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어린아이의 잘못된 생각>
- 또 다른 해악이 되는 어린아이의 모토는 잘못 지도된 문화에서 온다. “용감한 아이는 울지 않는다.” 이것이 얼마나 많은 남성들과 수백만 결혼을 무너뜨렸는지 모른다. 이 모토는 “아이들은 보기만 해야지 들어서는 안 돼”라든가 “그치지 않으면 정말 울게 해주겠다.”라는 등의 헛된 얘기 같은 여러 가지 모양을 갖고 있다. 특히 우리의 문화는 ‘강하고 조용한 사람’을 추켜올리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면 약골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이 파괴적인 모토를 격려하는 것이다. “주를 찬양합니다!” 외에는 다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인식된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 이 빡빡한 어린아이의 모토가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쳐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감정이 표면화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부끄럽거나 두렵거나 약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표현하든 안하든 간에 그 감정을 갖고 있음으로 자신을 빈약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어린아이의 모토는 “좋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또는 “좋은 그리스도인은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표현해선 안 된다.”라고 해석되어질 수 있다.
-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보다 그의 감정에 대해서도 더 인간적이셨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청교도와 매우 파괴적인, 특히 남성들에게 전해진 남자다운 남자의 전통적인 생각에 의해 지극히 잘못 인도되어져 왔다. 이 말은 여성은 모든 감정을 표출할 권리가 있지만 남자에겐 없다는 해석까지 가능한 것이다. 진정 ‘Christian he-man’인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아직도 많은 소녀들과 일부 소녀들이 이런 식으로 훈련되어지고 있다.
-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넘겨지는데 진정으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조용하고 고요하며 냉정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대 슬퍼하거나 화내거나 애곡하거나 노여워하거나 무엇에 의해서도 요동하면 안 된다. 우리는 승리는 그리스도인 됨의 뚜렷한 증거로서 ‘큰 바위 얼굴’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무표정하며 자제력이 강하고 감정도 없는 금욕주의자가 되기를 요구한다.
-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습이어야 한다면, 이것은 매우 혐오스러운 거짓 인상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는 이상적인 것으로 내놓지만 그것은 비틀어진 형상이다. 이것은 비 성문화되어 있는 비실제적인 기준이 거짓이므로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기준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거기에 다다르려고 노력하며 필요 없는 죄책감에 직면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용감한 아이는 울지 않는다.”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좀 더 잘해봐”의 언덕으로 끌어올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결사적인 노력, 실패, 절망, 회개, 또 다른 노력, 또 다른 실패, 또 다른 절망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거듭 만들어낸다. 예수님께선 그분의 감정을 표출하시는 데 전혀 두려움이 없으셨고 그분의 감정에 대해 타인들의 이목에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 슬픔과 비탄
-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비탄은 삶에 있어서의 가장 강한 감정이다.
- 예수님께서는 비탄과 슬픔을 어떻게 다루셨는가? 우리에게 실마리를 줄 수 있는 두 사건이 있다.
- 첫 번째 사건, 예수님께서 자신이 깊이 존경하던 침례 요한이 목 베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마 14:13). 바로 이것이 우리가 슬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취하는 행동이 아닌가? 우리도 사람들을 떠나 혼자 있고자 하는 것이다.
- 이것은 자기 연민이나 현실 도피일 수 없다. 슬픔에 대한 자연적인 반응이다. 얼마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군중들로부터 갈라놓고 그들끼리만 있게 하셨다. 그 후엔 그들을 떠나서 혼자 기도하셨다(마 14장 22-23절).
- 여기 우리가 따를 수 있는 아름다운 예가 있는데 그것은 너무 길지 않은 시간을 혼자 지내는 것이다. 만일 혼자 너무 오래 슬퍼한다면 균형감각과 객관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다가 잃어버린 삶으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슬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으로 할 것은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같이 있는 것이다. 또 확실하게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위대한 위로자인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서 기도해야 한다.
- 예수님께선 그분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떠나셨다. 또 그분은 타인들의 필요들을 잊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들을 도우셨고 고치셨으며 먹이셨다. 예수님께선 그분의 일과 슬픔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셨고, 그 일로 치유 받으셨다.
- 두 번째 사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슬픔을 다루시는 두 가지의 통찰을 얻게 된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이 작은 성경구절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것은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외우기 쉽게 만들어진 구절이 아니다. 여기엔 깊은 뜻이 잇다. 예수님께선 그분의 슬픔을 울음으로 표현하는 데 대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이를 공개적으로 표현하셨다.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이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라고 말한 것으로 미뤄볼 때, 예수님은 매우 공개적으로 우셨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예수님이 하신 것은 기도였다. 그리고 그는 나사로가 살아나올 때까지 상객들과 같이 계셨다.
- 슬픔을 다루는 합당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평범하며, 인간적이고 효과적이다.
우는 것이나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 친한 친구들로부터 도움을 얻는 것, 기도하는
것, 부활과 천국에 대해 얘기하는 것 모두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슬픔을 다루는 방법이다. 인간의 감정 중 가장 흔한 감정인 슬픔을 언제 당할지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다.
♣ 분노
- 더욱더 우리가 다루기 어려운 것은 그리스도인 사이에 가장 터부시되고 있는 분노의 감정이다. 예수님께서 화를 내신 적이 있는가? 안식일에 손 마른 한 사람을 고치시려 할 때였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막 3장5절). 신약에서 이곳만이 ‘분노’라는 어휘를 예수님에 대하여 사용한 부분이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실 때에도 그분이 노하셨을 것임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얼굴에서 분노를 숨기려 하였다든가 목소리를 낮추어 노를 감추시려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특별히 기록되어진 것 같다. 그분의 감정 표현에서 분노라는 용어 외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버트란드 러셀의 책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에서 그는 쓰기를, 바로 이 장면에서 추종자들에게 비춰진 예수님의 이 같은 모습이 그분의 불완전함의 증거라고 쓰고 있다. 러셀은 예수님께서 분이 나서 흥분했고 불완전함을 보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크게 얘기하고 있진 않지만, 우리 중 많은 사람들도 이 사건이나 성전 밖으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은 사건을 의아해하고 있을 것이다.
- 나는 그리스도의 분노가 그의 완전함의 일부분이며 그분의 이 같은 분노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된 분노는 결코 없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도 화내신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분이 완벽했다고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큰 찬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불완전의 완벽한 증거이며 그분의 신성의 결점을 드러내는 일인 것이다. 성경은 사실 365번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분노는 어린아이의 신경질의 발산과는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분노하심으로 그분의 성품을 잃는 것이 결코 아니다.
- 분노란 죄가 되는 감정이 아니다. 사실 죄가 되는 감정이란 없다. 단지 감정의 죄 된 사용이 있을 뿐이다. 이 분노의 감정을 잘못 사용하면 우리는 마치 아름다운 하모니를 위한 악보를 가지고도 악기를 잘못 사용하여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악사와 마찬가지이다. 분노는 하나님이 주신 감정이다. 선을 추구하는 본능과 손잡은 우리 모든 감정들이 마찬가지이듯, 분노 역시 건전한 영적인 목적을 위해 디자인되어 있는 것이다.
- 악에 대하여 분노하지 못하는 사람은 선을 추구하는 것에도 열심히 없다. 잘못된 것을 미워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진실로 당신이 의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 분노는 연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힘을 지니고 있다. 성경은 어디서도 감정으로서의 분노를 죄로 삼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분노의 잘못된 결과에 대해 정죄하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키우고 간직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분노의 감정에 따르는 많은 잘못된 행위를 죄라 말하고 있다.
- 그러나 바로 예수님께서 화를 내심과 같이 조건을 만족시켰을 경우는 올바른 경우이다. 그런 분노는 확실한 악에 대해 나타난다. 이것은 조절능력 밖의 끓어오른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조정 밑에서 잘 조절되어진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분노에 적의나 원한 또는 미움이나 증오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작고한 찰스 제퍼슨은 「예수님의 성품(The Character Jesus)」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분노가 마음의 토대와 추악한 요소들과 부딪치기 쉽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심령의 바닥을 휘저어 진흙을 끌어올리기 때문에 분노가 죄 된 느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가 벗어나기를 기도하게 되는 행동의 흠집이며 성격의 결점이 된다.”
-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듯 분노는 우리 감정의 바닥에서 진흙을 끌어올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분노는 진정한 거룩함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작열하여 넘치는 것이어야 한다.
♣ 분노와 동정
- 완전한 인식을 위해 무엇보다 분노와 비탄의 어휘들을 주의하라. 불과 물이 섞이지 않듯이 바로 여기에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감정이 있다. 그러나 그분의 마음속엔 악의나 분노가 없었다. 오직 크나큰 슬픔과 동정과 사랑만이 있었다. 그들에게 분노가 전해졌듯 또한 비탄도 전해졌다. 분노와 동정은 한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나는 분노함으로써 설교를 더 잘하고 기도를 더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윌리엄 채닝 박사는 이렇게 얘기했다. “평소에 나는 120파운드가 나간다. 하지만 화가 나면 1톤이 나간다!” 종교 개혁 사에는 이런 모습들로 가득 차있다.
- 영국 감옥들은 땅 위의 지옥이라 불릴 만큼 질병으로 가득 차있던 곳이다. 그러나 존 하워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에 분노하고 행동을 취했었다.
- 또한 노예제도는 이 새로운 세계에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이 “노예의 슬픈 표정에서 하나님 얼굴의 근심을 본다.”라고 얘기하기 전까진 깊이 파묻혀 있었다. 침묵하지 않는 의로운 분노로 개리슨은 소리쳤다. “나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은 받아들여질 것이다!”
- 분노는 꼭 사랑의 반대가 아니다. 어떤 때는 사랑의 결과이기도 하며 가장 명확한 표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절대 분노를 당신에게서 지우도록 또는 떨어져나가도록 기도하지 말라. 이것은 잘못된 것이며 당신 삶에서 성욕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는 것같이 미성숙한 것이자. 성질을 없애달라기보다도 성령님의 지내 아래 놓여 지도록 기도하라. 분노가 일소되기를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것으로 분노의 방향을 돌려주시기를 기도하라.
♣ 온전함과 거룩
- 완전한 인간으로서 예수님께선 오늘날의 심리학자들이 발견해낸 원리를 이해하셨다. 감정을 지불하지 않은 경험은 나중이라도 불어난 이자를 더해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각 경험에 대해 합당한 감정 표현으로 응답하셨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미루어진 반응’이라 부르는 그것으로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으신 적이 없다. 예수님은 “용감한 아이는 울지 않는다.”라는 모토를 믿지 않으셨다.
- 우리의 아동기나 십대로부터의 거짓말을 못 박아 두기로 하자. 그리고 이 감정의 감금으로부터 자유하자. 그래서 우리가 감정을 경험하도록 놓아주고, 다른 이들이 우리가 느끼고 있는 바를 알게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 자라가자.
-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성숙을 맛볼 수 있다. 성숙함이란 온전함과 거룩을 이야기한다. 성숙된 거룩은 우리의 참 인간성 회복을 뜻한다. 거룩함과 온전함의 중심은 타인과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앎과 사랑에 있다. 성화 되어 가는 과정은 인간화되어 가는 과정이다. 이 세상의 유일한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거룩해질수록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성결, 그리고 완전한 인성을 가지셨다.
- 만일 우리의 감정 시스템이 비기독교적인 자료로 프로그램 되어 있었다 해도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프로그래밍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억압된 자녀들이 되는 대신 그분의 거룩하고 온전한 아이들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