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장 성령의 역사의 신비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롬 12:6)
예언이 한 계시이기는 하지만 성경과 동등한 의미에서 계시는 아니다.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 첫째, 우리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예언하라는 뜻이다. 진지한 방식으로 예언해야 하며, 자기에게 계시된 것 이상을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귀는 너 자신을 신뢰하고 두드러지고 괄목할 만한 것을 말하라고 유혹한다. 또 받은 대로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고 결국 전하는 자신도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이러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바울은 “그러니 정직하라. 네가 가진 믿음의 차원에서 옳다고 여기는 것으로 너를 통제하고 조정하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선지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신약에는 여러 직분이 있다. 그 중 선지자는 큰 권위를 가진 직분으로 이 예언의 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많지 않았던 것처럼 선지자들도 많지 않았다. 신약성경에서 ‘믿음’을 가리키는 대목을 만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해진 진리의 체계를 뜻하는 것으로 쓰여지는 경우가 많다.(유3)
영감된 발언은 항상 교리 체계에 일치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언은 항상 ‘믿음’에 의해서 검증 받아야 한다. 고전 14:29에서 다른 이들은 예언하고 있는 사람이 말하고 있는 바를 검증하라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러므로 그 진리는 그 자체로 일관성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고 서로 모순을 드러내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을 거스르는 말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하고 있는 사람일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검증해 보아야 한다. 실로 이 어구는 우리로 하여금 조직신학을 가지라고 요청하고 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면 교리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성삼위 하나님의 교리, 인간의 교리, 타락의 교리, 구속의 위대한 교리, 교회의 교리, 성화의 교리, 영화의 교리, 조직신학은 이 모든 교리들을 질서있게 배치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그것이 바로 예언적 발설을 통제할 뿐만 이니라, 성경해석에도 설교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든지 “믿음의 분량대로”
우리는 언제나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야 한다. 원어나 성구 사전만 의지 하지 말고 교리의 조직적인 체계로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설교를 하는 우리는 성경을 통독해야한다. 교리의 큰 체계가 드러나면 그것을 사고 속에 넣으면 어떤 특별한 구절을 만나게 될 때 그 교리가 그 구절을 해석해 줄 것이다. 퀘이커주의 창시자 조지 폭스는 지적인 차원에서만 믿는 먼지처럼 깡마른 신학의 위험성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심각한 오류에 빠져 그들은 성경보다 직접적인 ‘내면의 빛’을 앞세워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있으니 성경이 필요 없다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주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주셨다. 이는 능히 ‘영들을 검증하고 시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일 성경의 교리를 조롱한다면 영들을 시험할 척도를 전혀 가지지 않는 셈이 될 것이고, ‘광명의 천사들’(고후11:4)로 나타나는 악한 영들이 있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한 백성이라도 미혹하려고 들게 될 것이다.
셋째, 사도시대 이후에 어떤 새로운 진리가 주어진 적이 없다. 사도는 말하기를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는다”고 말한다.(엡2:20) 오직 유일한 시금석과 오직 유일한 표준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넷째, 그러므로 가르침과 설교를 어떤 한 예언적 발설에 의지하여 해 나가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야 한다. 예언적 발설이 교리를 세우지 않는다. 1830년경으로부터 성도의 비밀스런 휴거에 관한 가르침이 에드워드 어빙의 부류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 가르침은 예언적 한 발설로 주어졌다. 그 예언을 ‘믿음의 분량대로’ 검증하지 않은 결과로 대두된 것이다.
다섯째, 예언적 발언들은 다른 이들의 행동을 수반할 때에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검증되어야 한다. 특히 전체 교회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오순절파 작가인 도날드 기가 쓴 오순절 운동 역사에 관한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방언 통변과 같은 신령한 은사들을 처음 체험하게 될 때 신기함에 사로 잡혀 열광주의에 빠지게 되는데 열광주의는 잠시 그 신자의 균형 어린 전망을 무너뜨리기 쉬운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전에 성경 진리에 잘 뿌리가 내리고 터가 굳어지지 않은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여섯째, 모든 은사들을 사용하는 원리이다. 하나님 편(신적인 것)에서 하는 일이 있고, 우리 편(인간적인 것)에서 하는 일이 있다. 이러한 것들이 성령에 의하여 항상 ‘주어진다’는 요소가 있다. 여러분이 그러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주어지고 성령에 의해서 통제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하고 싶을 때마다 은사를 사용할 수 없다는 바로 그것이 모든 은사를 통제하는 원리이다. 다음 두 번째 요소는 그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 정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전14:30, 32) 그리고 고전 33절에서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혼란과 무질서가 있는 곳에서는 어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령께서 역사하신 결과가 아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장은 권면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그 일을 일으킬 수 없지만, 그 일을 통제할 수 있다.
우리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화평을 만드시는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