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구교와 신교로 구분하여 분리되는 큰 획을 긋는 종교개혁은 루터(Martin Luther)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쯔빙글리(Ulrich Zwingli), 칼빈(John Calvin), 존 낙스(John Knox) 등으로 이어졌다. 이들을 통해서 행해진 종교개혁은 독일에서 유럽대륙과 스코틀랜드로 그 불길이 확산되어 가면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종교개혁으로 그 명칭이 굳는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그 방향이 독일에서 유럽대륙과 스코틀랜드로 길을 잡아가면서 크게 두 진영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하나는 루터의 교회를 따르는 진영이고 다른 하나는 칼빈의 교리를 따르는 진영이다. 이렇게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루터를 따르는 교회와 칼빈을 따르는 교회로 나누어지게 된 것은 루터를 따르는 교회는 성례에 대한 교리와 예배의식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로마 교회의 것을 수용하는 편인데 반해 칼빈을 따르는 교회는 이 모두를 다 개혁한 데 따른 것이다. 이렇게 성례와 예배의식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는 견해 차이로 다같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진 교회로 서게 되어서 각기 루터교회(Lutheran Church)와 개혁교회(Reformed Church)로 불려지고 있다. 이때 여기서의 '개혁교회'에는 칼빈, 쯔빙글리, 존 낙스에 의해서 소위 칼빈의 신학과 사상을 따르는 교회를 말한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유럽대륙의 교회가 개혁교회라는 이름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유럽대륙을 벗어나 스코틀랜드에 정착한 개혁교회는 감독에 의한 교권정치를 반대하고 장로에 의한 정치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3가지 큰 특징적인 교회가 생기게 되었으니 곧 루터파 교회, 개혁교회, 장로교회 이다. 그리고 이 프로테스탄트 교회 중에서 특히 '개혁파 교회', 곧 Reformed Church로 불리우는 교회는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를 특징지어서 불리우는 이름이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 교회에는 이들 세 부류의 교회만이 아니라 앵글리컨 처치(Anglican Church), 곧 영국교회(영국 국가교회, 영국 성공회)와 재세례파로 불리우는 아나밥티스트(Anabaptists)도 포함된다. 여기서 재세례파는 사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전부터 소단체로 존재해오면서 점차 그 행동이 확산되어가고 그 활동 또한 급격하고 과격한 성격을 띠어온 데다가 다른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조차 인정을 받지 못하였는데 이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제도로부터의 완전한 개혁을 주장한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성경에서 이탈한 과격한 입장을 취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들 프로테스탄드 교회는 모두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한 교회에 속하는데 Lutheran Church - Anglican Church - Reformed Church, Presbyterian Church - Anabaptist의 순으로 갈수록 좌파적 성격을 띠는 반면에 그 역순으로 갈수록 우파적 성격을 띤다. 즉 교리로부터의 개혁은 있으나 그럼에도 로마 카톨릭 교회적인 교리를 같이 하며 예배 생활에서도 그 모습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영국교회는 반카톨릭적이며 또한 반프로테트탄트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반면에 좌파적 성격을 띨수록 교리에서만이 아니라 예배 등의 제도적인 전반에 있어서 개혁의 성격이 급진적 성향을 띠고 있어서 재세례파의 경우는 지나쳐는 성향을 띠고 있다.
2. 재세례파(Anabaptist)의 등장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운동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하고 또 종교개혁시대 이후로 오늘날까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소단체의 교파가 있어 왔는데 재세례파(Anabaptist) 이다. 그러나 재세례파는 종교개혁 이후에서야 비로소 생겨난 교파가 아니다. 재세례파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영향과 자극을 받은 바가 많기는 하지만 본래 이들은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부터 독일과 화란을 비롯하여서 이태리, 불란서에까지 산재되어 있으면서 개혁신앙의 성격을 띠어온 소단체들이다.
재세례파는 처음에는 체제를 갖추지 않은 소단체에 불과했으나 1524년에 이러한 단체들의 대표가 발트슈트(Waldshut)에 모이고 1526년에는 아욱스버어그에 보이게 되어 그 결과로서 1527년에는 그곳에서 총회를 개최하고서 사틀러(Michael Sattler)가 기초한 7개조의 신앙선언 초안인 "우리는 신자 세례를 믿는다. 교회는 성만찬으로 결합된 모임이다. 성경은 축자 영감으로 받을 것이다. 권징은 파문 이상 다른 처형을 내릴 수 없다. 교역자는 개교회가 선택하여야 한다. 신자의 정치 참여는 있을 수 없다. 신자는 맹세할 수 없다."를 통과하여 제정하고 교회의 정치를 정하고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직분을 세우고 그의 대표로서 조직되는 회의를 두고 감독이 이 회의에서 선정하게 하는 재세례파 교회의 조직을 갖춤으로써 한 교파로서의 실체를 비로소 띠었다.
이들은 중세의 교회의 조직과 의식의 번잡함을 기뻐하지 않았으며, 교회의 제례(祭禮)에 반대하여 예배는 일상의 국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고, 각자의 가정에서 집회하였으며, 기도를 힘쓰고 신앙서를 고백한 사람들의 단체가 되어야 할 것을 엄격히 주장하고, 무엇보다도 재세례파의 명칭이 사용되어서 자신들의 존재를 실체화시키는 큰 특징적인 것이 되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를 않고 성인 세례만을 인정하여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때로부터 이미 '아나밥티스트'(Anabaptist)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3. 재세례파의 개혁과 그 성향
재세례파의 개혁은 그 특징적인 성향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크게 셋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1) 재세례
재세례파에 대한 평가는 샤프(Philip Schaff)가 이들을 가리켜 '과격한 복음주의자들'로 또는 '극단의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른데서 알 수 있듯이 혹독하게 비판을 받아 왔다. 재세례파가 이렇게 불리워 온 것은 이들의 개혁 성향이 같은 개혁파 교회에서도 과격하게 보여온 데 따른 비판에 의한 것이지만, 이러한 사실은 재세례파의 개혁이 갖는 성향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종교개혁을 한 루터파 교회와 구분하여 루터의 종교개혁을 재개혁 하는 뜻에서 개혁교리(Reformed Doctrine)를 강조하여 개혁파라고 불리우는 개혁교회가 존재해 왔듯이 재세례파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그리고 루터파 교회뿐만 아니라 개혁파 교회가 행하여 온 종교개혁 모두에서 재개혁 해야 할 것으로 세례를 중심에 두었다.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루터파 교회, 개혁교회 유아세례를 인정하고 있는 것에 반대하여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성인 세례만을 인정하여 재세례를 주장함으로써 재세례파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이들은 신앙적 의식을 가지고 신앙고백을 할 때라야 비로소 세례의 의의가 있다고 주장하여서 유아세례를 반대하기 때문에 신자의 자녀가 유아세례를 받았을지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서 성인이 되었을 때 다시 세례를 다시 받게 하고 있다. 이러한 이들은 자신들을 침례파(Baptist)로 부른다. 하지만 오늘날의 밥티스트교회, 곧 침례교회와는 그 미친 영향으로 인해서 다소 역사적인 연락이 없지는 않으나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2)로마 카톨릭 교회의 역사적 계속성 불인정과 새로운 교회의 건설
재세례파의 개혁은 세례가 그 중심에 있으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재세례파는 루터파 교회와 개혁교회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역사적 계속성(Historic Continuity)를 인정하며 개혁하려는 입장을 단호히 거절한다. 재세례파가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완전히 타락하여서 교회의 역사적 계속성을 잃어버렸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세례파는 성경에 의하여서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개혁시켜 초대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가려는 입장을 취하지 않고 성경으로부터 얻은 진리로 새로운 교회 건설을 시도하고자 한다. 즉 초대 그리스도의 교회를 모델로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교회로의 혁명을 지향하려 한 것이다. 이 운동은 쮸리히(Zurich)시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여기에 대표적인 인물이 그레벨(Conrad Grebel), 만츠(Felix Manz), 훕마이엘(Balthasan Hubmaier), 한스 덴크(Hans Denck) 이다.
재세례파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교회의 역사적 계속성을 잃어버렸다고 보기 때문에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의 개혁자들의 교회 개혁운동을 완전하고 철저한 교회의 개혁을 하기를 원했다. 단지 교황의 제도에서 벗어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전통사상을 없애기를 원했다. 그러한 이들의 눈에는 루터, 칼빈, 쯔빙글리의 교회 개혁이 못미더웠다. 그것은 그들이 너무나도 옛날의 질서에 타협하는 안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서 완전히 자주적이며 순결한 교회를 세우기를 원했다.
그에 따라서 재세례파는 교회를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보는 거대한 조직으로서가 아니라 신앙을 고백한 자들의 집단체라고 주장했으며, 교회의 조직과 의식과 예전을 반대하고, 예배는 자국어로 하고 단순하고 신앙은 의식적(意識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기도에 힘썼다. 그리고 외형적인 성경 말씀이나 성례전은 이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심령에 비취는 성령의 속 빛을 체험하는 주관적인 경험을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김으로써 성경의 권위보다도 직접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하는 영적 종교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재세례파의 모습은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나 개혁교회에서나 모두에게 지나친 과격한 행동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신구교 양쪽에서 다 환영을 받지 못하고 배척을 받았다. 그럼에도 재세례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피로써 확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세례파가 모두 과격한 극단주의자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초기의 재세례파 사람들은 그들 이후의 사람들보다는 보다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으며 고상한 이상과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들 안에서는 점차 분명히 구별되는 두 파가 있었다. 하나는 정적파(靜寂派, Quietists)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파(革命派)이다. 정적파는 열성적인 개혁파이기는 하지만 광신자들은 아니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심령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얽힌 남녀들이 단합하여 피차 종교적으로 교제하며 예배 볼 수 있는 자주적인 교회이었다. 그래서 정치적이나 교회적인 압력을 받아 신앙이나 생활에 구속을 받음이 없이 경건하고 평화로운 정신으로 종교생활을 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관공리나 군인으로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데서도 이들이 어떤 자들이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반면에 혁명파는 아주 열성적인 광신도들로서 모든 기존한 교회나 국가의 권위를 부정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권력이라도 사용하여서 성도 곧 진정한 신자로써 다스림을 받는 지상의 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 국가의 지배를 받는 국교회(국가교회)의 반대
재세례파는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아니라 개혁파 교회인 국교회들과는 아무 것도 함께 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것은 국가가 교회를 지배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인데 국가의 지배를 받는 신자들은 대부분이 이름만 그리스도인일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런 그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재세례파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를 받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세금 남부도 반대하였다.
재세례파는 종교개혁 이전부터 존재해온 소단체의 개혁신앙임에도 불구하고 적대적 관계에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개혁파 교회인 루터파 교회와 칼빈파의 교회로 말해지는 개혁교회 모두로부터 반대를 받았으며 이들에 의해서 박해를 받았다. 1525년에 쯔빙글리의 후원을 받아 열린 쮸리히 회에에서 재세례파의 운동은 이단자로 규정이 되어서 분쇄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서 많은 재세례파 신자가 처형이 되었다. 이들 중에서 맨처음 죽음을 당한 사람은 만츠(Manz)였다. 쮸리히의 박해가 일어나자 재세례파 운동은 북부 스위틀랜드로 퍼지고 또한 남부 독일로 들어가 많은 신자를 얻었는데 남부 독일의 센트 갈 같은 데는 2주일 동안에 1200명이 다시 세례를 받고 재세례파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1530년에 이르러서는 온 북부 스위틀랜드에까지 확산되어 갔으며 이에 따라서 이들에 대한 박해도 갈수록 심해져 재세례파의 지도자들과 열렬한 신자들이 수없이 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고 추방을 당하였다. 그런가 하면 재세례파 신앙에 견고히 서 있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개혁교회로 돌아가 불과 몇 해 동안에 스위틀랜드에서는 재세례파가 거의 없다시피 되었다.
재세례파 운동이 스위틀랜드에서 급속이 발전되는 그 시기에 남부 독일에서도 발전되고 있었는데 인골 숫타트에서 대학 신학 교수로서 한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자였다가 쯔빙글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발트하살 훕마이엘(Balthasr Hubmaier)이 재세례파의 신앙에 기울어져서 스위틀랜드 개혁자들의 계열에서 떨어져 나가 아주 열성적인 재세례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파와 쯔빙글리파의 박해로 훕마이엘은 모라비아로 피하여 가 그곳에서 재세례파 신앙을 전하여 많은 추종자를 얻었으나 결국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1528년에 비엔나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재세례파 교회의 교파가 조직이 된 회의인 1527년의 아욱스버어그에서 회집되어 한스 덴크(Hons Denck)의 사회로 열린 총회에 참석했던 사람들도 몇 해 안에 대부분이 죽음을 당하였기 때문에 이 회의를 그들은 '순교자의 회의'라고 부른다.
이렇게 재세례파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개혁파 교회의 양진영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죽음으로써 대항하였다. 2, 3년 동안에 죽음을 당한 사람은 2천명에 이르렀다.
4. 재세례파에 대한 비평
재세례파는 종교개혁 이전부터 존재해온 개혁신앙의 단체였으며 종교개혁 이후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긴 했으나, 이들이 주장하는 개혁과 그 성향은 사실은 교회의 개혁 운동을 가져온 개혁교회와는 달랐다. 그것은 성경적 관점에 의한 신학적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서 갖는 주장이었다. 세례, 교회의 역사적 계속성, 참된 교회의 본질, 예배에 대한 이해 등 이 모두는 단지 로마 카톨릭교회에 대한 반발과 로마 카톨릭교회적이지 않기 위해서 그에 상대적인 성향으로서의 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개혁파적인 개혁의 성향이 아니다. 그러니까 개혁주의 신앙이 아닌 것으로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이란 하나님 말씀의 본의 이해에 의한 바른 신앙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오직 성경으로!'.
첫댓글 아나밥티스트에 대한 좋은 설명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