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
고종 16년 기묘(1879, 광서5)
5월 28일(신축) 맑음
16-05-28[19] 중희당에서 신은의 사은례를 직접 받을 때 행 도승지 정범조 등이 입시하였다
○ 미시(未時).
상이 중희당에 나아갔다. 신은(新恩)의 사은례를 직접 받았다. 입시할 때, 행 도승지 정범조, 행 좌승지 홍원식, 우승지 박정양, 좌부승지 조병직, 우부승지 홍승목, 동부승지 김종한, 가주서 박수창ㆍ정승현, 기사관 김명래, 기사관 이용직, 검교직각 이호익이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문과 갑과(甲科)의 윤영수(尹英秀)ㆍ권태식(權泰植)ㆍ이중언(李中彥),
을과(乙科)의 이동욱(李東郁)ㆍ김석렬(金奭烈)ㆍ김지문(金之文)ㆍ김형익(金炯翼)ㆍ송관옥(宋琯玉)ㆍ고시기(高時冀)ㆍ정두흠(鄭斗欽),
병과(丙科)의 최병룡(崔炳龍)ㆍ김진형(金鎭衡)ㆍ유진필(兪鎭弼)ㆍ김조균(金祚均)ㆍ민계호(閔啓鎬)ㆍ윤희영(尹禧永)ㆍ송병서(宋秉瑞)ㆍ이범진(李範晉)ㆍ윤명섭(尹命燮)ㆍ민병석(閔丙奭)ㆍ윤상연(尹相衍)ㆍ김희수(金喜洙)ㆍ김정균(金定均)ㆍ임영상(林永相)ㆍ이정직(李貞稙)ㆍ채장오(蔡章五)ㆍ차두진(車斗鎭)ㆍ구건희(具健喜)ㆍ양봉제(梁鳳濟)ㆍ이장호(李章浩)ㆍ이종필(李種弼)ㆍ백면행(白冕行)ㆍ권종륜(權鍾崙)ㆍ이승연(李承淵)ㆍ김동영(金東纓)ㆍ이병섭(李秉燮)ㆍ전석구(全錫九)ㆍ김홍규(金弘圭)ㆍ조상학(趙尙學)ㆍ방하진(方夏鎭)ㆍ박병서(朴秉胥)ㆍ정국현(鄭國鉉)ㆍ김상운(金尙運)ㆍ백세진(白世鎭)ㆍ최침(崔琛)ㆍ조진만(趙鎭萬)ㆍ박내규(朴來奎)ㆍ김정묵(金鼎默), 무과 갑과의 백낙균(白樂均) 등이 차례로 계단 아래에 섰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정범조가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문무 합격자들과 솔방(率榜)한 사람들로 하여금 한꺼번에 예를 거행하도록 합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인의가 ‘사배(四拜)’를 외치니, 문무 합격자들과 솔방한 사람들이 사배례를 거행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문과에 합격한 사람들로 하여금 당 위로 올라와서 직명과 성명을 아뢰도록 합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윤영수 등이 차례로 나와 엎드려 직명과 성명을 아뢰고 물러나 계단 아래에 섰다. 조병직이 아뢰기를,
“무과에 장원한 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당 위로 올라와서 직명과 성명을 아뢰도록 합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백낙균이 앞으로 나와 엎드려 직명과 성명을 아뢴 다음 물러나 계단 아래에 섰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문무과 합격자를 먼저 물러가라고 합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대로 물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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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3년 병술(1886, 광서12)
7월 29일(기미) 맑음
23-07-29[30] 도목 정사를 하였다
○ 도목 정사를 하였다. 이비에, 판서 박제관(朴齊寬)은 나왔고, 참판은 아직 차임되지 않았고, 참의 김철희(金喆熙)는 나왔다.
홍승익(洪承翼)을 사옹원 별제로, 윤영두(尹榮斗)를 남부 영(南部令)으로, 이회원(李會元)을 영릉 영(永陵令)으로, 민치준(閔致駿)을 금산 군수(錦山郡守)로, 이승필(李承泌)을 부안 현감(扶安縣監)으로 삼았다.
전적(典籍) 다섯 자리에 박치항(朴治恒), 현규근(玄圭根), 전석구(全錫九), 황일룡(黃一龍), 이성묵(李性默)을 단부하였다.
김병적(金炳迪)을 감찰로, 이응달(李應達)을 찬의로, 이상필(李象弼)을 사직서 영(社稷署令)으로, 이학년(李鶴䄵)을 임천 군수(林川郡守)로, 조경승(曺慶承)을 금성 현령(金城縣令)으로, 황호석(黃浩錫)을 희릉 영(禧陵令)으로, 정기하(鄭基厦)를 영릉 영(寧陵令)으로, 이관직(李寬稙)을 영유 현령(永柔縣令)으로, 한진상(韓鎭庠)을 양성 현감(陽城縣監)으로, 이문영(李文榮)을 영희전 영(永禧殿令)으로, 신재범(愼在範)을 순릉 영(順陵令)으로, 신태정(申泰鼎)을 능주 목사(綾州牧使)로, 이철응(李哲應)을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남순원(南順元)을 연일 현감(延日縣監)으로, 박문하(朴文夏)를 상서원 별제로, 박교양(朴敎陽)을 종묘서 영(宗廟署令)으로, 정순용(鄭舜鎔)을 운산 군수(雲山郡守)로, 이상학(李象學)을 은진 현감(恩津縣監)으로, 이동필(李東弼)을 단천 부사(端川府使)로, 박제순(朴齊恂)을 형조 정랑으로, 임재준(任在準)을 영회원 영(永懷園令)으로, 송병필(宋秉弼)을 한성부 주부로, 윤필구(尹泌求)를 증산 현감(甑山縣監)으로, 유기선(柳冀先)을 진도 부사(珍島府使)로, 정동기(鄭東箕)를 빙고 주부로, 홍종희(洪鍾禧)를 상의원 별제로, 조장희(趙章熙)를 종묘서 영으로, 송완진(宋完鎭)을 충훈부 도사로, 조상진(趙相晉)을 예빈시 주부로, 조봉호(趙鳳鎬)를 호조 좌랑으로, 윤상은(尹相殷)을 조경묘 영(肇慶廟令)으로 삼았다. 임재준(任在準)을 연산 현감(連山縣監)으로, 홍종익(洪鍾益)을 한성부 판관으로, 유영균(柳令均)을 영회원 영(永懷園令)으로, 안창렬(安昌烈)을 후영 군사마(後營軍司馬)로, 윤상은(尹相殷)을 비인 현감(庇仁縣監)으로, 심의설(沈宜卨)을 병조 좌랑으로, 김종근(金宗根)을 사옹원 주부로, 송병두(宋秉斗)를 선공감 주부로, 김화식(金華植)을 경기전 영(慶基殿令)으로, 이관영(李寬英)을 조경묘 영으로, 윤원식(尹元植)을 감찰로, 윤규병(尹奎炳)을 상의원 주부로, 홍종희(洪鍾喜)를 형조 좌랑으로, 이학진(李鶴鎭)을 장릉 영(莊陵令)으로, 방시영(方時榮)을 전옥서 주부로, 이창렬(李昌烈)을 울진 현령(蔚珍縣令)으로, 안길수(安吉壽)를 상의원 별제로, 이호근(李好根)을 제중원 주사(濟衆院主事)로, 윤영태(尹榮兌)를 사옹원 판관으로, 이교헌(李喬憲)을 교섭 주사(交涉主事)로, 박영훈(朴永薰)을 오수 찰방(獒樹察訪)으로, 황보연(黃普淵)을 창락 찰방(昌樂察訪)으로, 이규선(李圭選)을 기장 현감(機張縣監)으로, 풍석귀(馮錫龜)를 현륭원 영(顯隆園令)으로, 김연근(金延根)을 상서원 별제로, 조지벽(趙智璧)을 전옥서 주부로, 이시상(李時庠)을 감찰로, 전준경(田俊敬)을 감찰로, 심능긍(沈能肯)을 명릉 영(明陵令)으로, 유순영(柳淳永)을 사옹원 주부로, 심재건(沈在健)을 전적으로, 김진의(金鎭懿)를 전적으로, 문병표(文炳豹)를 감찰로, 조명식(趙明植)을 장릉 영(長陵令)으로, 홍영익(洪永翼)을 감찰로, 조항수(趙恒秀)를 감찰로, 이장호(李章鎬)를 기기국 사사(機器局司事)로, 김현주(金顯柱)를 기기국 사사로 삼았다. 전 감찰 이기화(李圻華)와 사과 나문욱(羅文郁)에게 지금 통정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조관으로서 나이 80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경규(金敬圭)를 건원릉 영(健元陵令)으로, 김윤현(金潤鉉)을 사옹원 별제로, 홍사철(洪思哲)을 종부시 주부로, 이종국(李鍾國)을 전적으로, 초병식(楚秉植)을 기기국 사사로, 이승래(李升來)를 제용감 주부로, 김재하(金在夏)를 인의로, 고의상(高儀相)을 전적으로, 이교직(李敎稙)을 감찰로, 이해조(李海祚)를 기기국 사사로, 김병훈(金炳勳)을 전설사 별제로, 김문현(金文鉉)을 대사헌으로, 김양현(金亮鉉)을 대사간으로, 신정균(申政均)을 정언으로, 김진의(金鎭懿)를 정언으로, 정한조(鄭漢朝)ㆍ서상조(徐相祖)ㆍ박주양(朴周陽)을 동지경연사로, 이경직(李畊稙)을 응교로, 오유선(吳有善)을 부응교로, 조동희(趙同熙)를 대사성으로, 이경직(李畊稙)을 집의로, 오유선(吳有善)을 사간으로, 김열수(金悅秀)를 감찰로, 임진동(林鎭東)을 상서원 주부로 삼았다. 조병식(趙秉式)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서상조(徐相祖)를 부사(副使)로, 윤헌(尹)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윤용식(尹容植)을 응교로, 김정규(金貞圭)를 부응교로, 이의덕(李義悳)을 장령으로, 조승하(趙承夏)를 장령으로, 이회영(李會英)을 지평으로, 김명래(金命來)를 지평으로, 이용일(李龍鎰)을 전적으로 삼았다. 전 분교관(分敎官) 조진형(趙鎭亨)에게 지금 통정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조관으로서 나이 80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심원익(沈遠翼)을 헌납으로, 이기동(李起東)을 장악원 정으로, 김영선(金榮善)을 전적으로, 황종기(黃鍾岐)를 평릉 찰방(平陵察訪)으로, 오서원(吳瑞源)을 감찰로 삼았다. 전 낭청 김도진(金道振)에게 지금 통정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조관으로서 나이 80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제원(南濟元)ㆍ이희봉(李羲鳳)을 교리로, 박주양(朴周陽)을 동지돈녕부사로, 김환규(金煥奎)를 돈녕부 도정으로, 이교진(李喬鎭)을 감찰로 삼았다. 전 가감역관 김학제(金學濟)와 사과 허석(許碩)에게 지금 통정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조관으로서 나이 80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교창(李敎昌)을 병조 참판으로, 홍학주(洪學周)ㆍ왕제긍(王濟肯)을 부교리로, 고영석(高永錫)을 봉상시 첨정으로, 김찬근(金贊根)을 감찰로, 선준채(宣俊采)를 교서관 판교로, 김익룡(金益龍)을 감찰로, 임용상(林瑢相)을 전적으로, 이중두(李中斗)를 수찬으로, 이국응(李國應)을 수찬으로, 예성질(芮成質)을 남학 훈도(南學訓導)로 삼았다. 전 도정 이근환(李根煥)에게 지금 가선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조관으로서 나이 80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강일형(姜日馨)ㆍ이재순(李在淳)을 부수찬으로, 이연묵(李淵默)을 전적으로, 유정팔(柳鼎八)을 감찰로, 최응룡(崔膺龍)을 지릉 직장(智陵直長)으로 삼았다. 기로소 수직관(耆老所守直官)에 김영리(金永理)를 단부하고, 겸훈도에 이은수(李殷秀)를 단부하였다. 정면수(鄭勉洙)를 전적으로, 안광옥(安光玉)을 감찰로, 김순일(金順逸)을 의릉 봉사(義陵奉事)로, 이병(李秉)을 흥해 군수(興海郡守)로, 김재정(金在鼎)을 개성 경력(開城經歷)으로, 손덕한(孫德漢)을 사예(司藝)로, 최처심(崔處心)을 형조 좌랑으로, 장기렴(張基濂)을 감찰로, 유병수(劉秉洙)를 예조 좌랑으로, 박돈양(朴敦陽)을 의금부 도사로 삼았다. 시흥 현령(始興縣令) 이태정(李台珽)과 석성 현감(石城縣監) 이주필(李周弼)을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들었다. 배은성(裵殷星)을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으로, 남종두(南宗斗)를 전적으로, 윤치성(尹致聖)을 이조 참판으로, 박용석(朴容奭)을 의금부 도사로, 서병학(徐丙學)을 제릉 참봉(齊陵參奉)으로, 이매구(李邁久)를 정릉 참봉(貞陵參奉)으로, 조연(趙挻)을 창릉 참봉(昌陵參奉)으로, 이민영(李敏榮)을 순릉 참봉(順陵參奉)으로, 홍대식(洪大植)을 익릉 참봉(翼陵參奉)으로, 이기로(李箕魯)를 홍릉 참봉(弘陵參奉)으로, 정추택(鄭樞澤)을 영릉 참봉(永陵參奉)으로, 오승로(吳升魯)를 화릉 참봉(和陵參奉)으로, 이봉구(李鳳九)를 소녕원 수봉관(昭寧園守奉官)으로 삼았다. 봉상시 부봉사에 백문행(白文行)을 단부하였다. 전 첨지 김기련(金箕鍊)에게 지금 가선대부를 가자하고, 분교관 조진형(趙鎭亨)과 김천경(金天經)에게 지금 통정대부를 초자(超資)하였는데, 조관으로서 나이 80세가 되었고, 오위장 안석문(安錫文)에게 지금 자헌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조관으로서 나이 90세가 되어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학생 박제문(朴齊文)에게 이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고 학생 박송수(朴松壽)에게 이조 참의를 추증하고, 고 학생 박종주(朴宗周)에게 사복시 정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충청 병사 박선양(朴善陽)의 3대로 법전에 의거하여 추증한 것이다. 권지 승문원부정자에 이일언(李日彥)을 단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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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0년 계사(1893, 광서19)
5월 2일(계미) 맑음
30-05-02[12] 장령에 오영탁 등을 낙점하였다
○ 대간의 전망 단자를 들이니, 장령에 오영탁(吳濚鐸)ㆍ신종백(申鍾百), 지평에 전석구(全錫九)ㆍ한응원(韓應源), 정언에 홍익장(洪益樟)ㆍ이문환(李文煥)을 낙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