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註解 [1] 1)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詞般若波羅蜜多心經) 이 경(經)의 제목을 해석하자면 모두 다섯 구절에 중생의 근본 마음을 모두 밝힌 것이다.
(1)마하(摩詞)는 인도어(印度語)이니 크다는 뜻이며 중생의 온갖 경계에 망녕되어 집착한 것을 풀어주는 뜻이다. 마음이 세간의 허망한 것에 집착하면 구애가 되므로 이것을 작은 것, 즉 망심(妄心)이라 함에 비하여 마음과 경계가 텅 빈 것인 줄 깨달으면 동연(洞然)히 훤칠하게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머금어 수용함으로 마하라 한다.
(2) 반야(般若)의 우리말 뜻은 지혜이니 범부가 혼미한 마음으로 온갖 경계에 끄달려서 내다 남이다 하는 견해에 굳게 집착하여 어리석기 짝이 없으니 중생으로 하여금 경계에 끄달리지 말고 마음을 관조(觀照)하여 본래 내가 없음인 줄 알게 함으로 반야라 한다.
(3) 바라(波羅)의 뜻은 청정이니, 범부가 자기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여섯 감관(눈, 귀,코, 혀, 몸, 뜻)의 감각을 잘못 알아서 여섯 감각의 상대적인 경계(빛, 소리, 냄새, 맛, 촉감,분별)에 어지러이 휘말려 깨끗하지 못한 데 떨어져 있으니 중생으로 하여금 이러한 경계를 등지고 본래 청정함을 깨닫게 함으로 바라라 한다.
(4) 밀다(蜜多)란 화다(和多)라고도 하는데 우리말로 모든 법이라는 뜻이다. 범부의 망령된 생각으로 법을 구하려는 집착을 부수고 나서 모든 법이 본래 갖추어져 있으므로 이를 밀다라 한다.
(5) 심경(心經)은 대도(大道)이니 범부가 본래 마음을 모르고 오직 많이 읽고 많이 들어서 이름과 형상을 분별하여 삿된 견해에 떨어져 있으니 중생으로 하여금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비추어서 본래 텅 비고 고요한 분별없는 큰 도에 돌아가게 하는 것을 이름하여 심경이라 한다. 위의 경 제목의 큰 뜻은 다만 마음의 근원과 넓고 큰 지혜가 청정하여 화합하고 본래 다 갖추어져서 분별할 것이 없는 줄을 스스로 깨닫는 것을 말한다.
[2] 3)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범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無量劫) 가운데 마음을 등져서 오직 모든 법을 관조하되,법에 얽매여서 자유자재함을 얻지 못한다. 마음을 관하여 깨달으면 법을 가히 얻을 것이 없다. 그 이유는 색법(色法= 質量의 법)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니 일어난 마음을 돌이켜 관하면 그 일어난 곳이 없다. 실로 가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항상 색(色= 質量)이 없으면 무엇을 쫓아 있겠는가. 오히려 저 헛된 꿈과도 같음이니 생각도 집착도 하지 않으면 저 법의 자재함을 얻고 내지 일체 법을 가히 얻을 것이 없으며 일체 법에 섭수되지도 아니하고 어느 곳에나 자재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마음을 깨달아도 깨달은 마음이 없고 경계를 요달(了達)하나 요달한 경계가 본래 없어서 마음과 경계를 모두 잊어 요달하되 가히 요달할 바가 없다. 탄연(坦然)히 꺼리낌 없으므로 자재(自在)이다. 보(菩)는 요달을 말하는 것이오, 살(薩)은 견(見)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법을 요달하여 보매, 본래 텅 비고 고요하므로 이름하여 보살(菩薩)이라 한다. 鬧會마 ? ( 요회마 ?) 이 모든 것을 알겠는가.
眼裏聞聲方始知 (안이문성시방지) 눈으로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안다.
[3]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心般若波羅蜜多時) 밖으로 법을 구하는 사람이 자기의 마음이 본래 스스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건만
4)소승(小乘)의 마음으로 망녕되게 말과 글로 구하는 견해를 부수어 주는 것이다. 지혜의 이름을 반야(般若)라 하고, 모든 망상을 쉬면 청정함으로 바라(波羅)라 하고, 보는 견해가 텅 비어 한 몸을 합하여 이룸으로 이름을 밀(蜜)이라 한다. 모든 법을 통달하여 기억하고 생각하여 가짐으로 다(多)라고 한다. 마음을 등지고 법을 구하며 망녕 되어 닦아 증득(證得)함을 두어
5)성문승(聲聞乘)에 떨어지니 이름하여 얕은 반야라 한다. 이제 다시 깊은 반야라 한다. 이제 다시 깊은 반야를 실천함을 열거하여 대승(大乘)으로 앞의 잘못됨을 부순다. 보살(菩薩)이 모든 법을 요달하여 보면 본래 텅 비고 고요하여 실로 나고 멸함이 없으므로 반야라 한다. 마음이 본래 청정하여 안과 밖이 뚜렷이 통함으로 바라라 한다. 마음밖에 법이 없고, 법밖에 마음이 없으니 마음과 법이 둘이 아니므로 밀이라 한다. 마음 성품이 온갖 법을 꾸렸으므로 닦아 증득함을 빌리지 않는 것을 다(多)라고 한다. 이와 같이 깨닫는 것을 이름하여 대승이라 하나니 이 이름이 행심반야바라밀다(行心般若波羅蜜多)이다. 시(時)는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을 모두 얻을 수 없으므로 시라 한다.
[4]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오온(五蘊)이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말하는 것이다. 정미(精微)로히 밝아서 눈이 항상 경계를 바라보므로 색(色)이라 한다. 모든 법을 탐하여 구하고 수행하여 증득함을 바라므로 수(受)라 한다. 모든 법의 인연에 얽히어 유출(流出)이 쉬지 않으므로 상(想)이라 한다. 청정한 계율울 정묘(精妙)로히 지켜서 만행(萬行)을 수행하는 것을 행(行)이라 한다. 여러 가지를 분별하여 법을 따라 유전(流轉)하는 것을 식(識)이라 한다. 이 다섯 가지 법의 장애를 입어 깨닫지 못하므로 온(蘊)이라 한다. 삼계(三界)에 벗어나지 못하고 윤회(輪廻)가 멈추지 않으므로 이름하여 고액(苦厄)이라 한다. 보살(菩薩)이 자기의 마음 근원이 본래 청정한 줄 살펴 요달하니 앞의 다섯 가지의 법이 생긴 곳이 없고 본래 비고 고요하여 털끝만큼이라도 가히 얻을 것이 없으므로 오온(五蘊)은 이 모두 텅 빈 것으로 비추어 보고 일체의 괴로움을 건넜다.
要見本來面孔마 (요견본래면공마) 본래의 모습 비공(鼻孔)을 보려느냐
擧頭靑鶴過山城(거두청학과산성) 머리 드니 푸른 학이 산성으로 날아가도다.
[5] 6)사리자(舍利子) 이는 몸과 마음의 두 가지 모양으로 오음(五陰)의 법을 거듭 밝힌 것이다. 사(舍)는 사람이오, 리자(利子)는 법이라는 말이다. 사람과 법의 두 모양에 많은 정의(定義)가 있으나 다 말할 수 없고 요약해서 말한다면 오로지 법을 위하는 근본인 것이다. 이제 모든 법을 밝히고자 하는데 몸과 마음을 떠나서 할 수 없으므로 사리자(舍利子)라 한 것이다.
[6] 색불이공(色不異空) 자기 마음에 부질없이 집착하여 다시 마음 밖으로 색을 보고 색이 마음을 말미암아 있는 줄 모르고 허우대다가 다시 마음 근본을 살펴보니 색이 본래 없는 것이구나 한다. 그러니 무엇을 말미암아 경계와 색을 세우겠는가. 그러므로 색이 공(空)과 다르지 않다.
雨洗淡紅桃복嫩 (우세담홍도복사) 봄비가 복사꽃 담홍색 떨기를 적심이여,
搖淺碧柳絲輕 (풍요천벽유사경) 바람은 실버들 가지를 파랗게 흔드는구나.
[7] 공불이색(空不異色) 마음을 등지고 법을 취하니 자세히 살펴보면 공(空)이 있는 줄 알고 공이 마음을 말미암아 일어난 줄 모른다. 그러니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공(空)이 색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8] 색즉시공(色卽是空)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곧 색(色)이오, 마음을 거두어 얻을 수 없으니 곧 공(空)이다. 그러므로 색이 곧 공한 것이다.
[9] 공즉시색(空卽是色) 앞에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곧 색(色)이오, 마음을 거두어 얻을 수 없으니 곧 공(空)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공과 색이 마음으로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그렇지 않고 마음이 있는 그대로 바로 공한 것이다. 그 이유는 중생의 마음이 일어날 적에 실로 일어난 곳이 없으니 곧 색이오, 곧 공이다. 마음이 없을 그 현재를 바로 응용하니 곧 공이오, 곧 색이다. 앞의 예를 들어 보인 몸과 마음이 모든 만법(萬法)에 전부 이와 같은 이치가 해당되므로 공이 곧 색이다. 색과 공, 여기에 모든 법을 포함하여 홀연히 한 몸을 이루었는데 참으로 둘이 아닌 법문(法門)인 것이다. 7)진여(眞如)의 오묘한 이치에 어찌 색과 공의 두 이치를 두리요. 모두 다 한 가지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會마 (회마) 알겠는가.
亦無空 亦無色 (역무공 역무색) 공도 색도 아니니,
如8)布袋和尙逢9)拾得 (여포대화상봉습득)포대화상이습득을만난것과같도다.
是如何境地 ; (시여하경지) 이 어떠한 경지인가.
[10]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受想行識 亦不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비단 오음(五陰)뿐 아니라 다만 마음이 공한 줄 요달하면 모든 법이 스스로 공하여 실체가 없다.
百舌未休枝上語 (백설미휴지상어) 못 새가 나뭇가지 위에서 재잘거리니,
鳳凰那肯共同揶 (봉황나긍공동야) 봉황이 어찌 함께 쉬겠는가.
[11]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感) 모든 법이 이 마음이니 마음에는 형체가 없거늘 어찌 나고 없어지며 더러움과 깨끗함과 늘고 줄어드는 것이 있으리오.
[12] 시고 공중 무색 무수상행식(是故 空中 無色 無受想行識) 모든 법이 본래 공하므로 공한 가운데 색을 찾으려 하나 얻을 수 없고 색이 없으니 찾아봐도 찾을 수 없으니 수상행식(受想行識= 의식의 작용)도 없다는 말이다.
[13]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이것은 육근(六根= 눈. 귀. 코. 혀. 몸. 뜻)을 말한 것이니 범부가 허망한데 얽매여서 이것에 굳게 집착하여 사실로 여겨 간혹 나쁜 죄업을 짓는 것을 이름하여 근(根)이라 한다. 일일이 근마다 업이 쌓이고 불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죄업이 쉴 사이가 없다. 이러한 육근의 근본바탕이 마음이니 마음을 쉬면 근과 또 상대되는 경계가 함께 공(空)하여져서 자연히 밝게 사무치므로 눈. 귀. 코. 혀 몸. 뜻도 없다.
剔起眉毛著眼看 (척기미모저안간) 정신차려 살펴봐라.
擬疑之間隔千山 (의의지간격천산) 머뭇거리면 천리나 틀려진다.
[14] 무생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육근(六根)의 상대되는 경계를 육진(六塵= 빛. 소리. 냄새. 맛. 감촉. 의식작용)이라 한다. 이 육진에 흔들려 시달리나 다만 한 감관이라도 추심하여 살펴보면 주재하는 것이 없다. 육근에 주인공이 없으니 육진의 경계가 저절로 없어지므로 빛. 소리. 냄새. 맛. 촉감. 의식작용 등도 없다.
[15]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여기서는 십팔계(十八界) 가운데 처음인 눈의 경계와 끝의 의식경계만 들어서 말하고 다른 것은 생략한 것이다. 육근으로 인해서 육진이 생기고 육진으로 인해서 육식이 생기니 이것을 합치면 십팔계가 되는데 분별을 유출(流出)함이 각각 다르므로 계(界)라 한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오랜 시일을 살아오면 망령되이 죄업을 짓고 빗과 소리를 쫓아 저도 모르게 생각을 따라 유전(流轉)하며 중생의 성품이 원래 다르지 않음을 깨닫지 못하고는 다만 능히 생각하기를 진. 근. 식(塵.根.識)을 내지 않고 마음을 없이 하려는데 떨어지므로 이런 말, 즉 내 지 의식의 세계조차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16] 무무명(無無名) 혼미한 중생이 유(有)에 집착하여 오온(五蘊)과 십팔계가 본래 성품을 가려서 본래 있는 광명을 보지 못하므로 10)무명(無明)이라 한다. 본래 마음을 깨달아 요달하면 근.진(근.塵)이 원래 공하여 의식이 쓸데 없으니 어찌 장애가 있으리오. 그러므로 무명도 없다.
[17]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 육진(六塵)의 경계가 있는 것이나 있다는 것이 다하였으니 본래 없는 것이라 무엇을 가지고 다하였다 말하겠는가.
[18] 내지무노사(乃至無老死) 무명(無明)으로부터 늙고 죽는데 이르는 것이 모두 열두 가지 인연이다. 이제 다만 한 가지 인연을 들어보여 모든 무명을 열거함이니 늙고 죽는 것이 현실적으로 있는 것이지만 무명이란 것이 본래 없는 것이니 늙고 죽는 것도 이러한 이치로 미루어 보건대 본래 없는 것이다.
[19]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
1)십이인연(十二因緣)이 만약 생긴다면 곧 늙고 죽는다는 것이 가히 모두 없어질 것이 있지만 본래 생기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곧 늙고 죽는 것이 없는 것이다.
2)木人夜半穿靴去 (목인야반천화거) 목인이 밤중에 신을 신고 가는데,
3)石女天明戴帽歸 (석녀천명대모귀) 석녀가 새벽녘에 모자를 쓰고 돌아오다.
[20]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이 고. 집. 멸. 도(苦.集.滅.道)를 사제(四諦)라 한다. 마음에 구하는 것이 저 법에 얽매이므로 이름을 제(諦)라고 한다. 정밀하고도 부지런하게 수행하고 증득(證得)하여 마음에 쉴 틈이 없는 것을 고제(苦諦)라 하고, 경과 논을 널리 보아서 오묘한 이치를 탐구하는 것을 집제(集諦)라 하고, 모든 망상을 끊고 지극히 항상 고요한 것을 구하는 것을 멸제(滅諦)라 하고, 어지러운 번민을 멀리 떠나 진리를 정밀히 연마하는 것을 도제(道諦)라 한다. 이제 다시 사성제(四聖諦)를 자세히 밝혀 보자. 마음이 본래 맑고 비어서 수행하여 증득할 필요가 없다고 고집하는 것을 이름하여 고제라 하고, 성품이 모든 것을 포함하였으니 어찌 찾고 구할 것이 있겠는가 하는 것을 집제라 하고, 망상이 일어나지 않아 본래 스스로 항상 고요하다 하는 것을 멸제라 하고, 적정(寂靜)이 둘이 아니고 삿됨과 올바름이 다르지 않다고 고집하는 것을 이름하여 도제라 한다. 이것은 병을 대치하는 말인데 만약 무심(無心)을 요달 하면 어찌 사제(四諦)가 있으리오. 그러므로 고. 집. 멸. 도가 없다.
竹密不妨流水過 (죽밀부방유수과) 대밭이 빽빽하여도 흘러가는 물은 방해롭지 않고,
山高豈의白雲飛 (산고개의백운비) 산이 높아도 구름은 꺼리끼지 않는다.
[21] 무지 역무득(無智 亦無得) 모든 법을 두루 비추어 보아도 소득이 없는 줄 요달하는 것이 지혜요, 모든 법이 본래 공(空)한데 어찌 두루 비추는 것을 빌리겠는가. 그러므로 지혜조차 없는 것이라 하고 자기 성품이 청허(淸虛)하여 실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므로 또한 얻는 것도 없다고 하였다.
[22] 이무소득고 보리살타(以無所得故 菩提薩타) 모든 법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으므로 이것이 곧 보리(菩提)요, 모든 법을 얻을 수 없음을 요달하므로 살타(薩타)라 한다. 마음과 법이 한결 같아서 아울러 얻을 바가 없으므로 보리살타라 한다. 만약 참으로 실된 사람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스스로 출신(出身)할 수 있는 길이 있으니 그러면 어떤 것이 출신할 수 있는 길인가? 어제 어떤 사람이 오대산에서 와서 영축산을 지나갔다.
[23]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依般若波羅蜜多 故心無가碍) 중생의 지혜가 청정하되 또한 청정함을 얻을 수도 없다. 자기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서 모든 망상을 떠나므로 반야 바라밀다(般若 波羅蜜多)를 의지한다고 한다. 설사 법에 조금 구애됨이 있어도 마음 경계가 스스로 공하였으니 어떤 생각, 어떤 집착이던지 완연히 일이 없으니 어찌 거리낌이 있으리오. 해탈의 당체가 의거할 것이 없고 과행(果行)이 원만하도다.
破鏡重不照 (파경중부조) 깨어진 거울은 다시 비치지 못하고
落花難上枝 (낙화난상지) 떨어진 꽃은 가지에 오르지 못하네.
[24] 무가애고 무유공포(無괘碍故 無有恐怖)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 없으니 어찌 구할 것이 있으며 마음에 얻을 것이 없으니 두려움을 누가 내리요, 그러므로 공포가 없다.
白頭童子智猶長 (백두동자지유장) 백두동자가 지혜가 있으나,
般若三更度渺茫 (반야삼경도묘망) 야반 삼경엔 생각이 아득해지네.
任運往來無間斷 (임운왕래무간단) 되는대로 배를 왕래하여 간단이 없지만,
不須舡子與
14)浮囊 (불수강자여부랑) 뱃사공은 부랑의 털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네.
[25]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마음 밖으로 법을 구하는 것을 엎어진다 하고, 마음 안으로 공을 관하는 것을 거꾸러진다 한다. 없는 가운데 없음을 꾀하는 것이 꿈이요, 마음에 반영되는 것이 망상이요, 문득 마음 근원을 깨달아 요달 하여도 얻는 것이 없으므로 전도(顚倒)된 몽상(夢想)을 멀리 떠났다고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얻은 것이 사무치고 투철하면 영영 전도됨을 면하고 몽환(夢幻)을 단박 끊으리라. 말하여 보아라. 어느 곳을 향하여 가는가.
千聖覓他縱不見 (천성멱타종불견) 일천 성인이 저를 보려 해도 마침내 찾지 못하더니,
全身隱在太虛中 (전신은재태허중) 온 몸으로 태허공에 있었구나.
[26] 구경열반(究竟涅槃) 마음이 비록 나더라도 곧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요, 마음이 본래 나는 것이 없음이라 실로 없어질 것조차 없다. 나고 없어지는 것이 없는 것을 열반(涅槃)이라 이름한다. 구경(究竟)이란 궁극을 의미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번뇌 망상이 본래 나고 없어지는 것이 없으므로 마침내 열반이 된다고 한다.
열반이 어떤 것인가, 이것이 열반이다.
지척간에서 스승의 얼굴을 볼 수가 없도다.
[27]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뇩多羅三막三菩提) 과거 미래의 번뇌 무명(無明)과 어지러운 망상이 본래 청정하므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이 근본의 지혜를 스스로 요달하여 물들고 집착하는 것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반야 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말은 인도어(印度語)이니 아(阿)는 없다는 말이며, 뇩다라(누多羅)는 유요, 삼막(三막)은 올바름이요, 삼보리(三菩提)는 참됨이다. 곧 위 없는 참되고 올바른 도다. 만약 자기 마음이 본래 부처인줄 깨달으면 이 이름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28]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주문(呪文)은 계합(契合)하는 의지(意旨)요, 부처님의 15)밀인(密印)이요, 마음과 수행이 한 가지로 계합함으로 이름을 주(呪)라 한다. 중생의 본래 마음이 가이 없고 가고 옴에 걸림이 없어서 실로 동요하지 않으므로 이름을 대신주(大神呪)라 한다. 마음이 본래 청정하여 담연하며 항상 머무르며 법계(法界)를 뚜렷이 비추어 응하여 주고 나타남에 다함이 없으므로 이것이 대명주(大明呪)이다. 일체 모든 법이 다 마음에서 나는데 능히 여기에 초월하는 것이 없으므로 이것이 무상주(無上呪)이다. 마음이 있고 없는데 속하지 않고 갓과 끝을 측량할 수 없고 능히 비교할 수 없으므로 무등등주(無等等呪)라 한다.
[29] 능제일체고 진실불허(能除一切苦 眞實不虛) 일체 모든 부처님들이 이 주(呪)를 의지하여 마음이 홀로 16)삼계(三界)에 초월하여 17)윤회(輪廻)를 받지 않기 때문에 능히 모든 고뇌를 없애고 본래 마음을 바로 가르쳐 결정하는 것이 부처요, 수행하여 증득 하는 것을 빌리지 않으므로 진실이라 하는 마음이 변함이 없고 모든 광난(狂亂)과 의혹을 떠나서 탄연히 항상 머무르고 헛되지 않는다 한다. 위로부터 모든 성현들이 괴로움을 무릅쓰고 참고 견디어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아서 생각마다 어느 곳에서든지 그것을 만나니 말하여 보아라. 구경(究竟)에는 어디를 향하여 가는가 아느냐?
處處逢歸路 (처처봉귀로) 어디든지 돌아갈 길을 만나고
時時復故鄕 (시시복고향) 언제든지 거기가 고향이다.
古今成現事 (고금성현사) 예와 이제 현상을 이루는 일은
何必待思量 (하필대사량) 하필 생각하기를 기다릴 것인가.
[30] 고설반야바라밀다주(故說般若波羅蜜多呪) 주(呪)는 다만 이 중생의 본래 마음이니 말로써 마음을 가르치므로 반야바라밀다주라 하였다.
[31] 즉설주왈(卽說呪曰) 말을 해서 성품을 표시하므로 이 말을 하였다.
雨過매苔潤 (우과매태윤) 비가 지난 뒤 이끼가 파릇하고,
春來草自生 (춘래초자생) 봄이 오니 풀이 저절로 자라난다
[32] 아제아제(揭諦揭諦) 얽매어 집착하는 것을 제(諦)라 하고 아(揭)는 제하는 뜻이니 어지러운 망상을 지혜로써 소탕하여 없애므로 아제라 하고, 거듭 아제라 한 것은 마음이 공함을 요달하고 몸이 공함을 깨달음을 말한 것이다. 몸과 마음이 공적(空寂)함을 깨달아 요달하여 두 법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아제아제라 하였다.
不勞縣石鏡 (불로현석경) 수고로이 거울을 달지 않더라도,
天曉自分明 (천요자분명) 날이 새니 스스로 분명하도다.
[33] 바라아제(波羅揭諦) 마음이 이미 청정하니 어찌 망상을 없앨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라아제라 한다.
月上中峰頂 (월상중봉정) 달이 산마루에 솟아오르니,
還應過別山 (환응과별산) 아마 별산을 지나왔을 것이다.
[34] 바라승아제(波羅僧揭諦) 청정한 것이 탁한 티끌 경계를 대한 것의 이름이다. 탁한 경계가 본래 없는 것이니 청정하다는 것도 말할 필요가 없으므로 바라승아제라 한다.
自從泥牛鬪入海 (자종니우투입해) 진흙소가 싸우며 바다로 들어간 후로
直至如今不見踪 (직지여금불견종) 이제까지 자취도 보이지 않네.
[35] 보제사바하(菩提娑婆詞) 보리(菩提)는 도요, 사바하(裟婆詞)는 수행이다. 본래 성품을 깨달아 요달하면 곧 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또 보리는 요달을 말하는 것이요, 사바하는 견(見)을 말하는 말이다. 본래 마음을 요달하면 실로 생긴 곳이 없으므로 사바하라 한다. 다시 말후일구(末後一句)가 있는데 이것은 분부(分付)하지 않겠다.
雲收山岳千辱碧 (운수산악천욕벽) 구름이 산봉우리에 개이니 천길이나 푸르고,
水倒江南萬里心 (수도강남만리심) 물이 강남에 흐르니 만리나 깊도다. |
첫댓글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뜻도 모르지만 잘 담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