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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예전에는 열하(熱河)라 불리던 승덕(承德)쪽 일정이 잡혀 있는 날이다. 이동거리만 왕복 560km가 되는 좀 힘든 코스일 것 같다. 때문에 모닝콜이 5시 반에 울렸다. 여름임을 감안하더라도 많이 이른 시간이었다. 때문에 최대한 용진을 오래 자게 하고 식사를 하러 갔다. 아침은 늘 그렇듯 호텔의 뷔페식(自助餐이라고 함)으로 때우는데 음식은 썩 훌륭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중국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식사가 가장 입맛에 맞을 터였다. 용진에게는 그나마 별로 해당하지 않는 경우였지만.
둘째 날 아침 호텔 전경
7시가 되어서 승덕으로 출발했다. 그곳까지는 아직 고속도로가 완전 개통이 되지 않은데다 중간에 공사구간도 있고 해서 차가 밀릴 것도 감안을 해야 한다고 한다. 차는 금세 북경 시내를 벗어낫다. 인구 13억+∝의 나라 중국의 수도를 조금만 벗어나니 현대 문명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끝없이 펼쳐지는 옥수수밭이 다시 눈에 들어왔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탈것, 중간중간 나타나는 마을의 시골풍경은 아직 우리나라의 70년대, 곧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의 화동 모습을 별반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고북구와 승덕의 경계임을 알려주는 표지판
가이드의 예상대로 중간에는 공사구간이 있어서 많이 밀렸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공사구간을 일방통행으로 만들어 나름 소통을 원활하게 한 것이었다. 승덕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면서 고북구를 지나고 휴게소에 들러 휴식을 하였다. 기름값을 아끼느라 승객이 다 타야 에어컨을 넣어주는 여느 중국 기사답지 않게 새벽부터 에어콘을 빵빵하게 틀어 거의가 추위에 떨면서 잠을 자다가 쉬면서 햇빛을 받으니 모두들 좋아하는 것 같았다. 특히 용진이는 더…… 그때부터는 더 이상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휴게소 맞은편으로 만리장성이 펼쳐져 모두들 기념촬영도 하고 구경도 하였다.
곳곳에 보이는 만리장성. 승덕 가는 길에 쉰 휴게소 맞은 편에 있었다.
다시 출발하여 승덕에 들어섰다. 시간이 꽤 지체되어 피서산장과 외팔묘를 안내할 현지 가이드를 태우고 점심부터 먹으러 갔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오후에 둘러 볼 곳이 많았기 때문에 식사부터 해결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승덕에 들어서니 사방으로 탑과 만리장성 같은 피서산장의 담장, 그리고 어디서나 보이는 경추봉(磬錘峯) 등이 수시로 눈에 들어왔다. 특히 경추봉은 봉추산(棒錘山)이라고도 하며 승덕의 명물 중 하나이다. 가이드가 차마 말로 표현을 못하여 빙 둘러 말하였지만 남근석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일정에는 들어 있지 않아 못 가보았지만 그래도 승덕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어서 위안거리가 되었다.
피서산장의 북쪽 담에 보이는 누각. 이곳에 올라 소포탈라궁을 찍으면 눈앞에 전경이 멋지게 펼쳐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 갔다. 피서산장은 그냥 산장이라는 말만 듣고 보통 모두들 그런데는 왜 가느냐고 하지만 실제로는 청나라 황제들이 경영하였던 행궁, 또는 이궁이고 그들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곳이다. 이 산장은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건축되었다. 첫째는 말하자면 유목민족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한 목적이 있었고, 둘째는 청나라에 위협이 되는 같은 입장의 이민족들을 다스리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이곳은 습도가 없어서 한여름에도 뙤약볕만 피하면 별로 더위를 느끼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리가 가던 날은 상당히 무더웠던 편이었던 것 같았다.
시간상 다소 이른 점심을 먹은 식당
청나라 왕조의 행궁인 피서산장의 현판
피서산장은 청나라의 초석을 놓은 강희제 때 조성되기 시작하여 전성기를 구가한 건륭제 때 완성되는데 두 황제가 각각 조성한 36경을 합쳐 피서산장 72경이 있다. 물론 이들은 모두 100%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으로, 중국 정원의 모범이 될 만한 소주나 항주의 정원을 많이 본따서 지었다. 이렇게 조성한 행궁에 청나라의 최 전성기를 구가한 강희-건륭황제는 연중 최고 4개월까지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연암 일행이 자금성으로 갔다가 부랴부랴 다시 이곳으로 향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들 치세의 전성기가 끝나며 2차 아편전쟁 때 영불연합군의 침략을 피해 타의로 이곳에 왔던 함풍제가 이곳에서 죽음으로써 피서산장의 전성기도 끝이 나고 말았다. 사실상 피서산장은 거의 이화원 비슷하게 생겼다. 곤명호 같은 큰 호수가 없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이화원이 여성 취향적으로 만들어졌다면 이곳은 좀 더 남성 취향적이라고나 할까? 앞쪽 행궁의 부속 건물들은 가이드를 따라 걸으며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지만, 세계문화유산이란 표석이 쓰인 정원군쪽으로 나오자 걸어서는 오늘 내로 다 구경을 할 수 없다며 전동차를 타기로 했다. 물론 경비에 미리 다 포함되어 계산된 것이지만.
짧은 시간에 도보로 다 살펴보기가 힘들어 전동차를 탔다.
연우루 앞의 연꽃
이곳에서 인상이 남는 곳은 연우루(煙雨樓)와 문진각, 그리고 열하이다. 연우루는 입구쪽 목조 교량 양쪽의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낸 연꽃이 인상적이었다. 문진각(文津閣)은 일반인들은 관심을 가지기가 힘들겠지만 『사고전서』를 보관하던 왕실 도서관이었다. 지금은 북경도서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지만 이곳의 『사고전서』가 필체가 가장 아름답고 판본도 좋다. 이번 여행 때 문연각이 있는 자금성, 문원각이 있는 원명원까지 가보게 되니 북사각 중 세 곳이나 가보게 되는 것이다. 나머지 한 곳은 심양에 있는 문소각이고, 황하 남쪽에 있는 남삼각을 합쳐 모두 칠각이 된다. 연전에 항주의 서호 가에 있는 문란각을 본 적이 있으므로 모두 4곳을 보게 되는 것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영인본 『사고전서』는 국민당의 장개석이 모택동의 공산당에 패주하여 대만으로 달아날 때 가지고 간 문연각판 『사고전서』이다.
사고전서 가운데 가장 훌륭한 판본을 보유하였던 문진각(文津閣)
열하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강이라 한다. 발원지에서 호수까지 20m 정도이며, 원래는 계란을 넣어두면 익을 정도로 물이 뜨거웠던 온천이어서 그렇게 불렀다는데 지금은 물이 전혀 따뜻하지 않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연암 박지원의 연행록인 『열하일기』 때문에 특별한 장소가 되었는데, 지금은 표석만 있을 뿐이다. 열하라는 표석 바로 맞은 편에 물레방아가 하나 있었는데 가이드 말이 그 물로 얼굴을 씻으면 남자들은 돈을 많이 벌고, 여자들은 젊어진다고 한다. 목적한 바가 뚜렷해지자 많은 일행들이 물을 축여 얼굴을 대충 씻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물은 별로 깨끗하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강인 열하. 연암 박지원의 연행록 때문에 유명해졌다.
아쉽게 피서산장의 관람이 끝이 났다. 북경에 숙소를 정해놓아 시간이 많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전날 이곳으로 와서 숙소를 정하여 1박을 했더라면 하루를 온전히 여유를 가지고 둘러봤을 텐데. 나오는 길에 유목민인 몽고인들의 주거 공간인 게르, 또는 빠오라고 하는 천막 체험촌이 보였다. 보니 에어컨도 설치되어 있고, 가격도 호텔에서 자는 것이나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한다. 내몽고까지 가서 체험을 할 수 없다면 다음에는 이곳에 숙소를 정해놓고 자면서 피서산장을 한번 둘러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몽고족의 거처인 게르 체험촌
다음 행선지는 외팔묘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소포탈라궁이었다. 외팔묘는 피서산장 주위에 포진되어 있는 8개의 사묘(寺廟)인데 행궁인 피서산장 바깥에 있다하여 외(外)자를 붙인 것이다. 이 외팔묘는 모두 청나라가 국교로 삼은 라마불교의 사원이고, 그 종주국이랄 수 있는 티벳이 제정일치 국가이기 때문에 사묘이면서도 종교-정치 지도자들의 거처가 되는 것이다. 그 중의 소포탈라궁은 티벳의 라싸에 있는 포탈라궁을 본따 약 2분의 1규모로 축소시켜 지은 것이다. 당시에 강성한 나라였던 티벳의 달라이라마가 오면 머무르게 할 심산으로 지었다고 한다. 같은 이민족인 몽고족을 견제하기 위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일환으로 만든 것인데 실제 달라이 라마는 이곳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이곳에는 포탈라궁에 있는 집기 하나까지 같은 장소에 두었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완벽을 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명한 것은 이곳에 중국의 삼대 왕실 극장의 하나인 청음각이 있다는 것이다. 이곳에 올랐을 때는 마침 당시의 놀이를 재현한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시간에 쫓겨 청음각에서 공연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티벳 불교의 특징인 경통을 돌리며 내려왔다.
외팔묘 중 가장 규모가 큰 보타종승지묘. 라마불교 신자들이 소원을 빌며 돌리는 경통이 보인다.
다음에 들른 곳은 보령사(普寧寺)였다. 사(寺)자와 묘(廟)자는 여기서 별 의미의 차이가 없다. 바로 옆에 있는 수미복수지묘(須彌福壽之廟)에 들를 것으로 기대했는데 의외로 이곳은 건너뛰고 보령사로 향하는 것이다. 수미복수지묘는 그냥 차창 너머로 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수미복수지묘는 『열하일기』에 등장하여 유명한데, 당시 건륭황제가 자신의 70세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티벳 사절단의 수장인 판첸(盤旋)라마를 함께 알현한 곳이다. 조선의 사인(士人) 입장에서 대청제국의 지존인 건륭제가 판첸라마를 대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열하일기』에 있다. 이곳에서 유명한 것은 금지붕 위를 올라가는 형상의 네 마리의 금룡인데, 소포탈라궁에서 찍은 사진으로 본 것이 다였고, 경추봉과 함께 다음을 기약해야할 터였다.
보타종승지묘에서 본 수미복수지묘. 그 위로 경추봉이 우뚝 솟아 있다.
수미복수지묘의 가장 큰 볼거리인 금룡이 기어올라가는 황금 지붕
보령사는 볼거리가 많았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천수관음보살이다. 22m가 넘는 세계최대의 목조불상이다. 물론 중국에서 낙산대불을 한번 보면 나머지는 그다지 큰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지만 이 천수보살은 달랐다. 대부분의 불상이 목조든 소조든 간에 금박을 입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천수관음보살은 목조면서도 원형을 매끈하게 잘 보존된 온화한 몸체는 건물 내부를 모두 채우고 있었다. 그 곁의 보좌하는 불상도 볼만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사진을 못 찍게 한 것. 몰래 찍는다고 찍었지만 안 보고 찍은 것이어서 품질도 나쁘고 맘에 안 들었다. 결국 승려가 본 것이 걸려서 지웠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일수록 사진을 찍도록 허용을 해서 널리 알려야 찾는 사람들도 더 많을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령사 전경. 이 안에 세계에서 가장 큰 천수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보령사는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종교행사가 그대로 진행되는 살아 있는 곳이어서 활기에 차 있었다. 경통도 그렇고 법륜도 그렇고 가지런하게 세워진 사이로 승려들이 행진을 하고. 그리고 관광객들도 각자 소원을 빌면서 경통을 돌린다. 출구 쪽으로는 또 보령가(普寧街)라는 거리를 조성하여 쇼핑과 볼거리를 제공해주었다.
종교의식 때문에 행렬 중인 승려들. 가장 도력이 높아보이는 승려이다.
운이 좋으면 이런 광경도 잡을 수 있다.
너무나 먼 거리를 달려와서 주마간산격으로 훑어본 피서산장과 외팔묘. 여행을 해보면 만족스러운 상황이 별로 없다. 이곳도 다음에 또 올 기회가 있다면 더 꼼꼼히 훑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돌아섰다. 나중에 집에 와서 이리저리 알아보니 이곳 피서산장과 외팔묘, 경추봉을 제대로 관광하는데만 2박 3일이 걸린다고 한다. 현지 가이드와 헤어졌다. 중국의 가이드들은 작별 인사를 상당히 적극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가이드는 덩리쥔(鄧麗君)의 노래로 이별이다.
덩리쥔의 <달이 내 마음을 표현해준다(月亮代表我的心)>는 노래로 이별을 고한 가이드
다음은 코스에는 들어 있지만 사실상 시간적으로 관람이 불가능한 금산령이었다. 이곳을 올라보지 못한 것이 아쉽게 느꼊진 것은 만리장성에서 최고의 경관을 자랑한다는 수식어가 붙기 때문이다. 벌써 표를 파는 시간이 지나 가이드가 그냥 기념촬영만 하고 나온다는 말을 하여 들어가게 되었다. 멀리 장성의 망루가 보이는 곳, 표석에 금산령이라고 쓰인 곳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문을 다 닫은 가게에서 우리 일행을 보더니 다시 문을 여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얼핏 봐도 감시 카메라와 각종 안테나로 제모습을 잃은 팔달령의 성루와는 달라보였다.
금산령 장성의 망루. 팔달령보다 원래 모습을 훨씬 잘 간직한 곳인데 시간상 올라보지를 못했다.
오는 길은 갈 때보다 더 사정이 나빴다. 공사구간에는 일방통행이었는데 간혹 마주 오는 차량이 있어서였다. 긴 여름날도 금세 어둑해지더니 빠른 속도로 어두워져갔다. 관광지에서 지체되는 차량 행렬이 지겨울 만도 한데 오히려 사람들은 즐거운 모양이었다. 끼리끼리 즐거운 이야기도 하고 또 그것이 인편에 의해 중계도 되고…… 야튼 중국의 실상에 뛰어든 것이라 하고 모두들 소중한 시간으로 여긴 것 같다. 저녁은 9시 반이나 되어 샤브샤브로 했는데 한국인이 경영하거나 아니면 한국인 관광객을 위한 곳 같았다. 허름한 이면도로 안에서 현대기차(現代汽車), 곧 현재자동차 북경 지점 사옥이 보이는 곳이었다. 이장휘 선생이 급수가 떨어지는 식당으로 일행을 안내한 가이드를 다소 책망하기도 했지만 예산에서 많이 벗어난 경비를 상쇄하려면 좀 급이 떨어지는 곳으로 가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많이 늦어진데다 내일도 힘든 일정이 잡혀져 있어서 모임 같은 것은 생각도 못했다. |
첫댓글 나는 일정하게 쌓아놓은 피서산장의 예쁜 성벽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된다.마치 가장 작은 블럭들을 능선따라 쌓은 듯하던...
산 위까지 이어져 "저것도 만리장성인가" 하며 묻던 사람들도 있었지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