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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목은한산이공 휘 색 - 문양공 휘 종덕- 판중추공휘 맹진- 감사공 휘 연기- 직장공 휘 엄
한산이씨 세손별로 배위 며느리 시리즈를 바쁘신와중에도 연재해주시는 주원님에게 감사를 드리며 틈틈히 댓글로 응원해주시고 게시글을 말없이 구독해 주시는 모든분들에게 감사의 안부인사를 먼저 여쭈어 봅니다
문득 기사를 읽어보다가 휘 엄 배위 처 가문의 사료가 부족하여 연재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보고 제가 주제넘는 무례를 범하면서 시리즈를 이어가려고 하는 마음이 앞서 급하게 작을 해 보았습니다
아무쪼록 주원일가님 및 구독하시는 분들의 넓은 아량과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휘 엄 배위 처의 부친은 휘 담이다
처 조부는 휘 용으로 진보조씨의 시조가 되시는 분이다
진보조씨는 배천조씨에서 분적되었다 현대의 인물중 배천조씨로 유명한 인물 연예인은 당연 가수 조영남이다 대한민국 명곡 화개장터는 기성세대라면 모르는 분이 없다
배천조씨 시조 조지린 손자때 분적된 임천조씨(지면상 중략함) 도 같은 성씨이다
배천 조씨(白川 趙氏, 백천 조씨)는 황해도 배천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로써
북송 태조의 손자인 조지린(趙之遴)이 황실의 난을 피해 고려에 정착하였고, 고려 현종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좌복야(左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조지린은 송 태조(太組 : 조광윤)의 맏아들인 조덕소(趙德昭 : 위왕)의 세째 아들로 979년(고려 경종 4년) 난을 피하여 고려 들어와서 황해도 배천(白川 : 땅이름은 백천이 아닌 배천으로 발음한다.)군 도태리에 정착하여 살면서 고려 현종 때에 좌복야 참지정사가 되었다.
그의 아들 조양유(趙良裕)는 고려 덕종과 정종 때 판위위사승(判衛尉寺丞)을 지냈고, 추의찬화익조공신(贊化翊祚功臣) 문하시중으로 백천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주요인물로는 고려시대에 평장사를 지낸 조중장(趙仲璋)을 비롯하여 대제학을 지낸 조옥(趙玉), 병부상서를 지낸 조문위(趙文胃), 문하시중의 조진(趙珍), 대장군의 조천주(趙天柱), 검교시중(檢校侍中)의 조선(趙瑄) 등 많은 관직자들을 배출하면서 번성하였다.
특히, 참찬문하부사를 지낸 조광(趙胱)에 이르러서는 배천조씨 가문이 더욱 번영하였다. 그는 12세 때 원나라 연경에 가서 한문을 배우고, 몽고어를 통달하여 중서성역사(中書省譯史)로 있다가 귀국, 밀직부사, 동지밀직사사를 지내고 1392년 이성계의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2 등으로 부흥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
한편 조기(趙琦)는 개국공신 2 등으로 은천군에 봉해지고 동지중추원사를 지냈으며 문하시랑찬성사에 추증되었다.
조헌(趙憲, 1544~1592)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우 김경백, 전승업 등과 함께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1600여명을 규합하여 의병장이 되고,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으나 전라도로 진격하는 왜군에 맞서 금산 전투에 참가하여 의병들과 함께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제자들이 시신을 한데모아 묻고 "700의총"이라 했다. 그는 율곡 이이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학자의 한사람으로서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킨 유학자 이다.
이하 인물이 많으나 지면상 중략한다
진보조씨(眞寶趙氏)의 시조 조용(趙庸)은 배천조씨(白川趙氏)의 시조 조지린(趙之遴)의 11세손이다.
고려 때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조운주(趙雲柱)의 아들로 1374년(공민왕 23)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 · 좌찬성(左贊成) 겸 수문전대제학(修文展大提學)을 지냈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문장과 학행도 뛰어났는데 고려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야주군(夜珠郡 : 지금의 예천)에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절의를 높이 여겨 진보군(眞寶君)에 봉해졌다.
그가 죽은 후에 예천(醴泉)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추증되었다고 하며 후학 양성에도 이바지하여 조선의 대학자 별동 윤상을 배출하게 된다
가문의 중요 인물 조담(趙聃) 시조 용(庸)의 맏아들 담(聃)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다.
조이(趙耳) 용의 둘째 아들 이(耳)는 함경도 평사(咸鏡道評事)를 역임한 후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조청(趙聽) 이(耳)의 아들 청(聽)이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한 후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조문행(趙文行) 청의 아들로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진보 조씨(眞寶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168가구, 734명이 살고있다고 한다
출처 위키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성씨와 본관 안동권씨 청남선생님 등 다수 백과 사전 지면상 이하 출처 중략
경상북도는 예천 향현사 예천 윤씨 휘 상 및 진보조씨 관련 역사를 또한 기술하여 홍보를 하고 있어서 아래 기록을 그대로 담아 옮겨 보았다 출처인 경상북도에 감사를 표한다
직장공 한산이공 휘 엄의 처 조부 진보조씨 시조 휘 용 기사
처음 이름이 중걸이요 본관은 진보이며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학문이 고려 말 조선 초를 통해 가장 뛰어났으며 벼슬길에서도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맡은 바에 충실하고 후진들의 우러러 받듦을 한 몸에 지녔다.
고려조에서는 1374년(공민왕 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 주부, 삼사도사 계림부 판관, 사헌부 지평, 성균 사예, 예조 총랑 등을 역임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에도 학문과 덕망이 높은 그는 계속 조정에 머물러 1398년(태조 7년)간 의대부에 이어 경연시독관을 지내고 형조 전서에 올라 파면되고 예천으로 귀양 왔다.
이 사이 조용히 지내면서 후진 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당시의 제자로는 별동 윤상이 가장 뛰어나고 이로부터 예천 땅에 학문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문화 중심의 고장을 이루게 했다.
여느 사람으로서는 실의와 비탄에 빠지기 쉬운 귀양길에서도 학문을 숭상하고 풍교를 바로잡고 그 지역 주민을 계도하기란 고금을 통해 수월한 일이 아니다.
1403년(태종1년) 성균관 생원 200여 명이 공을 기용하여 스승으로 모시게 해 달하는 상소를 하여 검교 한성부윤 겸 대사성에 특임되고 이어 예문과 대제학으로 세자 우빈객을 겸임했다.
작고 후 예천의 향현사에 제향되었으니 그 까닭은 예천에 귀양 와서 예천 문화의 씨를 뿌린 일을 예천의 선비들이 마음의 스승으로 삼고자 한데서 유래된다. 시호는 문정이다.(어떤 기록에는 홍무임신 곧 1392년 공양왕조에 이 곳으로 귀양왔다고도 했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 세종실록, 예천군지, 한국인명사
그의 제자 별동 윤상은 불천위 인물로 기사를 추가해본다
예천군 보문면 소재지인 이곳은 내성천이 마을 앞을 둘러 눈썹처럼 되어 있다하여 미호리(眉湖里)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조선 초기 대학자 별동(別洞) 윤상(尹祥:1373~1455)이 벼슬에서 물러나 터를 잡은 곳으로, 현재 예천 윤씨들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예천군청 이재완 학예연구사와 예천 보문면에 자리잡고 있는 윤상의 불천위(나라에 큰 공훈으로 영원히 사당에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한 신위)사당인 윤별동묘(도유형문화재 제293호)에 대해 알아본다.
어릴적 예천군수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머물렀던 다산 정약용은 예천을 일러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했다고 한다. 이재완 학예연구사가 설명하고 있다.
곧, 예천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고향처럼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했던 곳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초기부터 이곳은 대제학을 지낸 송정(松亭) 조용(趙庸 ?~1424)과 그의 제자이면서 대제학을 지낸 별동 윤상 등이 후학을 양성했던 유학의 태동지이자 모태지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이러한 고을 풍습은 오랫동안 이어져 수많은 문과급제자를 배출해 내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전국의 문과급제자는 9천30명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예천이 44명, 용궁18명으로 모두 62명이다. 이는 경주 52명, 밀양 32명, 대구 27명, 영해 14명 등에 비해 많이 배출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학풍은 인근 영주·안동에 이어져 초기 유학을 전파하는 데 교두보 역할을 했다.
실제로 명종 22년(1567) 가을, 중국의 사신으로 온 서국(徐國)과 위시량(魏時亮)은 "동방에 공맹(孔孟)의 심학(心學)을 능히 아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묻자 퇴계 이황은 고려의 우탁, 정몽주와 조선의 김굉필, 정여창, 윤상, 이언적, 서경덕의 7인을 적어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별동 윤상은 조선조 경학에 조예가 깊었던 성리학의 선구자였으며, 경북 북부지역 초기 성리학적 학풍을 조성하는 데 막대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초라한 사당만이 미호리에 자리해, 옛 선현의 가르침을 어렴풋이 기억하게 끔 하고 있다.
별동 윤상은 어떠한 인물이었는가? 윤상은 출생부터 신이한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 '예천군지'에는 윤상의 아버지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옛 무덤에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후 윤상의 아버지는 무덤 주인이 학 한 마리를 주는 태몽을 꾸고 윤상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학은 조선조 문인의 흉배에 수놓아져 있는 것으로 문인을 뜻하는데 윤상은 문인으로 대성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현재 예천군 미호리에는 그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사당이 도유형문화재 제293호로 지정되었으며, 윤상을 제향하는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으로 1456년(세조 2)에 건립했다.
이하 중략
별동 윤상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후의 기록에는 그의 행적이 많지 않은 이유로, 그의 행적을 간략히 소개해 본다.
윤상의 어릴적 불렸던 이름은 철(哲)이었고 20살 관례를 치른 후 동기간에 불렸던 자는 실부(實夫), 호 별동(別洞) 윤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혜하고 명민해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8~9세 때 공부에 힘써 밤낮으로 글을 외우고 익혔다.
어려서 향리의 일을 맡아 보았는데 관솔불을 모아 밤늦게까지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관아의 군수였던 당대의 대유학자 조용이 그의 명민함을 눈여겨보고는 그를 제자로 삼았는데, 그는 이때 사서육경과 성리서(성리학 책자)를 연구했다.
그의 학문적 바탕은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윤상은 태조 1년(1392) 진사, 이듬해 생원이 되고 태조 5년(139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상주·선산의 교수를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사예(司藝,성균관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정사품 벼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늙은 부모를 위해 외직을 청해 금산과 영주, 대구 등지의 수령을 역임한 후 대사성에 뽑혀 16년이나 성균관 관장으로 지냈다. 당시의 많은 문인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성리학으로 당시의 주종이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특히 그는 세종 30년(1448)년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성균관박사가 돼 단종에게 학문을 가르쳐 사림의 자랑이 되기도 했다.
당시 경학삼김(經學三金)이라는 김구(金?), 김말(金末), 김반(金泮) 보다 더욱 뛰어나 모든 선비들이 다투어서 그에게 배우기를 청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 개국 이래 으뜸가는 사범(師範)이라 불려 질 것은 오랫동안 교편을 잡으며 현관(顯官)·명사(名士)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문종 원년(1451) 고향으로 돌아왔을 당시 나라에서는 예천군수로 하여금 음식을 매달 바치게 했다. 그의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지금은 헐어서 치워 버린 예천의 향현사(鄕賢祠)에 모셔졌다. '진주 삼킨 거위' 구한 선비이야기 실제 주인공 이재완 예천군청 학예연구사 이재완 학예연구사는 윤별동 선생의 일화를 짧게 들려줬다.
별동 선생이 길손이 되어 먼 길을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었는데 주막에 앉아 밖을 보니 주인의 손자로 보이는 대여섯살난 어린아이가 구슬 한 개를 들고 대문 밖을 나가다가 그만 구슬을 손에서 떨어뜨리자, 그때 마침 아이의 옆에서 먹이를 찾던 거위가 구슬이 먹이 인 줄 알고 집어 삼키고 말았답니다.
한참 후 주막 주인은 별동 선생을 의심하며 밧줄로 꽁꽁 묶어 관가에 끌고 가려 했는데 별동은 태연히 저기 있는 거위를 멀리 못 가도록 묶어 나와 같이 있게 하면 내일 아침 구슬을 틀림없이 찾을 것이라 주인에게 사정했다.
이튿날, 별동 옆에 다리가 묶인 거위가 똥을 누자 별동은 주인에게 거위의 똥 속에서 구슬을 찾으라고 했다지요.
구슬을 찾은 주인은 백배 사과하고 거위가 구슬을 먹은 줄 알면서 왜 말을 하지 않고 밤을 새워가며 고생하였냐고 묻자 "구슬을 당장 찾기 위해 거위를 죽였을 것이니, 내가 하룻밤만 고생하면 구슬도 찾고, 거위도 죽이지 않을 것이 아니요."라고 했답니다.
이렇게 침착성과 참을성을 갖고 모든 일을 처리한 탓에 별동은 높은 벼슬과 큰 학자도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윤상의 학문은 후대에 이르러 당대의 경학자이자 대문장으로 일컬어진 서거정과 김종직, 성현, 이황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위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휘 엄 처의 진보 조씨가문은 당시 충절 및 학문의 선두가문으로 우뚝솟아 있는 명문 가문인 휘 용의 소중한 손녀였던것이다
휘 엄의 장인은 홍산 현감을 지내신 휘 담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휘 용의 맏아들이 되신다
세종 3년 부친인 진보조씨 시조 휘 용이 말년에 집이 얼마나 청빈하였는지 보여주는 기사이며 그 이후 몇년지나지 않아서 졸하니 특별히 졸기를 기록하여 남기신 명문 가문의 손녀였던것이다
부친은 휘 용 사후 홍산현감의 관직에 나아갔다
한산이씨 문양공 후손이신 휘 엄 명문가에 시집와서 이후 성종 20년 시아버지이신 감사공 휘 연기의 자 휘 항 휘 엄 휘 서 가 모반을 계획하여 성종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건으로 한산에서 잡혀 궁에서 국문당하는 위협속에서도 당당히 처신하고 가문을 지킨 저력( 위사건시 휘 엄의 배위 진보조씨 부인이 생존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시대순 추측 생존확률높음) 은 어쩌면 충절과 청빈속에서도 학문을 통해 표본을 보여주신 명문가문의 자랑스런 후손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라고 나름 추측하여 삼가 글을 게시해 본다
아래 기사는 휘 엄 배위 진보조씨 명가의 기록입니다
첫번째기사
세종 3년(1421년) > 세종 3년 8월 > 세종 3년 8월 18일
세종 13권, 3년(1421 신축 / 명 영락(永樂) 19년) 8월 18일(무신) 2번째기사
검교 의정부 찬성 조용에게 전토와 곡식을 하사하다
검교 의정부 찬성(檢校議政府贊成) 조용(趙庸)에게 전토 30결과 쌀 및 콩 20섬을 내려 주었다.
용이 학문이 정밀하고도 해박하며, 또 덕행이 있어서, 그 때에 선비의 종장이 되었으나, 집이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임금이 어느날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가지고 좌우에게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었다. 좌우가, “용이라야 안다.” 고 말하므로,
집현전(集賢殿) 교리(校理) 유상지(兪尙智) 등에 명하여 용에게 가서 배우도록 하였더니, 이 때에 이르러 그가 집이 가난하였다는 것을 듣고,
또 그의 아들 조담(趙聃)으로 의영고사(義盈庫使)를 시켰다.
【태백산사고본】 5책 13권 4장 B면
【영인본】 2책 446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 *농업-전제(田制) / *인사-임면(任免) / *출판-서책(書冊)
두번째기사
세종 6년(1424년) > 세종 6년 6월 > 세종 6년 6월 28일
세종 24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6월 28일(신미) 2번째기사
판우군도총제부사 조용의 졸기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로 치사(致仕)한 조용(趙庸)이 죽었다.
용은 경상도 진보현(眞寶縣) 사람이다. 고려의 갑인년 과거에 급제하여 전교 주부(典校注簿)·삼사 도사(三司都事)에 제수되고,
〈외방에〉 나가서 계림부 판관(鷄林府判官)이 되었다. 계림부에 미수된 국공(國貢)이 매우 많아서 관리(官吏)와 백성이 폐(弊)를 입었는데, 영고(營庫)에 저장(儲藏)한 어물(魚物)을 팔아서 충수하였고,
또 호족(豪族)이 있어서 백성의 어량(魚梁)을 빼앗고 세력을 믿어 방자하여도 관(官)에서 능히 금단하지 못하였는데, 용이 와서는 장교(將校)와 이속(吏屬)을 풀어 잡아들여서 치죄(治罪)하였다.
조정에 들어와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가, 성균 사예(成均司藝)·예조 총랑(禮曹摠郞)을 역임(歷任)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즉위(卽位)한 후는 간의 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였다가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경연 시강관(經筵侍講官)으로 옮겼으며, 형조 전서(刑曹典書)로 승직(陞職)되었다가 일[事]로써 면직(免職)되었더니,
국학 생원(國學生員) 2백여 명이 상서(上書)하여 용을 기용(起用)하여 스승으로 삼기를 청하므로 특히 검교 한성부 윤(檢校漢城府尹) 겸 성균 대사성에 임명하였다.
예문 제학(藝文提學)·예조 판서(禮曹判書)·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옮겼으나 모두 성균 대사성과 세자 빈객(世子賓客)을 겸하였다.
임금이 경사(經史)를 보다가 의심되는 곳이 있으면 문득 경연관(經筵官)을 시켜 용의 집에 가서 질문하였고, 전후에 상 준 것이 여러 차례였다.
용은 젊어서부터 학문에 힘써서 경사를 넓게 통하고 더욱이 성리학(性理學)에 정통(精通)하여 당시 유학(儒學)의 으뜸이 되니, 배우는 자가 태산과 북두성(北斗星)같이 우러러 보았다.
문장(文章)을 지을 때는 종이를 들고 선자리에서 바로 끝내버렸는데, 빠르기가 귀신 같았고 마음 먹고 하는 것 같지 않아도 말이나 뜻이 함께 훌륭하게 짜여서 흡사 애써서 지은 것 같았다.
용은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서 경서나 사기를 한 번만 보아도 빨리 기억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서적(書籍)이 없으므로 매양 남에게 빌리고, 다 본 후는 반드시 돌려주었는데 〈한번 본 것은〉 평생 잊지 않았다.
젊어서 국학에 유학(遊學)할 적에 한 학생이 《원조문선대책(元朝文選對策)》을 새로 입수(入手)하여 귀중히 여겨 비장(秘藏)하고 남에게 잘 보이지 않았는데,
용이 알고서 빌리려고 하니, 학생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용이 다시 3일 동안만 빌도록 청하니, 학생이 주었다.
용은 빌린 기한이 되어 돌려주면서, “이 책이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하니, 학생들은 희롱하는 말인 줄로만 여겼다.
그 후 〈한 번은〉 학생이 그 대책을 읽으니, 용이 그 옆에 누워서 한 편(篇)을 외는데 한자도 틀리지 않았다. 학생이 크게 놀라 다시 딴 편을 시험하니 전후집(前後集)을 다 마치도록 모두 그러하였다. 용은 부모를 지성으로 섬겼다.
그 모친이 병으로 괴로와하니 용이 밤낮으로 걱정하고 울며 옷띠를 풀지 아니하고 스스로 글을 지어서 기도하더니 얼마 되지 않아서 병이 나았다.
. 부친의 상(喪)을 만나서는 몹시 슬퍼하여, 밤이면 부르짖고 울며, 낮에는 흙을 메어다가 무덤을 만들었다. 성품이 곧고 청검(淸儉)하여 한번은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을 적에 회동관(會同館)에 있으면서 방 밖에 나가지 않으니, 예부(禮部) 관원이 보고, “재상(宰相)이 매매(賣買)하는 일을 모르니 참 어진 재상이다.” 하였다.
평소(平素)에 세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나는 재주도 없으면서 임금의 은혜를 과하게 입었으나, 털끝만한 은혜도 갚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만 임금을 속이지 않았던 단 한 가지 일로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을 뿐이다. 너희들은 나의 뜻을 보고 내 말을 들어서 생각을 여기에 두도록 하라.” 하였다.
무당[巫覡] 따위을 좋아하지 않아서 제사할 만한 귀신이 아니면 제사하지 않았고, 임종 때에는 자제(子弟)에게 경계하여 불사(佛事)를 하지 않도록 하였다.
.평생에 조수(操守)한 것이 이와 같았으나 그의 성질이 편벽되고 급하여 위엄과 무게가 없으며 경세 제민(經世濟民)의 재주가 모자랐으므로 세상에서 이것을 단점(短點)으로 여겼다.
죽은 뒤에 조회를 3일 동안 철폐하고 관에서 장사를 도왔다.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는데 도덕(道德)과 박문(博聞)이 문(文)이고, 청백하게 절조(節操)를 지킨 것이 정(貞)이다. 아들은 조담(趙聃)·조치(趙恥)·조이(趙耳)이었다.
【태백산사고본】 8책 24권 34장 B면
【영인본】 2책 608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의식(儀式)
세번째기사
세종 9년(1427년) > 세종 9년 11월 > 세종 9년 11월 17일
세종 38권,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11월 17일(신축) 2번째기사
홍산 현감 조담이 사조하다
홍산 현감(鴻山縣監) 조담(趙聃)이 사조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수령을 지낸 일이 있는가.” 하니,
담이 대답하기를, “없습니다.
이제 백성 다스리는 직임을 당하오니 더욱 황공하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모든 일을 두려워하고 조심하면 실수가 적을 것이니, 그대는 그 고을에 가서 더욱 삼가고 조심하여 굶주리는 백성이 없도록 하여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38권 14장 A면 【영인본】 3책 103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의식(儀式)
한산이씨 문양공 판중추공 감사공 후손 11세 직장공 휘 엄 배위 진보조씨 가문을 기리며
수은공파 대은 이수영 후손 이대원 삼가 글을 게시하다
첫댓글 수고하셨소 아우님. 카탁하면 연재물에서 누락될 소중한 선조님들 얘기를 엮어줘서. 내가 글을 쓸때엔 원칙이 있어서 첨에 누락시켰네: 관계되는 할머님의 친가던 외가던 4대조까지 필적할 만한 행적이 추적되면 글을 쓰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독자들의 궁금중에 맡기는 것이지. 특히나 친정아버지나 외조부같이 가까운 세대에 신경을 쓰지. 애쓰셨고 독자들이나 관계되는 후손들이 아우님께 고마워 할 것이네. 여하튼 이번 기회에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한 편의 글에 투자하는지 아우님도 몸소 느끼시지 않았나 생각됨. ^^
형님 선조님의 역사 행적을 찾아가는 것 정말 힘든 여정입니다 특히 이번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여기에 사실 고증 및 답사 기타 자료를 더해야 100%가 되는데 진보조씨는 2000년 인구통계결과 대략120호구 현재 몇백명만 생존해 있고 족보 검색 수백번 기타 관청 왕조기록 등등
처음 풍향조씨에 유사인물이 있어 연대 와 우리족보가 잘못되었는지 몇번을 확인후에 진보조씨 기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연재 시리즈에 끼워드는 무례같아 포기하려다 게시하였습니다 좋은덕담까지 감사^^좋은 날 되세요
저는 당분간 게시글이 조금 늦어질것 같습니다 바쁜 일 처리해야될것이 쌓이는달이라서요 전 꿈나라로 갑니다 ----
@대원 연재물을 쓰는것이 뭐랄까 일종의 집념이 없으면 좋은 글을 쓰기가 힘드네. 독자들은 5-10분안에 읽고 끝내는 글이지만 정작 글을 쓴 사람은 적어도 여러 부분에 걸친 심층있는 리서치, 고증, 마지막 에디팅 등 적게는 너댓시간에서 많게는 열시간 (이상)을 그 글 한 편 에 투자한것이지. 참 난 요즘 대산선생실기를 읽다가 보충자료로 삼고자 한국왭사이트에서 대산선생관련 논문 9편을 일단 구입했네. 내가 어느정도 선생의 학문적-철학적-교육적-정치적 사상을 이해하게되면 그때 아우님과 정보교환할때가 오리라 생각되네. 다 바쁜가운데 짬내어 하는일인데, 아우님의 맹활약을 또 조만간에 기대해보네. 사무일 잘 보시고.
@이주원 (周遠) 저도 구입후 읽을 시간이나 될까 망설였던 논문인데요 최근 논문이라서 기대했습니다 다운 받은것 저한테도 보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진짜 꿈나라갑니다 ---
대단한 작업입니다. 두분의 필담도 유용한 읽을꺼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