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보학 언수(劉寶學 彦修)에게 보낸 답장 1-12
彦冲이 云夜夢晝思十年之間에 未能全克이라 或端坐靜黙하야 一空其心하야 使慮無所緣하며 事無所託하야사 頗覺輕安이라하니 讀至此에 不覺失笑호라 何故오 旣慮無所緣이라하니 豈非達磨의 所謂內心無喘乎아 事無所託이라하니 豈非達磨의 所謂外息諸緣乎아
二祖도 初不識達磨의 所示方便하고 將謂外息諸緣하며 內心無喘을 可以說心說性하며 說道說理라하야 引文字證據하야 欲求印可할새 所以로 達磨一一裂下하사 無處用心코사 方始退步하야 思量心如墻壁之語는 非達磨實法이라하고 忽然於墻壁上에 頓息諸緣호니 卽時에 見月亡指하고 便道了了常知故로 言之不可及이라하니라
언충(彦冲)이 말하기를 “밤에 꿈꾸고 낮에 생각한 것이 십년이라는 세월에도 능히 온전하게 극복하지 못하였는데, 혹 단정히 앉아 조용히 묵묵하며 그 마음을 한번 텅 비우고 생각에 인연하는 바가 없고 현상에 의탁하는 바가 없으니 조금 가볍고 편안함을 느낀다.”라고 하였습니다. 편지를 읽다가 이곳에 이르러 불각에 실소를 하였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이미 “생각에 인연하는 바가 없다.”라고 하니 그것이 어찌 달마대사 말한바, “안으로 마음이 헐떡거림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 또 “현상에 의탁하는 바가 없다.”고 하니 그것이 어찌 달마대사가 말한바,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쉰 것”이 아닌가.
이조혜가(二祖慧可)도 처음에는 달마대사가 보인 방편을 알지 못하고 장차 이르기를,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다.”고 한 것은 ‘마음을 이야기 하고 성품을 이야기 하며, 도를 말하고 이치를 말하였다.’하여 문자를 이끌어 증거를 대며 인가를 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달마대사가 낱낱이 부수어서 마음 쓸 곳이 없어진 뒤에 비로소 물러서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한다.”는 말은 달마대사의 실다운 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홀연히 장벽위에서 모든 인연을 다 쉬었습니다. 그리고는 곧 달을 보고 손가락을 잊어버리고 문득 말하였습니다. “분명하고 분명하게 항상 알기 때문에 말로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강설 : 언충(彦冲)이 자암노자(紫巖老子)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인용하고 한 구절 한 구절씩 달마대사의 법문과 배대하여 비교하는 내용이다.
불교에는 방편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사람사람이 본래로 갖추고 있는 궁극적 차원의 실체를 체득하는 것인데 그 궁극적 차원의 실체를 체득하기 위한 수많은 교설이 있다. 그것은 모두 방편의 가르침이지 곧 궁극적 차원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경학에서나 선불교에서나 그것은 꼭 같다. 궁극적 차원의 실체와 방편의 교설을 흔히 달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비유한다. 즉 궁극적 차원의 실체는 달이라면 수많은 교설은 아무리 고준하다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뜻이다. “할(喝)”이나 “방(棒)”이나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나 “무(無)자”나 “시삼마(是甚麽)”나 모두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방편이다. 그런데 달마대사의 말씀을 혜가가 듣고는 처음에는 그 말이 곧 실다운 법이라고 착각하였다. 언충이라는 사람도 또한 혜가와 꼭 같이 그렇게 여겼다. 그러나 혜가는 곧 뒤이어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보았다. 그러나 언충은 아직 달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방편을 실다운 진리로 오인하고 있는 상태다. 손가락이 달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첫댓글 _()()()_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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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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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息諸緣 內心無喘....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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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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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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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보았고, 달을 보고 손가락을 잊어버렸다.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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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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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불교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사람사람이 본래로 갖추고 있는 궁극적 차원의 실체를 체득하는 것.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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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나무 아미타불
書狀 - 無比스님 講說 177 - 劉寶學 彦修에게 보낸 答狀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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