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를 용서하기>
- “당신과 당신의 부모는 해로운 가정 역동관계를 지속시키는 “범죄의 동반자”였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자신의 고통에 당신이 기여한 부분들에 대해 책임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용서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난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도 않으면서 부모를 미워하는 사람은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어.” 언젠가 동료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 난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갖는 느낌은 부모로부터 오는 것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부모를 생각하는 방식은 불가피하게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방식을 형성한다. 만일 자신의 부모를 미워한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자기증오로 갈등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만일 부모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나은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가 역기능 가정의 성인아이로서 부모를 용서할 필요를 느낀다면, 자기 자신 또한 용서할 필요를 느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 “네 부모를 공경하라…”
- 우리 모두는 완전한 부모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완전한 부모의 자손이며 불완전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지적인 명제로 인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사실상, 우리의 부모가 우리에게 실패한 부모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 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성경은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출 20:12) 참으로 그렇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의 약점과 한계, 실수를 절대로 시인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그들이 우리에게 끼친 고통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 이 구절에서 사용된 히브리 원어는 문자 그대로 말하면 “…에 비중을 둔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우리에게 어떤 것을 말하면 우리가 “나는 당신이 말한 것에 비중을 두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듣고 그 말이 중요한다고 결정되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 가치, 중요성, 심각성 - 을 둔다는 뜻이다.
- 신약성서에서 히브리 원어가 헬라어로 번역되었을 때, 헬라어는 경의를 받을 만한 것에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와 연관이 있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 모두 반드시 본질적 가치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위치 때문에 사람들을 공경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이것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당신이 연회장에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연회를 하고 있는 도중, 시장이 걸어 들어온다. 이제, 당신이 이 시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자. 지난 번 선거 때, 당신은 그에게 표를 찍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몇 가지 잘못된 정책을 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가 연회장을 들어설 때면 당신은 일어나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그를 맞이한다.
- 왜 그런가? 그는 시장이며, 시장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에게 주어진 위치로 인해 그에게 어떤 가치, 또는 “비중”을 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이제부터 그를 인간적으로 좋아하거나 존경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가 시장으로서 하는 모든 정책에 대해 찬성하는 체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공경은 그에게 주어진 위치에 부여되는 것이지, 그의 개인성에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 같은 식으로, 우리 삶 속에서 우리의 부모로서 그들에게 주어진 위치 때문에 우리는 부모를 공경할 수 있다. 부모에게 적합한 “비중”을 부여하는 것이다. 시장의 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모를 공경한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에게 잘못이나 해로운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가장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 우리의 부모가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실패하고, 상처 입히고, 손상을 입힌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공경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것이다. 특히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기 위해 그렇게 할 때는 더욱 그렇다. 현실을 부인하고, 용서의 가능성을 없애고, 자신을 역기능적인 사고와 행동 패턴 속에 묶어 버린다면 우리는 부모나 자신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 과거를 부인하기
- 자신이 과거에 대한 진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우리가 노력하는 몇 가지 일반적인 방법이 있다.
1. 자신에게 어떤 상처가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 우리는 종종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많은 경우에, 이것은 어린 시절에 외상이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의식적으로 깨닫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불쾌한 현실을 이상화 된 그림으로 대체해 버린다.
- 우리에게는 부모를 보호하려는 강한 본능이 자리 잡고 있다(그리고 때때로 다른 권위자들도 보호하려고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화가 나거나 전적인 사랑이나 헌신 이외의 다른 감정을 느끼면 잘못된 것이라고 믿는다.
-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부모에게 화가 나면, 나쁜 일이 자기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셜리라고 하는 한 여성은 나에게 “전 오래 살 수 없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왜 그러냐고 묻자, 그녀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 대한 성경의 계명을 지적했다. “그리하면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 “저 때문에 제 부모님들은 어려움을 많이 겼었어요.”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저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그녀에게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권고이며 사회 복지에 관한 것이지,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형벌이 아니라고 말했다.
2. 자신의 부모에 대해 변명한다.
-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글쎄요, 맞아요. 저의 아버지는 저를 많이 때렸어요. 하지만 내 친구들은 그때 재정적으로 어려웠어요.” 또는 “제 부모님은 제게 한 번도 애정을 표현하지 않았어요. 나를 안아준 적이 있는지 기억도 없어요. 하지만 그분들은 그 상황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셨어요.”
3. 자기 자신에게 탓을 돌린다.
- “나는 자라면서 좋지 않은 시간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난 그런 일을 당할만했어요. 만일 내가 더 신중했다면(혹은 더 돕거나, 순종했다면…), 내 부모님은 나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4. 표면적인 용서를 한다.
- “그들이 내게 어떻게 했든, 난 그들을 용서해요.” 또는 “물론, 그들은 실수를 했어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에요. 난 그들에 대해 어떤 것도 붙들고 있지 않아요.”
5. 용서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는 사람들을 공격한다.
- “당신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한 외상적인 기억들은 그대로 지니고 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용서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먼저 가능한 한 많은 고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느낀 그대로 상처를 느낄 필요가 있다. 그 상처를 놓아 보내려면 말이다. 자신의 부모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수준에까지 나아갈 때에, 우리는 용서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 역시 자신이 실패한 부분을 더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을 시작해야 한다.
☞ 환상 버리기
-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한 영향력에서 자유함을 얻는 것은 배움의 과정이다. 우리는 자신을 수용하고, 자신의 한계와 취약점까지도 수용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필연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상처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배운다. 또한 우리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환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도 배운다.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방식에 대해 어린 시절에 갖게 된 기대와 이상화 된 생각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오랫동안 영향을 주어 불행한 결과로 끝을 맺는다.
- 예를 들면, 모든 가족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린 시절의 일반적인 기대이다. 엄마는 아이들의 모든 필요를 세심하게 돌보고, 아빠는 아침마다 웃음을 머금고 일터로 나가서 저녁 시간에 맞춰 돌아온다. 주말이면 가족들은 야외에서 재미있게 지낼 계획을 세운다. 모든 사람들은 항상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그러한 “정상적”인 가정생활은 수많은 방법으로 강화된다. 우리가 학교에서 읽는 이야기책에서, 우리가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쇼 프로그램에서,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곳에서…
-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는 이러한 장밋빛 그림은 일반적인 표준이 아니라 이상화 된 것임을 깨닫는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행하는 가정이 별로 없음을 깨닫는다.
- 우리도 그렇지 아니한가? 어떤 경우에는, 한편으로는 우리도 이러한 그림의 비현실성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으면서 그것에 절박하게 매달린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상황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될 뿐이다.
- 용서의 과정을 거쳐 나갈 때, 우리는 자기가 받은 상처에 자신이 갖고 있던 기대는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찾아낼 필요가 있다. 성숙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관과 관계관에 대해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한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 우리에게 상처가 되었다면, 우리는 그러한 기대들이 부적합하다고 비현실적인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 만일 그렇다면, 용서는 자신의 고통을 다루는 작업뿐만 아니라, 회개 -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마땅히 기대해야 하는 것에 대한 사고방식과 마음가짐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 - 도 필요로 할 것이다. 채워지지 않은 기대의 고통은 여전히 매우 실제적이며 여전히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비록 그러한 기대들이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 “일단 돌아가시면, 우리는 부모님들이 어둠이 전혀 없는 더 없는 빛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기억을 어둡게 하는 그림자를 허용할 때 자신이 다소 비열하다고 느낀다. 우리는 그들을 용서할 필요가 없기를 바란다. 만일 그들을 용서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들의 잘못을 찾아내야 하고, 어쩌면 그들을 미워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Lewis B. Smedes, 「Forgive and Forget: Healing the Hurts We Don't Deser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