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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8월. 뜻깊은 여행을 했다. 청소년 17명과 함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을 6박7일간 다녀왔다. 지난해 충북
진천 출신 보재 이상설 선생(마지막 선비 보재 이상설)에 이어 단재(단재와 사람들)을 기획취재할 수 있었던 건 즐거움과 동시에
고통이었다.
두 분은 충북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인물로, 우리 민족의
뛰어난 지도자다. 지역 언론인으로 이들에 대한 조명은 당연한 사명으로 취재하는 내내 희열이 가득했다. 반면 두 분을 공부하면 할수록 한없이
초라한 지적 능력은 둘째치고, 실천적인 면에서도 게으르기 그지없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보재와 단재는 10년 터울이다. 보재는
1870년생, 단재는 1880년생이다. 보재는 47살에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병사했다. 단재는 대전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청주 낭성면 귀래리에서
보내고 1936년 56살에 중국 뤼순 감옥에서 옥사했다. 두 분은 살아 이역만리에서 독립을 위해 천신만고했지만, 죽어서도 서럽기
그지없었다.
보재의 생가와 사당은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에 있지만 정작 묘소에는 선생의 유골이 없는 빈 무덤이다. 선생이 임종하며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기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지켜서다.
단재는 생전에 "내가 만일 죽으면 시체가 왜놈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후손들이 묘소를 쓰기로 결정해 1936년 2월 단재의 한 줌 유골이 압록강을 건너고, 경성역을 지나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옛 집터에 암장했다. 5년이 지난 1941년 묘비를 세우고 비로소 성분했다.
두분은 시대가 낳은 천재였다.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보재는 이이(李珥)를 조술(祖述)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1896년 성균관 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
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기도 했다. 헐버트와 친교를 맺어 영어, 프랑스어 등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물리·화학·경제학·국제법 등 동·서양 학문을 두루 섭렵한 대학자이다.
단재는 한국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역사학자이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창작한 작가다.
또한 신문과 잡지를 발간한 언론인이자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을 일깨운 교육자이며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독립 운동가다. 독립을 위한
후학양성에도 두분은 뜻과 실행이 비슷했다. 보재가 1906년 북간도 용정에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단재는 1904년
청주시 낭성면 묵정리에 산동학당을 설립하고 신교육운동을 전개했다. 1896년 보재가 성균관장에 임명된 지 10년 후인 1905년에는 단재가
합시에 합격해 성균관박사가 됐다. 두분이 함께 활동한 적도 있다. 1911년 보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간행한다. 권업회는 교민의 경제향상을 도모하는 것을 표방하지만 실질적으론 항일독립운동 기관으로 발전된다. 보재는 권업회 의사부 의장·회장을
맡았으며, 권업신문의 초대 주필이 단재다. 단재가 베이징으로 떠난 후 주필을 맡은 분이 보재다.
충청도 출신 두분의 민족 지도자를 우리는 얼마나 알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한국에는 이상설 기념관이 없다. 중국엔 신채호 기념관이 없다. 광복 70년이후 민족의 정기를 제대로 살리려면 이상설과 신채호는 반드시
재조명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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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충북 출신 보재선생과 단재선생에 대한 일목 요연한 정리를 보니 눈이 뜨이네요
반드시 재조명 선양해야 되실 두분 한국에는 이상설 기념관을 꼭 설립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