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문화와 석굴(石窟) 문화의 관련성 시론-4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석굴사원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되어 있다.
"석굴사원은 굴원(窟院), 석굴(石窟) 등으로 불린다. 바위 속에 불전(佛殿)과 법당(法堂)이 있어서 강당과 참선당이 되며, 방실(房室)과 주방이 마련되어 있어서 이른바 석굴 속의 사원이라는 것이다.
건축자체가 암석으로 이루어졌고, 이 암석 건물의 벽면이나 천정 등에까지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했다. 따라서 지상의 일반 사원보다는 첫째, 훨씬 더 장엄하고 정교하며 신앙적으로 뛰어났다고 할 수 있으며, 둘째, 산자 수명한 심산유곡에 자리 잡았고, 우기나 무더위를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셋째, 풍화나 부식에 강하고 파괴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쟁이나 화재같은 온갖 재난에 강한 반영구적이라는 점이다.
넷째, 간선도로 상이거나 마을과 지근거리에 있는 산록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방 상인이나 외국 무역상 소국의 왕이나 관료, 공인이나 의사 등이 드나들어 석굴 조성에 기여할 수 있다.
다섯째, 가장 성스러운 성산(聖山)에 조영했기 때문에 종교적 영감이 충만한 성소가 될 수 있다.
석굴사원은 만든 기법에 따라 자연석굴, 굴착석굴, 축조석굴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자연석굴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동굴을 수도처로 삼은 굴로써 인도 마가다국의 수도 라즈거(Rajgir, 王舍城) 영축산의 설법지 주위에 있는 가섭굴 등과 전정각산(前正覺山) 석굴이 가장 유명하며, 우리나라는 천성산 석굴 등이 유명하다. (영축산은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법화경을 설법하신 곳이라고 한다.)
둘째, 굴착석굴은 바위를 뚫어 만든 석굴인데 인도의 바라바르 석굴이 최초의 석굴이며, 아잔타, 엘로라석굴, 중국의 돈황, 운강, 용문석굴 등이 가장 저명하다.
셋째, 축조석굴(築造石窟)은 벽돌형돌인 모전석이나 큰 판석을 쌓아 석굴 형식으로 조성한 석굴을 말하는데, 간다라 스와트지역의 붓카라 제3사지 석굴이나 우리나라 토함산 석굴이 가장 대표적이다."
현재까지 잘 알려진 굴착석굴들의 위치는 [그림 1]과 같다.
[그림 1] 유명 석굴들의 위치
고고학적인 유적으로서 가장 오래된 석굴은 인도 비하르 주 가야(Gaya) 북방 약 25km 지점에 위치한 바라바르 히르의 거대한 암괴에 뚫은 석굴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기원전 3세기 중엽에 건축한 것으로서 각문에 의하면 아쇼카왕(阿育王)이 아지비카교도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도 서부 마하라쉬트라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십여 개의 석굴군 유적이 있으며 그 총 수는 약 천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즉, 인도 전체 석굴 사원이 약 천이백 개라고 하니, 대부분이 인도 서부 지역 마하라쉬트라 주(데칸 고원)에 집중되어 있는 셈이다. 그 중에서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잔타 석굴(29개)과 엘로드 석굴(34개)이 가장 유명하다.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석굴도 물론 있지만, 천여 개의 석굴 가운데 약 75퍼센트는 불교의 석굴이라고 한다. 석굴은 비구의 주거처인 정사(비하라) 굴과 예불당(차이탸) 굴로 구성되어 있다.
굴을 뚫는 작업은 대체로 기원전 2세기 말엽 내기 기원전 1세기 초엽부터 시작되어 도중에 잠깐 동안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서기 9세기까지 계속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굴원(석굴) 자체도 하나의 커다란 조각 작품이지만 굴원의 내부에는 적잖은 불교 예술 작품들이 남아 있다. 이곳 서부 데칸 고원의 굴원에 기반을 둔 불교는 고대 인도 불교의 황금시대에 있어서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불교가 언제 서부 데칸에 들어와서 정착했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다만, 팔리어의 남전은 아쇼카왕(阿育王)이 남인도의 각지에 몇 그룹의 전법사를 파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즉, 각 석굴의 건축시기가 적절하게 추정된 것이라면, 인도 내에서 불교와 함께 석굴 건축기술이 [그림 2]에서 화살표 방향과 같이 인도 북동부 비하르주 가야(Gaya)에서부터 서부 마하라쉬트라주(데칸 고원)로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계속>
[그림 2] 인도내의 불교와 석굴 건축기술 전래 추정방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