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절망의 순간 내 손 잡아 주신 분, 가슴으로 느끼는 주님 사랑
찬미 예수님.
지난주에 우리는 일상 안에서의 체험들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고 알아듣는 부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체험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드리려고 하는데요, 우리 신앙 생활, 영성 생활에 있어서 체험이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크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말씀 다 아시죠? 성경의 장·절까지는 모른다 치더라도 천주교 신자로서 이 말씀을 모르는 분은 안 계실 겁니다. 혹시 이 말씀에 동의를 못 하겠다거나 반대하시는 분 계신가요? 이런 분도 아마 안 계실 겁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다 쉽게 동의하고 또 자주 되뇌는 말씀이죠.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좋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느님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으세요?”라고 물어본다면 그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막상 “사랑이신 하느님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지?”라고 묻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찾게 되는 것이 바로 체험입니다. 즉,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하느님을 내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맛보는 체험이 없다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아무리 매일 같이 말하더라도 그 말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하나의 지식으로만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 생활에 체험의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인정되는 부분입니다. 현대 영성신학자인 샤를 앙드레 베르나르 신부는 영성신학이라는 학문을 “계시 원리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인의 영적 체험을 연구하고 그 점진적 발전을 기술하며 그 체험의 구조와 법칙들을 파악하고자 하는 신학의 한 분과”라고 정의합니다. 결국 영성신학이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들의 체험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영성신학자들의 정의도 크게 다르지 않죠. 영성신학뿐만 아니라 영성이라는 것 자체가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이 없다면, 영성 생활, 영성신학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느님 체험에 있어서 좋은 예를 보여주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이미 읽어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참 고마운 글이라는 생각에 이 지면을 빌어서도 다시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 글은 지난 2015년 9월 20일자 서울대교구 주보 ‘말씀에 이삭’ 난에 실렸던 김석환(요셉) 님의 글입니다.
“무비(無比). 이것은 1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법명이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불교 신자셨죠. 홀로 아이 셋을 키우시느라 고생도 많으셨습니다. 그러던 아버지께서 어느 날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집에 뇌혈관 질환 환자가 있는 집이라면 아시겠지만, 뇌졸중은 참으로 잔인한 병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한 가정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하는 병이죠. 아버지께서 쓰러지셨을 당시, 아버지 곁에는 고시준비생인 저와 100만 원에 10만 원짜리 사글셋방이 전부였습니다. 몇 년간의 병시중 끝에 남은 것은 더 심각해진 후유증과 많은 빚뿐이었습니다. 사법시험이란 꿈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어서 복지단체를 찾아봤습니다. 요양원은 꿈도 못 꿀 처지였으니까요. 평생을 불교 신자로 살아오셨던 터라, 그때 처음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복지단체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 각 종파 종단에 모두 문의해 봤지만, 불교계에서는 그런 복지단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중략) 그런데요, 정반대로 개신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복지단체는 정말이지 손닿는 곳마다 있었습니다. 극도로 곤궁하고 힘들었기에 그곳의 문을 두드렸는데, 가는 곳마다 한결같이 두 가지를 요구하더군요. 아버지의 종교를 바꿀 것과 담배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우리가 이 사업을 하는 이유는 전도이기 때문에 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한참을 생각하시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도 차마 개종을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함께 굶어 죽더라도 그냥 이대로 살아요.’ 하면서 포기하려던 찰나, 동네 아는 아주머니께서 수원 경로수녀회를 알려주셨습니다. 이미 몇 개월간의 경험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매우 냉소적인 마음으로 찾아갔습니다. 나이 지긋하신 수녀님께서 저희를 맞아주셨습니다. 대략 사정설명을 들으시더니 인자한 미소를 띠며 딱 한마디 하시더군요. “오세요.” 저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녀님 저희 아버지께서 불교신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마디 더 하시더군요. “오세요.” 다시 저는, “수녀님 저희 아버지께서 담배를 피우….” 다시 한마디 하셨습니다. “그냥… 오세요.” 저와 아버지는 원장 수녀님의 세 번의 “오세요”를 듣고 그 자리에서 무너져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느꼈던 한없는 포용이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전 지금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친절한 말 한마디가 순교보다 위대하다’는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느낍니다. 그리고 그 큰 은혜로움을 증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떠세요? 어떤 마음의 울림이 있으십니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저도 이 글을 다른 분들께 읽어드리는데, 아무리 여러 번을 읽어도 글 마지막에 수녀님께서 “오세요”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목이 메곤 합니다. 아마 우리 신자분들께서도 그러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 일을 글로만 읽는 우리들 마음도 이러한데 직접 이 일을 경험하신 이 분은 어떠셨을까요?
하느님의 사랑, 용서, 조건 없는 받아들임! 머리로만 알고 있던 이런 것들을 이 분은 직접 자신의 삶 안에서 체험할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당시 처해 있던 상황 안에서, 원장 수녀님의 눈빛과 태도 그리고 응답을 통해서 직접 겪은 체험이죠. 나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의 그 하느님이 아니라, 내 옆에 계시면서 ‘나’를 사랑하시는, 다른 누구의 하느님이 아닌 ‘나의 하느님’에 대한 생생한 체험인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예수님께서도 당신 제자들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누구나가 다 이야기하는 그런 하느님 말고, 여러분 각자의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십니까? 그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하고 계십니까?
*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 박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신문, 2017년 2월 12일,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