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행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결코 소극적이거나 작거나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 영광스럽다는 인상을 끼치지 못한다면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기독교 복음은 독특한 것이다. 우리에게 “너희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생각하고 그에 합당한 존재가 되라. 인식하고 너희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보여 주기 위해 나아가라”고 말한다. 세상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메시지를 발견하지 못한다. 실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은 이단을 가르치는 것이다. 거듭나기 전에는 결코 그리스도인의 원리를 실천에 옮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우리 편에서의 적극적인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빌2:12-13에서 말하고 있다.
“너희는 거듭났으니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하라”
첫째, 우리가 그 진리에 익숙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과 친숙하지 않으면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없다.
둘째, 진리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포착하고 이해했으니 그것을 부단히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편의 노력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죄의 결과로 습관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모든 난제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야한다. 자신에게 결국 ‘구원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 일로부터 시작해야한다. 주님의 성육신과 그로 인하여 된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새로운 인간상을 내는 데 있다.(딛2:11-15)
구원의 목적이 새로운 인간상을 형성하는 데 있다면, 필연적이고 보편적으로 우리가 다른 조건으로 변화됨이 수반되어야 한다. 흑암의 나라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져야 한다.(골1:13)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우리 각자가 마음에서 그와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전체 사고방식을 그러한 방식으로 통치하지 않기 때문에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에 대해 직면해야 하는 방식이다. “마음으로 새롭게 되는 것”은 스스로 그 점을 망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결코 그러한 것들을 다시는 잊을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1:9-12) 이것이 바로 설교이다.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첫 요점은 ‘우리가 어디로부터’ 옮겨졌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적극적으로 ‘우리는 어디로’ 옮겨졌는지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우리의 시민권, 우리가 속한 영역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영웅들의 비결도 그들이 이 세상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 구절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석들 중 하나는 고린도후서 5장이며, 17절에서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여기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묘사하고 있다.
둘째 요점은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역시 다른 방식으로 보았다. 바울이 이전에는 -유대인이냐 아니냐, 하나님의 백성이냐 개들이냐 - 그 개들에게 조금도 서운함이 없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호감이나 혐오감 선입견에 지배를 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음으로 새롭게 되었으므로 새로운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많은 난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다.
셋째 요점은 그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영위하는 삶에 대한 전체 관점을 바꾼다. 만일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지만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엡4:17) 마치 변화받지 못한 사람처럼 삶을 계속 살지 말라는 것이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추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 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3-17) 신약성경은 이러한 논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든 것을 망각하는 것은 세대를 본받는 대로 금방 나아가게 만들 것이다. 세대를 본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 모든 영광스러운 것들을 망각하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영광스러운 것들을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고, 생각을 바르게 하는 것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우리에게 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도달할 목적지를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함이다. 이제는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항상 장차 주어질 영광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것에 비추어서 행해야 한다. 모세는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히11:27)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한 것은 “이는 상 주시는 이심을 바라봄이라”(히11:12)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단순히 세부적인 난제만을 바라보면서 ‘할까 안 할까?’로 물으며 심리학적인 방법이나 세상적인 접근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고 말한다. 곧 여러분의 난제들을 해결하게 될 것이다.
또 새로운 방식의 통제를 받는 한 허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시간은 짧고, 영원한 세계는 오고 있다. 자신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우리가 주를 뵈올 때, 우리 마음이 부끄러움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제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비판한다면 그 일로 감사하길 바란다.(요일3:1-3) 여러분 자신을 정결케 하는 문제로부터 출발하지 않아야 한다. 주님께서 정결하시니 나 자신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은 이런식으로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투쟁해야 한다. 이전의 사고방식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여러분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이와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난제를 대면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