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에는 김해의 백월산에 있는 죽로차(竹露茶)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비인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에서 비롯되었다는 전설이 적혀 있다.
또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중 <흥덕왕 3년 12월조>와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일연선사(一然禪師)의 《삼국유사》에 전재된 <가락국기> <명주 오대산(溟州五臺山)의 보질도태자전기(寶叱徒太子傳記)> <오대산의 오만진신(五萬眞身). <월명사(月明師)와 도솔가(兜率歌)> <경덕왕(景德王)과 충담사> 등의 문헌과 중국에서 부처님께 차를 달여 공양하는 종파로서 신라에 전래된 연대(天台宗은 540~575, 律宗은 602, 密宗은 635, 華嚴宗은 671, 禪宗은 826년경) 등에 의하여 대렴(大廉)에 의해 차씨가 전래된 828년 이전에도 신라에서는 차를 마셨음을 알수 있다.
신라인들은 일정한 의식과 관계없이 생활속에서 차를 사랑하였다. 특히 국선(國仙)이던 화랑들은 산천경계를 유람하면서 심신을 단련하고 차를 즐겼다. 강릉 한송정에 석정(石井), 석구(石臼)같은 유적이 아직 남아있는 것도 좋은 증거이지만,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나타난 설총 '화왕계(花王戒)'도 참고가 될 만하다. 화왕계에는 왕이 차와 약으로 정신을 맑게 하고 기운을 내야 간신들을 물리치고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신라때 화랑들 사이에서 차생활이 성행했으며 이것이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음을 말해준다. 신라인들이 차를 마시는데 어떤 예법을 지켰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차는 군자의 기질과 덕을 지니고 있다고 했고, 맑은 인격과 고매한 학덕, 예(藝)를 고루 갖춘 사람을 '다인'(茶人)이라고 칭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차는 잠을 쫓고 정신을 맑게 할 뿐만 아니라 명상에 적합하므로 수도하는 승려, 수련하는 화랑(花郞:귀족)과 낭도(郎徒 : 평민)가 애음하였으며, 또한 야외 중심의 음다풍(飮茶風)이 성행하였다. 당시 신라인들이 자주 마시던 차를 '삼국유사'에는 말차(沫茶), 즉 잎차를 갈아서 가루로 만든 차라고 기록하고 있다. 학자들은 잎차와 말차가 함께 있었으나 말차가 더 성행하였을 것이라고 전한다.
차의 생산지는 남부지방에 국한되어 수요에 미치지 못하였므로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차가 수입되었으며, 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차도 수입되었다.
그러나 일찍이 1292년에는 고려시대의 향차(香茶)가 원나라에, 1627년, 29년, 36년에는 천지차(天地茶)와 작설차(雀舌茶) 50봉(封)씩이 후금에, 1637~45년에는 차 1,000포(包)씩이 청나라에, 1923~45년에는 정읍(井邑)의 천원차(川原茶)가 오사카[大阪]에, 1944년경 보성(寶城) 차밭에서 만든 5만 개의 전차(錢茶)가 몽골[蒙古]에 보내졌다.
또 73~77년에는 대한다업과 마루베니[丸紅]회사와의 계약에 의하여 매년 10~15 t의 보성녹차가 일본에 수출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