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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사찰순례와 법회 (1)
취재부
광법사에서 법회를 마치고 순례단과 광법사 신도들의 합동 기념촬영
북한 사찰 순례 22명 참가
지난 3월부터 준비했던 북한사찰순례에 참가하기 위한 사람들은 미 동부와 중부 그리고 서부에서 22명이었다. 이중 8월초에 서울을 방문하고 8월 26일에 인천공항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8월24과 25일에 미국을 출발하여 이 순례길에 올랐다. 24일 동부지역 10명은 뉴욕 케네디 공항에서 집결지 인천공항으로 떠났다. 이번 순례에 참가하는 사람들중 도안스님은 북한을 14번째 방문중이고 보스톤 거주 이민영 전 동국대교수, LA거주 최진한 치과의사 등도 이미 몇 번 북한 방문 경험이 있었다. 중학생 아들과 함께 방문하는 채수인씨와 필자도 1995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두 번 이상 방문하는 사람이 7명이었다. 그러나 이번 참가자 중에는 아직은 가깝고도 먼 나라인 북한의 사찰순례를 한다는 취지에 참가신청을 하였으나 이 사실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이들로부터 북한 방문이 혹 미국정부나 한국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뉴욕에서 밤에 출발하여 새벽에 도착한 뉴욕에서 24일 출발한 10명은 인천국제공항에서 평양행 비행기가 뜬다는 안내판을 보면서 이러한 걱정이 많이 감속하게 되었고급속하게 변하는 남북관계 현장을 목격하는 보는 듯 하였다. 이날 전세 비행기로 가는 사람들은 평양에서 열린 여자 골프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인천공항에서 23명이 모두 만나 북경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북경에 도착하여 북경관광 안내를 맡은 사람들의 안내로 천단공원과 써커스 공연을 관람하였다. 10년전에 비하여 북경은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 당시에 출퇴근 시간에는 자전거 물결이었는데 북경에서 하룻 밤을 보내면서 평양으로 들어갈 수속을 하였다. 평양으로 가기 위한 비자 수속은 대개 평양도착 하루 전에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평양공항에서 기념촬영
그리고 단체로 가는 경우에는 보통 2달 전에 명단을 해외동포원호위원회에 보내야 차질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순례단은 참가자 모집에 차질이 있어서 이 일정을 지키지 못하고 또 중간에 우리 일을 맡아 하던 전국연합 실무자가 바뀌어서 평양 비자를 받는데 문제가 생겼다. 필자와 순례단을 안내하는 전국연합 황규식 선생은 이 일로 26일 북경에 도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못하면서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태웠다. 27일 11시 30분에 북경공항에서 평양가는 고려민항을 타기 위해 순례단은 북경공항에 9시경에 도착했지만 10 30분이 넘도록 비자가 도착하지 않아 북경공항에서 기다렸다. 북한 대사관에서는 우리 순례단이 모두 탄 후에 고려민항이 출발한다고 말해주었지만 어째든 고려민항에 탈때까지 필자에게는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원래 도착시간인 2시 30분을 훨씬 넘겨 4시 쯤에 도착하였다. 일부 순례자들은 평양 도착에 기뻐하면서 기념촬영을 하기 시작하였다. 공항에는 고 윤이상 선생님 사모님과 전국연합 동부지역 이금순 부회장이 나와 있었다. 우리 일행은 공항을 나와 버스로 먼저 만수대 김일성 주석 동상을 방문하고 숙소인 고려호텔에 짐을 풀었다. 해외동포원호위원회 김관기 국장이 주최하는 저녁 만찬에 참석하였다. 만찬 환영사에서 김 국자은 인사말을 통해 “미국 동포들을 많이 방문시켜 공화국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시키고 싶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도안스님은 순례단을 대표하여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하여 우리민족의 번영을 위하여 우리 모두의 건강을 위하여 축배를 들자”고 하였다.
이날 도안스님과 필자는 해외동포위원회 김 국장과 최 순철 참사등과 순례단 일정을 협의하였는데 원래 미국에서 계획하고 왔던 칠보산과 구월산은 사정에 의하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로 도안스님과 총무인 필자는 이 후로도 며칠에 걸쳐 칠보산과 구월산을 가자고 말했지만 칠보산의 경우는 헬리콥터로 가야 하는데 사정이 안되고, 구월산은 도로가 장마로 인해 유실되어 갈 수 없다는 설명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칠보산과 구월산에 간다고 참가자들에게 말했던 필자는 참가자들을 속인 것 같아 순례기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번에 참가한 순례단원들은 대체로 이번 방문에 만족하였지만 이 명산들을 방문하지 못한것에 대한 미련은 많았다. 우리 순례단은 23명이었는데 해외동포원호위원회측에서 최 참사를 비롯하여, 안내자 4명, 순례기간 동안 우리들이 궁금해 하는 사항에 대하여 설명할 대학교수, 운전기사, 비데오 촬영기사, 우리 일행의 식사를 조직하고 방문지 등을 사전에 준비하는 사람등 8-9명이 순례기간 함께 움직이면서 우리 일행의 순례를 도왔다.
광법사에서 법회를 하며 설법하는 도안스님
광법사에서 첫 합동법회
28일 아침에는 만경대 김일성 주석 생가를 방문하고 만경봉에 올라갔다. 만경봉에서 보는 평양은 공원도 있고 시내 주변의 녹지대가 살아있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이어서 순례단은 평양 시내에서 아주 가까운 고구려 시대의 사찰인 광법사를 방문하였다. 평양근교에는 이 광법사를 비롯하여 용화사, 법운암, 정릉사 4개의 사찰이 있다. 이중에서 광법사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이라고 볼 수 있다. 광법사에 도착하니 심상진 조선불교도연맹-이하 조불련으로 약칭- 부위원장과 광법사 주지스님,. 류인명스님등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 동안 자주 만났던 도안스님은 이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필자는 이들과 10년만에 뜨겁게 해후를 하였다. 광법사 안창순 주지스님의 안내를 받으면서 경내로 들어서자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로 수십명의 신도들이 박수로 우리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여자들은 모두 젊었으며 한복을 곱게 차려 입었고 남자들은 평상복 차림이었다. 우리는 10시 50분부터 법회를 시작하여 12시 까지 1시간 조금 넘게 합동법회를 하였다. 합동법회 순서는 먼저 법회를 알리는 21번의 타종을 북한의 채병철스님이 하고 이어 류인명 스님이 개회와 대표단소개, 찬불가 합창, 순례단 박길림 보살의 노래- 혜수관음의 빛, 순례단장 도안스님과 조불련 정각스님의 헌향, 조불련 신도회 김명희 보살과 순례단 정법심 포교사(캘리포니아주 세크라멘트 정법사 주지)의 헌화, 3귀의례, 조불련 심상진 부위원장과 도안스님의 설법, 공동발원문 봉독, 뉴욕불교방송 김자원 사장 발원문 봉독, 사홍서원, 폐회, 우리는 하나 노래합창, 기념촬영 순으로 진행되었다.
광법사 신도들의 환영
설법을 통해서 심상진 부위원장은 “전쟁이 터지면 조국강토와 불교 도량이 파괴된다. 우리 불교인들은 전쟁을 막고 평화실천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순례단장인 도안스님은 설법을 통하여 “우리 민족은 어느 곳에 살던지 민족의 단합과 협력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법회에서 필자를 비롯한 순례단원들이 깜짝 놀란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북한식 반야심경 독경을 처음 들었는데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이런 식으로 딱딱 끊어서 하는 방법이었다. 아주 새롭고 긴장미가 있어 좋았다.(도안스님에 의하면 북한불교계에서는 전부터 이런 식으로 하였다고 한다) 둘째는 이날 법회에 참가한 북한 사람들의 찬불가 실력이었다. 언제 연습을 하였는지 아주 잘하였고 특히 마지막 ‘우리는 하나’를 할 때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기념 촬영을 끝으로 우리 순례단은 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으로 떠났다. 그러나 필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생각은 점심은 대중공양으로 이날 법회에 참석한 사람들과 함께 하였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말로만 듣던 옥류관에서 우리는 냉면을 맛있게 먹었다. 옥류관은 식당이라기 보다는 궁전같은 모습이었다. 옥류관 앞 마당에 엄청난 분량의 고추를 말리는 모습도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오후에는 주체사상탑과 개선문을 보고 그 옆에 있는 3시경에 용화사로 갔다. 용화사는 김일성 경기장과 어린이 공원 바로 옆에 있었다. 우리가 방문하는 28일은 일요일이고 이날이 북한 에서는 청년학생들을 위한 무슨 날이라고 하여 어린이 공원에는 수 많은 어린이들과 청년학생들이 나와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10년만에 방문한 용화사는 주지 스님만 바뀌었을 뿐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주지스님은 젊은 사람이었는데 이름은 박경일이라고 하였다. 필자가 방문한 1995년 4월 이후 북한은 그해 여름 큰물(장마)피해를 시작으로 경제적으로 계속 어려움을 느낀 것을 알지만 그후 남북관계가 좋은 쪽으로 변하여 남한 불교계 인사들도 많이 방문하였을 것인데 용화사가 그 모습 그대로 인 것에 대해 조금 아쉬움이 있었다. 남한의 절들처럼 단청을 화려하게 하고 건물불사를 높이 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평양 시내에 자리 잡은 이곳에서 우리 전통문화인 불교문화를 알리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는 흔적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또 절 뒤편에 뻗어있는 호박넝쿨과 절 앞쪽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멋없게 심어있는 봉선화는 자기 자리를 잘못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이 주지스님에게 이런 꽃 대신에 햇볕이 드는 곳에 연못을 만들면 좋겠다고 하였다. 주지 스님도 연꽃과 연못에 관심이 있었다.
우리 순례단은 용화사를 나와 을밀대를 향하였다. 을밀대를 올라가는 입구에는 옷을 멋있게 차려입은 아가씨들이 많이 보였다. 을밀대를 향하여 올라가는 곳곳에 여러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이야기도하고 베드민턴, 배구 등 운동도 하고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노인들이 서양 카드놀이를 하는 장면을 볼 수도 있었고 젊은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먹으면서 노래를 하는 모습도 있었다. 우리 일행 중 뉴욕불교방송의 김자원 보살과 이금구씨등이 즉석에서 이들과 한데 어울려 춤을 추고 노래도 불렀다. 을밀대 바로 밑에서는 평양시민들과 우리 일행 몇 명이 한데 어울려 배구를 하기도 하였다. 을밀대는 고구려 시대의 쌓은 성으로 이곳에 올라오면 평양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옛부터 평양 8경의 하나인 이곳에서 바라보는 평양시내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을밀대에서 내려다 보니 현재는 초대소라고 하여 외국에서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숙소로 쓰이는 영명사가 보였다. 필자는 이 영명사는 언제가는 초대소에서 다시 사찰로 복원되어야 할텐데 하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도안스님을 위시하여 이 민영 선생과, 이병무, 이윤희 부부, 박길림보살과 안내원등 여러 사람들이 노래를 하면서 휴식을 취하였다.
용화사에서 법회를 마치고 기념촬영
개성 방문
우리 순례단은 숙소는 고려호텔로 정하고 대개 7시에 아침을 뷔페식으로 하였다. 개성이나 묘향산 등 평양에서 2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 갈 경우에는 이 호텔에서 도시락을 주문하여 가지고 갔는데 가격은 보통 1개당 $10 짜리로 주문하였다. 북한 방문 3일을 맞이하여 우리 순례단은 8월 29일 개성을 방문하였다. 개성은 평양에서 약 2시간 정도 걸렸는데 이 시간을 이용하여 버스안에서 안내원들의 지도로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를 배우고 이 노래를 팀을 나누어 노래시합을 하면서 같다. 우리 일행은 현대에서 시범 관광을 한 개성지역을 8월 29일 방문하였다. 개성에서는 박연폭포, 박연폭포에서 1시간 걸리는 관음사, 그리고 개성 시내의 선죽교와 개성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우리 순례단이 방문하기 3일전에 현대에서 개성관광 첫 번째 시범으로 500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수년 전에 이곳을 방문한 도안스님은 전에는 박연폭포 가는 길이 도로포장이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런 영향인지 관음사 가는 길 도중과 관음사에서도 관광객들이나 방문자들을 대상으로 물건을 파는 좌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박연폭포
순례단은 박연폭포를 지나 산길을 따라 1시간 쯤 걸어서 관음사를 방문하였다. 관음사 가는 길은 계곡을 따라 들어갔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계곡은 가회 절경이었다. 절 가는 도중에 전에 사찰이었던 곳으로 보이는 장소들이 군데 군데 보였다. 인가도 없는 곳에 물건을 파는 좌판대가 있었다. 개성을 방문하는 남한 관광객들을 주 대상으로 설치한 것 같았다. 개성 관음사 주지 청맥스님은 우리가 미국에서 왔다고 하니 도안스님에게 “혹 LA 관음사 도안스님을 아느냐?”고 물었다. 도안스님이 “내가 도안스님입니다”하며 “스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청맥스님이라고 하며 전에 한번 여기에서 만난적이 있는데 스님 모습이 많이 변해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도안스님도 이제 생각이 난다고 말하며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순례단은 관음사에서 삼귀의, 반야심경, 청맥스님의 환영사 및 관음사 연혁소개, 도안스님의 설법 순으로 법회를 하였다.
청맥스님의 환영사
청맥스님에 의하면 이 박연폭포가 있는 지역은 개성의 금강산이라 불리었고 개성에서 25킬로 떨어진 관음사는 대찰이었으나 일본인들에 의해 황폐화 되었다. 관음사는 970년에 법인국사가 대웅전 옆에 있는 자연굴을 관음굴이라 하였고 이 굴에는 대리석으로 된 관음상이 있다. 1383년 이조 태조가 동북면병마절도사 시절에 중창되었으며 1392년에 또 중창되어 암자가 5개가 있었다. 대찰이었던 관음사는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 1월 일본인들이 모조리 파괴하였다. 몇 년전에 영국사람들이 이 곳을 방문하여 “관음사 현판이 영국대영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들에게 그 현판을 내가 꼭 찾아올테니 잘 보관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643년 이조 중엽에 현재의 대웅전을 복구하였고 1946년에 석가래를 교체하였으며 기와는 1960년대에 교체하였고 마루는 1970년대에 깔았으며 나머지는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고 소개했다.
청맥스님은 논리 정연하게 말을 하였으며 설득력과 호소력이 있었다. 스님은 “며칠전에 남한 사람들이 방문한데 이어 이번에 미국에서 관음사를 찾아주어 너무 감격스럽다”고 말을 잇지 못하였다. 도안스님은 설법을 통해 “ 개성은 일제시대 우리 상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지역이다. 개성은 불교문화유적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앞으로 이 지역은 경제개발, 관광개발, 문화개발을 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도안스님이 설법이 끝나고 개성과 특별히 인연이 깊은 시카고 불타사 신도인 김경숙(불명 정법심) 보살이 찬불가를 불렀다. 정법심 보살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나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개성으로 가서 성장하였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였다. 시카고 불타사의 오랜 신도로 불타사 합창단을 결성하여 지도를 한 보살이다. 순례단은 관음굴의 관세음보살님에게 참배를 하였으며 경내에 있는 석탑을 중심으로 기념촬영을 하였다. 관음사에서 다시 한시간을 더 올라가면 대흥사가 있지만 우리 일행은 시간관계상 대흥사는 방문하지 못하고 관음사와 청맥스님을 뒤로 하고‘송도 3절’의 하나인 박연폭포로 내려갔다. 송도 3절이란 개성의 뛰어난 세가지를 일컸는 것으로 박연폭포와 화담 서경덕의 높은 학문과 황진이의 미모와 예술적 재능을 가르킨다.
관음사에서 법회를 마치고 기념촬영
우리 일행은 옛 사람들이‘하늘의 은하수가 거꾸로 쏟아지는 듯 하고 흰 무지개가 뜬다고 경탄해 마지 않던 박연폭포를 바라보면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은 후 박연폭포를 배경으로 기념촬영도 하고 황진이와 서경덕을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개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개성은 면적이 서울의 두배이지만 인구는 약 40만 정도라고 한다. 이곳은 6. 25 전에는 남한이었지만 전쟁 후 북한 영토가 되었다. 이곳은 전쟁시기 비교적 폭격을 덜 받은 지역이라고 한다. 남한의 개성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서 북한에서는 많은 준비를 한 것 같았다. 서울이나 뉴욕같이 번쩍번쩍하고 화려한 간판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개성시내 건물들과 도로들이 말끔히 정비되었고 관광객들이 다니는 곳에는 새로운 주택들이 들어선 곳도 있었다. 개성시내에 들어서자 일부 구간에서는 도로정비 작업을 하고 있는 곳도 군데 군데 보였다. 중장비도 별로 없이 순전히 사람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북한의 에너지 사정을 말해준다. 개성시내에는 건물들도 많았지만 일부 구역에서는 아낙네들이 흐르는 하천에 빨래하는 모습도 여기 저기 보였다. 대지가 청정하다는 것일 수도 있고 공장이 별로 없다는 표시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의 충신 정몽주의 핏자국이 남아있는 선죽교에 3시 10분전에 도착하였다. 선죽교는 한석봉의 필체라고 하며 충신이 억울하게 죽은 곳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가라는 하마비(下馬碑)도 이곳에 있었다. 선죽교와 바로 건너 비석이 있는 표충사부 근을 둘러보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충신 정몽주를 생각하며 선죽교를 떠나 고려 박물관으로 갔다. 우리 일행은 3시 20분에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원래 고려시대 대학이었던 성균관 건물이다. 우리가 도착하자 한복을 입은 미인 안내인이 나와 안내를 하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오래된 은행나무가 큰 은행나무들과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이 나무들은 수령이 천년이 넘은 나무들로 은행나무 두 그루는 그 높이가 30미터나 넘는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마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길다란게 있는데 성균관의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라고 하였다. 이 박물관에는 1.000여점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는데 특히 고려시대 청자를 비롯하여 불상 등 불교유물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었고 개성에서 발굴되었다는 세계최초의 금속활자 한점과 '직지심경' 영인본이 눈길을 끌었다. 건물을 나와 왼쪽으로 들어가니 개성 주위의 폐사지에서 옮겨다 놓은 석탑들이 여러 개 있었다. 오후 5시에는 다시 왕건릉에 구경하고 평양에 아주 늦게 10시가 다 되어 도착하였다.
개성은 불교를 국교인 고려의 수도이기 때문에 사찰을 비롯한 불교 유적지가 많다. 꼭 가보고 싶은 곳 중에 하나가 천태종에서 복원한 영통사였는데 아직 공사가 완료되지 못해 방문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보 부족으로 개성시 남대문에 보관되어 있는 우리나라 3대 종의 하나인 연복사종과 선죽교에서 버스로 15분이며 갈 수 있는 안화사를 사전에 방문지로 신청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안화사는 선죽교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즉석에서 안내인에게 방문하자고 건의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번 순례단이 이곳을 방문했더라면 미국과 남한에 널리 소개되었을 터인데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앞으로 불교인들이 북한을 많이 방문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공동 발원문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오늘 우리 북과 해외불교도들은 여기 대성산 광법사에서 <6.15 공동선언실천, 조국통일기원 북, 해외불교도 합동법회>를 가지고 온 겨레의 간절한 조국통일소망을 담아 삼가 부처님전에 서원을 올립니다.
거룩하신 부처님!
반세기이상 분렬과 대결이 지속된 이 땅위에 화해와 협력의 눈석이가 시작되었습니다. 6.15 공동선언발표로 자주통일의 새 시대가 펼쳐진 지난 5년간의 나날들을 통하여 우리들은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치면 나라의 통일도, 현세지상정토건설의 서원도 반드시 성취할수 있다는 신심과 락관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가는 앞길에는 안팎의 분렬주의자들의 책동으로 하여 의연히 어려운 난관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오욕을 강탈로 채우려는 반통일 보수세력들은 6.15 공동선언리행을 각방으로 방해하고 있으며 이 땅에서 핵전쟁의 불을 지르려고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거룩하신 부처님!
삼천리 조국강토는 우리겨레의 삶의 보금자리이며 우리 불자들의 영원한 불도량입니다. 만약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그 참화를 당할 것도 우리 민족이며 황폐화될 땅도 다름아닌 우리 강토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나라의 평화와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며 통일을 반대하는 안팎의 그 어떤 책동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저지 파탄시키기 위한 현실 참여행에 용맹 정진하겠습니다.
조국통일의 길이 아무리 어렵고 난관이 앞을 막는다해도 우리 북과남, 해외의 불교도들은 민족자주, 반전평화, 통일애국의 3 대공조를 실현하여 이 땅우에 반드시 통일 조국을 일떠세우겠습니다.
거룩하신 부처님!
민족의 분렬고를 끝장내고 발고여락의 리념이 실현된 현세지상정토, 통일 조국을 하루 빨리 이룩하려는 우리들의 앞길에 무량한 가호와 가피를 내려주십시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6.15 공동선언실천, 조국통일기원 북, 해외불교도 합동법회> 참가대중
주체 94(불기 2549)년 8월 28일
대성산 광법사
김 자원 보살 발원문
발원문을 낭독하는 김 자원 보살
삼계도사요 사생자부이신 부처님
부처님의 위신력과 자비함으로
우리민족 하나된 마음으로
환희도 함께 고통도 함께 나누는
한겨레의 터전 되도록
어떤 장애물도 사라지게 하소서
60여 년. 그 멈췄던 시절의 아픔과 설움
누구 탓이라 원망의 한 티끌도
무명(無明)의 어리석음 인줄 알아
서로가 기대고 받들어주는 밝음의 지혜로
힘찬 흐름의 원동력 되게 하소서.
절망과 고뇌의 시절 밑거름 되어
희망의 든든한 미래 열리게 하시고,
불신의 아픈 상처 믿음과 사랑으로 아물게 하시어
반만년 역사의 영광된 민족의 얼
만 세상에 두루 하게 하소서.
법계의 모든 분들이 부처님처럼 깨닫게 하시어
2005년 10월 184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