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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칠산 앞바다 일출 / 김재일 : 선상 촬영
현낭 스님의 서신에 대해
영가 현각 스님의 답신이 있는데
조금 길기는 하나 한번 살펴 봄으로써
공부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것이라 생각해
전문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눈 밝은 도인들의
서로 탁마상성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고 아름다워
명문장이라 생각됩니다
말미에 가서 마치는 글에
내 필시 미친 듯이 한 말은
그대에게 해당되는 바가 없을 것이니
다 보고 난 뒤 불쏘시개로나 사용하여 주십시오.
함을 보면
이 답신이 결코
현랑 스님의 청에 대한
자신의 반대되는 생각을
전하려는 것이 아닌
처음 마음 공부에 뜻을 둔
후학들을 위한 자비에서 나온
영가 스님의 마음임을
오롯하게 알수 있을 것입니다
천천히 앞에 앉은 현각 스님이
나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음미하여 보십시요
원효사 심우실에서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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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한 이후 지금까지
몇 해를 지나오며 멀리서
마음으로 돌아보고 생각하기에
때로는 오히려 걱정이 되더니
문득 보내 주신 서신을 받게 되자
적연히 근심이 없어집니다.
서신을 주신 뒤로는
도체(道體)가 어떠하신지 자세하지 않습니다만,
법의 재미로움이 정신을 북돋울 것이기에
응당 맑디맑은 즐거움에 계시리라 믿습니다.
언뜻 시간을 내어 덕스러운 법음(法音)을
조심스레 읊조려 보니
이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절개와 지조를 받들어 가슴에 품고
홀로 그윽한 곳에 머무르며
사람들 가운데 자취를 없앤 채
깊은 산과 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친한 벗과는 오고감을 끊은 채
새나 짐승과 때때로 노닒에,
밤이 다하도록 간단없이 이어지고
아침녘 한나절을 적적히 지내면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쉬게 되고
마음의 번뇌는 고요해 질 것입니다.
외로운 봉우리에 홀로 머물며
나무 아래로 단정히 거처하면
번거로움을 쉬고 도에 맛들일 것이니,
진실로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른 도는 고요하고도 고요하니
비록 닦음이 있더라도 익혀 알기 어렵고,
삿된 무리는 떠들썩하니
이에 익히지 않고도 가까이 하기 쉽습니다.
만약 이해하는 바가
현묘한 종지에 계합하지 않거나
수행하는 바가 참된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자라면
아직은 한적하게 머무르며
무위자적하는 몸으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니
한 생의 삶을 살았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응당 선지식에게 널리 물음에
가슴 깊이 머리 숙여 정성을 간절히 하고
합장하여 무릎을 꿇은 채
생각과 용모를 단정히 하고
아침저녁으로 피로함을 잊고서
시종일관 경건히 우러러
몸과 입과 뜻의 업을 꺾고
태만함을 힘써 없앰에
몸뚱이를 돌아보지 않은 채
오로지 정진하여 도에 이르는 자라야
혼과 마음을 맑힌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릇 오묘한 이치를 체득하고
현묘한 종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단하여 행할 때는
마치 엷은 얼음을 밟듯이 하여
반드시 귀와 눈을 기울여
현묘한 법음을 받들고
본성의 티끌을 말끔히 하여
그윽한 이치를 맛볼 것이며,
말을 잊은 채 근본 종지에 편안히 깃들어
번뇌를 씻고 미묘한 이치를 맛들임에
늦은 밤까지 뒤척이다 아침이면 다시 물어
실 한 올이나 터럭 하나라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으면 곧 몸뚱이를
산 속 골짜기에 잠기운 채
세속의 번거로움을 잠재우고
무리들과의 인연을 끊을 수 있을 것이나,
혹은 마음의 좁은 길이 뚫리지 않아
사물을 대할 때마다 막힘이 생기게 되면서도
시끄러움을 피해 고요한 것을 구하고자 한다면
세상이 다하더라도 그 방법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빽빽이 늘어선 숲과
높이 솟구친 가파른 언덕에
뭇 새와 짐승들이 목메어 울고
소나무와 대나무는 무성히 자라 있으며,
물 옷 입은 바위들이 험준하게 엉켜 있고
바람 이는 가지로는 쓸쓸함이 다하여
등나무와 여라이끼가 얼기설기 얽혀 있고
구름과 안개의 기운이 어려있으며
절기마다 사물이 피고 짐을 거듭하고
아침녘과 저물녘으로 어둠과 밝음이 반복되니,
이러한 가지가지의 모습들이
어찌 시끄럽고 번잡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미혹된 것을 보아서 오히려 굽어진다면
부딪치는 것마다 막힘이 될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먼저 모름지기 도를 알고 난 후에야
산에 거처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도를 알지 못한 채 앞서서 산에 거처하는 자는
단지 그 산을 볼 뿐 필시 그 도는 잊게 될 것이요,
만약 아직 산에 거처하지 않더라도
앞서서 도를 아는 자는 단지 그 도만을 볼뿐이니
필시 그 산은 잊게 될 것입니다.
산을 잊으면 곧 도의 성품이 정신을 기쁘게 할 것이요,
도를 잊으면 곧 산의 형상이 눈을 현혹케 할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도를 보고 산을 잊은 자는
사람들 사이에 있더라도 또한 고요할 것이요,
산을 보고 도를 잊은 자는 산중도 시끄러울 것입니다.
반드시 오음(五陰)에 나 자신이 없음을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니
나 자신이 없다면 그 누가 사람들 사이에 머무는 것이며,
만약 오음과 육입(六入)이 허공과 같다면
허공이 모인 것이니 어찌 깊은 산골짜기와 다르겠습니까?
만일 삼독(三毒)을 미쳐 떨쳐버리지 못하고
육진(六塵)은 여전히 어지러우며
몸과 마음이 제 스스로 모순된다면
어찌 사람들 사이의 시끄러움이나
산 속의 고요함이 상관이 있겠습니까?
또한 무릇 참된 도의 성품은 텅 비어 공허로울 뿐이요
만물은 본디 그 번뇌가 쌓인 것이 아니며
진실한 자비는 평등하니
소리와 빛깔이 어찌 도가 아니겠습니까?
보는 바가 거꾸러져 의혹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윤회의 바퀴가 구르게 될 뿐입니다.
만약 모든 경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면
눈에 닿는 것이 도량 아님이 없을 것이며
깊이 이해해야 할 것 또한 본디 없음을 알 것이니,
그러한 까닭에 인연에 끄달리지 않고
원만융통한 법계를 비추어 본다면
올바른 견해와 잘못된 미혹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중생이 있으므로써 자비가 분별되고
상념(想念)에 나아감으로써 지혜가 밝혀지니
지혜가 생기면 곧 법이 응당 원만히 비춰질 것인데
이러한 경계를 여의고 어떻게 능히 자비로울 것이며,
자비심이 일어나면 곧 모든 근기를 통틀어
거두어 들여야 할 것인데
중생과 괴리되면 어찌 능히 제도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면 자비는 커질 것이요,
궁극적인 경계까지 비추어 보면
지혜가 원만하여질 것입니다.
지혜가 원만해지면
시끄러움과 고요함이 똑같이 들여다보일 것이며,
자비가 커지면
원수나 친한 이나 두루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어찌 산 속 골짜기에
오래도록 거처함을 의지하겠습니까?
머무는 곳에 따라 인연에 맡길 뿐입니다.
하물며 모든 법은 공허롭고도 융통하며
일체 마음은 고요하고도 고요하여
본래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데
그 누가 굳이 말하여 “없다”라고 하겠습니까?
시끄럽고 떠들썩한 그 어떤 것이
가히 그것을 시끄럽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적막하고 고요한 그 어떤 것이
가히 그것을 적막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만물과 나 자신이 그윽하게 하나임을 안다면
저곳이나 이곳이나 도량 아닌 곳이 없을 것인데
다시 어찌 사람들 사이에서 혼잡함을 좇을 것이며
산 속 골짜기에서 적막함에 노닐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에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은
목칼을 미워하면서 쇠고랑을 좋아하는 꼴이요,
원수를 멀리 여의고 친한 이를 가까이 하려는 것은
수레감옥을 싫어하면서 죄인덮개를 즐기는 꼴입니다.
만약 시끄러운 가운데에서
고요함을 능히 사모할 수 있다면
저잣거리도 참선의 자리가 아닌 곳이 없을 것이며,
어긋남을 징계하고 순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원수거나 빚진 이도 본디 착한 벗일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곧 위협하여 빼앗거나 헐뜯으며 욕함이
나의 근본되는 스승이 어찌 아닐 것이며,
규환지옥의 시끄럽고 번잡함도 적멸 아님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진대,
오묘한 도는 형상이 없으므로
모습을 지닌 모든 것은 그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며
진여는 적멸이니 모든 음향은 그 근원이 다르지 않으니,
이에 미혹되면
곧 견해가 전도되어 의혹이 생기게 되고
이를 깨달으면
곧 역경계건 순경계건 자리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
고요함은 본디 존재하지 않으나
인연이 모이면 능히 생겨나고,
아상과 분별 같이 높고도 높은 것은 없지 않으나
반연이 흩어지면 능히 소멸될 것입니다.
소멸은 이미 소멸이 아닌데
무엇으로써 소멸을 소멸시킬 것이며,
생겨남은 이미 생겨남이 아닌데
무엇으로써 생겨남을 생겨나게 하겠습니까?
생겨남과 소멸이 다하여 텅 비게 되면
진실한 모습이 항상 머물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선정의 물줄기가 도도하면
어떠한 망념의 티끌이라도
어찌 씻기지 않을 것이며,
지혜의 등불이 밝게 타오르면
어떠한 미혹의 안개더라도
어찌 떨쳐 없애지 못하겠습니까?
이것이 어긋나면
곧 육취(六趣)에서 순환할 것이요,
이것을 익혀 깨달으면
곧 삼도(三途)로부터 멀리 벗어날 것입니다.
이와 같을진대
어찌하여 지혜의 배를 타고서
법의 바다에 노닐지 않고
산 속 골짜기에서
바퀴 축이 부러진 수레를 몰고자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물은 종류가 어지러이 많다지만
그 성품은 본래가 하나이며
신령스러운 근원은 고요하고 고요하여
비추지 않고도 알 수 있으니
진실한 모습은 천진하며
신령한 지혜는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미혹하면 그것을 일컬어 “잃었다” 하고
사람이 깨달으면 그것을 일컬어 “얻었다” 하니,
얻고 잃음이 사람에게 있을지언정
어찌 움직임과 고요함에 연관되겠습니까?
비유컨대,
아직 배타는 법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물줄기가 굽어 있는 것만을 원망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만약 현묘한 종지를 능히 잘 알아
텅 비운 마음으로 그윽이 계합하며
움직임과 고요함이 항상 법다웁고
언어와 침묵이 늘 모범되며
고요한 마음이 돌아갈 바가 있고
편안한 마음은 간단(間斷)이 없다면,
이와 같으면
곧 산 속 골짜기를 자유로이 거닐고
성밖 저자거리를 활달하게 노닒에
겉모습은 즐거이 노닐지라도
속마음은 고요히 머물러 있으며
안으로는 담박하게 쉬고
밖으로는 조용하고도 한가롭게 드날리니
그 몸은 마치 얽매인 듯 하나
그 마음은 마치 태연한 듯하여
모습은 천하에 드러내고
그윽한 영혼은 법계에 침착히 잠길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면
곧 근기(根機)에 응하여 감응이 있게 되기에
자연스럽게 따로 준칙이 없을 것입니다.
서신에 답하여 이처럼 간략히 적으니
나머지 말은 다시 어찌 펼치겠습니까?
만약 뜻 있는 벗이 아니면
어찌 감히 가벼이 범하여 들었겠습니까?
한적함을 즐기는 여가에
때때로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만,
내 필시 미친 듯이 한 말은
그대에게 해당되는 바가 없을 것이니
다 보고 난 뒤 불쏘시개로나 사용하여 주십시오.
이만 줄이겠습니다.
도반 현각 합장.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_()_
텅비게되면 진실한 모습이 머물것입니다.()()()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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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된마음,,,, 맑디맑은 고요함 평안함 참!!!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치문을 대하니 초심을 돌아보고 참회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