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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한국의 비전
요9:1-7,행1:8
퀴즈를 내겠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은 한국 사람이 아니면서 한국인의 자아상과 정체성을 높이는 일에 적지 않게 기여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시인이고 사상가이며 교육가였습니다. 이 사람은 11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6세에 첫 번째 시집을 냈고, 1913년 동양 사람으로 첫 번째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조국처럼 한국이 제국주의 국가에 의해 식민지 통치를 받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한때 간디의 친구요 동지였으며 간디의 비폭력 저항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따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919년 한국적 비폭력 저항 운동인 삼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안타깝게 여겨 육당 최 남선 편에 ‘패자의 노래’라는 시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난지 10년 후인 1929년 일본을 방문했다가 한국까지 방문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또 한편의 시를 동아일보에 기고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시가 일제 치하의 식민지 통치로 자긍심을 상실한 우리 민족에게 자존감을 회복하게 하는 '민족의 시'가 된 것입니다.
본래 영어로 쓰여진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In the golden age of Asia/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주요한 선생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그 등불 다시 켜지는 날에/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쓴 ‘동방의 등불’이란 시입니다. 물론 이런 시를 통해서 우리가 한국인 된 자긍심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시의 내용처럼 우리나라가 동방의 빛, 세상의 빛이 되는 나라로 쓰임을 받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 역사의 발자취 속에서 한국이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일은 오늘날의 IT산업, 전자산업의 발전과 함께 한국이 세계에 끼치고 있는 기독교적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날 한국 기독교(개신교)는 복음을 받은지 120년 만에 세계에 다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세계에 파송하는 국가가 된 것입니다. 그동안 뜻있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성서 한국’, ‘통일 한국’과 함께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과제를 ‘선교 한국’으로 정해 왔습니다. 진실로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의 마지막 주자로 세계 선교를 완성해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자, 이런 ‘선교한국’의 숙제를 풀어내기 위하여 우리가 할일은 무엇일까요?
1. 선교의 이유를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은 어쩌면 요한복음의 기자가 보여 주고 싶어 했던 모든 인생의 존재론적 모델일지 모릅니다. 성경은 모든 인생은 날 때부터 죄인이며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는 존재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오늘의 본문이 들어있는 요한복음 9장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면 예수께서는 본문의 주인공인 날 때부터 맹인 된 이 사람만이 아닌 이 맹인 된 사람을 비판하고 위협하던 당시의 민중들 그리고 바리새인들도 꼭 같이 맹인임을 지적하시지 않습니까?(41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 헤매는 맹인들입니다. 그런 어둠의 인생을 향해 오늘의 본문 5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선행하는 구절인 4절은 그가 이 땅에 오신 그의 미숀을 선언하시는 대목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미숀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성취하고자 의도하신 아버지의 일입니다. 본래 'miss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missio'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낸다’(sent)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왜 보내셨습니까? 그것이 바로 미숀의 이슈인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 자신의 대답을 두 가지로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인자가 온것은--’이라고 선언하신 대목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여기 바로 우리는 그분의 두가지 미숀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인류의 구원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눅19:10)는 말씀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섬김입니다. 그는 섬기기 위해서 보냄을 받아 오신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그러므로 이 땅에 예수님 모르고 방황하는 영적으로 잃어버려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미숀은 포기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우리의 섬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포로되고 눈멀고 눌린 이웃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미숀은 포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한 첫 설교를 기억하십니까?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그의 처음 설교는 그의 미숀의 선포였습니다. 그는 이사야서를 읽으신 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우리는 왜 이 땅에 보냄을 받았습니까? 사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이유 곧 미숀을 예수님을 만나기까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믿고 알게 된 우리의 미숀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미숀은 바로 예수님의 미숀이요, 그것은 이땅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고 그리고 상처받고 눌린 이웃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한국 교회가 선교 한국의 과제를 완성하려면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하게 우리의 미숀을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아직도 살아 있는 이유-무엇입니까? 우리의 이웃들을 구원하고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서 임을 잊지 마십시다.
2. 선교의 명령에 다시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미숀의 수행은 언제나 변함없는 순종을 전제 조건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자 할 때 예수께서 순종하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미숀이 실현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이제 여러분과 저를 보내시고자 할 때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다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선교의 미숀이 실현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여름 단기 선교를 수행하는 와중에서 이웃 교회인 샘물 교회 선교단의 아프간 피랍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건 직후의 설교에서도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좋은 일 하다가 나쁜 일 만났다고 해서 그 좋은 일, 아니 그 중요한 일, 아니 중요한 정도를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그 미숀을 쉽게 접거나 포기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악플 여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일을 계기로 우리의 선교 태도나 자세에 잘못은 없었는가를 충분히 자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좀더 지혜롭게 좀더 창조적으로 선교해야 할 것인가를 숙고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다시 우리의 미숀을 확인하고 변함없는 순종을 결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그가 우리를 이 곳에 보내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예수께서는 실로암 못으로 보내어 그 눈을 씻게 하십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실로암이라는 이름의 뜻입니다. 7절은 이 실로암 못의 의미를 밝혀놓고 있지 않습니까?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 맹인은 그가 보냄 받은 그곳에 갔을 때 거기서 기적을 체험합니다. 순종의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아프간은 이제 정부에 의해 당분간은 우리가 여행할 수 없는 지역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부나 권세자들의 명에도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의도가 국민을 보호하려는 의도라면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권세자 들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아프간 선교를 포기하거나 중단해야 할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아프간을 위해 기도하며 선교의 문을 열리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몸으로 가지 못해도 중보기도와 방송이라든지 TV, 인터넷등으로 선교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 8월 15일을 전후하여 일본 동경 요코하마 음악당에서 열린 일본 동맹 복음주의 교단의 선교대회를 인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약 1,500여명이 모인 일본으로서는 보기드문 큰 집회였습니다. 나는 여기서 선교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아프간에 갔다가 피납된 한국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제 그 아프간으로 한국인이 갈수 없다면 일본 그리스도인이라도 그곳에 가야 한다고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에로의 소명에 응답하라고 촉구했을 때 일본 청년 40여명이 응답하는 놀라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일본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일어난 하나의 작은 부흥이라고 감격해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계속적인 순종입니다. 그렇다면 선교 한국을 위해 다시 순종을 결심하시겠습니까?
3. 성령의 인도에 항상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행전1:8의 말씀은 선교의 주체가 사람의 방법이 아닌 성령의 권능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전체의 역사는 이제 이 말씀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성령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테반이, 12장에 보면 야고보가 순교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계속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안디옥으로 마침내 로마로 확산되어 갑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가 복음 선교의 사명을 다하는 한 예루살렘 교회도 축복을 누리고 유대 땅도 축복을 누립니다. 그러나 선교의 촛대가 안디옥으로 옮겨가면서 안디옥과 안디옥 교회 그리고 소아시아는 새로운 선교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립니다. 그리고 바울 당시 소아시아는 ‘새로운 로마’(Neo Roma)라는 별명을 얻고 번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에게 선교를 감동하면 우리는 계속 깨어 있어 그분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권능을 받는 다는 말은 반드시 초자연적인 기적과 표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놀라게만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의 권능을 체험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에 항상 민감하게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바울은 아시아를 향해 계속 복음을 전하고자 했으나 성령께서는 바울에게 마게도냐로 갈 것을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럽 선교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교에 순종하고자 할 때 우리의 기도는 보다 구체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 가서 선교하고, 그리고 어떻게 누구를 대상으로 선교할 것인가도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때로 복음에 적대적인 지역을 선교할 때 우리는 직접적인 전도를 시도하기보다 사랑의 섬김만을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섬기고만 돌아와도 저는 충분히 선교의 목적을 이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우리가 너무 직접적인 전도만을 고집할 때 우리의 이웃들은 우리의 순수한 섬김조차도 선교의 수단으로만 오해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또한 아프간 사건에서 봇물을 이룬 소위 세상의 비판이 아니었습니까?
저는 이번 아프간 사건을 계기로 우리 교회를 포함해서 모든 한국 교회가 성령의 인도에 좀 더 민감해 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본위의 선교가 아닌 성령께서 원하시는 선교를 다시 발견하고 순종하십시다. 요한복음 9장 본문에서 예수께서 이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주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고칠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맹인의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하신 것은 그에게 편안한 방식으로 주님의 치유를 수용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주님의 치유의 소식이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에게 증거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순종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어떻게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만 주님의 영이신 성령을 의지하겠습니다. 우리를 인도해 주소서” 만일 아프간 사건을 계기로 우리 교회가 한국 교회가 좀더 겸허하게 낮아져서 성령의 인도를 구하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이 사건은 한국 교회 부흥의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꿈꾸던 선교 한국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교 비전을 이루시고자 한국 교회와 한국 민족을 다시 한번 붙드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때 진실로 코리아는 또 한번 빛나는 동방의 등불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시성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후렴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후렴 대목은 타고르의 다른 시에서 빌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지식은 자유롭고/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진실의 깊은 곳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지성의 맑은 흐름이/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을 잃지 않는 곳/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그렇습니다. 그런 천국,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구현되는 성서 한국, 통일 한국, 선교 한국의 비전을 꿈꾸고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할렐루야! 이동원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