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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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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축총림 통도사 홈페이지 "불경속의 산책"
승가대학(강원) 강주 志安스님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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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승가대학 (강원) 강주스님 소개
법명 : 志安
본사 : 통도사, 거주사 : 통도사
직위 : 강주
행장 : 1975 : 통도사승가대학 졸업
통도사승가대학 중강
1978 : 통도사승가대학 강주
조계종 중앙 상임 포교사 역임
1989 : 마산 정법사 주지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교육원 역경위원, 교육위원 역임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화엄일승법계도>는 '법계도' '법성게'등으로도 불리는데, <화엄경>의 사상을 그 핵심만 들어 간략히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해동화엄(海東華嚴)의 발원지가 된 명문(名文)이다.
가히 유식에서의 <유식삼십송>에 비견할 '화엄삼십송'이라 할 만하다.
저자는 해동화엄의 초조(初祖) 의상(義相, 625-702) 이다.
의상은 황복사에서 출가하여 원효를 만나 같이 입당.유학을 꾀하게 된다.
1차의 입당 시도는 실패하고, 36세 때 행한 2차의 입당 시도는 성공하여 중국 화엄의 기초자 지엄(智儼)에게 사사하였다.
이때 현수 법장과는 동문(同門)이 되었다.
<법계도> 역시 <화엄경>의 대의를 간추려, 인(印)으로 만들어 지엄에게 제시.인가받았다고 한다.
귀국하여 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을 건립하고 십대제자(十大第子)를 두었다.
의상의 가풍(家風)은 원효와는 대조적으로 차분하며 온화하게 도제양성의 승가 내적 불사에 매진하였다.
당나라 유학시를 배경으로 한 '선묘설화'는 아름답고도 감동적이다.
<법계도>에서 의상은 먼저 7언 30구 210자의 도인(圖印)을 제시하고, 이어서 이를 2문(門)으로 나누어 해석한다.
즉 구성을 살펴보면 첫째 대의 및 도인, 둘째 석문(釋門)이다.
문장을 풀이한 석문은 다시 총석인의(總釋印意)와 별해인상 (別解印相)으로 나누고,
별해인상은 도인의 글이 지니고 있는 모습에 대한 설명인 '설인문상(設印文相)'과
문자의 형상에 관한 해석인 '명자상(明字相)', 문장을 뜻 풀이한 '석문의(釋文義)'로 이루어져 있다.
<법계도>에 나타난 의상의 화엄사상도 성기(性起)사상이다.
그것은 <법계도> 의 첫 구절 '법성원융 무이상'에서 나타난다.
법성(法性)은 언어가 끊어진 불가설이고 본래 적정한 증분(證分)인데,
이것이 진성(眞性)으로 대체되면서 연기분(緣起分)이 성립된다.
법성이 연기하는 것(性起)을 <법계도>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기와 연기는 둘이 아니다. 성기즉연기. 연기즉성기인 것이다.
주석서로는 직계제자의 주해를 모은 <법계도기총수록>과
균여.설잠.유문의 것이 있으며 모두 현존한다.
뿐만 아니라 보조선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 출처 : 불교 백과사전 >
법계도(法界圖)
법계도는 화엄교학의 대가 의상(625-702)이 <화엄경>의 광대무변한 진리를 압축한 게송을
하나의 도인(圖印)으로 나타낸 것이다.
원래 이름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나
흔히 '법계도' '해인도'라고 하며, 게송은 '법성게(法性偈)'라 한다.
법성게는 7언30구 210자의 짧은 시문(詩文)이고,
법계도는 이 시문을 54각(角)의 네모꼴 도인(圖印)에 합쳐서 만든 인장(印章)이다.
의상이 법계도를 완성한 것은 668년 7월이다.
스승 지엄(智儼)화상은 자신이 그린 72인(印)보다 의상의 1인(印)이 더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인가했다.
의상은 인(印)이란 형식의 법계도를 짓게 된 까닭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그물과 같은 교법이 포괄하는 삼종세간(三種世間)을 해인삼매를 좇아 드러내,
이름에만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이름마저 없는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다.
삼종세간이란 물질의 세계(器世間), 인간들의 세계(衆生世間), 지혜의 세계(智正覺世間)를 말한다.
흰 종이에 붉은 도인(圖印)의 줄(길)과 검은 글자를 써서 만든 법계도의 백지는
기세간, 검은 글자는 중생세간, 붉은 줄은 지정각세간을 나타낸 것이다.
3종세간이 별개의 것이 아니면서도 따로 이해해야 함을 표현했다.
법성게는 의상이 자증(自證)한 화엄사상의 요체다.
의상은 법성게를 자리.이타.수행방편.공덕 등으로 구분하여 풀이하고 있다.
지극히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법계도의 게송은 중앙에서 '법(法)'자로 시작해
다시 중앙에서 '불(佛)'자로 맺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의식이 집행될 때 반드시 법계도를 그리고 법성게를 독송하면서 회향한다.
그래서 불자들은 법계도.법성게와 친숙하다. <출처 : 불교 백과사전>
법성게 강의(1)
의상스님이 법성게를 지은 유래에 대해 매우 신비스러운 설화가 전해진다.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義湘傳)에 기재되었다는 이 설화는 고려시대 균여대사가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를 지어 그 속에서 인용 소개하는 내용이다.
의상스님이 그의 스승 지엄스님 문하에서 화엄을 수학하고 있을 때
한번은 꿈속에 이상한 모양을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의상에게 "그대가 깨달은 바를 저술하여 여러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꿈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총명약을 주었다.
그리고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다시 나타나 세 번째로 비결(秘訣)을 주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스승 지엄에게 하였더니 지엄이 듣고 "신인이 신령스러운 것을 나에게는 한 번을 주더니
너에게는 세 번을 주었구나. 널리 수행하여 네가 터득한 경지를 표현하도록 하라."고 했다.
의상이 명을 따라 그가 터득한 오묘한 경지를 순서대로 부지런히 써서
『대승장(大乘章』 10권을 짓고 스승에게 잘못이 없는지를 보아주기를 청했다.
이에 스승 지엄이 보고 난 뒤, 뜻은 좋으나 말이 너무 옹색하다하여 다시 고쳐지었다.
그리고 난 뒤, 지엄과 의상이 함께 불전에 나아가 그것을 불에 사르면서
"부처님의 뜻에 맞는 글자는 타지 않게 해 주소서."하고 기원을 하였더니 210자가 타지 않고 남았다.
의상이 타지 않고 남은 글자를 주워 다시 불 속에 던졌으나 마침내 타지 않았다.
지엄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하여 칭찬하였다.
의상이 글자를 연결하여 게(偈)가 되게 하려고 며칠 동안을 문을 걸고 글자를 연결해 맞추어
마침내 30구(句)를 이루니 삼관(三觀)의 오묘한 뜻을 포괄하고 십현(十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었다 하였다.
이상과 같은 설화는 법계도가 만들어진 과정을 신비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다만 의상이 스스로 깨달은 경지를 여러 사람에게 알려 주기 위하여 법계도를 만들었다고 그 동기를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이 점은 의상 자신이 직접 법계도 첫머리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理)에 의하고 교(敎)에 근거하여 간단한 반시(槃詩)를 만들어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그 이름마저 없는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법성게를 짓게 된 동기를 밝혀 많은 사람들이 법성게를 통하여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삼국유사』의 의상전교편에서는 법계도가 완성된 때를 총장(總章 : 당 고종 때의 연호) 원년 무진년 (서기 668년)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해에 스승 지엄스님도 열반에 든다.
법계도는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세계를 도인(圖印)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곧잘 바다에 비유한다.
바다는 깊고 넓은 것이며, 또 한없는 보배를 간직하고 있다.
또한 만상(萬象)을 비쳐주는 능력이 있다.
마음의 바다도 이와 같아 깊고 넓으며 무한한 보배를 가지고 있으며
깨달음의 세계를 마음을 통하여 비춰 볼 수 있다.
다만 깨달음의 세계, 곧 참된 진리의 세계가 비워지기를 바라기 위해서는 먼저 물결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파도가 일고 있는 바다에는 만상이 비춰지지 않는 법이다.
파도는 바람이 불어 일어난 것, 따라서 바람이 자면 바다는 고요하며 만상이 저절로 비춰지는 것이다.
마음의 바다에 무명의 바람이 불지 않아 번뇌의 파도가 쉬어지면 고요한 법성의 세계가 여실히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파도가 잠든 바다, 거기에 진실한 실상의 세계가 나타난 것을 일러 '해인' 이라 하고 번뇌가 잠든 마음의 바다를 '해인삼매'라 하는 것이다.
이래서 법계도는 해인도라고 바뀌어 불려지기도 한다.
법계도는 직관으로밖에 증득할 수 없는 깨달음의 세계를 상징하는 하나의 표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의상스님이 그의 제자들 가운데 공부가 성취된 사람에게 깨달음을 인정하는 증표로서 법계도를 수여하였던 것이다.
또 의상은 법계도에 대한 소(疎)를 지어 법계도의 이해를 도와주려 하였다.
법계도에 대한 주석서로는 의상 자신이 지은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隨錄』 2권과
고려 때 균여대사가 지은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2권과
조선시대 생육신(生六臣)의 하나로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고 했던
매월당 김시습이 지은 『일승법계도주((一乘法界圖註)』 1권 등이 있다.
의상스님은 그의 소에서 법계도를 전체적으로 해석과
도인의 부분 하나하나에 개별적인 풀이를 하여 두 가지 면으로 해석하였다.
1. 총석인의(總釋印意)
총괄적으로 도장(도인)의 의미를 해석한다는 과목 이름을 붙여 법계도를 짓게 된 까닭을 밝혔다.
곧,"석가여래께서 가르치신 그물과 같은 교법이 포괄하는 3종의 세간을 해인삼매로부터 드러내 나타내기 위함이다."
라고 하였다.
해인삼매에 들었을 때 나타나는
3종의 세간, 기세간(器世間)과 중생세간(衆生世間), 그리고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법계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흰 종이 위에 붉은 도인의 길을 표시하는 줄과
검은 글자로 만들어진 법계도가 이 3종 세간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다시 있다.
"백지(白紙)는 기세간을 표시한다.
백지에는 본래 염색이 되어 있지 않다.
먹으로 점을 찍으니 검고, 붉은 획을 그으니 붉다. 기세간도 이와 같다.
깨끗하거나 더러운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있지 않다.
중생이 처하면 더러움에 물들고 성현이 처하면 맑고 깨끗하다.
그러므로 검은 글자는 중생세간을 나타낸다.
검은 글자는 모두 다 검고, 하나하나는 다 같지 않다. 중생도 이와 같다.
무명번뇌가 모두 자신을 어둡게 덮고 있고, 온갖 차별을 나타낸다.
반면에 붉게 그린 한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끊어짐이 없이 모든 글자들 속에서 연결된 고리를 이루고,
그 빛과 색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부처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아 평등하고 광대하여 두루 중생들의 마음에 미친다.
십세(十世)가 상응하여 원만하고 밝게 비춰 준다.
이런 까닭에 이 인(印)은 3종의 세간을 다 갖추고 있다."
이어서 백지와 검은 글자와 붉은 줄이 서로 상호관계 속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것과 같이,
3종 세간이 융통상섭하여 혼연히 한 덩어리를 이루지만
그러면서도 문이 각각 달라 분명하고 동요하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세간이란 세계라는 말과 같다.
앞서 설명했듯이 시간과 공간에 의하여 한계 지어지는 상태를 뜻한다.
범어의 'loka'를 '세간' 혹은 '세계'라 번역한다.
2. 별해인상(別解印相)
별해인상이란 도인(圖印)을 하나 하나 나누어 해석한다는 뜻인데,
여기에 다시 설인문상 (說印文相), 명자상(明字相), 석문의(釋文意)로나누어져 설명된다.
가) 설인문상
의상스님이 직접 인문(印文)의 양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를 요약하면,
"인문이 하나의 길로 되어 있는 것은 여래의 일음(一音)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 길이 번거롭게 많은 굴곡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중생들의 근기와 취향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삼승교(三乘敎)가 이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하나의 길에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은
여래의 선교 방편에는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없고 대응하는 세계에 따라 적당하게 융통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은 원교(圓敎)에 해당한다.
4면이 4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사섭법(四攝法)과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나타낸 것이다.
이 인문은 삼승에 의하여 일승을 드러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 명자상
시문(시문)의 모양을 밝히는 것으로 의상스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시문은 시작과 끝이 있는데, 그것은 수행하는 방편을 나타낸 것이다.
인(因)과 과(果)가 다름을 나타낸다.
그리고 문중(文中)에 많은 굴곡이 있는 것은 삼승의 근기와 취향이 차별 되어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또 왜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가 중앙에 있느냐 하면,
인과의 두 자리가 법성의 집 안의 진실한 덕(德)과 용(用)임을 표시하는 것인데 그 성품이 중도(中道)에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도인의 전체적인 의미 설명과 아울러 인문과 시문의 모양에 대하여 설명하고 문의(文意)의 해석에 들어간다.
다) 석문의
시문(詩文) 곧 법성게 한 게송 한 게송의 뜻을 자세히 풀이해 나가는 부분이다.
법성게는 7언 30구의 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송부터 18송까지는 자리행(自利行),
19송부터 22송까지는 이타행(利他行)의 수행방법 그리고
22송부터 30송까지는 수행의 이익을 나타내는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그리고 이 세 부분을 다시 자세하게 나누어 가면서 내용상 의미를 구분해 과목을 나눈다.
A. 자리행
1)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으며
2)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 모든 것은 동요 않고 본래 고요해
3)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이름도 모양도 모두 끊어졌나니
4)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 깨달은 지혜로 안 바라 다른 경지 아니네
이상의 4구는 스스로 안으로 증득한 자내증(自內證)의 경계를 천명해 놓은 내용이라 한다.
곧 깨달음의 경지를 열어 보여 주는 내용이다.
현시증분(顯示證分)이라고 과목한 이 부분은 깨달은 분상에서 보는 법성의 설명이다.
법성이란 범어 dharmata의 역어로 법의 체성(體性) 곧 우주의 모든 현상이 지니고 있는 불변의 본성을 말한다.
가시감각적인 현상의 차별경계를 넘어서 있는 본체계(本體界)의 실상을 가리킨다.
진여(眞如)를 달리 부르는 말이기도 한데, 진여법성(眞如法性)혹은 진성(眞性)이라 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불성(佛性)이 생명체의 세계인 정보(正報) 또는 근신(根身) 쪽에서 하는 말이라면
법성이라는 말은 무생물의 세계인 의보(依報) 혹은 기계(器界) 쪽에서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진여나 불성이나 법성이나 다 같은 말인데
이들 용어를 어느 쪽에서 쓰느냐에 따라서 용어 선택이 달라질 뿐이다.
법성을 법과 성으로 글자를 떼어 해석할 때는 법은 제법(諸法)의 법으로 모든 존재의 상황을 함께 묶어 표현하는 말이 된다.
곧 현상 속에 전개되는 일체 만유의 차별상이며 이 차별상을 에워싼 시간과 공간적인 상황 전체가 법의 범주에 모두 들어가는 것이다.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는 법은 존재 자체와 존재하는 방법이 모두 법의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이러한 법의 근원인 본래의 성품은 모든 상대적인 차별에서 벗어나
전일적(全一的)인 것으로 원융무애하다고 설명한 것이 첫구의 뜻이다.
상대적인 차별로 보는 현상은 기실은 모두 가상일 분이다.
마치 거울 속에 비추어지는 물체이 모습이 모두 실물이 아닌 허상인 것처럼 인연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현상계의 제상(諸相)이 모두가 공(空)한 것이기 때문에 공해진 자리에서 보면 이미 상(相)이 없는 것이므로 원융할 뿐이다.
또 본래의 성품(性品)은 사물이 가지는 개체적인 성질을 떠나 있다.
가령 물의 성질은 적셔 주는 수분 성질이고 불의 성질은 태워버리는 뜨거운 성질이지만.
이 물과 불의 성질이 법성 안에서는 원융하게 하나로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법성의 당체는 피차의 이동이 없으므로 동요하지 않으며 고요할 뿐이다.
시간적인 상황과 공간적인 상황을 초월한 것이므로 어떠한 상황의 전개에 의해 현상을 나타내기 이전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어떠한 개념이 성립되지 않으며 관념화되기를 거부한다.
이름과 모양이란 겉으로 파악하는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허사로 실상의 이치와는 동덜어진 것이다.
꿈에 나타난 모습 (夢境)이 꿈을 꿀 적에는 있는 것 같지만 꿈을 깨고 나면 없는 것이다.
이 없는 경지는 역시 깨달아야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4구에서 다른 경계가 아니라 하였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물론 지적인 이해가 아닌 체험으로 얻어진 증오(證悟)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5) 진성심심극미묘 (眞性甚深極微妙)
- 진성은 참으로 깊고도 미묘하여
6) 불수자성수연성 (不守自性隨緣成)
- 자성대로 있지 않고 연을 따라 달라지나니
위의 두 구절은 연기(緣起)의 체(體)를 설명하는 말이다.
원융무애한 법성이 현상계의 차별상을 전개하는 심오한 이치는 불가사의하다.
이것은 법성을 진성이란 말고 바꾸어 사량분별심에 의해 이해하는 차원에서 설명해 보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불교의 교리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연기법이다.
연기란 말은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뜻인데,
이 인연의 도리는 심오하여 깨달은 경계라야 체득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화장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화엄경에 미륵보살이 손가락을 퉁겨 누각의 문을 여는 장면이 나오는 것처럼,
진성의 심오한 문이 열려야 법계에 깨달아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도 진성이 발현하여 인연을 따르는 것이요, 부처가 중생으로 전락하는 것도 그렇다.
여기에 변하지 않는 것(不變)과 인연을 따르는 것(隨緣)의 도리가 있다.
이를 흔히 체(體)와 용(用)이라 설명한다.
본체와 본체가 일으키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일체 만법이 생성 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심오하고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쉽게 비유하여 말한다면 물이 추워지면 얼어 얼음이 되고 다시 얼음이 뜨거워지면 녹아 물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때 그때의 기온의 상태에 따라서 눈, 서리, 이슬, 안개, 비와 또 수증기, 아지랑이, 구름 등의 갖가지 형태로 변하여 달라지지만, 물의 본체 즉 H2O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본체가 작용을 일으키는 상태는 상황 따라 무한히 달라진다.
왜 달라지는 것인가?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불가사의하고 심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자성이 왜 수연을 하느냐 할 때, 일체법이 본래 자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설잠(雪岑) 김시습도 이 구절을 그렇게 설명하였다.
"일체법은 본래 자성이 없다.
또한 모든 자성은 본래 머무름이 없다.
머무름이 없으므로 고정된 주체가 없고,
고정된 주체가 없기 때문에 연을 따르는데 장애가 없다.
연을 따르는데 장애가 없기 때문에
자성을 고수할 수가 없고,
시방삼세(시방삼세)를 이룬다.
자성이란 제법의 상(相)이 없는
본래 청정한 본체가 그것이다.
(一切法 本來無性 一切性
本來無住 無住則無體 無體則隨緣不碍
隨緣不碍故 不隨自性而性十方三世矣
自性者 諸法無相本來淸淨之體)"
자성이 없기 때문에
현상이 인연따라 나타난다는 것은 화엄경에서 설한 핵심요지의 하나다.
이것은 제법의 자성이 공하다는 말과 같은 뜻인데,
어떤 현상도 체와 용의 관계에서 연기되지만 고정된 모습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無)를 설하고 공(空)을 설한다.
또 화엄 대의를 나타내는 유명한 4구게의 하나인
"일체법이 자성이 없는 줄 알아 이렇게 법성을 알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了知一體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성이 없는 줄을 아는 것이 법을 통달하는 관문이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시방삼세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는 도리다.
시방은 공간이고 삼세는 시간인데,
시간과 공간이 있으면 존재의 상황이 전개된다.
그러나 이 존재의 상황은 본성의 당체가 무(無)의 상황 곧 비존재의 상황이므로
근원적인 관점에서 보면 없음의 상태가 모체가 되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무(無)를 천하모(天下母)라고 표현한 재미있는 말이 있다.
7) 일중일체다중일 (一中一切多中一)
- 하나 가운데 일체요, 많은 가운데 하나며
8) 일즉일체다즉일 (一卽一切多卽一)
- 하나가 곧 일체요,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
위의 두 구절은 의상 자신의 과목 설명에서는
다라니의 이(理)와 용(用)을 설명하는 부분이라 하였다.
다라니(陀羅尼)란 말로써 이 대목을 설명하는 것은, 하나 속에 일체라는 말이 바로 다라니의 번역한 뜻인 총지(總持)의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총지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마치 그물을 당길 적에 그물의 한 코를 당기면 전체 그물이 당겨 오듯이 하나를 통하여 전체를 파악하며, 또 전체는 결국 하나의 범주 안에 들어 가는 것이므로 이(理)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와 전체는 항상 등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구절은 앞의 구절인 '불수자성수연성"의 뜻을 구체적으로 보충 설명하는 말이 된다.
연기법에서 나타나는 모든 상대적인 현상들이 모두 자성을 고수하지 않는 무자성의 이치에서는 모두가 하나로 회통되며 동시에 그 속에 모든 일체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간단히 예를 들면, 열 개의 동전이 있을 적에 한 개가 두 개를 만들고 또 세 개, 네 개 내지 열 개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 하나 헤아릴 적에는 모두 한 개이지만, 이것들을 합치면 열 개가 되는 것이다.
한 개가 있어서 열 개를 이루니 한 개는 곧 열 개의 대역을 하게 된다.
또 개체적으로 보는 하나의 사물이 언제나 전체의 의미가 된다는 뜻이 있다.
동전 하나가 돈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은
열 개나 백 개가 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두 구절이 또 인과도리(因果道理)와 덕용자재(德用自在)를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떤 하나의 결과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하여 이루어졌을 때
하나의 결과는 그 결과를 이룬 전체의 인연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因)과 과(果)가 함께 있으면서 인에서 과를 보고 과에서 인을 보는데
이를 인과의 도리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에서 볼 대 이것이 곧 그것이요,
그것이, 곧 이것이라는 서로 상통하는 무애도리가 생기는데, 이를 덕용자재문이라 한다 하였다.
두 구절이 하나는 '中'으로, 하나는 '卽'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를 물결에 비유하여 이쪽의 물결이나 저쪽의 물결이나 그것은 모두 한 물 위에 일어난 ,
동풍이 일으킨 물결이나 서풍이 일으킨 물결은 그 방향과 모양은 다르지만,
그러나 한 물결이 또 다른 물결 없이는 물결일 수가 없다,
동풍에 의해 일어난 물결도
서풍에 의하여 일어난 물결도 바람이라는 연을 따라 생긴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홀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두가 서로의 상대적인 관계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연기의 도리를 응용하여 하나와 전체의 관계를 설명해 놓은 대목이다.
9) 일미진중함시방 (一微塵中含十方)
-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포함되고
10) 일체진중역여시 (一切塵中亦如是)
- 모든 티끌 속에도 또한 그러하다.
이 두 구절은 현상계와 관련하여 법을 분별하는 대목이다.
우선 공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작은 티끌이 시방을 머금는다는 것은 공간의 크고 작은 한정이 없다는 것으로 자성 (自性)이 없는 까닭에 어는 것도 머무름이 없어 작은 것이 작은 것에 머물지 않고 큰 것이 큰 것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성에서는 크고 작은 차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꿈에 본 물건이 큰 것도 있었고 작은 것도 있었지만. 꿈을 깨고 나서는 큰 것도 작은 것도 모두 없는 것 처럼 실상의 자체는 일체 차별을 떠나 있기 때문에 작다하여도 작지 않고 크다 하여도 크지 않아,
작은 것이 큰 것에 맞추어지고 큰 것이 작은 것에 맞추어지는 것이다.
마치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멀리 내려다 볼 때 시야에 전개되는 광활한 경치가 눈동자 속에 다 들어오듯이 미진 속에 시방이 들어 가는 것이다.
미진은 가장 작은 공간을 뜻하는 말이고, 시방은 공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11) 무량원겁즉일념 (無量遠劫卽一念)
- 한량없는 먼 겁이 곧 한 생각이요,
12) 일념즉시무량겁 (一念卽是無量劫)
- 한 생각이 곧 한량없는 겁이니
13) 구세십세호상즉 (九世十世互相卽)
- 구세와 십세가 서로 붙어 있지만
14) 잉불잡란격별성 (仍不雜亂隔別成)
- 뒤섞이지 않고 따로 따로 간격을 이루네
이상의 네 구절은 시간을 통하여 법을 분별하는 내용이다.
겁 (kalpa)은 시간의 가장 긴 것을 나타내는 말인데, 계산할 수 없는 무한대의 시간이다.
일설에 4억 3천 2백만년이라는 수치의 계산으로 나오는 시간을 가리킨다고도 하지만, 지도론 (智度論)에 나오는 반석겁 (磐石劫) 개자겁 (芥子劫), 또는 진점겁 (塵點劫)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의 시간 단위로는 계산 불가능의 시간이 겁이다.
사방 40리 높이 40리의 성에 개자씨를 가득 채워놓고 100년마다 한 알씩 가져가 개자씨가 다 없어질 때 까지를 1개자겁이라 한다 하였고,
같은 이야기로 사방 40리 높이 40리의 큰 반석을 엷은 옷깃으로 스쳐 그 반석이 다 닳아져 없어질 때 까지를 1반석겁이라 한다 하였다.
진점겁은 삼천대천세계를 먹으로 삼아 그 먹이 다 닳도록 갈아서 만든 먹물을 1천 국토를 지날 때 마다 한 방울씩 떨어뜨려 그 먹물이 다할 때까지를 1진점겁이라 한다 하였다.
한량없는 먼 겁이 한 생각이라는 것은 영원과 순간이 똑같다는 말이다.
찰나의 순간이 영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과 동서남북, 사유상하의 모든 공간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대단한 메시지를 전하는 말이다.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은 어제와 내일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이다.
존재의 본질에서 보는 실상의 모습은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초월된 시공은 초월되지 아니한 현상계의 상황 속의 시공을 전부 포함하는 것이다.
9세란 보통의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의 3시로 나누고, 이 3시를 다시 각각 3시로 나누어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제의 구분으로 움직이는 시간의 동태를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 일념 (一念)이라는 시간의 근본 단위를 총합적인 의미로 추가하여 10세라 한다.
9세는 그때 그때의 시간으로 구분될 수 있지만, 이 9세를 一念의 시간이 전체적으로 파악할 때,
모든 시간은 통일되며 서로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법계도기총수록 (法界道記叢隨錄)에는 꿈 속에 5대 (五代)가 지붕에 기와를 나르고 있는 일에 비유하여 9세를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꿈 속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지붕 위에 올라 가 있고 아들과 손자가 밑에서 기와를 나르는데, 자기가 중간에서 전달하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할아버지는 과거이며, 과거는 오직 한 자리일 뿐이다.
아버지는 과거의 현재이며, 현재의 과거이다. 그러므로 두 자리 (二位)가 된다.
중간의 몸인 나는 과거의 미래요, 미래의 현재이므로 두 자리 (二位)를 갖춘다.
손자는 미래일 뿐이므로 한자리 (一位)이다.
이들 가운데 기와를 날라 주는 사람을 본위로 생각하면 나머지 8세도 모두 현재의 현재가 된다,
현재의 현재는 일념이라는 1세를 의미한다.
에릭슨 (E.H.Erikson)이
"갓난 아기가 동시에 그의 노년을 살고, 현재의 노인이 동시에 그의 아기 시절을 같이 살고 있다."라고 한 말처럼 우리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은 결코 현재 여기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과거와 미래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존재는 영원 속에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15) 초발심시변정각 (初發心時便正覺)
- 처음 발심할 때에 바로 깨달음을 이루며
16) 생사열반상공화 (生死涅槃常共和)
- 생사와 열반이 함께 하네
이 대목은 수도의 단계에 의하여 법을 분별하는 내용이다.
일체의 법에는 자성이 없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의 고유성을 지니는 어떠한 것도 없다는 것으로 이것이 화엄철학의 요지이다.
이것은 모든 시간적 상황과 공간적 상황의 한계를 벗어버린 원융무애한 법성의 당체에 입각해서 하는 말이다.
이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의 선후나 공간의 원근이 모두 한 점에서 만난다.
또 인과가 동시에 갖추어지며, 상대적 차별이 하나 속에 합쳐지는 것이다.
처음 발심할 때는 수도의 시작이며, 정각은 완성된 결과인데 이것이 동시라는 것이요,
생사의 경계에서 발심하여 정각을 이루면 열반을 얻게 되는 것인데,
이는 수행의 시작과 끝의 선후가 상대적으로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쉽지만,
그 실은 생사에 처하면서 열반에 머물며 열반에 머물면서 생사에 노니는 것이라는 말이다.
또 자성이 없는 이치에서 보면 생사도 공한 것이요, 열반도 공한 것이다.
생사의 정체나 열반의 정체가 같다는 것이며,
같으므로 동일한 선상에서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다.
고래의 해석에서 무엇이 생사이고 무엇이 열반이냐 물어놓고
생사도 너의 몸이요 열반도 너의 몸이라고 한 말도 있다.
어떤 개념으로 조립된 대상으로서의 생사나 열반이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또 이것은 대승의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생사를 버리고 열반을 구하는 취사선택적인 수행이 소승이라면,
대승은 모든 것을 회통하여 하나로 보는 수행의 가풍을 가지고 있다.
생사와 열반이 하나인 것이 대승이 된다는 말이다.
17) 이사명연무분별 (理事冥然無分別)
- 이(理)와 사(事)가 명연하여 분별이 없으니
18) 십불보현대인경 (十佛普賢大人境)
- 십불(十佛)과 보현, 대인의 경지로다.
위의 두 구절은 연기분(緣起分)의 결론에 해당되는 대목인데,
이(理)와 사(事)가 통일된 경지를 부처의 경계와 보현의 경계로 설명하였다.
본질적 차원에서 보는 이치적인 면을 이(理)라 하고
현상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 사실적인 면을 사(事)라 한다.
화엄교의에 나오는 사법계설(四法界說) 가운데
이법계, 사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의 이(理)와 사 (事)이다.
「탐현기」 금사자장(金獅子章)에 나오는 이(理)와 사(事)의 설명을 예로 들어보면
순금으로 만든 사자를 사자의 모양으로 보면서 머리와 다리 등 몸의 각 부분을 구별해 보는 것은 사(事)이고, 머리든 꼬리든 모두 순금인 줄 알고
금사자 전체를 순금으로 보는 것은 이(理)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이'와 '사'의 설명인데, 불법 수행의 과정에서 살펴본다면 깨달음의
진리를 체험한 내면적인 경계가 이(理)가 되고 외향적인 교화활동의 구체적 사실들은 사(事)가 되는 것이다.
「법기(法記)」에서는 생사와 열반의 성(性) 없음이 '이'이고,
이처럼 성(性)없는 생사와 열반 자체는 곧 '사'라 하였다.
곧 일체법이 무자성(無自性)이라는 성(性)없는 면은 '이'요,
이 성(性)없는 무자성(無自性)에서 연기되는 제법의 현상이 '사'이다.
또 십불(十佛)은 '이'에 해당하고 보현(普賢)은 '사'에 해당한다.
십불이란 화엄경에서 부처님의 경계를 10가지 면으로 나누어 의인화(擬人化)시켜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 해경십불(解境十佛0과 행경십불(行境十佛)이 있다.
지엄스님이 쓴 「화엄공목장(華嚴孔目章)」에 의하면, 해경십불은 차별이 없는 평등한 진리를 지혜로써 관조할 때 온 법계가 모두 부처로 보이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열 가지로 나누어 중생신, 국토신, 업보신, 성문신,
벽지불신, 보살신, 여래신, 지신(智身), 법신, 허공신 등으로 든다.
또 행경십불은 수행이 완성된 뒤 얻는 부처님의 경계를 열 가지로 분류하여 말하는 것으로
정각불, 원불, 업보불, 주지불, 화불, 법계불, 심불, 삼매불, 성불(性佛), 여의불 등이다.
이는 해경의 여래신을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다.
이 십불설은 모두 부처님의 깨달은 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에 해당한다면, 중생제도를 위한 이타행으로 실천화될 때 나타나는 자비의 덕용 이를 화엄경에서는 보현의 행원으로 설명한다. 이것이 곧 '사'이다.
이사(理事)가 둘이 아니라는 것은 지혜와 자비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19) 능인해인삼매중 (能仁海印三昧中)
- 능인이 해인삼매 가운데에서
20) 번출여의부사의 (繁出如意不思議)
- 여의 부사의를 치성(熾盛)하게 드러내어
21) 우보익생만허공 (雨寶益生滿虛空)
- 허공 가득히 보배 비 내려 중생을 이익되게 하니
22) 중생수기득이익 (衆生隨器得利益)
- 중생들은 그릇따라 이익을 얻네.
이 대목부터는 이타행을 설해 나간다.
곧 부처님이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는 내용이다.
능인은 부처님 존칭의 하나다.
중생을 교화제도하는 능력이 어질게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먼저 능인이 해인삼매 속에서 모든 것을 뜻대로 되게 하는 여의보(如意寶)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힘차게 솟구쳐 내어 온 허공에 보배의 법비를 내려 중생을 이익케 한다 하였다.
해인삼매란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하기 전에 들었던 삼매 이름이다.
도장에 문자가 새겨진 것 처럼 밝고 고요한 바다에 만상의 영상이 비춰진 것을 뜻한다.
이는 곧 앞서 말한 십불의 내자증(內自證)의 경계로 이 해인삼매에 의하여 이타원력이 일어나는 것이다. 해인 속에 참된 자리와 이타가 들어 있다.
이 자리와 이타는 동시적인 것으로 이타 속에 자리가 있고, 자리 속에 이타가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이타(利他)를 중생이 받을 적엔 바로 부처님의 은혜가 된다.
이 은혜는 태양의 광명이 온 세상에 꽉 차듯이 법계에 충만해 있다.
산천초목을 적셔 주는 빗물처럼 중생을 적셔주는 법우(法雨)가 되어 내리고 있어
중생들의 근기(根機)인 그릇의 크기에 따라 법수(法水)를 받아 담게 된다는 것이다.
화엄대가인 통현(通玄)장자의 게송에
"불시중생심리불(佛是衆生心裏佛)이요,
수자근감무이물(隨自根堪無異物)이니라.
욕지일체제불원(欲知一切諸佛源)인데
오자무명본시불(悟自無明本是佛)이니라."
라는 말이 있는데 중생의 마음이 근기의 정도에 따라 부처를 나타낼 뿐 다른 것이 없으며
스스로의 무명을 깨달으면 이것이 바로 부처라 하였다.
부처의 근원이 바로 중생의 무명이라는 말이다.
또 화엄경 경문에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이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
하여 중생 자체가 바로 부처라 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의 이타 역시 중생의 이타가 되는 것이다.
이 '이타'를 수반하고 '자리'를 닦아 나가는 것이 불도 수행이라 할 것이다.
밝은 해를 소경은 보지 못하듯이
믿음이 없는 중생은 부처를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부처님의 감로법문은 열려 있다.
그릇이 없이는 샘물을 퍼담아 올 수 없듯이 신근(信根)이 갖춰지지 아니하면 법문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이다.
용수보살Nagarjuna은 불법의 큰 바다는 믿음으로 들어와서 지혜로 건너간다 하였다.
23) 시고행자환본제 (是故行者還本際)
- 그러므로 수행자가 본제에 돌아가려면
24) 파식망상필부득 (*息妄想必不得)
- 망상을 쉬지 않으면 되지를 않네
25) 무연선교착여의 (無緣善巧捉如意)
- 조건없는 선교방편 마음대로 잡아
26) 귀가수분득자량 (歸家隨分得資糧)
- 집에 돌아가 능력따라 양식을 얻나니
이상의 4구는 수행의 방법을 설해 놓은 대목이다.
행자는 탄탄한 믿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구도자로 보리심(菩提心) 을 일으킨 사람이다.
본제(本際)에 돌아간다는 것은 법성의 당체를 가리키는 본래의 자리란 뜻인 깨달은 세계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것은 바로 시간과 공간의 근원이 되는 자리로 안으로 증득된 해인(海印)의 경계다.
중생 모두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참 성품 자리이기도 하다.
여기에 돌아가면 중생이 부처로 전환된다.
여기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에 집착하는 망상이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무아(無我)의 이치를 통달해야 본제에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파'는 불가(不可)의 뜻이다.
이렇게 해서 해석하는 것은 행자가 수행의 도중에 있어 앞으로 본제를 향해 나가는 경우이다.
미래를 향해 수행을 진행하는 차원에서 '파'를 불가의 뜻으로 새기는 것이다.
그런데 종래의 해석에는 또 달리 해석하는 경우가 있었다.
'파'를 '자못'이나 '마침내'의 부사로 새겨, 망상을 쉬려 할 것이 없다.
즉 다시는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새긴다.
이는 수행을 완성하여 본제에 돌아갔을 경우로 본제에 돌아 가면 일체 망상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고려의 화엄대가인 균여대사는 이렇게 두 가지 뜻으로 설명하였다.
'초발심시변정각'이란 앞에 나온 구절의 인과(因果) 동시적 의미에서 볼 때는
후자의 해석이 화엄교의에 더 적합한 것 같기도 하다.
무연(無緣)이란 관계의 매임이 없다는 말로 조건이 없음을 뜻한다.
무연대비(無緣大悲)라는 말이 있듯이 무위심(無爲心)에서 실천되어지는 것은 모두가 무연이 된다.
서양 신학에서 말하는 아가페agape 정신과 유사하다.
선교란 방편을 잘 쓰는 훌륭한 솜씨를 일컫는 말이다.
여의(如意)를 잡았다는 말은 뜻대로 걸림없이 이룬다는 뜻이다.
순조로운 수행의 성취를 나타내는 말이다.
집에 돌아간다는 것은 곧 본제, 법성(法性)의 집이다.
만유의 근원인 이 법성의 집은 일체 중생들의 생명의 실상 자리이다.
자량은 생명을 보존하는 양식인데 전(轉)하여 수행의 공덕을 이루는 여러 가지 실천덕목이라 할 수 있다.
27) 이다라니무진보 (以陀羅尼無盡寶)
-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써
28) 장엄법계실보전 (莊嚴法界實寶殿)
- 법계의 실다운 보배 궁전을 장엄하고
29) 궁좌실제중도상 (窮坐實際中道床)
- 마침내 실제 중도의 자리에 앉으니
30) 구래부동명위불 (舊來不動名爲佛)
- 옛부터 움직임이 없는, 그 이름 부처이네.
수행의 이익을 밝혀 전문(全文)을 마무리한 마지막 4구이다.
수행의 이익은
결국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던 부처의 성품을 계발하여 부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다라니란
모든 선법을 구족한 한량없는 공덕장(功德藏)을 밀교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곧 마음의 근원(心源), 거기에 갖추어진 비밀스런 공덕으로
일체 악을 차단한 순수하고 참된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다라니'라 한 것이다.
이것은 한 없는 이익을 발생케 하여 온 세상을 부처의 세계로 꾸며 놓는 것이다.
법계의 실보전(實寶殿)은 부처가 거처하는 궁전이다.
이는 법성의 자리를 공간적으로 수식한 말이다.
여기에는 모든 상대적 차별을 뛰어넘어
만법이 하나로 회통되는 중도의 진리가 일승(一乘)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일승이 진리의 궁극으로 만법의 참된 근원이다.
이 참된 근원은 본래부터 어떠한 변화나 이동이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알고 보면 본래의 제 모습이었던 것으로
근원에 돌아오고 나서 비로소 그러함을 깨닫게 되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경지, "실상(實相)은 이언(離言)이요, 진리(眞理)는 비동(非動)이라." 한 말처럼
고요 하고 동요가 없는 본래부터 여여한 그 모습이 부처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잠을 자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동서남북을 내왕하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잠을 깨고 보니 정작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잠자리에 누워 있었을 뿐이었다.
꿈속에서는 이곳저곳 다녔으나 깨고 보니 오고 간 일 이 없었던 것이다.
깨닫기 전의 중생이나 깨달은 뒤의 부처가 본질적 근원에서 볼 때 다른 것이 없다.
마치 돌 속에 들어 있는 금이나 순금으로 제련된 금이나 금의 성분은 다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번뇌와 망상 그리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속에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고 있다가
번뇌와 망상을 끊고 아집과 법집을 여의고 보니 본래의 자기 모습이 회복되어 나타났을 뿐,
번뇌와 집착을 가지고 있던 나를 떠난 별도의 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깨달음은 자기의 참된 성품자리에 돌아가는 복귀요, 또한 그것을 회복하는 일이다.
법성의 그윽한 이치는 불변(不變0과 수연(隨緣)으로 설명되면서 인연을 따라 변화하는 모든 법이
근원에 돌아가서 보면 변화되지 않는 불변의 바탕이 되어 고금을 꿰뚫고 동서를 관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도 감이 없는 것이요, 와도 옴이 없는 것이다.
의상스님은 이것을
행행본처(行行本處)
지지발처(至至發處)라 설명하였다.
"가도 가도 본래 자리요,
이르고 이르러도 출발한 그 자리이다."
첫댓글 깨달음은 자기의 참된 성품자리에 돌아가는 복귀요, 또한 그것을 회복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