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 김연식 展
구스타프 말러의 몽유도원도
인사아트센터 1층
2012. 9. 12(화) ▶ 2012. 9. 24(월)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8 | T.02-736-1020
협찬 | 주식회사 도루코
www.insaartcenter.com
정산김연식 6회 개인전_쿠스타프 말러의 몽유도원도_전시장면
정산김연식의 무한 변주(變奏)
평론_박천남(성곡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수 만개의 성냥갑, 파노라마 형식의 초대형 화면, 매니큐어를 사용한 다양한 불상그림 등 파격적인 방식의 지지체와 재료, 형식을 채택, 구사하는 김연식의 작업은 그의 여러 직함이나 별난 이력만큼 독특하다. 제도권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재료와 형식, 규모와 화제(畵題) 등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러한 김연식의 작업은 단순한 노욕(老慾)이 아니라, 저간의 연륜과 축적된 이런저런 창작충동과 동인이 밀고 올라온, 예술적 기운이 응집된 총체적인 형국이다. 김연식이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을 택한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미루어 짐작컨대 이러한 잠재적 창작동인과 예술충동을 누군가 오래전에 예비하고 느지막하게 불러내고 밀어낸 것으로 생각된다. 매년 국내외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그의 화면은 젊은 화력(畵力)으로 가득하다. 최근 들어서는 음악적 상상력과 삶의 운율을 공감각적으로 결합, 리드미컬하게 전개하는 독특한 작업 방식을 전개하고 있다. 이는 그가 많은 시간 동안 직접 만나온 자연인상과 그 속에 잠재된 내밀한 기운, 아주 작고 사소한 미물(美物)들의 소리와 몸짓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관심, 사랑으로부터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정산김연식은 작은 기억과 경험, 사고의 단편들을 모아 거대하고 중층적인 화면을 구성한다. 크고 작은 생각과 감정들, 사소한 것들이 모여 힘과 두께를 가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증거하고 있다. 자그마한 제한된 공간 속에 담아 놓은 이미지들은 각기 다른 기억의 시공간에서 나름의 의미를 드러내며 존재감을 가지고 있던 것들이다. 김연식은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분리하거나 파편화하여 새로운 세상질서로 재(再)구조화한다. 수많은 의미 단락과 구조 맥락, 이미지 파편을 다시 분절하고 분리하며 생성으로서의 또 다른 의미구조, 이미지 세상을 창출한다. 본래성을 제거하거나 의미를 뒤집고 기존의 선입견을 탈각, 탈색하며 탈의미화 맥락으로 전치(轉置)시킨다. 임의의 질서와 나름의 호흡으로 해체, 재구성하는 까닭에 관객이 그 원상을 미루어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작은 꽃잎, 속세로부터 벗어나려는 듯 원상으로부터 탈각(脫却)된 이미지, 의미가 해체된 글자 파편들은 분화되어 본래성을 찾기 어려운 것들이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원융(圓融)을 이루어 조화롭고 아름다운 규칙과 질서를 선보인다.
쿠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_면도날 설치_지름 150cm_2012
쿠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_면도날 설치_지름 150cm_2012(부분)
정산김연식이 이러한 작업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불타(佛陀)의 주요 가르침 중 하나로, 일반에서도 자주 회자되고 있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하루하루 일상처럼 반복하는 세속적 삶의 무료함과 일견 역동적으로 보이는 분주한 삶 속에서 문득 경험하는 허무와 그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는 어쩔 수 없는 세속적 욕망을 강조하고 다스린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세상을 살며 경험하는 모든 오욕(五慾)과 칠정(七情), 그로부터 파생하고 스스로 범하는 감정이 가감 없이 투영되어 있다.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오욕, 즉 '색(色), 향(香), 미(味), 성(聲), 촉(觸)' 등과 같은 '정욕(情慾)', 혹은 '색욕(色欲), 음욕(飮欲), 수면욕(睡眠欲), 명욕(名欲), 재욕(財欲)'과 같은 '욕심(慾心)'과 이로부터 비롯하는 희(喜)·노(怒)·애(哀)·낙(樂)·애(愛)·오(惡)·욕(欲)의 칠정(七情)을 숨김없이 털어 놓았다.
정산김연식의 작업은 이들 감정이 쉼 없이 교차하며 빚어내는 세상만사, 삶의 풍경에 다름 아니다. 혹자는 멋과 맛은 동원(同源)이라 했다. 김연식은 언제부터인가 사찰음식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밟으며 만난 자연의 속살과 아름다움, 그 속에서 나름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미물들이 서로 다투듯 어울려 빚어내는 교향곡 같은 울림을 주목하였다. 작은 꽃잎 하나하나, 바람, 햇살의 떨림은 실로 깊고 커다란 깨달음에 다름 아니었다. 획일화된 세상 규칙을 흔들며 자신만의 자유로운 미감과 변화율을 하나둘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 사이의 우여곡절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김연식 작업의 시각적인 변주, 물리적 외재율과 함께 내재율을 꼼꼼히 살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쿠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9번_면도날_240x960cm_2012
쿠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9번_면도날_240x960cm_2012(부분)
정산김연식은 지난 4회 개인전까지 이어오던 관조, 명상의 화제를 음악중심으로 전환했다. 5회 개인전 <드뷔시의 달빛>에 이어 이번 전시는 '말러의 교향곡'을 모티프로 했다. 일반적으로 교향곡은 악기 편성의 스케일이 크고 합창도 가세하는 대규모 악곡(樂曲) 형식이다. 음악회가 무르익어 절정에 달하는 마지막 순간에 등장하는 중요하고 긴 음악이다. 김연식의 작업은 작은 소리와 큰 울림이 함께 하며 마지막에 '함께 울리는' 교향곡처럼 커다란 완전 협화음을 지향한다. 빠르게 진행되다가 늦어지고 다시 빨라지는 등 인생의 완급과 우여곡절을 돌아본다. 말러의 교향곡 역시 허망하고 고통스러우며 우울하기도 한 인생을 노래했다. 김연식 역시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존재를 일깨우며 죽음으로부터 희망을, 비극으로부터 부활을 강조한다. '대지의 노래'와도 같이 청춘의 아름다움과 힘을 노래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김연식의 작품은 말러 교향곡의 시각적 변주이자, 미완성으로 남은 10번 교향곡일지도 모른다.
정산김연식의 대형작업은 교향곡의 빠름, 느림, 빠름의 내적 변화율을 반복하듯 비슷한 모듈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일정한 질서와 규칙을 가지고 일견 잘 정돈된 규칙적인 질서와 정형률을 지니고 있다. 잘 정리되어 보인다. 멈추지 않는 호흡과 흐름을 보인다. 작은 단편들을 보고 있자면 분열된 세상처럼 어지러이 보인다. 보는 사람 저 마다, 혹은 보는 각도에 따라 각기 다른 지난 경험에 의해 또 다른 시공과 이미지의 흐름, 눈을 간질이는 움직임을 체험할 것이다. 멀리 떨어져 나와서도 볼 일이다. 하나의 장대한 하모니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산김연식은 하루하루 일기를 써나가듯 쓰고 또 쓰고, 적고 또 적고, 그리고 또 그리고, 담고 또 담고, 비우고 또 비운다. 매일처럼 그리한다. 모으고(集) 쌓는다(積). 무모할 수 있는 집의(集意)와 적의(積意). 다만 그 뜻을 헤아릴 뿐이다. 시공이 켜켜이 쌓인다. 시공의 때, 혹은 시각적/청각적 사고, 맛과 멋이 결합된 오욕(五慾)의 결정체로서 조형적 열매가 탄생한다. 그것은 욕망의 배설이자 충족일 수 있다. 솔직하게 드러나는 김연식의 감정은 순환하는 계절처럼 화면을 맴돌고 있다. 찰나와도 같은 삶도, 영원한 죽음도 모두가 하나라는 어쩌면 평범한 진리를, 그러나 인정하기 어려운 순리를 일깨운다.
쿠스타프 말러의 연가곡-대지의 노래_혼합재료_각 240x120cm_2012
쿠스타프 말러의 연가곡-대지의 노래_혼합재료_각 240x120cm_2012(부분)
수 만개의 단편들이 집적된 그의 작업은 옵티컬한 광경을 연출한다. 보기에 따라 달라지는 표정과 의미구조를 따라잡는 재미가 쏠쏠하다. 잡다한 이미지로 충만한 무의미하고 공허한 세상일 수도 있고 창백하게 텅 비었지만, 충만한 내적세계일 수도 있다. 세상에서 만나는 사물이나 현상은 사실상 실유(實有)가 아님을, 곧 공(空)일 수 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 비극과 희망,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음이다. 오늘도 김연식은 반야심경을 새기듯 한 글자 한 글자를 써내려가고, 그것을 집자(集子)하듯 하나하나 다시 분해해서 세상에서, 삶에서 채집한 수많은 이미지들로 더해나간다. 희로애락의 감정과 오욕과 칠정을 다스리고 드러낸다. 세상 만상을 구성하는 모든 법의 진실상을 살피는 지혜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단편들을 반복적으로 집적해놓은 대형 패널은 늘어나는 세속적 욕망, 혹은 그것의 집적, 총량을 가늠케 한다. 새삼 인간이 가지는 끝없는 욕망의 정도와 세속적인 바람을 돌아보게 한다. 욕망의 집적, 한편으로는 그것의 무한함과 유한함. 끝없음과 덧없음,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히 자라나는 욕망과 그것을 다스리려는 내적 다스림의 갈등을 반어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정산김연식의 작업에는 온갖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욕망기제로 가득한 세상과 그것에의 번뇌를 송두리째 덜어버린 텅 빈 세상의 극명한 대비가 빛난다. 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이 생각하기 나름이요, 충만한 것은 비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일 수 있다는 불교의 혹은 인생의 평범한 진리를 일깨우고 있다. 불타에서는 이를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했다. 김연식은 그 경계와 사이를 넘나들며 방황하는 자신을 걷잡는다. 전체를 보거나 부분을 들여다보며 결국 인간의 삶이 어떤 정해진 운명과 세계 내에서 아등바등 현실적 욕망과 이윤을 위해 몸부림 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돌아다본다. 부처님 손바닥이라 했다. 더 큰 기운, 더 큰 가치, 더 큰 깨달음이 필요한 요즘 세태다. 김연식의 무한 변주는 시각적 법어와도 같은 교훈을 던져준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와 이치를 따르는 이들에게 주는 말이기도 하며 작가 자신에게도 던지는 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