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총괄
1. 수행의 바탕
3) 신심
① 무엇을 믿을 것인가
우리는 신심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신심이 깊어졌다거나 떨어졌다는 말을 종종 한다.
신심은 무엇이며, 무엇을 믿는 것인가.
믿음은 결정적으로 그렇다고 여기는 말이다.
이른바 이치가 실로 있음을 믿으며, 닦으면 얻을 수 있음을 믿으며,
닦아서 얻을 때에는 무궁무진한 덕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소별기 제1권>
신심이란 진리가 실로 있음을 믿고
수행으로 얻을 수 있음을 믿는 것인데,
이러한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가.
그것은 삼보에 의해 생긴다.
부처님을 보며 그 위대한 덕을 믿고,
그도 우리와 같은 범부에서 부처가 되었다는 것을 믿고,
따라서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를 위한 방도와 이러한 이치에 대한 설명이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모두 있으며,
위대한 수행자들에 의해
그 일이 현재에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신심이란 삼보에 귀의함을 말한다.
이제 저는
사람 중에서 가장 존귀하신 부처님께 귀의하나이다.
욕망을 떠난 것 중에서 가장 존귀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나이다.
온갖 집단 중에서 가장 존귀한 승가에 귀의하나이다.<최무차경>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첫째는 역사적 부처님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하여
그 분이 삶 속에서 보여주신 교훈을
몸으로 받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는 나고 감도 없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법신불께 귀의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자성불에 귀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것이다.
승가에 귀의한다는 것은
그렇게 살고 있는 분들께 귀의한다는 것으로
그분들을 의지하여 불법을 배우겠다는 것이다.
승가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4부 대중을 말하며
불법을 따라 배우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불교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비심과 보리심이 뛰어나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분들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찬탄하라.
우리가 속해 있는 수행공동체에 귀의하라.
이것이 삼귀의다.
진리가 있으며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음을 믿는 것이 신심인데
이것은 삼보에 대한 믿음과
목숨 바쳐 돌아가는 삼귀의를 통해 가능하다.
② 어떻게 믿을 것인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즉, 신심의 내용이 삼귀의임을 밝혔다.
그렇다면 삼귀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귀의는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로
나의 본성에 돌아가 의지함을 말하며,
목숨 바쳐 귀의한다는 의미로 귀명이라고 한다.
귀명(歸命)이라는 두 글자는 능히 귀의하는 모습이다.
능히 귀의하는 모습이란
공경하고 순종하는 뜻이 있어 귀의라 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뜻이 있어 귀의라고 한다.
명(命)은 목숨의 근원으로
모든 기관을 총체적으로 제어하는 것이다.
한 몸의 요긴한 것으로는 오직 목숨이 주(主)이기에
모든 생명체가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이보다 앞설 것이 없다.
이 둘도 없는 목숨을 가지고 가장 존귀하신 분을 받들어
신심의 지극함을 나타내기에 귀명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귀명이란
근원으로 돌아간다[還源]는 의미가 있다.
그 까닭은 중생의 육근이 일심(一心)으로부터 일어나지만,
그 근원을 등지고 육진(六塵)으로 분주히 흩어지는데,
이제 목숨을 들어 육정(六情)을 모두 수습하여
그 근본 일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함으로 귀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돌아가는바 일심이란 곧 삼보이기 때문이다.<대승기승론소별기 제1권>
삼귀의의 바른 뜻을 알고 진심으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불자 됨의 가장 중요한 관문이다.
“부처님만이 우리의 귀의처요,
부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진리로 이끌 수 있으며
부처님의 교단만이 우리의 의지처 임을 나는 확신합니다.
따라서 이외의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불 법 승 삼보에 의지하여 진리의 길에 나아가겠습니다.
목숨 바쳐 귀의하나이다.”하고 간절히 서원해야 한다.
이것이 있어야만 수행도 있고 깨달음도 있는 것이다.
원효스님은 어떻게 믿을 것인가에 대해 네 가지로 제시하셨다.
어떻게 하는 것이 신심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수행인가?
대략 말하자면 신심에 네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근본을 믿는 것이니,
소위 진여법을 즐겨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부처에게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고 믿어서
항상 부처를 가까이 하고 공양하고 공경하여 선근을 일으켜
일체지(一切智)를 구하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어서,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할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사문이 바르게 수행하여 자리이타할 것을 믿어서
항상 모든 보살들을 즐겨 친근히 하여
여실한 수행을 배우려고 하기 때문이다.<대승기신론소별기 제6권>
첫째, 근본을 믿는다는 것은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은 진여의 발현임을 믿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성불이라는 목표가 정해진다.
왜냐하면 내가 비록 중생이지만
내 마음을 떠나 부처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을 떠나 궁구해야할 본질이 따로 있지 않다.
다만 내가 그것을 믿고 깨닫기만 한다면
현실에서 바로 부처가 되고 불국토를 이룬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근본을 믿음으로써 비로소 대승의 보리심을 발할 수 있으며
모든 수행과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회향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성불을 이루는 보리심을 낼 수 없으며
부처의 공덕을 갖출 수 없다.
따라서 근본을 믿는 것은 신심의 핵심이며,
수행의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다.
그러나 근본을 모르고서는 이러한 믿음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먼저 대승경전을 통해 우리의 근본을 이해하고 열심히 참구하여
어렴풋하게나마 본성을 보았을 때
비로소 근본을 믿는 굳은 신심이 자리 잡는 것이며
이 믿음의 힘으로 본격적인 수행이 가능한 것이다.
둘째, 부처님에 대한 믿음으로
항상 부처님을 가까이하고 공양하고 공경하며
부처님과 같이 일체지를 구하고자 생각한다.
셋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항상 수행할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넷째, 승가에 대한 믿음으로
항상 선지식을 친근하고 여실한 수행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르게 믿는 자의 모습이다.
4) 선지식
① 선지식의 필요성
이(理)와 사(事)는 같은 원(圓)이라
어느 각도에서 출발하든지 쉬지 않고 걸어가면
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기는 하지만,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선지식의 가르침이 없이는 될 수 없느니라.
(<만공스님 어록> "화두짓는법" 중에서)
수행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은 다음에는 직접 가야하는데
부처님의 생애와 가르침은 우리에게 훌륭한 안내도가 된다.
이 지도를 가지고 우리는 길 없는 길을 간다.
부처님이 계실 때에는 부처님이 직접 길 안내를 해 주셨지만
지금은 경전의 말씀을 지도 삼고,
계율을 나침반 삼아 혼자서 가야 한다.
그러나 혼자서 가는 길은 너무나 막막하고 어렵기만 하다.
혹시 지도를 잘못 보아 길을 잘못 들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마군의 집으로 가고 말지도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경험 많은 안내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음을 가는 길에서 언제나
선지식을 찾는 노력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달마혈맥론에
“만일 자기를 밝게 알지 못하거든
반드시 선지식에게 찾아가 생사의 근본을 깨쳐야 한다.
성품을 보지 못했다면 선지식이라 할 수 없으니,
비록 12부경을 다 외운다 하여도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삼계에 윤회하면서 고통을 받아 벗어날 기회가 없으리라.” 하였다.
이것은 불교에 대해 조금 아는 지식이나 약간의 경험을 가지고
마치 불법을 다 아는냥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오만이 불법을 가로막고 있으니
성품을 보지 못했다면 선지식을 찾아가
생사의 근본을 깨쳐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선지식은 어떤 분인가.
선지식은 성품을 보신 분이다.
따라서 선지식은 일체의 질문에 막힘이 없다
반드시 선지식을 여의지 말아야 하나니
선지식은 인생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시느니라.
만공스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시고 다시
“선지식은 선생이니 박사니 하는 막연한 이름뿐이 아니라
일체 이치에 요달 된 사람으로
부처님의 혜명(惠命)을 상속받는 분이니라” 하셨다.
또한 선지식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선지식은 그냥 만나지지 않는다.
먼저 간절한 구도심이 있어야 하며,
학식이나 명성 등 겉으로 보이는 외형들로 분별해서는 안 된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는 구법여행에서 52선지식을 만난다.
그들은 신분과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선재동자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선지식은 외형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자신의 간절한 구법이 선지식을 만나게 한다.
따라서 먼저 발보리심을 한 후에는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선지식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으로 가르침을 받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선지식은 어떻게 찾습니까
누구나 자기를 잘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스스로의 지혜가 있지.
잘못 가르치면 따라가지 않는 법이지.
결국 자기가 부처이므로 안 속는다.
찾다보면 계합이 되지. (서암스님)
② 선지식에게 배우는 자세
선지식을 믿는 그 정도에 따라
자신의 공부가 성취되느니라.(만공스님)
먼저 선지식을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받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선지식은 부처님을 대신해서
영원한 깨달음의 세계로 나를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지식을 만나면 지극한 마음으로 따를 것이며
결코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즉, 그의 성격이나 외부적 조건,
가르치는 방식 등에 대해 의심하지 말고 믿고 따라야 한다.
만일 이런 믿음이 없이 의심하고 분별한다면
평생토록 선지식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옛날에 훌륭한 원효스님나 의상대사도
관세음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니
외형을 보고는 선지식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오늘도 부처님께서는 발심한 중생들을 돕고 계신다.
이 사실을 믿고 지극한 마음으로 선지식을 구하라.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함이니,
어찌 성불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스스로 진실한 마음으로 도를 구하면 선지식을 만나게 될 것이니,
분별하지 않고 선지식의 가르침을 믿고 진실로 배우고자 하는 자세
그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5) 재가자도 불도를 이룰 수 있는가
깨달음이란 절에 있느냐, 집에 있느냐에 달려있지 않다.
출가했더라도 마음은 늘 세속에 가 있다면 수행자라 할 수 없으며,
재가자라도 마음이 속세에 물들지 않았다면 수행자인 것이다.
연꽃은 진흙에서 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듯이
세속에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
반드시 수행의 열매 맺을 것이다.
한편 재가자들은 부부관계를 하므로
음욕을 없애지 못하였다는 시비에 대해서도
달마스님은 <혈맥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떤 이가 물었다.
“속인은 처자가 있어 음욕을 없애지 못했거늘 어찌 부처를 이루지요?”
이렇게 답하였다.
“견성만을 말했을 뿐 음욕은 말하지 않았으니
성품을 보기만 하면 음욕이 본래 공적해서 끊어 없앨 필요가 없으며,
또 집착하지도 않으니 설사 남은 습기가 있더라도 해치지 못한다.
무슨 까닭이냐?
성품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니,
비록 오온의 몸속에 묻혔더라도
그 성품이 본래 청정해서 물들이지 못한다.
법신은 본래 느낌이 없으며, 주림과 목마름도 없으며,
추위도 더위도 없으며, 질병도 없으며,
은혜와 사랑도 없으며, 권속도 없으며,
괴로움과 즐거움도 없으며, 좋고 나쁨도 없으며,
길고 짧음도 없으며, 강함과 약함도 없어서
본래 한 물건도 얻을 수 없건만,
다만 이 몸이 있기 때문에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괴질과 질병 등의 모습이 있게 되었나니
만일 속이지 않게 되었거든 마음대로 행동해 보라.
생사 가운데서 자유로움을 얻어서
모든 법을 굴리어 성인들의 신통과 같이 자유로와 걸림이 없으면
편안치 않은 곳이 없다.
만일 마음에 의심이 있으면 결코 모든 경계를 통과하지 못하여
생사의 윤회를 면하지 못하겠거니와
만일 성품을 보면 천민이라도 부처를 이루리라.”
재가자라고 하더라도 성품을 보았다면 모든 것이 공함을 깨달아서
어느 것에도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을 것이므로
처자가 있더라도 걸림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수행에 있어서는 출가자, 재가자, 여자, 남자 등
외형의 조건이나 겉으로 드러난 생활모습에 앞서
마음에 걸림이 있는지 없는지가 더욱 중요하며,
깨달음에서는 먼저 자기 성품을 보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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