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살 무늬 한옥 문 두 짝에 흰 한지를 바르고, 마른 다음 맞붙여 경첩을 달았다. 문살 사이 사이마다 흰 한지가 하얗게 얼비치는 가리개가 되었다. 강의실에서 회원들이 한복을 갈아입을 때 사용할 가리개지만, 좀 더 아름답게 만들 방법을 생각하다 색색의 차주머니를 만들어 조롱조롱 매달기로 했다. 하늘색, 인디언핑크, 겨자색, 연두, 자주, 회색, 아이보리, 팥분홍, 주황, 갈색 … 색색의 한지로 작은 주머니를 만들어 어떤 것에는 해묵은 차를 담고, 어떤 것에는 말린 황국화를 담아 서너가지의 색실로 위쪽을 묶어 문살에 다문다문 매달았다.
조롱조롱 매단 차주머니 위에 차를 뜻하는 글자 ― 차(茶), 가(가), 명(茗), 설(설), 천(천)을 붓으로 써서 걸어놓았더니, 방문하는 사람마다 그 글자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차를 뜻하는 글자라고 하면, 그렇게 많으냐고 되묻곤 한다.
차를 뜻하는 글자만 많은 것이 아니다. 차의 명칭 또한 많다. 찻잎을 따는 시기, 제조 방법, 발효 정도, 생산지, 차에 얽힌 일화 등에 따라 명칭을 붙이기도 하고, 그 외 또 여러 방법으로 이름을 붙인다.
신라시대 차의 이름 중에는 최치원이 쓴 진감국사 비문에 중국차인 한명(漢茗)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고려사》에 용봉차가 많이 보이지만, 이 차는 중국에서 수입된 연고차이다. 그 외 자순차, 납전차, 화전차, 노아차, 작설차 등 다양한 이름이 있다. 조선시대에서 일제시대까지는 작설차, 죽로차, 백산차, 뇌소차, 춘설차 등 많은 차이름이 있다.
앞의 차이름 중에 몇 개를 살펴 보면, 작설차(雀舌茶)는 곡우와 입하 사이에 처음 나온 차나무의 새순을 참새 혀만할 때 따서 만든다는 뜻에서, 찻잎의 모양이 참새의 혀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춘설차(春雪茶)는 송나라 나대경의 차시 한 구절 ‘한 사발 춘설차는 재호보다 수승하구나’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본인 오자끼 이찌조(尾峰市三)가 경영하다 두고 간 광주 무등산 기슭에 있던 다원을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이름을 삼애다원으로 바꾸고, 차밭 가까운 곳에 춘설헌(春雪軒)을 짓고 살며 차생활을 했던 의재 허백련 화백이 그곳에서 생산된 차에 붙인 이름이다.
요즘 유통되고 있는 차의 이름은 더 더욱 많다. 차의 산업화에 따라 차 제조업을 하는 사람마다 다른 제품과 구별할 수 있는 상품명을 만들다보니, 수 많은 차 이름이 탄생된 것이다. 그러나, 전체를 통칭하는 명칭은 녹차이다. 1980년대 초반 무렵만 해도 녹차라는 명칭은 드물게 쓰였는데, 그후 일본에서 차를 ‘녹차’라 부르는 것과 태평양화학의 ‘설록차’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일본의 영향이 더 크다.
녹차란 명칭이 대중화되기 전까지, 1980년대 초반까지는 대체로 작설차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일본에서 유입된 녹차에 긴 역사를 가진 작설차가 자리를 내준 것이다. 작설은 송나라 휘종황제가 저술한 《대관다론》에 처음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익재 이재현의 ‘송광화상이 햇차를 보내준 은혜에 대하여 붓가는 대로 적어 장하에게 부치다’에 ‘작설’이란 단어가 보인다. ‘작설차’가 온전히 보이기는 태종 이방원의 스승 원천석의 시에서다. 그 외 신숙주, 김시습, 서거정, 정약용 등 수많은 문사들이 작설을 읊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궁궐에 바치는 지방의 공물토산품에 작설차로 기록되어 잇고, 《동의보감》에도 작설차라고 적혀있다. 고유 토속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뇌원차와 죽로차 같은 명칭이 있었지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죽로차는 대나무 아래 심은 차나무에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조선시대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차의 명칭은 거의 작설차였다.
녹차가 ‘녹색의 차’라는 직설적이며 대중적인 장점이 있다면, 작설차에는 긴 역사와 상징성, 아름다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