙어 자라고 있어
가을에 담쟁이 덩굴의 잎이 단풍이 들면 바위 전체가
붉은 빛을 띄어 영락없이 장닭의 벼슬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깝게도 근래에 몰지각한 사람들이 담쟁이 덩굴을 잘라버려
지금은 가을이 되어도 붉은 빛을 띄지 않는다.
용천(龍泉, 湧泉)
용소와 여울목 사이의 도로 아래에 바위 틈이 있어 시원한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다.
하마의 입처럼 떡 벌어진 바위 속에서 샘이 솟아 2m정도의 폭포를 이루며 쏟아지는데
그 광경이 기이하게 생겼다.
옛날 용소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이곳 용천의 물을 이용하여 제수를 장만하였으니
제정(祭井)이라 할 수 있다.
원래 구무안(穴內村) 사람들의 식수원(食水源)이었으나 고수골에 연화공업소에서 둑(댐)을 막고
광미침전지(鑛尾沈澱池)를 만들고 부터는 샘물에 악취가 나고
중금속에 오염이 되어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샘이 나오는 곳도 석회동굴로 되어 있어 그 속에 용(龍)이 산다고 하여
용천(龍泉)이라 불리기도 하고 그냥 맑은 샘물이 솟아나온다고
물 솟을 용(湧) 샘천(泉)하여 용천(湧泉)이라 부르기도 한다.
뼝고개
인공석굴 닭벼슬 바우 사이의 산등에 있다.
옛날 인공석굴을 뚫기 전에 사람들은 이곳으로 넘어 다녔다.
사람하나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석벽을 깨어내고 만든 길이다.
뼝은 벼랑 혹은 벽을 뜻하는 이지방 말로 뼝고개는 벼랑고래라는 말이다.
뼝고개에는 전설이 하나 전해진다.
옛날 구무안에 김해 김씨네가 부자로 살았다.
어느날 시주를 온 노승을 박대하였다.
그러자 그 노승은 “이 집이 좀더 잘 살 수 있는 묘책이 있는데 아깝다”하며 혀를 찼다.
그러자 주인은 안색을 바꾸어 노승을 환대하며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어냐고 하며
음흉하게 웃었다.
노승은 김시에게 집 앞쪽에 보이는 뼝등을 깨어내고
사람과 말(실내바리)이 넘나들 수 있게 하면 더 큰 부자가 된다고 말하고 가버렸다.
김씨는 뼝등을 깨어내고 길을 만들었다.
그리로 사람과 말바리가 넘어다니게 되자 김씨네는 망해버리고 말았다.
뼝등을 깰 때 피가 나왔고 뼝등을 끊던 석수장이도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곳이 뼝고개이다.
뼝등
구무소와 인공석굴 위의 석벽(石壁)을 뼝등 또는 뼝바래미라 한다.
옛날에는 장마가 져서 길이 끊기면 뼝등 꼭대기로 해서 소복단 쪽으로 건너가기도 하였다.
30~40여년 전만 해도 뼝등에는 봄만되면 두 세발 정도 구렁이 허물이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구무소에 사는 용의 허물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으나 30여년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뼝등은 벼랑꼭대기라는 말로 뼝은 벼랑이며 벼랑등성이를 뜻한다.
뼝바래미도 뼝등과 같은 말로 바래미는 바람마루와 같은 말이다.
뼝바래미 → 뼝등
앞내밭
구무소 앞쪽 강건너에 있는 반달형 밭을 말한다. 구무소 앞 냇가에 있다고 앞내밭이다.
용우이산
구무소 맞은편 앞내밭 뒷쪽의 높은 산이다.
구무소 형성 전설에 청룡과 백룡이 싸우다가 백룡이 청룡을 물리치고
등천할 때 올라간 산이 바로 이 산이다.
용이 올라간 산이라고 용우이산이라 하는데 다른 이름으로 용애꼭대기라 한다.
용애꼭대기 → 용우이산
앞내밭골
용우이산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앞내밭 뒤에 있는 골짜기라서 붙은 이름이다.
앞내밭골 오른쪽에는 커다란 절벽이 있고 그 절벽 아래에는 큰 돌서덜이 있다.
그 돌서덜에 커다란 먹구렁이가 살고 있는데 최근에도 본 사람이 많다.
그 먹구렁이는 얼마나 큰지 서까래 크기 정도 된다고 하는데
어떤 땅꾼이 잡으로 갔다가 너무나 크기에 기가 질려 그냥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구무소 거리
구무소 앞을 구무소거리라 한다.
옹당소(沼)
옛날의 철암천(鐵岩川)은 지금처럼 흐르지 않고 구무소 옆의 도로가 있는 곳으로
바짝 산쪽으로 붙어서 흘렀다.
단기 4270년 길을 닦으면서 지금의 장소로 물길을 돌리고 물이 흐르던 곳에는
석축을 쌓고 흙을 돋우어 도로를 만드는 것이다.
현재의 버스 정류장 부근에 옹당소라는 깊은 소(沼)가 있었다.
물이 옴팍하게 고여 있는 소(沼)라는 옹당소이다.
옛날 옹당소에는 물고기가 많아서 열목어․뱀장어․메기․쏘가리 등이
가마솥에 국수 끓듯하여 물 반 고기 반이라 하였다.
지금은 매워져 그 위로 423번 지방도로가 나 있다.
엄탄(嚴灘)
구무소 앞 여울인데를 말한다.
엄씨가 그물을 치던 곳이라 한다. 일설에는 용소 아래의 여울목을 엄탄이라 부른다고 한다.
장광터
철암천과 황지천이 만나는 강변에 모래와 자갈이 널려 있는 넓은 곳이다.
구무안(穴內村)
구무소 안쪽에 있는 마을을 구무안이라 한다.
구무소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인데 혈내촌(穴內村)이라 하기도 한다.
혈내촌(穴內村) → 구무안
인애원(仁愛園)터
구무안에 있던 고아원터이다.
김연수(金蓮秀)라는 여인이 단기 4286년에 전쟁으로 인한 상장면 지역의 고아21명을 모아
인애원(仁愛園)이라는 고아원을 만들었다.
김연수씨 소유의 토지에서 나오는 연간 30만환 정도의 수입금으로 운영하였다.
그후 토지와 고아원 집을 강원탄광에 팔고 부산쪽으로 이주해갔다.
남천(南川)
구무소에서 흘러나온 강물이 철암천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가니 남천(南川)이라 한다.
380년 전 안동지방에서 발간된 영가지(永嘉誌)에 보면 남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남천은 소천부곡에 있다. 그 근원은 네 곳이니 황지연못에서 솟는 물과
금대봉 아래에서 흐르는 물 그리고 절골의 본적산에서 흐르는 물, 혈리에 석굴에서 흐르는 물이다.
이 네 곳의 물이 합쳐져 구무소의 산을 뚫고 남쪽으로 흐르니 낙동강의 근원이다』
(南川在小川部曲其源四一出金台山一出本寂山一出泉竇四水合流穿山而南流爲落源)
소복단
구무소 북쪽에 소나무가 많고 가파르게 우뚝솟은 산이 소복단이다.
산이 소복하게 솟아 있다고 소복단이다.
소복단 꼭대기에는 쇠말뚝이 있는데 왜인(倭人)들이 혈을 지른 것이라 한다.
소복단을 다른 이름으로 봉황대(鳳凰臺)라 한다.
산의 생김새가 봉황새처럼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가재골
용소 북쪽 소복단 기슭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골짜기에 물이 조금씩 흘러 가재가 많이 서식하였다.
옹구무덤
가재골 옆에 있다. 검은 오지독을 이용하여 사람을 장사지낸 무덤이다.
언제 어느때 무덤인지 알 수 없으나 독을 엎어서 묻었다.
60여년전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쟁기에 무엇이 걸리기에
자세히 보니 독(단지)의 밑부분이었다.
눈어림으로 봐도 굉장히 큰독으로 엎어서 묻은 것이었다.
그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필시 누군가가 돈이나
보물을 묻어 놓은 것이 틀림 없다고 결론 짓고 혼자서 그 보물과 엽전을 가질 요량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에 왔다.
밤이 되자 그 사람은 혼자서 독이 묻힌 곳으로 가서 독 주변의 땅을 팟다.
독 주위의 흙을 모두 파내고 마지막으로 독을 달랑 들어올리니
그 속에는 해골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혼배백산한 그 사람은 집으로 도망와서 한동안 몸져 누운 일이 있었다.
그 후 다시 독을 묻어 놓았는데 소가 밭을 갈다가 밟아 독의 밑이 빠져 버렸다.
독 속의 해골은 사람이 앉아서 죽은 형태라 했는데 아마도 생매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개무덤
옹구무덤 부근이라 하는데 알 길이 없다.
옛날 용궁을 갔다 온 엄종한의 길 안내를 하던 강아지의 무덤이라 하는데 어디쯤인지 알 수 없다.
설농배리
구무소와 메밀뜨리 사이에 있다.
강가에 석회 암벽이 깔려 있어 설롱배리라 한다.
설은 바위를 뜻하는 말로 설농은 설능과 같아 바위 절벽을 이르는 말이다.
배리도 벼루에서 온 말로 벼랑을 의미한다.
꺽지소(沼)
설농배리 아래에 있다.
꺽지라는 물고기가 많이 서식하던 곳이다.
지금은 하천 물이 오염되어 고기 한 마리 살지 않는다.
부엉지
소복단 아래에 있다.
산이 가파르고 암벽으로 되어 있는데
부엉이가 집을 짓고 새끼를 자주 치므로 부엉지라 한다.
우물둔지골
구무안에서 사근다리로 가는 중간에 있다.
옛날 골짜기 어귀에 우물을 파서 식수로 이용했기에 붙은 이름이다.
업둔어미 화장터
우물둔지골 안쪽에 있다.
업둔어미라는 여인이 범에게 물려가 죽은 곳이다.
범이 잡아 먹고 머리만 남겨 좋은 것을 화장(火葬)하고 그 위에 돌무덤을 만들었다.
돌무덤 위에 시루와 가락이 있었느나 지금은 돌무덤만 있다.
업둔이는 업동(業童)이에서 온 말로 주워온 아이를 이르는 말이다.
새펀디기
구무안 서쪽에 있는 산등이다.
새(갈대)가 많은 펀디기(편편한 땅)라서 새펀디기이다.
그 곳에는 무덤이 많은 데 6.25사변 때 그 인근에서 참호를 파는데
푸른 청자대접과 그릇이 출토된 적이 있다.
부처바우
새펀디기 아래에 석회암 절벽이 병풍처럼 되어 있는 곳이다.
40여년 전 그 절벽 중턱에 금불상이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바우라 하는데 6.25사변 뒤 없어졌다고 한다.
부처바우에 허리안개가 끼면 비가 온다는 말이 있다.
부처바우 오른쪽 50m지점에 바위굴을 뚫어 설농배리 윗쪽의 하천물을 끌어들여
사근다리의 농토에 물을 댄다. 20여년 전 뚫은 굴이다.
사근다리(士近橋)
무리골 어귀의 넓은 땅이다.
논이 태백시에서 가장 많은 곳으로 비옥한 땅이다.
아주 옛날에는 황지천의 물이 이곳으로 흘렀던 곳으로 하상(河床)에 해당되었던 곳이라
모래땅ㅇ으로 되어 있는 곳이다.
싸근다리 사군다리 등으로 불리는 사근다리는 한자로
「士近橋」또는「沙近橋」라고 표기한다.
옛날 이 마을에서 사방으로 통하는 길이 있어
사개통(사거리)이라 하였고 그러다 보니 각 곳의 사람들이 왕래하며
이곳의 주막에서 싸개통이 곧잘 벌어졌다.
그래서 사방으로 통하는 「사개통」이요.
싸움이 잘 벌어지는「싸개판」「싸개질」의 들(드리, 다리)이기에
사개드리 혹은 싸개드리로 부르다가 「드리」가「다리」로 변하여
싸개드리가 싸근다리 혹은 사근다리로 부르게 되었다.
박죽배미
사근다리의 도살장 앞에 있는 논이다.
부근의 논은 다락이 큰데 이 논만 유독히 작고 길게 생겨
흡사 밥주걱(박죽)처럼 생겼기에 박죽배미라 한다.
박죽은 밥주걱의 이 지방 방언이고 배미는 논배미로 논을 의미한다.
큰 늪
사근다리 한 가운데에 큰 늪이 있다.
옛날 황지천이 사근다리로 돌아 흐르던 흔적이다.
처음에는 수천평에 달하는 큰 늪이었으나 차츰 메워 거의 논으로 만들었고
지금은 작은 늪만 남아있다.
20여년 전 어느해 여름, 오랜 장마 끝이었다.
큰 늪 옆에 오모씨의 논이 있었는데 옛날 늪을 메워 만든 논이었다.
그날 오시가 자기 논에 논물을 보러 나갔는데
자기 소유의 논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물기둥이 치솟더라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오씨는 저만치물러나 바로보니 물기둥이 계속 치솟으며
삽시간에 인근 논이 모두 물에 잠기며 자욱한 안개가 끼고 천둥번개마져 치더라는 것이다
무서움에 떨던 오씨는 집으로 쫓겨와서 한참 있다가 다시 논에 나가보니
자기 집 논이 반쯤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시퍼런 물이 고여 있는
새로운 연못이 하나 생겨 났더라는 것이다.
오씨는 생각하기를, 이는 필시 용이 승천하느라고 일어난 현상이라고 믿게 되었고
그 소문은 삽시간에 동점, 철암, 장성 등 태백 전역에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황지읍 장성읍을 비롯하여 봉화군, 삼척군 등지에서 사람들이
점심 도시락을 싸들고 이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곳을 보려고 물려와 법석을 떨었다.
특히 나이 많은 노인들이 구경을 많이 왔는데 모두가 한결같이
용이 승천한 곳으로 믿는 것이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100평 정도되는 연못이 있어 그때의 일을 증명하여 주고 있다.
그 당시 신문에도 보도된 사실로 이것은 지하에 석회암 지반이 붕괴되어 일어난 현상 같다.
늪 고개
큰 늪 동쪽에 작은 산이 길게 뻗어 내려와 있고 그 산등으로 길이 나 있는데 늪고개라 한다.
산끝에는 김영김씨네 선대 묘가 있는데 남근(男根)형상이라 한다.
일설에는 연화부수(蓮花浮水)형상이라 한다.
소문혈(小門穴, 一名 玉門穴)
늪고개 맞은편 가매안에서 내려온 산끝의 절벽에 있다.
바위 벼랑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소문혈(小門穴)이라 한다.
소문(小門)이란 여자의 생식기(陰部)를 이르는 말로
늪고개의 산이 남자의 생식기(男根)처럼 생겨 바로 이곳 소문혈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음양(陰陽)의 조화를 이룬 명당이라고 한다.
이곳 소문혈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진다.
김시네가 늪고개에 묘를 쓰고 집안이 흥하여 잘 살기는 한데 짓궂은 동네 사람들이
이 소문혈의 구멍을 나무 꼬챙이 같은 것으로 쑤시면
김씨네 집안에 생피(상피;相避)가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문혈 부근에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금도 철조망을 쳐놓았다.
개금둔지
늪고개 뒷쪽 산기슭이다. 개금나무가 많은 곳이다.
늪 도랑
큰 늪에서 나오는 물이 구무소로 흐르도록 깊게 파여져 있는 도랑이다.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으나 장마가 지면 물이 흐른다.
늪도랑은 깊이가 2~3m정도로 보통 때는 물이 흐르지 않기에
쑥이나 갈대가 많이 자라고 있다.
지금부터 40여년 전 구무안에 사는 천몽근(千夢根, 81세)씨가
형님과 함께 늪도랑 속에 들어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참 쑥대를 베고 있는데 갑자기 “쏴-”하는 소나기 오는 소리 비슷한 것이 들리기에
하늘을 쳐다보니 큰늪 쪽 도랑의 갈대와 쑥대가 흔들리며 뭔가 천씨 쪽으로 오는 것 같아
얼른 도랑 둑에 올라서서 도랑을 내려다 보았다.
그곳은 천씨 쑥대를 베어 바닥이 원히 보이는 곳인데 그리로 큰 뱀이 기어나오는 것이었다.
그 뱀은 얼마나 큰지 몸통이 전봇대 같았고 누른 몸빛에 손바닥 크기의 귀가 돋아 있었다고 한다.
그 뱀은 마른 도랑바닥을 기어가서 구무소로 들어 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슴(이무기)으로 용이 되고자 큰 늪에서 구무소로 들어갔다고 추측되며
그후 그 이무기는 보지 못했으나 봄이 되면 구무소 뼝등에 서너발 되는 구렁이 허물이
해마다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가메안
소문혈 오른쪽에 있는 가파른 골짜기를 올라가면 우묵하게 가마솥처럼 생긴
지형이 나오는데 가메안이라 한다.
가메는 가마의 이 지방 말인데 가마솥처럼 생긴 지형의 안쪽이란 말이다.
이곳에는 옛날 서낭당이 있었고 당산림으로 큰 재래이나무(쏙슬밤나무)가 있었다.
경주김씨네가 그곳에 조상 묘를 쓰기 위해 그 서낭목을 베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뒤가 켕겨 함부로 벨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백정(白丁)을 불러다가 돈을 주고 베게 하였다.
백정은 살생을 업으로 삼믄 사람이니 나무를 베어도 탈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 나무를 벤 백정은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김씨네는 그곳에 묘를 썼다.
그 묘(墓)는 사루형국의 천마옹실의 명당이라 하여 사람들은 물뫼네 묘라고 부른다.
천마옹실
김씨네가 태백산에서 100일 기도를 올린 다음 꿈에 현몽을 받아 잡았다는 묘가
천마옹실 형국이라 한다. 물뫼네 묏자리가 있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바리봉
가메안 윗쪽에 있는 작은 산봉우리이다.
생긴 형상이 바리(승려들이 사용하는 그릇)을 엎어 놓은 것 같아 바리봉이라 한다.
바리보 밑에 천마옹실의 물뫼네 묘가 있다.
당솔배기
바리봉 윗쪽에 있다.
옛날 산굿을 할 때 그곳에 있는 큰 소나무 아래에서 무당들이 굿을 하였다.
그래서 그 소나무를 당솔이라 불렀고 그 일대를 당솔배기라한다.
구무바우
마리거랑을 거슬러 올라가 사근다리 쪽으로 가면 왼쪽에 깍아지른 높은 절벽이 있는데
구무바우라 한다. 절벽 중턱에 바위굴이 있기에 구무(구멍) 바우라 한다.
직물구녕
구무바우 중턱에 있는 바위굴이다.
깊이를 알 수 없으나 구멍 안쪽의 수직굴에는 더운 김이 올라온다.
옛날 어느 무당이 죽을때가 되어 가지고 있던 직물(징, 꽹가리, 방울, 칼 따위)를
이 구멍 속에 감추어 두었다고 하여 직물구녕이라 한다. 구녕은 구멍의 사투리이다.
새물내기
구무바우와 연화바우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 어귀에 맑은 물이 나오는 샘이 있어서 새물내기이다.
연화바우(蓮花岩)
연화골 어귀에 있다.
20여m 되는 높이의 바위가 서 있는데 생긴 모양이 연꽃처럼 생겨서 연화바우이다.
이바위 때문에 연화골이니 연화봉이니 하는 이름이 생겼다.
바위 중턱에 산신당이 있다.
연화골
연화바우 옆의 깊은 골짜기이다.
연화바우가 있는 골짜기라서 연화바우골이라 하다가
바우는 떨어져 나가고 연화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새밭문지
연화골로 들어가서 오른쪽 첫번째 골짜기인데
그곳에는 갈대밭(새밭)이 크게 있기에 새밭문지라 한다.
문지는 둔지와 같은 말로 좀 우묵하게 생긴 땅을 말한다.
간지밭골
새밭문지 다음 골짜기이다.
옛날 골짜기 안에서 개갈간지(개갈가지, 시라소니)가 자주 출몰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하여 간지밭골이라 한다.
간지밭골은 개갈간지의 「개갈」은 떨어져 나가고 간지만 남아 간지밭골인 것이다.
또한 골짜기 안에서 범이 새끼를 쳐서 그 새끼가 기어다니는 것을 붙들어왔다가
동네 어른들이 보고 큰일 난다며 되려 갖다놓으라 해서 갖다놓은 것이 간지밭골이 되었다고 한다.
간지는 강아지와 같은 말로 새끼를 의미한다.
큰골
연화산골 안쪽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진 깊은 골짜기이다.
연화골에서 가장 큰 골짜기라고 큰 골이라 한다.
가운골
연화골에서 똑바로 올라간 골짜기로 가운데 있다고 가운골이다
가골
가운골에서 왼쪽으로 갈라진 골짜기로 가에 있다고 가골이다.
물바우
가운골 어귀에서 왼쪽 산등에 있다.
큰 바위가 솟아있고 그 바위 밑에서 샘물이 나온다.
물이 나오는 바위라 물바우라 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치성드리러 자주 가며 옛날 신선들이 마시던 물이라 하는데
구지봉에서 뻗은 산등이에 있다.
범바우
물바우와 점시바우 사이에 있다. 범굴이 있어 옛날 범이 새끼를 쳤다고 한다.
범굴
범바우 밑에 있는데 범이 새끼를 치던 곳이다.
산제단(山祭堂)
큰 골과 가운골 사이의 산등에 있다.
퉁점, 말바드리, 사근다리, 고수골 등 연화봉 밑에 사는 사람들이
연화산신(蓮花山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산제를 지낼 때는 산제당 옆에 땅을 파고 커다란 독을 묻은 다음 그곳에다 술을 담그고
동네사람 모두가 근신하며 부정한 짓을 않는다.
30여년 전 어느해 산제를 지내는데 곳재 밑에 사는 사람이
산제당 옆에 묻어 놓은 술독의 술을 몰래 퍼다가 감추어 놓다가
동네 원로들에게 들켜 혼쭐이 났다.
감추어 놓은 술을 다시 술독에 되 갔다놓고 겨우겨우 제사를 지냈는데
얼마후 곳재 부근의 마을에 염병이 퍼져 이틀이 멀다하고 사람이 죽어갔다.
사람들은 산제당의 술을 제사 지내기도 전에 퍼냈기 때문에
산신의 벌을 받아 그렇다고 하였다.
천제단(天祭壇)
가골과 가운골사이의 산등 꼭대기에 있는데 구지봉에서 뻗은 산줄기가 우뚝 솟은 곳에 있다.
연화봉 기슭에 사는 사람들이 3년에 한번씩 천제(天祭)를 지내는 곳이다.
산제당 보다 썩 윗쪽에 자리한 천제단은 산제당에 제사할 때
먼저 알리는 상위제단(上位祭壇)이다.
50여년 전 연화봉 일대의 동점 마을에 밤마다 범이 나타나 작폐를 하는데
동네의 가축이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 석포리와 대현리․평천리 등지와 강원도 쪽 동점리 철암리 등
인근 40여리 안의 마을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각 동네의 개와 돼지 물론 송아지까지 물어가고 곳재 밑의 솔고개에서는
시집갈 나이의 다 큰 처녀를 물어가 잡아 먹었다.
동네 어른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 산신의 탈이라 하여
연화골 산제당에 고사(告祀)를 지냈으나 범의 작폐는 계속되었다.
하는수 없이 마을의 어른들이 모여 다시 회의를 한 끝에 이 일은 산신께 빌어 될 일이 아니니
천제(天祭)를 올려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하여 산제당 윗쪽에 있는 바로 이곳
천제단에 올라가 천제를 올렸다.
정성껏 술을 빗고 소를 잡아 고사를 올린 뒤로는 범의 작폐가 없어져 버렸다.
사람들은 신통하게 생각하고 천제의 효험을 믿으며 한숨 돌리게 되었다.
몇 달 뒤 마을 사람이 마을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해심이골에 나물 뜯으러 가니
벼락틀이 튀었는데 범이 치어 죽어 가죽만 남고 썩어버린 것을 발견하였다.
그 벼락틀은 멧돼지를 잡으려고 설치한 틀로서 다 썩은 소뼈를 매어 달아 놓았느데
그 범이 뭐 먹을 것이 없어 다 썩어 살점 하나 안붙어 있는 뼈를 먹으려고
물고 당기다가 치어 죽은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전부남터의 돼지틀에도 또 한마리의 범이 치어 죽었다.
마을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범들은 천신(天神)의 벌을 받아 죽은 것이라 했다.
벼락틀에 치어 죽을 범이 아닌데 치어 죽은 것은 신(神)이 그 범을 버린 것이라 하며
천제단의 신성함과 영험함에 감복하는 것이었다.
연화봉(蓮花峰)
동점동 남쪽에 위치하여 경상북도와 경계를 이룬 해발 1,053m의 산이다.
태백산 원술봉(문수봉)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동쪽으로 달리다가
이곳 연화봉을 만들고는 멈추어 버렸다.
연화골 어귀의 연화바우가 있기에 연화봉이라 하며
산 전체가 연꽃 형상으로 보이기에 연화봉이라 한다.
구지머리(구지대가리)
연화봉에서 가장 끝쪽(동쪽)에 솟은 산봉우리이다.
이 봉우리는 태백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 가운데
가장 동쪽 끝에 솟은 산봉우리이다.
옛날 퉁점마을 사라들이 이 봉우리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구지」라는 말은 우뚝하다는 말이고「머리」는 산봉우리 곧 산머리를 뜻하는 말로
한자표기로 구지봉(龜旨峰)이라 한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김해의 구지봉에서 강림하였으니 이곳의 구지봉과 같은 이름인데
이것은 신성한 장소, 나아가 하늘에 제사하는 제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100여년전 상장면에 정강동(정거러시, 정학길?)이란 큰 무당이 있었다.
경상북도 북부와 강원도 남부 일원에 널리 소문이 난 남자 무당이었다.
그 사람은 특히 병을 잘 고치기로 이름이 났는데
병을 고칠 때는 꼭 자연석으로 탑을 쌓는 것이 었다.
하도 병을 잘 고치니까 인근에서는 이인(異人)이라 하였고
그 행적이 항상 남루한 차림에 거지처럼 돌아다니므로 정거러시라 불렀다.
그때 장성에 백보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날 눈이 어두워져 바깥 출입을 못하고
3년을 방 안에 있었다.
이때 정무당이 나타나 눈을 뜨게 해 준다고 하며 구지봉 꼭대기에 돌탑을 쌓고
기도하기 21일 만에 백봉사의 눈을 뜨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정무당은 태백산 일원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에
작은 돌탑을 쌓아 놓고 기도하여 많은 환자를 고친 신통한 무당이었다.
구지봉(龜旨峰) → 구지머리
수애 머리 (소머리, 수애봉)
연화봉의 주봉이다.
소머리(牛頭)처럼 우뚝솟은 봉우리라서 수애머리(쇠머리)라 한다.
혹은 「수애」가 머리를 뜻하는 말로 「수애머리」는 수애봉(首峰)의 뜻이 있다고 한다.
한자로도 우두봉(牛頭峰)이라 쓴다.
우두봉(牛頭峰) → 수애머리 → 수애봉
안개봉
연화봉에는 봉우리가 셋 있는데 가장 끝이 구지머리이고 가운데가 수애머리이며
가장 오른쪽이 안개봉이다.
항상 산봉우리에 안개가 끼어 있으므로 안개봉이라 한다.
안개봉은 가파른 산봉우리가 뽀족이 솟아 있는데 꼭대기에 약간의 바위가 있고
주위에 짐승뼈가 무수히 흩어져 있으며 어떤 바위 밑에는 짐승뼈가
무수히 흩어져 있으며 어떤 바위 밑에는 짐승의 해골도 있다.
활메기산
안개봉과 곳재 사이에 낙타등처럼 생긴 산이 있는데
그 생긴 모양이 활처럼 생겨서 활목이산이라 한다.
활목이산이 변해 활메기산이 되었는데 이산을 넘으면 경북 대현리의 배지미로 갈 수 있다.
무리골
사근다리에서 무래이골로 들어가다가 오른편에 있는 골짜기로
사근다리에서 메밀 뜨리로 갈 수 있다.
메밀드리와 사근다리에는 논이 많은데
옛날 이 골짜기에 양쪽 들판에 많은 논을 가지고 있는 부자가 살았다.
다른 사람들은 잡곡을 먹는데 이 부자집은 항상 쌀밥만 먹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씻은 뿌연 쌀뜨물이 항상 이 골짜기를 흐르므로 무리골이라 불렀다.
무리는 쌀뜨물이란 말이다. 무리골 안에는 속칭 고려장이란 고대의 무덤이 많다.
무리재
무리골에서 매밀드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물바우골
물바우가 있는 골짜기로 점골 맞은편에 있다.
물바우머리
물바우골 꼭대기에 있다.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밑에서 맑은 물이 나온다.
점골(점터)
물바우골 맞은편에 있는 지형이 좀 우묵하게 생긴 곳이다.
골자기라 할 것도 없는 곳인데 옛날 쇠를 녹이던 점터가 있었다.
무래이골(水寒村)
고수골과 갈라지는 오른쪽 골짜기 전체를 무래이골이라 한다.
골짜기 안쪽 김녕 김씨(金寧金氏) 종가집 밑의 석굴에서 맑은 물이 나오기에
물나오는 골이란 뜻의 물내이골․무래이골로 부르게 되었다.
한자로 수한촌(水寒村)이라 쓴다.
수한촌(水寒村) → 무래이골
가장골
무래이골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첫째 골짜기이다.
옛날 골짜기 안쪽에 범이 사람을 물고가 잡아먹었다.
머리만 남은 것을 거두어 화장(火葬)을 하였기에 화장골인데 그 말이 변해 가장골이다.
안즈내미골
가장골 지나가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를 넘으면 무리골로 갈 수 있는데
무래이골에서 안쪽(무리골)으로 넘어가는 골짜기라고 안즈(안쪽) 네미(너미)골이라 부른다.
솔개재(솔고개)
안즈네미골 맞은편에 있다.
이 고개를 넘으면 고수골로 갈 수 있다.
솔개바우가 있는 고개라서 솔개재라 부르고 솔(소나무)이 많다고 솔고개라 한다.
솔고개 → 솔개재
솔개재서낭
솔개재 어귀에 있다. 무래이골 사람들이 매년 정월 보름에 제사하는 서낭이다.
골터
김녕김씨 종가 집터이다.
집터 밑에 물이 나오는 석굴이 있고 그 석굴 위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400여년 전 무리골에 김씨네가 살았는데 어느날 소를 잃어 버렸다.
소를 찾아 사방을 헤매다가 이곳에 와보니
지금의 집터 자리에 다래 덤불이 우겨져 있는 속에 소가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때 자세히 살펴보니 비록 형국은 좁으나 제법 괜찮은 집터이기에
무리골에서 이 터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소가 잡은 터라고 하며 무래이골에 있는 터라서 골터라 한다.
석회동굴 위에 축대를 쌓게 집을 지은 관계로 지금도 장마 때는
집터 곳곳에서 물이 솟아 나온다.
태백시 일원에 흩어져 사는 김녕김씨네 종가가 되는 곳이다.
막뒤
골터 뒷쪽의 산비탈로 집뒤에 있다고 막뒤라 한다.
수굴(水窟)
골터 밑에 있는 물이 나오는 석회동굴이다.
사람이 서서 들어갈 수 있으며 한참 들어가면 굴이 둘로 갈라지고 바위턱이 나오는데
그 안에는 큰 호수가 있고 물이 꽉 차 있어서 더 들어가지 못한다.
이 굴에는 뚜구리와 용고기(버들먹지)라는 고기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서
굴 앞에 발을 쳐놓으면 그 이튿날 물고기가 한대야씩 걸려 있었다고 한다.
굴에서 나오는 물은 인근 주민의 식수로 사용된다.
지금은 굴 어귀를 많이 메워서 옛 모습은 찾기 어렵다.
이 굴에서 뿌연 물이 나오면 풍년이 들고 붉은 물이 나오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고수골에 연화광업소에서 아연을 제련하고 남은 복대기를 저장하는
광미침전지(鑛尾沈澱池)의 둑(댐)을 만들고 부터는 굴 속에 물고기가 없어졌으며
굴물이 중금속에 많이 오염된 것 같다.
수굴 맞은편에 20여년 전 좋은 샘이 있었는데 연화광업소에서 댐을 막고 부터는
몇번 붉은 물이 나오더니 샘물이 말라버렸다.
그리고는 샘에서 윗쪽으로 30여m 지점의 밭에서 4~5개의 새로운 물줄기가 솟아 나오는데
굴물(수굴의 물)보다 두 배나 많은 물이다.
아마도 댐에서 중금속이 침전되며 그 물이 지하의 석회암반을 녹여서
새로운 지하 수로를 만든 것 같다.
석이바우
골터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이다. 그 바위에 석이버섯이 많이 있다.
도롱뇽 묘
김녕김씨네 9대조(九代祖)의 묘라 한다.
김씨네 9대조는 풍수가였는데 태백산에서 기도하여 산신의 계시로 이곳의 묘터를 잡았으며
사발에 먹으로 이름을 써서 묘터의 땅 속에 묻어 두었다.
죽은 뒤에 이곳에다가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였으나
자손들은 장성의 새볕뜨리 미골에 장사하였다.
그후 자손들의 꿈에 할아버지가 현몽하여 춥다고 하기에 3년뒤에 이장(移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초에 할어비가 유언한 곳으로 옮기려고 유골을 가져가는데
천씨네가 초상이 나서 상여를 메고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결국 두 집안이 묘터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고 땅 속에 묻어둔 사발에 쓰인 글씨 때문에
김씨네가 이기게 되었다.
그때 천씨네 집에 따라온 지관(地官)이 김시네 보고 일러주기를
참으로 좋은 명당이니 3자 3치를 파면 암반(岩盤)이 나오는데
그 위에 관을 놓고 봉분을 하라고 하며 가버렸다.
과연 석자석치를 파니 암반이 나오는데 관(棺)을놓으니 덜렁 들려 좀더 파야 한다고 하며
괭이로 암반을 찍으니 얇은 암반이 깨지며 암반 속이 궁굴어 물이 고여 있었으며
그 물 속에는 도롱뇽이 몇마리 들어 있고 도롱뇽 알이 2개 들어 있었다고 한다.
알을 하나 깨내어 깨보니 노란 자위가 나왔다고 하며 놀란 김씨네는
나머지 알을 그대로 두고 묻었다고 한다. 도롱뇽이 나온 묘터라고 도롱뇽묘라 한다.
굼밭
골터 안쪽에 있다. 우묵한 골짜기로 화전밭이 있었다.
새골
굼밭을 지나서 왼쪽에 있는데 큰새골과 작은새골이 있다.
큰새골과 작은새골 사이에 새굴(수직굴)이 있어서 새골이라 부른다.
또는 새(갈대)가 많은 골짜기라서 새골이라 한다.
새굴
큰 새골과 작은 새골 사이에 있는 수직석회동굴이다.
수직(새)으로 된 굴(窟)이라서 새굴인데 돌을 던지면 한참 내려가는 소리가 나다가
첨벙하는 소리가 난다.
자귀밭골
큰 새골 지나서 왼쪽에 있는 골자기로 골짜기 안쪽에
자귀풀이 많이 자생하기에 붙은 이름이다.
상상재
무래이골 끝에 고개이다.
골짜기 안쪽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고개라서 상상재이다.
이 재를 넘으면 장성의 설무실 골로 갈 수 있다.
고수골
무래이골 갈라져 왼쪽으로 들어간 깊고 큰 골짜기이다.
지금은 골짜기 안쪽에 연화광업소의 광미침전지 댐이 있다.
옛날 어느때인지는 모르나 이 골짜기 곳재 밑에 곳집이 있어서
나라에서 곡식이나 병장기(兵仗器)를 저장해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곳실(庫谷) 또는 곳실골(庫室谷)이라 하였으며
그 말이 변해 곳실이 곳실곳로 다시 고싯골․고수골로 되었다.
고수골에서 따부(一名 소부)라는 고대의 농기구가 출토된적이 있는데
따부는 여자들이 손으로 밭을 가는 보섭 같은 것이다.
곳재(庫直峙)
고수골에서 봉화군 대현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부터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통하는 교통의 요로(要路)였다.
옛날 고개 아래에 나라에서 곳집을 지어놓고 동점지역에서 나는 곡식과
군졸이 사용하는 병기(兵器)를 보관하였다고 한다.
곳집이 있는 곳의 고개라는 뜻으로 곳재라 하였다.
이곳에 곳집이 있었을 때는 고려때로 추정되며 그 당시 태백현(太白縣)에 속해 있었다고 본다.
영가지(永嘉誌)에는 곳재를 고령(姑嶺)으로 표기 하였다.
구무골
고수골로 들어가서 왼쪽에 있는 골짜기로 첫번째는 가구무골이고
두번째는 가운 구무골이며 세번째가 큰 구무골이다.
큰 구무골 어귀에 석회동굴이 하나 있어서 구무골이라 한다.
큰 구무골 안쪽이 덫밭목이인데 그곳에는 호식총(虎食塚)이 있고 그 윗쪽은 안개봉이 된다.
골짜기 어귀에 연화광업소의 광미침전지 댐이 있다.
솔개바우
큰 구무골 맞은편 솔개재 아래에 있는 큰 바위로 솔개가 새끼를 치던 곳이다.
옛날 고수골 이씨 딸네가 범에게 잡혀 먹힌 곳이다.
미느리골
솔개재를 넘어 고수골로 들어가다가 오른쪽 첫번째 골짜기이다.
옛날 골짜기 어귀에서 며느리 혼자 살았다고 해서 며느리골이었는데
그 말이 변해 미느리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뫼넘이골이 변해 미느리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산(뫼)을 넘으면 장성의 설무실골로 갈 수 있다.
갈미바우
미느리골 안쪽에 솟아 있는 바위로
비올 때 갓 위에 쓰는 갈미(갈모) 처럼 생겼다고 하여갈미바우라 한다.
활메기골
곳재로 올라 가다가 왼쪽으로 펀펀하게 생긴 골짜기이다.
활메기산 아래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앞산양지
솔개바우가 있는 산비탈로 양지바른 곳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댐 공사를 하기 전에 농가가 몇 집 있었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면 앞쪽이 되어서 붙은 이름이다.
참나무밭골
참나무가 많은 골짜기로 곳재와 피밭골 사이에 있다.
피밭골
참나무밭골 지나서 왼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 안쪽에 피나무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배나무실
참나무밭골 피밭골 사이 건너편에 있다.
골짜기 어귀에 큰 돌배나무가 있어서 배나무실이라 한다. 실은 골이 변형된 말이다.
서낭터
피밭골과 승지미골 사이의 도랑가에 있는데 정월 보름에 제사한다.
승지미골
정감록(鄭鑑錄)의 십승지(十勝地)와 같은 비결(祕訣)의 승지(勝地)라는 뜻의
승지미골은 골짜기 입구는 좁으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넓어진다.
골짜기 안쪽은 우묵한 지형에 뒷산이 바위산으로 병풍처럼 둘러 있어
두세 집이 족히 먹고 살만 한 곳이다.
승지(勝地)란 이상향(理想鄕)과 같은 곳으로
난리가 나도 피난하여 보신(保身)할 수 있는 땅을 말한다.
승지미골을 넘으면 장성 설무실골로 갈 수 있다.
독장골
옛날 미친 사람을 독에 넣어 묻었다는 골짜기이다.
승지미골로 들어가서 오른쪽에 있는 골짜리고 미느리골로 갈 수 있다.
문바우골
골짜기 안쪽에 문바우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문바우(門岩)
문바우골 안족 산등에 있다.
거대한 바위가 양쪽에 수직으로 서 있어서 흡사 문기둥처럼 생겼기에 문바우라 한다.
양쪽 바위 사이로 길이 있어 그리로 넘어가면 금천 우벙골과 장성 가래골로 갈 수 있다.
옛날 조수(潮水)가 올라와 천하가 물바다로 되었을 때
문바우에 문짝 만큼 물이 차지 않았다고 한다.
문암산(門岩山, 文岩山)
문바우가 있는 산이다. 삼척군지 등에 「文岩山」으로 기록되어 있는 산이다.
문암산(門岩山)인데 소리나는 대로 「文岩山」이라고 잘못 적은 것이다.
쇠 등어리 바우
문바우 옆에 있다. 거대한 바위가 산등성이에 엎드려 있는데
소등어리(牛背, 소등)처럼 생겼다.
심밭골
문바우골 어귀를 지나서 왼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심메꾼(산삼캐는 사람)들이 산삼(심)을 많이 캔 곳이다.
메님이재
심밭골 다음에 있는 고개이다. 메(뫼, 산) 님이(넘이)재는 산을 넘어가는 재(고개)라는 말인데
경북 평천으로 넘어가는 곳이다.
뒷골
코구무재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고수골 가장 뒷쪽에 있는 골짜기라서 붙은 이름이다.
이 골짜기를 넘으면 문바우로 갈 수 있다.
코구무재
고수골 가장 안쪽에 있는 고개이다.
산이 험하고 바위가 있는 길이 아주 나빠 코구멍 같이 좁다고 코구무(코구멍)재라고 한다.
옛날 금천에서 동점으로 시집을 갈 때 가마를 메고 가는 골짜기가 하도 좁아
가마꾼들이 애를 먹고는 이 고개를 코구멍처럼 좁은 곳이라 하여 코구무재라하였다.
금천의 우벙골과 곰직이골로 갈 수 있다.
수리봉
동점역 아래쪽 기차굴(汽車窟)이 있는 윗쪽 산봉우리이다.
수리(鷲)가 서식하기에 수리봉이다.
목넘이 뼝대
수리봉 오른쪽으로 낮은 절벽이다.
그리고 꿀밤(도토리) 주우러 사람들이 넘어 다니기에 목넘이 뼝대라 한다.
뼝대는 벼랑이고 목넘이는 산등의 잘록한 부분을 넘는 것을 말한다.
조대거랑
말씹조개 웅뎅이 아래에 있다. 강가에 조대흙이 나오는데
그것을 파와서 흙화로 등을 만들었다.
설통바우
조대거랑 뒷쪽의 벼랑이다.
벌을 밭기 위해 설통(벌통)을 놓아 두었기에 설통바우라 한다.
쇠꼽등(쇄기등)
파수골 맞은편 연화광업소 사택이 있는 곳이다.
옛날 그곳 뒷등에서 퉁쇠(구리, 쇠꼽)를 캐내었으므로 쇠꼽등이라 한다.
이곳의 흙이 좋아 그 흙을 파서 흙화로 등을 만들었다.
수지골
조대거랑 아래쪽 수리봉 건너편에 있는 깊은 골짜기이다.
골이 상당히 깊고 옛날 화전민이 10여호 살던 곳이다.
수지골에는 매(鷹)가 많이 서식하기에 옛사람들이 사냥에 쓸려고 매를 붙잡아다가 길을 드렸다.
길들인 매를「수지니」라 부르는데 이 골짜기에서 수지니를 많이 붙잡아 길들였다고
수지니골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수지골로 부르게 되었다.
터뒤골
수지골 안쪽으로 들어가서 왼쪽 첫번째 골짜기이다.
골짜기 어귀에 큰 신배나무가 하나 있는데 옛날 그 나무 아래에 공부터가 있었다.
그곳에서 공부하던 사람이 도깨비에게 홀려 미쳐버린 일이 있었다.
공 부터 뒤에 있는 골짜기라서 터뒤골이다.
이 골짜기를 넘어가면 병밑의 승지미골이 된다.
살구나무골
큰 살구나무가 골짜기 안쪽에 있어서 붙은 이름인데 터뒤골 다음에 있다.
동수골
수지골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세번째 골짜기이다.
골짜기에 물이 좋기에 동수(洞水)골이다.
지르메 어이
수지골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네번째 골짜기 뒷 산등이다.
그리로 넘어가면 방터골로 갈 수 있고 경상북도 석포리의 전개목으로도 갈 수 있다.
「지르메」는 뫼(산)를 질러 간다는 뜻이고
「어이」는 위와 같은 뜻으로 산등을 이르는 말이다.
삼동실
수지골로 들어가서 오른쪽 첫번째 골짜기이다.
골짜기 안쪽의 세 곳에서 물이 나와 합쳐 흐르므로 삼동실(三洞谷)이라 한다.
실은 골과 같은 말이다.
고무덫골
삼동실 다음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그곳에 곰이 많이 서식하여서 사람들이 곰 잡는 덫을 설치하였기에
고무(곰)덫골이라 한다.
웃둔지
수리봉 남쪽의 편편한 땅이다. 속새둔지 윗쪽에 있다고 웃둔지이다.
둔지는 펀펀하고 두둑한 땅을 이르는 말이다.
대밭 모팅이
웃둔지 건너편에 있는데 산죽(山竹)이 많이 자생하기에 대밭모팅이라 한다.
해심이골
대밭모팅이 윗쪽이다. 발바드리에서 보면 이 골짜기 윗쪽 산등에서
아침해가 올라오기에 해 솟는 골이란 뜻의 해심이골로 부르게 되었다.
독바우
해심이골 안에 있다. 독(단지)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이다.
머리언진바위
독바우 윗쪽에 있다. 커다란 바위 꼭대기에 또 다른 바위가 얹혀있다.
흡사 머리를 얹어놓은 듯한 바위이다.
굴통메기
해심이골 끝의 산등이다.
그곳엔 큰 굴피나무가 속이 빈 것이 많아서 굴통메기라 한다.
속새둔지
대밭모팅이 아래쪽 편편한 곳이다.
속새라는 풀이 많이 자라고 있기에 속새둔지라 한다.
사슬골
속새둔지와 새터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숲이 우거지고 맑은 물이 계곡에 흘러나온다.
골짜기 안쪽에 옛날에 화전(火田)을 많이 했는데 화전(火田)이 사슬밭으로 되어 있어서
사슬밭골이라 부르다가 사슬골이 되었다.
사슬밭이란 화전이 연결되어 있지 않고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밭을 이르는 말이다.
속새둔지 뒷쪽의 골짜기는 작은 사슬골이고 이곳은 큰 사슬골이다.
사슬밭으로 가는 골짜기라서 사슬골이다.
30여년 전 이 골자기에 약초 캐러간 사람들이 산 속에서 소 우는 소리가 나기에
찾아가 보니 엄청나게 큰 구렁이가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세 사람이 합심하여 그 구러이를 생포하였는데 오래 묵어서인지 천천히 움직이며
잡으면 잡는대로 별 반항 없이 있더라고 했다.
얼마나 큰지 큰 광주리로 하나 가득되고 철길 두번 가로 지를 만큼 길며
가장 굵은 쪽 몽통이 넓적다리 만 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보통 뱀은 혀가 두 가닥으로 되어 있는데
이 구렁이는 혀가 고양이 혓바닥같이 납작하며 한 가닥이었다.
필자(筆者)가 목격한 사실이다.
사슬밭
사슬골 안쪽에 편편한 산등이 수만평에 달하여 펼쳐져 있는 곳이다.
옛날화전이 성할 때 이 일대 수만평에 화전민이 살았다.
여기저기 화전을 하여 사슬밭으로 되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전부남터
사슬밭 가운데에 있다. 전부남이란 사람이 살던 터이다.
새터
강원도와 경상도 경계 지점에 있는 터인데 호시고개 앞쪽 강건너에 있다.
새롭게 터를 잡았다고 새터(新基)라 한다고 하며 새(갈대)가 많아 새터라 하고
경상도와 강원도 사이에 있다고 새터(間基)라 부른다고도 한다.
그곳은 삼면이 강물로 둘러있고 뒷쪽은 급한 산등이 둘러처져 있다.
그래서 장마때는 일주일 이상 고립되어 있기가 일쑤였다.
20여년 전 그곳에 김씨노인이 살았는데 몸이 불편하여 앓고 있었다.
그때 마침 장마가 져서 일주일 정도 고립되어 있었는데 장마가 끝나고 물이 빠진 뒤
사람들이 건너가 보니 노인은 죽어 있었고 일주일 동안 쥐들이 시체를 뜯어 먹어
귀와 코 등이 없어져 엉망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호시고개
강원도와 경상북도 경계에 불과 100m도 안되는 짧은 기차굴(汽車窟)이 있다.
이 굴 윗쪽의 산등으로 도계(道界)가 지나가며 그 산등에 있는 고개가 호시고개이다.
지금은 그 고개를 중장비로 절개(切開)하여 35번 국도가 통과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시고개를 돌아서 강물쪽으로 자동차 길이 있었는데
몇 년 전 고개 가운데를 절개하여 도로를 만들었다.
옛날 이 고개 위에서 범이 항상 고개 아래를 호시탐탐(虎視耽耽) 노려보고 있어서
혼자서는 고개를 넘지 못하고 여럿이 모여 넘어 다녔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호환(虎患)을 당하였고 범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고개라고
호시(虎視)고개라 하였다.
돌고개
호시고개 조금 못미쳐 오른쪽으로 뻗은 깊은 골짜기이다.
옛날 자동차 길이나기 전에 이 골짜기 어귀에 바위 사이로 고개길이 있어서 돌고개라 하였다.
구한말 돌고개에 하원직이란 사람이 살았다.
하루는 밝은 대낮에 범이 나타나 하씨집의 개를 물어 죽이고는 사람이 보니
물고 가지는 못하고 산으로 달아났다.
하씨가 집뒤 언덕에 죽은 개를 미끼로 큰 덫을 만들어 놓았는데
범이 그 죽은 개를 따 먹으려다 덫에 치여 죽었다.
범이 커서 힘센 장성 몇 명이 들어야 움직일 정도였다.
삼척군에서 알고 가져오라고 명하여 동네사람들과 더불어 삼척까지 운반하여 바치니
군수는 죽은 범을 빼앗고 호통을 쳐서 곤장까지 친다음 돌려 보냈다.
하씨는 범만 갖다 바치고 매까지 맞고 그냥 돌아왔는데
범을 잡아서인지 그 후 가세까지 기울었다고 한다.
부들밭골
돌고개 안쪽에 있다.
자리를 만드는 부들이란 수초가 많이 나는 곳이라서 부들밭골이다.
문디터께
돌고개 어귀에 있다.
나병환자(문둥이)가 살던 터라고 문디(문둥이)터께라 한다.
수리병골(시리병골)
돌고개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난 골짜기이다.
경상북도와 경계에 수리병이라는 바위산이 있다. 병풍처럼 둘러 있다.
수리(鷲)가 사는 곳으로 병은 뼝대 곧 절벽을 뜻한다.
수리병골은 수리병 밑에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칼바우
수리병 옆 산등에 바위가 칼처럼 뾰족뾰족하게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데 칼바우라 한다.
오마골(오맞골)
시리병(수리봉)골과 갈라져 오른쪽으로 들어간 골짜기이다.
옛날 그 골짜기 안에 어떤 여인이 살았는데 퉁점 약물내기에 약수를 뜨러 갔었다.
멀리서 왔기에 먼저 약수를 뜨려다가 뒷사람에게 물벼락을 맞고
겨우겨우 약수를 떠 오는데 비가 와서 비를 맞게 되었다.
비를 맞으니 옷이 몸에 찰싹 붙어 지나가는 남정네의 눈에 색욕을 일으켜
몸을 빼앗기고 집에와 보니 도둑이 들어 소를 훔쳐 갔다.
저녁에 돌아온 남편에게 소를 잃어 버렸다고 실컷 두들겨 맞았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오맞댁이라 불렀다.
약수터에 갔다가 물벼락을 맞고 비 맞고 서방 맞고 도둑 맞고 매 맞고 하였다 하여
그리 부른 것이다.
그 여인이 살던 골짜기라고 오맞골 또는 오마골로 부르게 된 것이다.
새날기
소복단 아래에 있다. 구무소와 가마뜰 사이인데 소복단이 봉황새 형상이고
이곳의 지형이 새의 날개처럼 생겼다고 하여 새날기라 한다.
새날기둥(새날기 재)
새날기에서 가마뜰로 넘어가는 산등이다.
새날기 나드리
새날기에서 구무소 앞 장광으로 건너가는 물나드리이다.
가래골
새날기 뒷쪽에 있는 골짜기로 가래나무가 많아서 가래골이다.
가마뜰
(신작로끝에보이는 마을)
천천주(穿川酒)라는 소주공장(燒酒工場)이 있던 부근을 가마뜰이라 한다. (양조장마을)
지형이 가마솥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혹은 가마바우 아래에 있다고 해서 가마뜰이라 한다.
6.25사변 뒤 기근(饑饉)이 심할 때 사람들이 가마뜰 천천소주 공장에서 나오는
술지게미를 받아 먹었다.
멀리 춘양에서도 오고 인근 수십리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이
그 술지게미(아래기)를 구할려고 장사진을 이루었었다.
그때의 술지게미(아래기)는 소주공장에서 땅속으로 연결한 철관(鐵管,pipe)을 통하여
돼지우리로 흘러나와 돼지죽통에 쏟아지게 되어 있던 것을
사람들이 돼지 대신 받아 먹은 것이다.
당시 천천주(穿川酒)는 순곡소주(純穀燒酒)였기에 술지게미가 나왔던 것이며
그것으로 돼지를 키웠는데 배고픈 사람들이 몰려와 돼지 대신 받아가니
소주공장에서도 묵인하였다.
줄을 잘 서서 처음에 받으면 노란 색깔의 술지게미가 나오나
나중에 받으면 검은 빛의 술지게미가 나온다.
어쨋든 그 술지게미는 당시에 여러 사람을 살린 구황식품이었다.
도가 모팅이
가마뜰의 소주공장에서 구무소쪽으로 돌아가는 모퉁이다.
「도가」라는 말은 「술도가」를 이르는 말로 술만드는 곳을 뜻한다.
뼝때칸
가마뜰 맞은편의 높은 벼랑으로 된 산을 뼝때칸이라 한다. (모퉁이 강변쪽)
용우이산 북쪽기슭에 해당하는 이곳은 워낙 심한 벼랑이라 나무가 별로 없고
사람이 잘 올라가지 못한다.
뼝때란 벼랑 또는 절벽을 이르는 이 지방 말이다.
뼝때칸에서 돌이 구르면 동점마을에 초상이 난다는 말이 전해진다.
가마바우
뼝때칸 벼랑 가운데에 있는 바위이다.
생긴 모양이 가마(사람이 타고 다니는 것 )처럼 생겨서 가마바우라 한다.
뼝때칸 가마바우 부근에 산삼밭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암골
뼝때칸의 물 나오는 골짜기이다.
새날기둥이 남근(男根) 형상이고 이곳 뼝때칸이 여근(女根)처럼 생겼다하여 암골이라 한다.
암골에 치성을 드리면 자식을 본다고 하는데
안쪽 가파른 곳에 물이 나오고 치성을 드리는 터가 있다.
반찬쏘(沼)
뼝때칸 암골 앞에 있다. 철암천이 이곳에 와서 깊은 소(沼)를 이루었는데
그 속에는 바위굴이 있고 굴 속에는 물구리(물구렁이)가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물구리는 보호색으로 주변의 지질에 따라 몸의 색깔이 변하는데
깊은 곳에 있으면 검어지고 얕은 곳에 있으면 붉거나 푸른색으로 볂한다.
뼝밑과 가마뜰 사람들이 이 소(沼)에서 물고기를 잡아 밥 반찬을 하였기에 반찬쏘라 한다.
20여년 전만 해도 이곳에는 물고기가 많았으나 지금은 오염이 되어
한 마리의 물고기도 살 수 없는 죽은 물이 되었다.
임원놈 쏘(沼)
반찬소 윗쪽에 있다. 옛날 동점에 삼(麻)을 많이 재배할 때 삼척 임원에 사는 사람들이
삼을 사러 왔다가 이곳에서 멱을 감다가 빠져 죽었다.
그뒤 이 소(沼)를 임원놈쏘라고 부르게 되었다.
뼝밑(屛下, 屛村)
가마뜰 건너편 넓은 땅이다. 지금은 강원탄광에서 지은 광원아파트가 있는 곳이다.
뼝때칸 밑에 있는 마을이라고 뼝밑이라 한다.
승지미골
뼝밑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그 골짜기 안쪽에
정감록을 신봉하던 사람이 십승지(十勝地)라는 이상향(理想鄕)을 찾아와 살았다.
그래서 승지(勝地)미라 부르게 되었다. 「미」는 산이나 골을 이르는 말이다.
승지미목재
승지미골 안쪽 산등에 있는 고개이다.
그리로 넘어가면 수지골의 터뒤골로 넘어간다.
구기등
승지미목재 위쪽 산등에 올라가면 우묵하고 편편한 땅이 있는데 구기등이라 한다.
옛날 정감록 신봉자가 살던 터라 해서 구기(舊基)등이라 한다.
절터
뼝밑 북쪽에 있다. 옛날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중서낭 아래쪽이다.
중서낭
뼝밑 마을과 방터골 사이의 산등에 서낭당이 있다. (동점초등학교앞산)
몇 백년 묵은 소나무가 있고 당집이 있다.
옛날 절터에 살던 스님(중)들이 만든 서낭당이라 하여 중서낭이라 한다.
50여년 전 중서낭당 안에는 금부처와 무쇠말이 안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6.25사변 뒤에 없어졌다고 한다.
중서낭은 매년 정월보름과 오월단오에 제사한다.
중서낭등
중서낭이 있는 산등이다.
굴구녕
중서낭 아래 개천가에 있는 석회동굴로 굴구녕이라 한다.(동초앞)
옛날 동점 사람들이 이 굴 속에서 몰래 사시랭이를 하던 곳이다. 구녕은 구멍이다.
굴거랑(굴앞거랑)
굴구녕 앞의 철암천을 이르는 말로 굴거랑 또는 굴앞거랑이라 한다.
굴 앞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동점초등학교 앞이다.
양지말
동점국민학교 앞 마을을 양지바르다고 양지말이라 한다.
그곳에 동점동사무소가 있다.
나팔고개
양지말 뒷쪽의 석회암 산등을 끊어 길을 내었는데 나팔고개라 한다.
본래의 고개는 현재의 도로보다 50m정도 나오면 옛 고개가 있는데
처음 이름은 나붓고개로 낮은 고개라는 뜻이다.
혹은 산의 모양이 나팔(喇叭)처럼 생겨서 나팔고개인데
지금의 길이 난 곳은 나팔의 잘록한 목에 해당되는 것이라 한다.
나팔등(喇叭嶝) (일명 비석산)
나팔고개에서 뻗은 산이 불룩하게 솟아있는 동점초등학교 뒷산을 나팔등이라 한다.
나팔처럼 확 퍼드러진 산등이란 뜻이다.
이곳 산등에 강원탄광에서 세운 순직광부위령탑이 있다.
이 탑은 꼭대기에 화강암으로 조각된 탄광 감독으로 보이는 석상(石像)을 세우고
그 밑에 사망자 명단을 새겨 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먼저 세운 산업전사(광부)위령탑으로
단기 4292년에 세웠으며 매년 오월단오에 위령제를 지낸다.
단기 4292년 2월 24일 강원탄광에 근무하던 민우식(閔于植, 당시 28세)이란 기사(技師)가
갱내(坑內)에서 사고로 죽었다.
일류 대학을 졸업한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로
그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보상금 관계로 회사측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위령탑을 세워주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순직관원위령탑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순직광원위령탑의 상징인 광원상(礦員像)이 광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망치를 들고 서 있는 것은 죽은 민기사의 형상이지만
막장에서 탄을 캐는 광부의 모습은 아니라하여
나머지 순직광부 유족들의 저항이 거세기도 하였다.
당초 위령탑을 세울때 민가사의 위령탑만 세우면
그 전에 죽은 광부들의 유족이 그냥 있지 않을 것이니
내막적으로야 민기사의 위령탑이지만 외형적으로는 강원탄광에서 순직한
모든 광부의 영령을 위로하는 탑으로 세운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된 것이 탑의 꼭대기에 세운 화강암으로 만든 광원상(礦員像)인 것이다.
망치를 들고 서 있는 석상(石像)의 모습은 탄을 캐는 광부의 모습이 아니라
광부들을 감시하고 일을 시키는 감독이나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기사(技師)의 모습인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광부는죽어서도 기사나 감독의 발 아래 새겨진
이름으로 남아야 되느냐고 했다.
참배나무집터
동점초등학교 부근이다. 학교 옆에 큰 참배나무가 있었고
김해김씨네가 살았는데 집옆의 참배나무 때문에 참배나무집이라 하였다.
옛날 참배나무집에 어느날 도승(道僧)이 찾아와서 하룻밤 자고가기를 청하였다.
김씨네 집에서 후히 대접을 하였더니 이튿날 도승이 신세를 갚는다며
한지로 기러기 세 마리를 접어 날렸다.
한지로 접은 기러기는 진짜 기러기로 변해 날아가 한 마리는 미등에,
한 마리는 중서낭 등에 또 한마리는 구무소 부근에 떨어졌다.
김씨네는 미등에 묘를 쓰고 크게 번창하였고
중서낭등에는 김씨네 사돈집인 심씨네가 묘터를 얻어 묘를 썼다.
김씨네는 미등에 묘를 쓴 덕분에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
그 집안의 장손은 매를 5~6마리씩 데리고 꿩사냥을 하며 소일하였다.
어느해 그 사람은 구문소 뼝등 위에서 매를 날려 꿩을 쫓다가 실족하여
구무소 아래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며 죽었다.
그 사람을 미등의 조상묘 윗쪽에 묻어 역장(逆葬)을 하였는데
그때부터 집안이 망해 버렸다.
14년전 그 묘를 이장하기 위해 파보니 정말 다리뼈가 부러진 채인 유골이 나왔었다.
참배나무집터 윗쪽에는 동점초등학교가 있다.
단기 4281년 11월 16일 개교때 퉁점의 서낭독뫼 뒤에 있었다.
강원탄광이 커지며 그쪽 학생이 많아지자 지금의 터로 단기 4293년 10월에 옮겨왔다.
50여년 전 학교터에 천씨네가 살았다.
집앞 밭가운데에 큰 돌담이 2개 있어서 천씨는 품을 사서 돌담을 헐어
개천에 갖다 버리는데 그 가운데 한 돌담 바닥에서 금불상이 나왔다.
천씨는 그 불상을 집 뒤안의 돌담 사이에 끼워 놓았는데
갑자기 형님이 눈병이 나서 점쟁이(복재)인데 물으니
신불(神佛)의 탈이라 하여 그 불상을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진등
나팔고개 넘어 두골산에서 뻗어 내려온 길다란 산등이 진등이라 한다.
산등이 길다고 진등(긴등)이라 하는데 산등이 길다란 뱀처럼 생겼다하여
산등 끝에 장사축와형(長蛇逐蛙形)의 명당이 있다하고
건너편 나팔고개 밑에는 개구리바우가 있었다.
절터양지
진등 위에 있다. 옛날 작은 절이 있었으며 꽤나 양지바른 곳이다.
부근에는 고려장터가 있고 총이 긴 놋숟가락과 푸른색 자기가 출토된 적이 있다.
휜두리
새날기와 가마뜰 사이에 있다.
나팔등 북쪽 철암천 물이 돌아 흐르는 일대를 흰두리라 한다.
물이 돌아흐르니 지형이 휘어져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호터지골
진등 오른쪽에 있는 가파르고 깊은 골짜기이다.
골짜기 어귀는 가파르나 골짜기 윗쪽은 편편한 분지로 되어 있어
땅의 살이 깊고 기름져 농사가 잘된다.
그래서 옛부터 화전민이 농사를 많이 지은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농사는 잘되나 지덕이 세서 땅과 산이 울어 약한 사람은 견디지를 못한다.
옛날 범이 많을 때 동점사람들을 범이 이곳으로 먹이를 물고와 잡아 먹었다고 한다.
범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을 호식(虎食)이라 하는데 이 골짜기로 호식되어 갔다고 하여
호식터골이라 하였고 그말이 변해 호지터골이 되있다.
호지터골에는 범에게 물려가 죽은 사람의 무덤인 호식총(虎食塚)이 몇 개 있다.
두골산 → (철암편 참조)
미등
김해김씨네 묘가 있는 산등으로 두구리골 옆 산등이다.
묘가 있어서 미등(묘등)이다.
두구리골
방터골 어귀에서 왼쪽으로 두골산쪽으로 나 있는 골짜기이다.
두골산 아래에 있다고 두구리골인데 그리로 넘어가면 철암의 매산골로 갈 수 있다.
쇠구뎅이
두구리골 안에 있다. 옛날 구리(퉁쇠)를 캐던 구덩이다.
통덜수머리
미등 윗쪽에 있다. 산판을 할 때 나무를 내리는 덜수가 있었다.
붉은병
통덜수머리 윗쪽 산등에 있다. 붉은빛을 띄는 바위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있다.
씹바우골
두구리골 안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갈라진 골짜기이다.
골짜기 안쪽 석벽 중간에 길쭉한 구멍이 뚫려있고 거기에서 약간의 물이 나온다.
여자의 성기처럼 생겼기에 씹바우라 하고 골짜기 이름도 거기에서 생겼다.
새재
돌꾸지에서 장성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장성과 돌꾸지 사이에 있다고 새(사이)재이다.
덫목이
돌꾸지 마을 뒷쪽 산등에 있다.
옛날 짐승을 잡기 위해 덫을 설치했던 곳으로
그곳을 넘으면 메밀드리의 탑밭으로 갈 수 있다.
황장평지
강원산업 사무실이 있는 부근으로 큰 황장목(목재)이 많은 평지이므로 붙은 이름이다.
돌꾸지
소복단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강원탄광 사택이 있는 곳으로 돌꾸지라 한다.
돌구지의 지형이 풍수학적으로 보면 돌개(실감는 기구)처럼 생겼다하여
돌개치라 하였는데 그 말이 돌꾸지로 변했다고 한다.
또는 그곳에 돌이 많아 돌고지라 하였다 하며 돌고지가 돌꾸지로 변했다고 한다.
돌꾸지에 아홉 개의 돌샘이 있어서 돌구지라 불렀다고 하는 말도 있고
한자로「石九池(돌구지)」라고 기록한 문헌도 있다.
부엉지
돌꾸지 마을 동쪽에 있는 작은 산봉우리이다. (일명 돌산)
부엉이가 자주 나타나 울고 새끼도 치므로 부엉지라 한다.
닭벼슬 바우
부엉지 건너편 두골산 아래 423번 지방도 윗쪽에 있는 거대한 바위이다.
그 바위는 높이 20여m나 되는 사암(沙岩)으로 폭은 2m 정도 밖에 되지 않아
납작한 바위가 우뚝 서 있는 것이 흡사 닭벼슬처럼 생겼다.
일설에는 돌꾸지의 지형이 닭을 알을 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인데
그것이 닭인 것을 알려주는 징표가 바로 닭벼슬바우라고 한다.
음지말
방터골 어귀의 마을을 이르는 말로
오전에는 햇볕이 잘 들지 않음으로 음지말이라 한다.
밀배나무집터
음지말 가운데 있다. 옛날 큰 밀배나무가 있었기에 붙은 이름으로
그곳이 관방터 또는 절터였다는 말이 있다.
관방터(官房基)
밀배나무집터 부근이다. 옛날 동점 방터골과 두구리골에서 구리를 캐낼 때
나라에서 관리(官吏)가 나와 동광(銅鑛)을 관리하였다.
그때 관리가 기거하며 사무를 보던 곳을 관방(官房)이라 하였으며
그 관방이 있던 곳이기에 관방터라 하는데 방터골 어귀의 밀배나무집터 부근이었다.
방터골
동점초등학교 건너편에 있는 깊은 골짜기이다.
골짜기 안의 용소에서 솟는 물은 동점마을의 식수원이 되고
골짜기가 깊고 물이 맑아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웃방터골과 아랫방터골로 나누어 부르는데 옛날엔 화전민이 많이 살았으나
지금은 아랫방터골에만 사람이 산다.
옛날 방터골에 동광이 성할때 골짜기 어귀에 관방(官房)이 있으므로
관방골로 부르다가 관방이 없어지자 관방터골로 부르게 되었고
나중엔 「관」자를 빼고 방터골로 부르게 되었다.
합쏘(合沼)
철암천(鐵岩川)과 방터골 물이 합치는 곳에 있는 깊은 소(沼)인데
양쪽물이 합쳐지는 곳에 있다고 합소이다.
40여년전 심모씨가 합소에서 삼을 짜서 물에 담가 껍질을 벗기다가
물 속에서 큰 솥을 하나 건져 내었다.
구리와 무쇠가 섞인 커다란 솥이었는데 붉고 푸른 녹이 나 있었다.
녹을 제거하고 깨끗이 닦아 부려 먹는데 그 집 큰 아들이 아파서 점을 치니
솥 탈이라 하여 푸닥거리를 하고 솥을 내다 바렸다.
얼마후 그 솥이 아까워 다시 주워다 부리는데 또 집안에 우환이 생기고 손해를보기에
원해 있던 곳에 버렸다고 한다.
그 솥은 두껍고 둥근 것이 이상한 무늬가 있으며 상당히 무거웠다고 한다.
피아골
밀배나무집터 뒷골로서 방터골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첫번째 골짜기이다.
옛날 난리때 이 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피난하였다고 한다.
가매안
피아골 안쪽에 있는데 지형이 가마솥 안처럼 우묵하게 생겨서
피난하여 농사짓기에 좋은 곳이다.
용소
방터골로 들어가서 용소골 아래 개천 가에 있다.
개천에서 약간 비켜나 깊은 웅덩이가 있고 둥덩이 주위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쌓여 있었다.
지금은 용소 위에 콩크리트 건물을 지어서 식수원으로 보호하고 있다.
용소에는 버들먹지(버들메기)라는 물고기가 많이 사는데
4~5마리만 잡아내면 더 이상 물고기가 입질을 아니하고 고기들이 사라져버린다.
평소에는 물고기가 버글버글하지만 서너 마리만 낚아내면 물고기들이 물지도 않고
자취를 감추어버리니 사람들은 용소의 고기를 잡지 않는다.
용소에도 40여년 전에는 열목어가 살았다고 하며
용소에서 뿌연물이 나오면 풍년이 들고 붉은물이 나오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처음 용소는 상당히 넓어 경관이 수려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어떤 사람이 용소 안을 들여다보니
오색빛이 나는 커다란 물고기가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낚시로 낚으려 해도 물지 않을 뿐 아니라
낚시만 드리우면 용소 안의 모든 물고기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과 힘을 합쳐 이 물고기를 잡고자 용소에다 돌을 집어 넣어 소(沼)를 메웠다.
소가 메워지면 물고기가 나올 것으로 알고 자꾸 돌을 집어 넣는데
갑자기 날씨가 어두워지며 비바람이 불고 뇌성번개가 치더니
용소의 오색물고기가 용으로 변해 승천하고 말았다.
그때 돌로 메워서 용소가 지금처럼 작아지게 되었고
지금도 용소의 물고기를 잡지 않을 뿐 아니라 잡고자 하면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용소골
용소 뒷편에 있는 골짜기로 큰 용소골과 작은 용소골이 있다.
큰 용소골에는 석회석을 캐내던 곳이 있다.
잼박골
용소골 다음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 안에는 피나무와 박달나무가 많아 옛날 이곳에서 목기류(木器類)를 많이 만들었다.
특히 소물바가지, 이남박, 함지, 제기, 목기 등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런 행위를 “박 절는다”라고 하였다.
“박저름”의 뜻인 저름박골이 변해 잼박골로 부르게 된 것이다.
태백지방에는 지게를 만들거나 자리를 엮거나 나무 바가지를 만들 때
“지게 하나 절다”, “자리 한닢 절었다”, “박 절었다”라고 한다.
「절다」, 「저름」등 은 역기거나 만들때 쓰이는 말인데 결(結)에서 온 말 같다.
고사리밭등
잼박골 안족 산등을 올라서면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이 있는데 고사리밭등이라 한다.
고사리가 많이 나기에 붙은 이름인데 화전농사를 많이 하던 곳이다.
고사리 밭등에는 범이 물려가 죽은 사람의 호식총(虎食塚)이 있다.
원샘이골
잼박골 지나서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 안쪽에 맑은 샘물이 솟아나오기에 원샘(源泉)골이라 부른다.
마당뜨리
원샘이골 안쪽 산등을 올라서면 수만평의 편편한 땅이 나타나는데
마당처럼 넓은 들이라 해서 마당뜨리라 부른다.
옛날 화전민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떡밭등
잼박골과 원샘이골 사이에 있다. 편편한 산등으로 화전을 하던 곳이다.
덕밭(德田)이란 말이 떡밭으로 변했다.
덕이 덕시 등으로 불리는 덕은 산지의 고지에 자리한 편편한 땅을 이르는 말이다.
너래골
원샘이골 맞은편에 있다. 골짜기 어귀에 암반이 층층으로 쌓여 있고
골짜기 안쪽도 암반으로 되어 있기에 너래골이라 한다.
너래는 암반(岩盤)을 일컫는 말이다.
알개바우
너래골 어귀에 큰 바위가 얼기설기 탑으로 쌓여져 있는데 알개바우라 한다.
넓적하고 큰 바위가 층층으로 쌓여 있는 형상을 얼기설기 알기설기라하는데
알개는 거기에서 나온 말이다.
명주바우(명지바우)
너래골 어귀 아래쪽에 높은 절벽이 있는데
가운데에 넓이 1m저도의 길다란 바위띠가 형성되어 있어 흡사 명주 필을 펼쳐 놓은 듯 하다.
그래서 명지바우 혹은 명주바우라 부른다.
굿바우
명지바우 아래쪽 개천 가에 있다.
바위에 구멍이 있고 물이 솟는데 구멍 속에 귀를 대고 들어보면
징소리가 나며 굿을 하는 것 같기에 굿바우라 한다.
방맹이 도리
알개바우 밑에 있다. 산이 방맹이처럼 삐죽이 나와 있고
물이 그리로 돌아 흐르기에 붙은 이름이다.
가장골
너래골 지나서 왼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옛날 범이 사람을 물고가서 잡아 먹은 곳인데 유해를 화장한 곳이다.
화장골이 변해 가장골이 되었다.
범에게 화를 당했을 때 일상용어를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은어(隱語)로 쓰는 것이 이 지방 풍습인데 화장골을
가장골로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떡갈등
너래골과 과장골 안쪽의 산등이다.
떡갈나무가 많은 산등이라고 떡갈등이라 한다.
새물내기
가장골 어귀를 지나서 오른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그곳에 맑은 샘물이 나오기에 새물내기라 한다.
골안떡밭등
새물내기 안쪽 산등이다. 편편한 덕시를이루어 화전을 많이 하던 곳이다.
잼박골 안쪽에 떡밭등이 있는데 이곳은 방터골 안쪽으로 더 들어가서 있다고
골안 떡밭등이라 한다.
재피골
재피나무가 있다고 재피골인데 재피는 후추와 비슷하여 향신료로 쓴다.
박달골
박달나무가 많은 골짜기라서 박달골이다. 마땅뜨리로 갈 수 있다.
칠가촌(七家村)
박달골과 재피골 그리고 가래이골 어귀에 일곱집이 살고 있었다.
일곱집이 산다고 칠가촌(七家村)이라 하고 옛날엔 웃받터골(上芳基)이라 하였다.
가래이골
골짜기 안쪽이 두 갈래로 가랑이처럼 갈라져 있기에 가래이골이라 한다.
가래이재
가래이골 산등에 있다. 철암 매산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덕골
박달골 지나서 있다. 짐승을 잡으려고 덫을 놓았는데 그 말이 변해 덕골이 되었다.
가르마골
면산 바로 밑에 있는 골짜기로 골짜기 안이 가르마를 타 놓은 듯 돋게 뻗어 있기에
붙은 이름으로 계속 올라가면 두리봉과 취밭목을 지나 가곡면으로 갈수 있다.
면산(免山, 綿山)
옛날 난리 때 사람들이 이 산으로 피해와 화전(火田)을 일궈 농사를 지으며
난(亂)을 면(免)했다고 면산(免山)이라 하였다.
그후 「免山」이 「綿山」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경북 봉화군과 태백시의 경계에 솟은 산으로 마당뜨리처럼 넓은 땅이 많다.
두리봉
방터골 가장 안쪽 끝에 솟아 해발 1245m의 산봉우리이다.
생긴 모양이 두리뭉실하게 생겨서 두리보이다
지도에 면산으로 표시된 산인데 사실 면산은 그보다 서남쪽으로 한참 내려와 있다.
어떻게 보면 면산의 주봉으로 봐도 무방하다.
서낭독뫼와 꽃밭등 사이에 동점국민학교가 이었다.
단기 4280년 2월10일 장성국민학교 동점분교로 인가를 받아
그해 3월 13일 개교를 하였고
이듬해 11월 16일 동점국민학교가 되었다.
강원탄광이 커지면서 그쪽(돌꾸지) 학생들이 많아지자
참배나무집터 윗쪽으로 단기 4293년에 옮겨갔다.
동점초등학교가 방터골 입구로 이사가던해 이군요.... (1960년)
1957년 구문소 부근에 있던 동초
교정을 배경으로 5회 졸업생들이 찍은
사진이다
뒷편 우측상부에
구문소의 자개문 상부가 보인다.
그이후에
보이는교실 90도직각부위로(자개문방향)
교실 서너채가
더 증설되었고
책걸상 없이 수업을 하였다.
그교실뒤로
교사관사 한채가
더 지어졌었다
방터골 입구동초 교무실앞 계단에서 여름방학을이용
강원산업 장학회 친목행사
전체사진을 찍음(1967)
(1968)
초기 동점초등학교 수도 나뭇잎 사이로 친구집이 보인다.
초기 동점초등학교 연못
동점침례교회와 나의친구
지금은 울진에서 목회를 하신다
변해있는 구 동점침례교회
하늘에서본 양지마을과(동초 앞동네) 동점초등학교
추억의 소나무점빵
철갑을 두른 소나무는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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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드립니다 이리좋은 정보를 얻어갈수 있어서 감사드리고요 선생님 귀한자료 담아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