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 멀다. 서울역에서 아침 7시 10분에 떠난 기차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구례역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둔중한 몸체를 내려놓는다.
섬진강을 옆에 두고 달린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님의 마암분교는 어디쯤 있을까. 강 너머 산밑을 더듬어도 보고, 이곳이 지리산 근처이니 차밭이 가까이 있겠다 싶어 키 작은 녹색 나무만을 찾다 비슷하게 생긴 나무를 보고 실망을 하기도 한다. 물이 잦아들어서인지 섬진강은 좁다랗다.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 푸르지만 수심은 얕아 보인다. 얕은 수면 위로 번지는 잔물결이 곱다. 섬세한 여성의 매무새 같다. 강변에 무리 지어 있는 눈 시리게 푸른 시누대는 바람이 불 때마다 서로 온몸을 부빈다.
다압마을이 다가오자 차창 밖에는 매화나무가 간간이 보인다. 하지만, 며칠 전 내린 춘설과 바람에 꽃잎을 떨군 채 초라한 행색으로 서 있다. 안내인의 말로는 한길가라서 그렇다며, 위로 올라가면 아직 꽃이 많이 피어 있다고 한다. 차에서 내려 올려다본 매화마을은 생각보다 작아 보인다. 작고한 김오천옹이 1931년 일본에서 5천 그루를 가져와 밤나무와 함께 45만 평에 심었고, 며느리인 홍쌍리여사가 가꾸어 온 곳이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매화 향기가 안개처럼 자욱하다.
중턱쯤 오르니 매화군락이 보인다. 남쪽이라서 일까, 땅 위에 잡초가 푸르다. 긴 겨울을 묵묵히 보낸 눈치다. 개량된 듯한 나무가 있는가 하면 세월의 옹이가 깊게 박힌, 구불구불한 목피를 드러내며 서 있는 노목도 있다. 등걸을 쓰다듬자 앞 섬진강 푸른 물결 같은 맥박이 뛴다. 바람이 불자 관람객을 환영하기라도 하듯 하얀 꽃비를 분분히 쏟아낸다. 얼굴을 스치고 낙하하는 꽃잎에서 지난 겨울의 신산함을, 하롱하롱 지는 몸짓에서 먼저 피는 봄꽃의 내재율을 훔쳐낸다.
푸른 잡초 위에 매화를 친 묵화 다포(茶布)를 편다. 차를 우리는 회원들의 손길이 바빠진다. 오랜만에 한껏 멋을 부리고 싶어진다. 수려한 덤벙 유색 분청 찻종과 작은 청자 찻종에 차를 따르고, 각자 마음에 드는 꽃을 따서 띄우기로 한다. 때마침 바람 한 더미 불어 찻종 위로 꽃잎 홀홀히 떨어져 주었으면 하지만, 산이 품고 앉은 매화군락은 그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작은 찻종에는 한 송이, 큰 찻종에는 3송이를 띄운다. ‘선생님, 꽃도 먹어요’한다. [탑매...매화를 찾아서]에서 기억해낸 문구를 장난 삼아 말하며 서로 웃는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본다. 입안에는 매화 향 가득, 하늘에는 하늘색이 다북하다. 가만히 호흡을 멈추어 본다. 그리고 숨을 깊게 쉬었다가 길게 토해낸다. 매화향기의 끝을 잡아보기라도 하듯 잔향이 흩어지는 것이 애달파 말을 하는 것조차 삼간다. 서둘러 다기를 챙긴다. 짐을 꾸리는 회원들의 얼굴에도 아쉬움이 가득하다. 잠시지만 매화나무 아래를 서성거려 본다. 온 몸에 매화향기를 묻혀 떠나려는 듯. 옛사람들이 비가 내릴 때 매화나무 아래 항아리를 놓아 매화꽃에서 떨어지는 매화수를 받아 땅속에 묻어두고 찻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 떠올려 본다.
매화군락을 나오면서 중턱에 한 그루와 어귀에 수문장처럼 서 있는 등걸이 깊게 굴곡진, 꽃 다 이울고 몇 송이만 바람에 파르르 떨고 있는 청매를 발견한다. 꽃받침은 연두색이고 꽃색은 가까이서 보면 흰빛, 멀리서 바라보면 푸른빛을 띤다. 꽃송이는 여느 매화보다 작다. 대부분의 매화가 그렇듯 이곳 매화도 대부분이 홍매인데, 모처럼 청매를 보니 신선하다.
내년을 기약하며 버스가 기다리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서울에 돌아와 일상을 시작한지 여러 날이 흘렀다. 그러나, 섬진강 매화향기는 아직 현재형으로 풀풀 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