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臣)은 본래부터 재지(才智)가 없고 또한 늙음에 병까지 겹쳐서 처음 모의를 시작할 때부터
그 형세가 막히기를 십중팔구나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거의(擧義)할 것을 끌어오면서 세월만 보내다가 이제 그 계획이 다소
정해지고 인사들이 모여들었기에 이제 이달 12일에 전(前) 낙안(樂安)군수 신(臣) 임병찬을 보내어 먼저 의기(義旗)를
꽂게 하였습니다”
이 글은 1906년 면암 최익현(1833-1906)이 고종에게 바친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의 일부다. 최익현이 임병찬의 도움을 얻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구한말 일제에 항거해 민족정신을 드높인 의병운동은 흔히 3단계로 나눈다. 첫째가 을미(乙未)의병, 둘째가
을사(乙巳)의병, 셋째가 정미(丁未)의병이다. 을미의병은 1895년 민비시해사건, 을사의병은 1905년 을사조약,
정미의병은 1907년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의 군대해산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 의병운동은 국가로 부터 훈장을
받거나 자손의 부귀영화를 보장받기 위해 일어난 운동이 아니었다. 깊은 산속에서 굶주림을 안은채 며칠을 헤메야 했고 엄청난
사람이 묘비명 하나 없이 죽어가야 했다. 또 마을이 잿더미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의로운 정신은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우리 민족이 뿌리를 보존할수 있는 고갈되지 않는 수원지였다.
임병찬이 최익현과 함께
일으킨 의병운동은 둘째번 을사의병에 해당한다.
임병찬(林炳瓚)은 1851년 2월 옥구군 서면 (현재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에서 임용래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시중(時中, 뒤에 中玉), 호는 돈헌이라 하였고 본관은 평택이다.
네살에 오언고시(五言古詩)를 지을만큼 어려서 부터 총명하여 동네에서는 신동으로 통했다고 한다. 15살에는
전주에서 치른 향시(鄕試)에 수석합격을 했다고 전한다.
1882년 그의 나이 31살에 태인현 산내면으로
이사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는등 어지러운 세태를 보고, 산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1886년 조정에서 거문도에 진(鎭)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감독관에 추천하자 관직에 나아갔다. 거문도진이 예정대로
완공되자 조정에서 그에게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에 임명하고 그의 선대 3대를 추종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이어
낙안군수겸 순천진관 병마동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부임하면서 먼저 아전들의 폐단을 시정하고 죄 없이는 단
한대의 매질도 하지 못하게 엄히 다스렸다. 또한 체납된 세금과 쌀을 모두 추징하여 적폐를 일소하였다. 이에 감복한 주민들이
사례를 하고 선정비를 세우려 했으나 모두 물리쳤다. 말하자면 명목민관이요, 청백리였던 셈이다.
1890년에는
차례로 군산진, 성당진, 법성포진의 겸관(兼官) 사관(査官)을 겸하였다.
이후 1893년 관직을 버리고
종성리로 이사하였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는 무남영우영관(武南營右領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공자를 모신 사당과 흥학재(興學齋)를 지어 제자들을 모아 한학과 활쏘기 말타기 등을 가르쳤다.
그럴 즈음
대한제국은 점차 기울어, 1905년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이르자 전국의 선비들이 비분강개
하였고 여기저기 장탄식이 끊이지 않았다.
임병찬도 이러한 소식을 접하고 크게 실망,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를
옮겨 장사지내고 아버지의 묘 아래서 시묘살이를 하기로 작정했다.
이때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키려 동지를 구하던
참이었다. 즉 전주의 전우(田愚)와 호남의병을 일으키고, 거창의 곽종석과 연락하여 영남의병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인물을 물색중 군사전략에 뛰어나다는 군수출신 임병찬과 연락이 닿게 되었다. 장성의 기우만 이항선
등도 그를 찾아와 함께 목숨을 다해 싸울 것을 권했다.
1906년 3월 24일 73살의 최익현이 그의
묘려(墓廬)를 직접 찾아왔다. 이날 임병찬은 그를 맞아 사제(師弟)의 의로써 구국의 길에 동참키로 다짐했다.
의병의 봉기는 그 해 6월 4일(윤 4월 13일) 태인(현재 칠보)의 무성서원에서 첫 깃발이 올랐다. 이에
앞서 임병찬은 자신의 재산 5백여석을 처분, 군량과 화승포 구입에 사용하였다. 또 각 도와 군에 윤통문(輪通文)
군율(軍律) 등을 발송하는등 의병모집과 군량및 병사훈련을 도맡았다.
무성서원의 강회(講會)에는 80여명의
의병이 뜻을 같이 했다. 그들은 태인읍을 거쳐 정읍을 공략했다. 인근 흥덕등에서 호응해 오는 의병들이 크게 불어났다. 순창
구암사에서는 포수 채영찬이 다른 포수 수십명을 데리고 합류해 왔다. 이어 곡성을 점령하고 순창으로 회군했을 때는 의병의
수가 6백여명으로 증가했다. 순창에서는 왜군과 접전하여 격퇴시켰다.
그들이 각 고을에 도착하면 군수는
도망하거나 엎드려 사죄하며 환영했다. 그것은 그들이 의병이기 이전에 거유(巨儒) 최익현과 군수를 지낸 임병찬이 지휘했기
때문이었다. 순창군수 이건용은 의병에 참가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했고 진영은 9백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 중
순창에 진을 치고 있던 6월 12일, 전주와 남원에 주둔한 진위대가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일제의
침략을 놓고 같은 동포끼리 싸울수 없어 의병을 해산토록 했다. 하지만 잠깐사이, 중장군 정시해가 전사하고 최익현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 임현주 유종규 조우식 조영선 최제학 나기덕 이용선 유해용등 13명은 체포되었다.
이들은
전주 진위대를 거쳐 서울의 일본군 사령부로 압송되었다. 당시는 군대해산 전이었지만 군사지휘권이 사실상 일본에 넘어간
상태였다.
일본군은 최익현에게 3년, 임병찬에게 2년, 그리고 나머지 의병들에게 태(笞) 1백대에서 감금
4개월까지를 선고했다.
결국 최익현과 임병찬은 쓰시마(對馬島)로 유배되었고 최익현은 그곳에서 단식절명하고
말았다.
임병찬은 1907년 1월 방환되었으나 그해 말 전주주재 일본수비대에 다시 붙잡혀 천안수비대에 갇혀야
했다. 같은해 말 순창군의 노촌 헌병소장이 일본 천황이 내렸다는 은사금 첩지를 전하러 왔지만 이를 냉정히 거절하고 돌려
보냈다.
임병찬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은거하면서 재차 거의를 도모했다. 1912년 고종의
밀조를 받고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에 임명되어,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조직을 확대 강화했다. 그해 12월
독립의군부 육군부장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1913년 아들 응철(應喆)을 서울로 보내 이인순
곽한일 전용규 등과 협의케 하는 한편 유생 임태홍 임창현 김덕장 등과 같이 호남지방의 조직정비에 착수했다.
1913년 2월 전라남북도 순무총장겸 사령장관에 임명된 그는 호남지방의 조직을 완료하고 독립의군부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가 이명상 이인순 등과 협의하여 독립의군부의 편제를 재정비했다.
그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총독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제출하여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주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자백함으로써 독립의군부의
국권회복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많은 간부와 동지들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자 경무총감과 면담, 국권반환및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했다. 6월 1일 재차 총리대신과 총독에게 편지를 보내 면담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일제에 의해
죽느니 스스로 죽겠다며 3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독립에의 염원을 안은채 단식으로 목숨을 거두었다. 저서로 「돈헌문집」이 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자료협조 : 전북일보 『20C 전북5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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