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주님이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은 기뻐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하며 많은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예수님을 앞뒤로 호위를 하면서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환영하였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겟세마네 동산 건너편에 황금의 문이 있는데 이 문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 날의 입성을 기념하는 문이라고 합니다. 당시 주님을 환영하던 사람들처럼 우리들도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환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에 저는 여러분과 함께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자”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우리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요3:14-15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할 때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셔서 많은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이 때 모세가 여호와께 대신 회개하며 부르짖을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21:8)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순종하니 놋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다 살게 되었습니다.
이 놋뱀 사건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장차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실텐데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예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했습니다.
그러므로 의미 없이 바라보지 마시고 십자가에 내 죄 짐이 있다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 내 죄가 못 박혔고 내 질고와 저주와 불행까지도 다 못 박혔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믿고 시인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가 십자가에 달린 것을 믿고 회개하여 늘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면 모든 짐은 나에게서 다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고후5:13-4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고난의 사랑을 말씀하면서 한 말입니다. 그러면서 고후5:15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깊이 묵상해야 할 중요한 이유입니다.
당시 십자가는 가장 끔찍한 사형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장식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목걸이, 반지, 넥타이핀, 자동차 등 수많은 곳에 십자가를 지니고 다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가 되었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이 믿는 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멋이 아니라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특히 고난 주간을 맞이할 때마다 마음속에 깊이 참회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고난을 말씀하고 노래하고 있지만 주님의 그 고난을 묵상함에 너무나도 부족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그 희생의 피를 흘리신 우리 주님을 얼마나 감사하며 또 그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번 한 주간이라도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한 주간 경건하게 보내면서 사사로운 오락과 일에서 벗어나 마음으로 고난에 동참하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 프란시스와 같이 고난의 그 사랑을 깨달아야합니다. 성 프란시스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일생 주면서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죽기 2년 전 라베르나 산에 들어가 깊은 기도에 빠졌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도대체 당신은 누구이시오며 작은 벌레 같은 저는 무엇입니까? 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허락해 주소서. 한 가지는 당신께서 수난에서 당하셨던 그 고통을 제 영혼과 육체도 체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또 한 가지는 그 어떤 고통도 사랑으로 감내할 수 있는 극치의 사랑을 제게도 넘치게 주시옵소서.” 바로 그때 프랜시스의 몸은 마치 불덩어리를 댄 것 같은 고통이 일어나면서 그의 두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상처가 생겼고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예수의 흔적으로 고통하며 살았지만 그의 영혼은 무한한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는 1226년 10월 3일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 주님이 벌거벗은 몸으로 죽으셨던 것처럼 자기도 벌거벗은 몸으로 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찬양하고 둘러선 형제들의 죄를 다 용서하고 축복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이런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히12:2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온전해집니다. 나를 위한 그 사랑을 안다면 어찌 방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랑을 안다면 그 분의 뜻대로 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19세기 초 미국의 작가 나다나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이 지은 큰 바위 얼굴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미국 뉴햄프셔주 프랑코니아 주립공원내 캐논 산(Mt. Cannon)에 있는 자연암석(old man face)을 주제로한 단편소설입니다. 주인공 어니스트라는 소년의 집 앞 바위가 장엄하고 인자한 사람의 얼굴과 같은 큰 바위가 있어서 사람들은 큰 바위의 얼굴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고장 전설에 언젠가는 그 큰 바위 얼굴을 닮은 훌륭한 인물이 이 고장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니스트는 그 예언이 성취되어 그 성자를 만나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그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 얼굴을 닮았다는 억만장자 부자가 나타났으나 사실은 인색하기 짝이 없는 장사꾼이었으며, 다음에 장군이 나타났으나 무자비한 무인에 지나지 않았으며, 정치가가 나타나 웅변이 뛰어났지만 역시 사람을 끌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으며, 천하에 제일가는 시인이 나타났지만 그 역시 그가 읊은 시만큼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제 어니스트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 전도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니스트가 석양녘에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 동네 사람들과 천재적인 시인은 그 어니스트의 모습이 그 큰 바위와 같은지 어니스트는 장엄과 자비라는 인간이 가질 최고의 인품을 구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시인이 외쳤습니다. “보시오, 보시오, 저 어니스트야말로 바로 큰 바위의 얼굴 그 사람입니다!” 마침내 그 예언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일생 그 바위를 바라보면 그처럼 장엄하고 인자한 모습을 사모하다보니 그렇게 닮게 되었던 것입니다. 작가 나다나엘 호손이 그 작품을 통해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바라보고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존경하고 사모하면 예수님을 닮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교훈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볼 때 어찌 참 사람이 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는 일도 좋지만 이제는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닮은 자가 많다면 이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프란시스와 같이 주님을 닮아 섬기며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며 봉사하며 희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성도는 잘 살아야 한다. 성도는 복 받아야 한다. 성도는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아야 한다. 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높고 높은 영광의 보좌에서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시고, 부요하지만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의 그 본을 받아 사랑하며 섬기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위해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그 분을 믿고 구원 받고, 그 분을 사랑하며, 그 주님을 닮은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첫댓글 좋은말씀 스크랩해갑니다..
감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