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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경남PEN문학>(제13호)에 김현우 소설가가 소설 "똥고집 정영감"을 발표했다.
소설 /
똥고집 정영감
김현우
정영감이 느티나무 쉼터에 나타났을 때 모두들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한 잔씩 마시면서 브라질 리우에서 열리고 있는 올림픽 얘기로 슬슬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박영감이 지난밤에 있었던 경기인 양궁 남자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흥분해서 떠들었다. “정말 우리나라 선수들이 최고야 최고! 10점 만점 과녁에 세발씩 어김없이 쏘아 넣어서 단번에 30점이지 뭐야?” 아침에 뻔히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다 알고 나왔을 영감들 앞에서 박영감은 새로운 소식이라도 전하는 듯 우쭐하고 기분이 좋은 표정으로 떠들었다. 사실 올림픽이 4년에 한 번씩 열리는데 우리나라 선수들이 출전해서 금메달 10개에 10위를 목표로 힘껏 달리고 굴리고 뛰고 있음을 영감들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박영감의 흥분은 바로 애국심의 발로요 조국의 번영과 영광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애국심이나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는 곧잘 현 시국에 대해 개탄하고 한숨을 쉬곤 했었다. “이제는 애국자가 없어. 예전에는 국산품 애용하자고 떠들었는데 요새는 아예 그 말을 듣기도 힘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제. 어데 그 뿐이가? 젊은 놈들 보라모! 해외여행을 죽자고 가니 외화낭비가 얼매나 심할 것이고? 수출로 돈 벌어 들이면 뭐해? 해외여행 가서 외제 물건 한 보따리씩 사 오니 말이야.” 평소 애국애족에 대해 열변을 토하곤 했던 박영감은 오늘은 올림픽 경기에 우리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에 고무되어 입에 거품을 물고 이야기하느라 정신없었다. 그런데 뒤늦게 나온 정영감은 박영감의 열변에 슬며시 배알이 꼬이는 것이었다. 우선 그가 느티나무 쉼터에 나왔음에도 노인네들이 아무도 알은 척도 않고 박영감의 양궁 경기 얘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 허? 이것 봐라? 내가 나왔는데 모르는 척 인사도 없네? 커피는 저들끼리 마시고 본 척 만 척하는 거……. 정영감은 기분이 나쁘다는 걸 노상 쓰고 다니는 검정안경을 벗었다 썼다 하면서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큰 기침에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젊은 시절부터 트럭 택시 시내버스 기사를 수 십년하면서 검정안경을 걸치고 다녔고 이젠 버릇이 되어서 외출을 하면 꼭 검정안경부터 쓰는 영감이었다. 물론 목욕탕까지 쓰고 들어가지는 않지만……. “어험! 아침 자셨소?” 그제야 사람들이 정영감의 등장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음을 보내거나 우물우물 ‘어서 오이소.’ 하거나 ‘와 늦었어?’ 했다. 그러고는 또다시 박영감의 양궁 경기 얘기에 정신이 팔렸다. “그 금메달이 우리나라 선수단에서 제일 처음 딴 것이제? 하여간 우리나라가 예전부터 활 하나는 잘 쏘는 나라였다오. 그래서 영화도 나왔지. <궁(弓)>인가 <활>인가? 조선 첫 임금 이 태조께서 활을 잘 쏘았고…….” “활이라카마 고구려 시조 주몽이제. 주몽이 물을 이고 가는 여자에게 활을 쏘아 물동이를 맞히고 그 다음 화살로 물이 세는 그 구멍을 도로 막았다는 얘기가 가장 유명하지.” “아하! 맞아! 주몽이 있었지. 그러고 보니 활량들이 우리나라에 많았구먼. 그래서 부전자전, 아니, 빛나는 전통이 대대손손 이어져 오는 구먼.” 영감들은 이구동성 활쏘기가 우리나라의 대표적 국기(國技)라고 떠들어 댔다. 마을금고 옆 골목에 서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와서 뒤늦게 제 혼자 궁상스럽게 마시던 정영감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 주몽이야기를 했던 김사장이, “그런데 그 금메달, 선수들 세 명 목에 다 걸어주는 거야? 아니면 달랑 하나만 주는 거야?” 하고 질문을 던졌다. 순간 그는 ‘이때다!’ 하고 쾌재를 불렀다. 그가 그 대화에 끼어들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암! 단체전이니까 선수들 세 명에게 다 주지. 그라고 국가별 성적메달 수도 3개로 되는 거지.” 정영감은 손가락을 3개 내밀며 모두 보라는 듯 팔을 휘저었다. 순간 영감들 얼굴에 의아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걸 입빠른 소릴 잘하는 배사장이 아는 척 했다. “에에! 단체전인데 무슨 성적메달 수가 3개가 돼요? 그냥 국가별 성적으론 하나지!” “뭐야? 하나? 어엉? 배 사장은 영 모르는구만. 우째 하나고? 세 명이 출전해서 목에 금메달을 세 개 걸었으면 당연히 3개지!” 바로 똥고집으로 정평이 나있는 정영감의 턱도 없는 고집이 우격다짐으로 나오는 찰나였다. 한번 이렇다 하고 말을 뱉고 나면 그게 틀렸거나 말거나 빡빡 우기고 생뚱한 이유에 기발한 사례까지 주어다 갖다 부치며 우겨대는 것이었다. 영감들은 일시에 분위기를 망쳐버리는 정영감의 주장에 할 말을 잊은 듯 조용해져 버렸다. 신문에는 분명히 “국가별 메달 순위”에 금메달 하나라고 인쇄돼 나왔겠는데 최근 신문을 구독하는 영감들이 없으니 그걸 당장 들고 와 정영감 코앞에 제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텔레비전을 들고 와, “봐라 봐! 중계방송 자막에 <국가별 매달 순위>에 하나라꼬 되어 있제?” 할 형편도 아니어서 정영감의 우격다짐에 다 기가 막혀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이었다. 배사장은 슬쩍 화제를 축구로 돌리고 말았다. “야아! 축구 하나는 잘 하제. 피지인가 휴지인가 7대 빵이가? 8대 빵이가? 그렇게 이겻제. 우리 선수들이 그렇게 뽈을 잘 차는 줄 미처 몰랐네!” “이번에는 8강은 문제없을 꺼고 결승까지 신나게 올라가서 금메달 따야해!” “아아! 우승해서 금메달을 따면 몇 개나 주나? 그날 출전한 선수 11명에게만 주나? 아니면 우리 대표선수단 전원에게 다 주나?” “올림픽 경기에 한번이라도 출전한 선수들에게는 다 줄걸? 그러니까 열댓 개는 될 거야.” 박영감의 엉뚱한 질문에 누가 열댓 개는 될 거라고 말했지만 영감들은 잠시 어리둥절해 서로들 눈치를 보았다. 사실 메달을 스무 개나 열댓 개를 주는지 아니면 그때 그 경기를 뛴 선수 11명의 목에만 금메달을 걸어주는지 아리송했다. 그때 번개처럼 정영감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아! 이 무식한 영감들아! 그것도 몰라? 당연히 그 경기에 출전한 11명에게만 금메달을 주지! 열댓 개? 아니 스무 개를 줘? 개가 웃겠구만!” 그때 삘삘삘 하고 누군가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영감들은 서로 제 것인가 잠깐 확인하는 척 하는데 벨이 계속 울었다. 금메달을 11개만 준다고 주장을 펴던 정영감이 호주머니에서 낡고 낡은 휴대폰을 꺼냈다. 폴더폰 뚜껑을 열면서 짜증을 냈다. “뭐꼬? 뭐시라……? 안 간다 안 했나! 인자 소화도 잘되고 멀쩡한데 무신 놈의 내시경검사고?” 정영감은 버럭 고함을 치더니 휴대폰 뚜껑을 힘껏 닫아버리면서 화를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떨었다. “허! 마느레고 자식이고 간에! 내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지. 요새 의사들이 돈을 못 벌어서 눈이 뻘껀 것 아쇼? 며칠간 배탈이 나서 정로환 먹고 그냥저냥 했는데 아, 그제 마느레하고 자식하고 날 억지로 끌고서 내과에 가지 않았겠어? 이 놈으 의사가 내 말을 반도 듣지 않고 위내시경검사에다 피검사까지 해보자는 거야. 위가 탈이 났다는 거지, 난 활명수에 정로환 먹고 다 나았다고!” 배사장이 조용하게 타일렀다. “정영감! 한번 위내시경검사 해 보소, 이때껏 한 번도 내시경검사 안 해 봤으면 한번쯤 검사받아 볼만해요. 검사 결과 별탈이 없으면 좋고 위에 염증이라도 생겼으면 약 먹으라꼬 처방해 줄 것이니…… 뭘 그리 겁을 내요.” 최사장도 거들었다. “요새 검사비도 많이 들지 않아. 해 보라꼬.” “무슨 소리! 난 멀쩡해!” 영감들은 속으로 ‘저 영감 똥고집 누가 이기겠노?’ 하고 검사를 해보라고 아무도 권하지 않고 입을 닫고 말았다.
며칠간 느티나무 쉼터에 정영감이 통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웬일이고? 정영감이 통 보이지 않네?” “오데 여행이라도 갔겠지요.” “똥고집 영감이 자식들 따라 여행을 갔을까? 아파서 들어 누운 거 아닌지 몰라.” “아하! 며칠 전에 위내시경검사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 후에 누가 소문 들은 거 없어요?” 그때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던 박영감이 그 말을 받았다. “위암 진단 받고 수술하러 큰 병원에 갔답디다.” ***
김현우 : 1964년 <학원> 장편소설 당선. 장편소설 『하늘에 기를 올려라』 소설집 『욱개명물전』, 『먼 산 아지랑이』 『완벽한 실종』 『그늘의 종언』 , 동화집 『산 메아리』 외 다수.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경남문인협회 이사(소설분과 위원장) 경남소설가협회 회장
소설이 실린 <경남PEN문학> (2017. 제13호, 2017. 12.23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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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첨언 / 창작노트
이 소설 창작의도는 검정 안경을 밤이나 낮이나 불문하고 노상 쓰고 다니며 똥고집을 부리는 정영감 같은 그런 인물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먼나라 얘기 같지만 독재자, 독불장군 노릇을 하는 인물 또한 정영감처럼 흔하게 만날 수 있으니 재미난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무리의 지도자(?) 노릇을 오래 하려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부리며 욕하는 소리에는 귀 막고 칭송하는 말에만 정신이 빠진다면 장기 집권을 노리는 독재자나 다름없는 것이다. 오늘날 똥고집 부리는 정영감이 우리 동네에서 제발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에 이 짧은 소설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