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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倭)란 누구인가?(1)
● 왜(倭)! 이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밝혀보려는 시도를 했고, 또 지금도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을 것이나, 이들(왜)의 정체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의 상태다. 우리 카페에서도 여러 차례에 “왜(倭)”에 대한 사서(史書)의 기록을 소개했다.
현 열도(列島)의 옛 백성들이라고도 하고, 쫓겨난 자들이 도서(島嶼)지방과 섬들을 오가며, 해적질을 하는 무리들이라고도 하고, 망한 나라의 유민(流民)들이 자신들을 망(亡)하게 만든 나라를 핍박(逼迫)하고, 다시 부흥(復興)시키려 변경(邊境)지방을 노략질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또 이들의 본거지(本據地)가 현 열도(列島), 반도(半島)일부, 대륙의 동남(東南)해안으로부터 남서지방까지, 또 현 동남아시아 지방, 또는 서남아시아를 넘어 동서남북의 왜(倭)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다. 조선사(朝鮮史)만큼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存在)이기도 하며, 또한 역사도 깊다.
요즘에는 <아시아=조선> 카페에서는 중앙아시아를 조선(朝鮮)의 중심지였던 “중국(中國)”지방이라고 하며, 왜(倭)지역을 아프리카등지로 추정하는 주장(主張)도 한다.
이들은 분명(分明) 동이(東夷)라고 했으며, 조선(朝鮮)과는 떨래야 뗄 수없는 관계에 있다. 상호 공부하고, 연구하는 자세에서 대륙 사(大陸史)와 조선 사(朝鮮史)속에 기록된 “왜(倭)”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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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후한서(後漢書) 동이(東夷)열전(列傳) : 《倭在韓東南大海中,依山島為居,凡百餘國.自武帝滅朝鮮,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國皆稱王,世世傳統.其大倭王居邪馬台國.樂浪郡徼.去其國萬二千里,去其西北界拘邪韓國七千餘里.其地大較在會稽東冶之東, 與 朱 崖﹑ 儋 耳 相 近, 故 其 法 俗 多 同. : 왜(倭)는 한(韓)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의 산에 의지하여 사니, 무릇 백여 개 나라나 되었다. 무제(武帝)가 조선(朝鮮)을 멸하자, 사신을 한(漢)으로 보내어 30여 개국이 통하였다. 나라 모두 왕(王)이라 칭하고 세세토록 전하였다. “대 왜왕”은 “사마대국”에서 살았다. 낙랑(樂浪)국과는 멀어, 그 나라에서 “만 이 천리”를 간다. 서북쪽으로 “구다 한국”과 경계하니 “칠천여리”를 간다. 그 땅을 크게 보면 “회계(會 稽)”, “동야(東 冶)”의 동쪽에 있고, “주 애(朱 崖)와 담이(儋 耳)”와 서로 가까워, 그 법과 풍습이 많이 같다.》
● 위 후한서(後漢書)에서는 “왜(倭)”를 말할 때 <“낙랑(樂浪)”에서 멀다고 하면서 12,000 리 떨어져 있다.>고 설명하고, 양서(梁書)에서는 <“왜(倭)”는 “대방(帶方)”에서 12,000 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 이곳에서 말하는 “왜(倭)”는 회계(會稽)와 동야(東冶)의 동쪽지방을 말하는데, 이곳은 현재의 지명으로 “복건(福建)성 민 후 현”이라 한다. 이러한 곳과 도서(島嶼) 해안(海岸) 및 여러 군도(群島)에서 살던 종족(種族)을 말하는 것이 되며, 또 앞에서 “한국(韓國)”의 “동남(東南)”쪽 큰 바다가운데라 했으므로, 아래 글 “회계(會稽)와 동야(東冶)의 동쪽지방”이라 했으니, 이곳의 서북(西北)지방에 “한국(韓國)”이 있었다는 것이며, <“한국(韓國)”의 “낙랑(樂浪) 또는 대방(帶方)” 동남쪽 12,000 리에 있었다.>는 말과 같다.
● 복건(福建)성에서 “서북(西北)”방향이면 『섬서(陝西) 장안(長安)으로부터 “감 숙(甘肅)성 천수(天水)”등지이다.』 위 글로 보면 당시의 『“한국(韓國)은 대륙(大陸)의 중원(中原)과 그 서쪽지역에 있었으며,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역시 이곳지방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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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후한서 오환. 선비열전 : 《冬, 鮮 卑 寇 遼 西。光 和 元 年 冬, 又 寇 酒 泉, 緣 邊 莫 不 被 毒。 種 □ 日 多, 田 畜 射 獵 不 足 給 食, 檀 石 槐 乃 自 徇 行, 見 烏 侯 秦 水 廣 從 數 百 里, 水 停 不 流, 其 中 有 魚, 不 能 得 之。 聞 倭 人 善 網 捕, 於 是 東 擊 倭 人 國 得 千 餘 家, 徙 置 秦 水 上, 令 捕 魚 以 助 糧 食. : 겨울에 선비가 요서지역에 쳐들어왔다. 광화원년 겨울에도 선비가 주 천 【酒泉 : 감 숙(甘肅)성의 서쪽지방 하서회랑(河西回廊) 서쪽에 있다.】을 약탈하였다. 종족(種族)의 입이 많아 가축을 잡고 수렵을 해와도 식량이 부족했다. 단 석 괴【檀石槐 : 선비 대 추장】가 순행하여, 진수(秦水) 수 백리 넓은 곳에 물은 머무르지 않고 흐르기만 하는데 그 물속에는 물고기가 있었으나 잡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왜인들이 그물을 가지고 물고기를 포획한다는 말을 듣고, <단 석괴>는 동쪽의 왜인 국 (倭人 國)을 격파해 천 여가를 얻었다. 이들을 진 수 (秦 水)에 이주시켰다. 포획한 물고기로 양식을 대신하도록 영을 내렸다.》
● 진수(秦 水) : 진 수 (秦 水)는 “감 숙성 청수 현(淸 水 縣) 북쪽에 있으며, 후천 하”라고도 한다. 수경 주(水 經 注)에 의하면 진수(秦 水)는 “동북(東北)의 대 농 산(大 隴 山) 진곡(秦谷)”에서 발원하며, 서남(西南)쪽으로 흘러 淸 水(청수)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 <진수(秦 水)의 동쪽에 있던 왜인(倭人)국을 쳐들어가 천여 가(家)를 포로(捕虜)로 데려왔다.>고 하면, 당시의 왜 인 국 (倭 人 國)은 진수(秦 水)의 동쪽에 있었다는 것이며, 그 왜인(倭人)국은 위 【1】에서 설명한 왜국(倭國)과는 또 다른 왜인(倭人)들일 것이다.
● 이 내륙지대의 “왜(倭)”는 <산해 경(山海經)/해내북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蓋 國 1 在 鉅 燕 南, 倭 北. 倭 屬 燕 2 : 개국(蓋國)은 거연(鉅燕) 남쪽에 있고, 왜(倭) 북쪽에 있는데, 왜(倭)는 연(燕)에 속했다. (注) 1 郝 懿 行 云 :(三 國 志)魏 志 東 夷 傳 云 : 東 沃 沮 在 高 句 麗 蓋 馬 大 山 之 東. 後 漢 書 東 夷 傳 同. 李 賢 注 云 : 蓋 馬, 縣 名, 屬 玄 菟 郡. 今 案 蓋 馬 疑 本 蓋 國 地. : 학의행이 이르기를, (삼국지) 위지 동이(東夷)전에서 ;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麗)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후한서 동이전과 같다. ‘이 현’이 주석에서 이르기를 ; 개마(蓋馬)는 현(縣)의 이름이며, 현토 군에 속했다. 상고해 보면, 개마(蓋馬)는 본시 개국(蓋國) 땅이다. 【➡개마(蓋馬)는 고려(高麗)의 토음(土音)이라고 했으므로 개국(蓋國)은 구려(句驪)를 말하는 것이며, 곧 고구려(高句驪)이다.】
2 郭 璞 云 :「倭 國 在 帶 方 東 大 海 內, 以 女 為 主』 : 곽박의 말에 따르면 ; “왜국은 대방의 동쪽 대해(大海) 내(內)에 있다. 여자가 주(主:왕)이다.”
여기서 <倭 國 在 帶 方 東 大 海 內>라는 문구 중에서 “동대해내 東 大 海 內”라는 말은 꼭 바다를 말한다고 볼 수 없다. ‘산해 경’에는 넓고 넓은 곳을 <해海>로 표기한 기록이 많기 때문이다. <內는 안쪽 또는 바깥쪽의 반대되는 의미이다>. 『동쪽 크고 넓은 땅의 안(內)에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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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후한서(後漢書) 韓(한)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 한(韓)은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마한(馬韓)이요, 둘은 진한(辰韓)이요, 셋은 변진(弁辰)이다. 마한(馬韓)은 서(西)쪽에 있어, 54개국이 있으며 북(北)으로 낙랑(樂浪)에 접하고, 남(南)으로 왜(倭)에 접한다.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어 12개국이며 북(北)으로 예맥(穢 貊)에 접한다. 변진(弁辰)은 진한(辰韓)의 남(南)쪽에 있으며 역시 12개국으로, 그 남(南)쪽은 역시 왜(倭)에 접한다.
● 위 글로 볼 때, 마한(馬韓)은 서쪽, 진한(辰韓)은 동쪽, 변진(弁辰)은 진한(辰韓)의 남쪽이다. <“왜(倭)”는 마한(馬韓)의 남쪽에 있고, 변진(弁辰)의 남쪽에 있다.> 이 말은 바다를 건너도 아니요, 육지(陸地)속에 경계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말은 삼한【三韓 : 마한. 진한. 변진 또는 변한】의 남쪽지대는 육지(陸地) 땅이며, 이 땅에 “왜(倭)”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 산해 경 / 해내동경 : 【韓 鴈 1 在 海 中, 都 州 南. : 한안(韓鴈)은 바다 가운데 있는데, 도주(都州)의 남쪽이다. 】注 : 1 郝 懿 行 云 : 韓 鴈 蓋 三 韓 古 國 名. 韓 有 三 種, 見 魏 志 東 夷 傳. 珂 案 : 魏 志 東 夷 傳 云 :韓 有 三 種, 一 曰 馬 韓, 二 曰 辰 韓, 三 曰 弁 辰. : 주석 : 1 학의행이 이르기를 ; 한안(韓鴈)은 모두 삼한(三韓)의 옛 나라이름이며, 한(韓)에는 세 종류가 있다. 위지 동이전을 보라. 가(珂 : 옛 학자)의 말을 상고하면, 위지 동이전에서 말하기를, 한(韓)에는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마한(馬韓)이요, 둘째는 진한(辰韓)이요,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畢 沅 云 :轅 厲 即 韓 鴈 也 ; 轅 、韓 音 相 近 , 鴈 、 厲 字 相 似 。 郝 懿 行 云 :轅 厲 疑 即 韓 鴈 之 訛 也 ; 轅 、 韓 , 鴈 、 厲 並 字 形 相 近. : 필원(畢沅)의 말에 의하면 : 원려(轅厲)는 곧 한안(韓鴈)이다. 원(轅)과 한(韓)은 음이 서로 가까우나, 안(鴈)과 려(厲)자는 서로 다르다. 원려(轅厲)는 의심스럽다. 곧 한안(韓鴈)이 그 증거다. : 원(轅). 한(韓). 안(鴈)은 자형이 서로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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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建武中元二年,倭奴國奉貢朝賀,使人自稱大夫,➡倭國之極南界也,光武賜以印綬.安帝永初元年,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願請見。: 건무(建 武) 중원 2년, 왜노국(倭奴國)이 받들어 조공하고 하례하였다. 사신은 스스로 대부라 불렀다. ➡왜국(倭國)은 가장 남쪽경계지역이다. 광무(光武)가 인수를 하사하였다. 안제(安 帝)영초 원년(元年), 왜국 왕 “수승 (帥 升)”등이 백성 160 인을 헌상하고, 만나기를 원하였다.>
● 대륙 중원(中原) 왕조(王朝)에서 『극 남계 (極 南 界)』는 열도(列島)가 아니라 “대만(臺灣)이나 해남도 (海 南 島), 또는 현 베트남”지방이 우선일 것이다. 열도(列島)는 방향, 지리, 지형적으로 해당사항이 될 수 없다. 왜국(倭國)이 현 열도(列島)를 말하지 않는 것이라면 고구려(高句驪).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3국은 반도(半島)에 존재할 근거가 없어진다. 이 말은 삼국(高句驪. 百濟. 新羅)은 “왜(倭)”국의 서북(西北)방향에 있었기 때문이며, 낙랑(樂浪) 또는 대방(帶方)에서 동남쪽 12,000 리 떨어져 있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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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韓(馬韓) ;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 동(東)쪽과 서(西)쪽으로 바다를 한계로 한다. 남쪽은 왜(倭)와 접(接)해 있으며, 사방 4천리이다. 》
● 한(韓)은 마한(馬韓)을 말하는 것인데,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이며, 남쪽은 “왜(倭)”와 접(接)하였다는 말은 남쪽은 바다가 아닌 땅(地)으로 “왜(倭)”와 맞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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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➊《倭 ;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爲國邑.舊百餘國,漢時有朝見者,今使譯所通三十國.從郡至倭,循海岸水行,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中略). : 왜인(倭人)은 대방(帶方)의 동남(東南)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과 섬을 의지해 나라의 읍(邑)이 있다. 예로부터 백여 개의 나라가 있어, 한(漢)나라 때에는 알현(謁見)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제 그 역관이 통하는 곳이 삼십 나라이다. 군(郡)에서 나아가 왜(倭)에 이르는데, 물로 가서 해안을 따라 돌면, 한국(韓國)이 나오고, 남쪽으로 가다 동쪽으로 가면, 구사한국(狗 邪 韓國)의 북쪽 언덕에 이르는데, 칠천여리나 된다. 》
➋《倭地溫暖,冬夏食生菜,皆徒跣.有屋室,父母兄弟臥息異處 : 왜(倭)의 땅은 따뜻하여, 겨울에도 여름음식과 반찬이 나오며, 모두 맨발이다. 집이 있어, 부모형제가 함께 거하지만, 거처는 다르다. 》
➌《女王國東渡海千餘里,復有國,皆倭種.又有侏儒國在其南,人長三四尺,去女王四千餘里.又有裸國·黑齒國復在其東南,船行一年可至.參問倭地,絶在海中洲島之上,或絶或連,周旋可五千餘里. : 여왕(女王)국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천 여리에,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倭)의 종류이다. 또 그 남쪽에 주유국(侏儒國)이 있는데 사람들의 키가 삼, 사척으로 여왕(女王)국에서 사천여리이다. 또 나국(裸國)과 흑치 국(黑齒國)이 그 나라 동남(東南)쪽에 있는데, 배로 일 년을 가야 이른다. 모두 왜(倭)의 땅으로, 바다 가운데에 섬으로 끊어져 있고, 혹은 연해 있기도 하니, 사방 가히 오천 여리이다.》
●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중에서 ➌의 기록으로 인해 “왜(倭)”가 아프리카 또는 그 주위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이 나오는 것 같다. 이러한 기록으로 지정학적 위치를 추정(推定)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 두 가지 사안을 갖고 “왜(倭)”의 위치를 찾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리라.
● 일단, 『“왜(倭)”는 “대방(帶方)”의 동남쪽 12,000 리 바다 중에 있다.』는 설명이기 때문에 “대방(帶方)”이 어디인가냐에 따라서 “왜(倭)”의 위치는 전혀 다른 곳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대방(帶方)”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먼저 해결해야 될 일이다.
이 설명(說明)은 사견(私見)을 전제로 한다. : “대방(帶方) 또는 낙랑(樂浪)”은 조선(朝鮮)의 것이며, 대륙사관으로 말하면, 장안(長安)주위에 있어야 하며, 장안(長安)을 한양(漢陽) 또는 한성(漢城)으로 보면, 감 숙성 “천수(天水)”지구까지 확대할 수 있고, 초기(初期)로 보면, 개마대산【蓋馬大山 또는 단단 대령(單單大嶺). 자비 령(慈悲嶺)이다.】의 동쪽이라 했으므로, 하서회랑(河西回廊)의 중심(中心)지인 장액(張掖). 주천(酒泉)으로, 다시 돈 황(燉煌)으로 연장, 확대할 수 있다.
장액(張掖). 주천(酒泉). 돈 황(燉煌)으로부터 동남(東南) 12,000 리라면 4km 기준으로, 이곳은 <현 필리핀 지방과 그 주위 나라들>이 될 수 있다. 아래 기록으로 넘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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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오환선비동이전(일본 편) : (中略). 其 山 有 丹, 其 木 有 柟 杼, 豫 樟, 楺 櫪, 投 橿, 烏 號, 楓 香, 其 竹 篠 簳, 桃 支. 有 薑, 橘, 椒 、➡蘘 荷, 不 知 以 為 滋 味. 有 獮 猴, 黑 雉. 其 俗 舉 事 行 來, 有 所 云 為, 輒 灼 骨 而 卜, 以 占 吉 凶, 先 告 所 卜, 其 辭 如 令 龜 法, 視 火 坼 占 兆. 其 會 同 坐 起, 父 子 男 女 無 別, 人 性 嗜 酒. 見 大 人 所 敬, 但 搏 手 以 當 跪 拜. : 산에는 단(丹)이 있는데, 그 나무로는 남(柟 : 녹나무)· 저(杼 : 북 저 또는 상수리나무 서) ·예장(豫 樟 : 樟 / 홍자옥편예장나무 장. 열대지방에서 산출된다.) ·유력(楺 櫪 : 楺 : 나무 휠 유, 櫪 : 가죽나무 력) ·투강(投 橿 : 橿 : 박달나무 강) ·오호(烏 號 : 烏 號 弓 / 예전에, 중국에서 이름난 활의 하나.) ·풍향(楓 香 : 단풍나무 풍. / 백 교 향(白膠香 : 단풍나무 진)등이 있고, 대나무 삼태기(竹 篠 簳 / 蓧 : 삼태기 조. 簳 : 조릿대 간. 화살대). 화살대, 조지(桃 支)가 난다. 생강(薑)과 귤(橘), 산초나무(椒)와 양 하(蘘 荷 : 풀이름. “양 하” 양 / 양 하(蘘荷)는 열대 아시아 원산지의 여러 해살이 풀이다.)가 있지만, 맛을 보태는 것인 줄 알지 못한다. 원숭이(獼猴)와 검은 꿩이 있다. 그 풍속에 일이 있으면 이르는 곳이 있는데, 뼈를 불살라 점을 치는 것이다. 길흉을 점칠 때 먼저 점치는 곳에 고하는데 그 법이 거북점과 같다. 불이 터지는 것을 보아서 점을 치는 것이다. 모임에서 앉아있을 때에는, 부자(夫子)와 남녀(男女)의 차이가 없다. 사람들 성품이 술을 즐긴다. 어른에게 공경을 보이는 것은, 단지 손을 잡고 꿇어 엎드려 절하는 것이다.
● 양 하(蘘 荷) : 풀이름. “양 하” / 양 하(蘘 荷)는 열대 아시아 원산지의 여러 해살이 풀이다.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Zingiber mioga / 양 하 (Z. mioga)을 보면 : <특징> : 열대 아시아 원산의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1m 내외이다. 잎은 2줄로 어긋난다. 잎 새는 30cm 정도의 긴 타원형으로 끝이 가늘고 뾰족하다. 잎 집 부분은 줄기를 감싸고, 겨울에 땅 윗부분은 마른다. (중략). 이용(利用) : 꽃 이삭은 꽃 양하라고 하며 식용한다. 어린 줄기를 어두운 곳에서 연백 도장한 것을 양하 죽이라 하며 식용한다. 양하는 번식력이 강해 갈지 않아도 잘 자라는데 겨울에 겉겨 등을 깔아주면 추위에 상하지 않고 이듬해 봄에 일찍 발아한다. 양 하 죽을 얻을 때에는 발아 전에 50cm 정도 간격으로 심고 흙과 겉겨를 덮는다. 또한 그루터기를 캐어 온실에서 마찬가지로 덮고 연화 촉성시키는 것도 있다. 품종은 여름에 꽃이 피는 작은 여름 양 하와 가을에 피는 큰 가을 양 하가 있다.
● 일본은 “왜(倭)” 이후(以後)다. 이곳에 나는 특산물 중 “양 하(蘘 荷)”를 찾아보면, 열대 아시아 원산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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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북사(北史) ; 왜국은 백제(百濟) 및 신라(新羅)에서 동남으로 수륙【水陸 : 강 , 하천 또는 땅으로】 3,000리에 있으며, 그 나라의 ➡지세(地勢)는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다. 【현재 열도는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다.】 그리고 낙랑군(樂浪 郡)계의 대방(帶方)군에서 나란히 12,000 리이며, 회계【會稽 : 대륙의 동남부 복건省】의 동쪽 『“담이(儋 耳)”와 가깝다.』고 하였다. 【“담이”는 광동省의 주해市에 있던 옛 지명이다.】 특히 왜(倭)에 대해 설명하기를 만이【蠻夷 : 양자강 이남에 살던 종족을 통칭】라 하였다.
● <➡지세(地勢)는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다.> : 이러한 북사(北史)의 기록은 『“왜(倭) 또는 일본(日本)이 본래 있던 곳”은 현재의 열도(列島)가 아니다.』라는 강력한 증거(證據)다. 실제 열도(列島)의 지형지리(地形地理)는 서(西)쪽은 높고, 동(東)쪽은 낮은 지형(地形)으로 되어 있으며, 반도(半島)에서 열도(列島)까지 모두 바다(海)뿐이다. 기록에 따르면, 수륙(水陸) 곧 물(하천 또는 바다)과 땅(육지)을 지나 3,000 리라고 하였으므로, 반도(半島)와 열도(列島)를 지칭하는 것이 될 수 없으며, 만이(蠻夷)는 곧 “왜(倭)”이다. 만이(蠻夷)는 장강(長江)이남지방으로부터 그 남쪽지방, 도서(島嶼), 섬과 서남(西南)아시아 대부분지방에 살던 종족(種族)들을 “만이(蠻夷)”라 호칭하였다.
● 또한 낙랑(樂浪)군 경계의 대방(帶方)군으로부터 12,000 리 떨어져 있다는 말은 후한(後漢) 또는 삼국(위. 오. 촉)때와 왜(倭)가 살던 곳이 똑 같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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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진서(晋 書> ; 당시의 <왜>의 지역을 동야 (東 冶)의 동방(東方)지역이라 했으므로, 동야(東 冶) 의 동방(東方)지역은 복건省 및 그 주변의 동쪽지역 및 대만(臺灣)을 포함한 지역이며, 또한 왜(倭) 지역은 대방군(帶方 郡) 남쪽 12,000 리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백제(百濟)는 북제(北齊) 및 수(隋)로부터 대방(帶方)군왕으로 봉해졌을 때이다.
● 이렇게 보면, 현재의 인도(印度) 대륙의 동쪽지방으로 <광동(廣東). 광서(廣西). 안남(安南)일부. 대만(臺灣). 해남도(海南島). 베트남.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 인도네시아>등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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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남사(南史)를 보면 ; 『왜(倭)는 백제(百濟)와 가까이 있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史記지명고> 조이(鳥 夷>편과 아주 잘 어울리는 기록인데,
➊ <괄지 지(括地志)>에 의하면 백제(百濟)국 서남(西南) 큰 바다 가운데 큰 섬 15 개소가 있는데, 사람이 살고 있으며, 모두 부락을 설치하고 있는데, 이 모두는 백제(百濟)에서 다스렸다.
➋ 또 왜국(倭國) 서남(西南) 대해 중에 백여 소국이 섬에 거하고 있는데, 경(京 : 서울)에서 남쪽으로 13,500 리이다. 『안【안 황 보 밀을 말함】에 의하면 무후(武 后)가 왜국(倭國)을 일본(日本)국으로 개명하였다. 』라고 주(注) 하였다.
○ 이러한 대륙(大陸)의 기록으로 보면, 왜(倭)는 백제(百濟)의 영토(領土)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오늘날 일본(日本) 천황(天皇)이 “자신의 핏속에 백제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말을 이해(理解)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백제(百濟) 왕실(王室)에서 “왜(倭)” 왕실로 이어졌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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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양서(梁 書)를 보면 ; 왜(倭)는 대방(帶方)에서 12,000 리를 가야하며, 회계(會稽)의 동쪽이며, 한국(韓國)을 지나 바다, 물길로 가야 한다고 했고, 산물(産物)은 “담이(儋 耳)”와 “주 애(朱 崖)”와 같다고 하였다.
● 『주 애(朱 崖)와 담이(儋 耳)』는 해남(海 南)도와 그 북쪽 광동(廣 東)성 해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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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구당서(舊唐書) ; 『“그 나라의 경계(境界)는 동서남북(東西南北) 각 수천(數千)리 이며, 서쪽 및 남쪽경계는 대해(大海)와 접하고, 동쪽과 북쪽의 경계는 대산(大 山)으로 한계(限界)가 되어 있다.”』고 하였다.
● 현 열도(列島)의 지형지리(地形地理)를 보면, 『남북(南北)은 길고, 동서(東西)거리는 짧고, 동(東)쪽은 높은 산악지형이며, 서(西)쪽은 낮은 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또한 동서남북(東西南北) 모두 바다와 접해있기 때문에 섬(島)이라 하며, 어느 곳이든 다른 나라와 접경(接境)할 수 없는 지형(地形)이다.』
● 이러한 지형지리(地形地理)와는 전혀 다른,『서(西)쪽과 남(南)쪽은 대해(大海)에 접해있고, 동(東)쪽과 북(北)쪽은 대산(큰 산)에 막혀있다.』고 설명하는 “왜(倭)”지역은 현재의 열도(列島)는 옛 왜(倭) 또는 일본(日本)의 본거지가 될 수 없다.
『서(西)쪽과 남(南)쪽은 바다, 동(東)쪽과 북(北)쪽은 큰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을 찾아보면, 당시 “왜(倭)”가 살던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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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통전 변방전의 왜(倭) ; 倭 自 後 漢 通 焉 ,在 帶 方 東 南 大 海 中 ,依 山 島 為 居 ,凡 百 餘 國 。(중략). 其 王 理 邪 馬 臺 國 ,或 云 邪 摩 堆 。去 遼 東 萬 二 千 里 ,在 百 濟 、新 羅 東 南 ,其 國 界 東 西 五 月 行 ,南 北 三 月 行 ,各 至 於 海 ,大 較 在 會 稽 、閩 川 之 東 ,亦 與 朱 崖 、儋 耳 相 近. : 왜(倭)는 후한 때 통하였다. (왜는) 대방 동남 큰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산과 섬에 의지하며 살아가며, 모두 100여국이다. (중략). 그 나라의 왕은 있는 곳은 사마대국이다. 혹은 “사마 퇴”라 전한다. 요동에서 12,000리 떨어져 있으며, 백제(百濟) 및 신라(新羅)의 동남(東南)지역에 있다. 그 나라의 경계(境界)에서 동쪽, 서쪽으로 5월을 가고, 남쪽, 북쪽으로 3월을 가 각 바다에 이르는데, 이들이 있는 곳은 회계(會 稽) 및 민천(閩 川)의 동쪽이며【 閩 (민) : 복건 성 지역. 광동지방에 살던 옛 종족의 이름 】, 주 애(朱 崖)이며 담 이(儋 耳)와 가까이에 있다.【주 애(朱 崖). 담이(儋 耳)와 가까운 곳은 해남도와 현 베트남지방(임 읍 및 부남)과 필리핀지방이다.】
● 여기서 <회계(會稽), 민천(閩 川), 주 애(朱 崖), 담이(儋 耳)>지역은 모두 대륙(大陸)의 최남단 해안과 가까운 지역을 말하며, 『절강(浙 江)성. 복건(福 建)성. 광동(廣 東)성. 광서(廣 西)성. 해남(海 南)성. 대만(臺灣). 안남(安南). 교지(交 趾). 현 베트남지방【일남(日 南). 임 읍(林邑).】 과 필리핀군도. 말레이시아 반도』 등을 가리킨다.
● 중원【中原 : 천수. 부풍. 장안】의 동남(東南) 지역은 대륙의 『절강(浙江)성. 복건(福建)성. 광동(廣東)성. 광서(廣西)성. 해남(海 南)성. 대만(臺灣). 안남(安南). 교지(交 趾). 현 베트남지방【일남(日 南). 임 읍(林邑).】 과 필리핀군도. 말레이시아 반도』 등을 가리킨다. 이곳은 『“무이 산맥” 및 “남 령 산맥”등과 “동정호(洞庭湖) 및 양자 강”등의 천연적인 지형(地形)으로, 육로(陸路)로 남북(南北)간에 왕래가 매우 어려웠던 지역이어서, 대부분 연안(沿岸)의 해상(海上)으로 통행이 가능했던 곳이다. 』
● <대방(帶方)은 낙랑(樂浪)>과 함께 대륙의 중원(中原) 곧 『감 숙성 돈 황(燉煌). 천수(天水).부풍(扶豊), 장안(長安), 낙양(洛陽)으로 이어지는 하(河)주위에 있었다.』고 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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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高 麗 史 / 忠 烈 王 5. 1301 : <耽 羅 接 于 倭 國>
【10】 高 麗 史 / 忠 肅 王 2. 1333 : <三 月 右 丞 相 燕 帖 木 兒 奏 于 皇 太 后 皇 太 子 曰 : 『 高 麗 隣 于 倭 境 』今 其 王 久 在 都 下 請 令 還 國." 制 可. : 3 월, 원나라의 우승상 <연 첩 목 아>가 황태후 및 황태자에게 아뢰기를 “고려는 왜(倭)와 경계를 인접하고 있는데, 지금 왕이 오래도록 도성에 있으니, 돌아가도록 해 주십시오”, 하여 그렇게 해 주었다.>
● 위 기록에서 (9)의 <高 麗 接 于 倭 國> 과 (10)번의 <耽 羅 隣 于 倭 境>을 비교해보면 ; <隣은 이웃 린(인)이며, 接은 “連 也”이다. 즉 “연 이어져 있다.” 라는 뜻이다>. 바닷길 수 백리 또는 천리 길을 “이웃하고 있다거나, 연 이어져 있다. 접하고 있다.” 등으로 표현 할 수는 없다. 홍자옥편에서 “接”을 찾아보면, 『連 也 : 연할 접』, 『付 也 : 접할 접』, 『近 也 :가 까 울 접』등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隣”은 “鄰”과 같은 자로, 『近 也 : 이웃 린. 親 比 : 가까울 린. 連 接 : 맞붙을 린』등이다.
● 탐라(耽羅)를 현 반도(半島)의 제주도(濟州道)라 할 수 있으려면 우선, 왜(倭)의 경계와 가까이(이웃하고)있어야 하며, 또 고려(高麗) 땅과 왜(倭)의 땅이 접(接)해 있어야 한다. 이 말은 곧 『탐라(耽羅)와 고려(高麗)와 왜국(倭國)은 서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뜻이다.
● 기존(旣存)의 역사해설로 보면, <원(元)나라는 고려(高麗)를 부마국(鮒馬國)으로 했다.>고 하며, 많은 사신(使臣)들이 수없이 고려(高麗)를 드나들었으며, 원(元)나라 군사와 고려(高麗)군사가 일본(日本 : 倭)국을 치러 왜(倭)의 영토로 상륙(上陸)까지 했다는 기록에 따르면, 고려(高麗)나 원(元)의 입장에서 보면 왜(倭)의 영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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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원사(元史) 열전 “탐라(耽羅)” ; <耽 羅, 高 麗 與 國 也. 世 祖 既 臣 服 高 麗, 以 耽 羅 為 南 宋, 日 本 衝 要, 亦 注 意 焉. : 탐라(耽羅)는 고려와 같은 나라이다. 세조(世祖)때 이미 고려(高麗)를 복속시켜 신하(臣下)로 하였다. 탐라(耽羅)는 남송(南宋)과 일본(日本)이 부딪치는 중요한 곳으로, 크게 정신 차려 조심해야 한다.>
● <남송(南宋) + 일본(日本) + 탐라(耽羅)>가 아주 가깝게 근접(近接)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남송(南宋)과 일본(日本)사이에 고려(高麗) 땅인 탐라(耽羅)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남송(南宋). 고려(高麗). 일본(日本)등의 3국은 근접(近接)해 있었으며, 고려(高麗) 땅인 탐라(耽羅)는 지정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요충지였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대목이다.
● 당시에 원(元)나라가 탐라(耽羅)를 지배하다가 고려(高麗)의 요청으로 다시 돌려받은 땅이다. 따라서 원사(元史)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남송(南宋)과 일본(日本)과 고려(高麗)』가 함께 있었던 곳은 넓은 땅으로, 세 나라【남송(南宋) + 일본(日本) + 고려(高麗 : 탐라(耽羅)】의 이해관계(利害關係)가 상충(相衝)되는 아주 중요한 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러한 곳이 <대륙(大陸)과 바다건너 반도(半島)와 또 바다 건너 열도(列島)일 수는 없는 일이며, 이러한 땅은 대륙(大陸)의 광활(廣闊)한 곳에서나 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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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원사(元史) 일본(日 本) : <二 十 三 年, 帝 曰 :日 本 未 嘗 相 侵, 今 交 趾 犯 邊, 宜 置 日 本, 專 事 交 趾. : 23년, 제(帝 황제)가 이르기를, 일본(日本)이 일찍이 자주 침략하고, 교지(交趾)의 변경(邊境)을 범하였다. 마땅히 일본(日本)에서 이러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나 일본(日本)은 교지(交趾)의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
● 원나라 시절에, 일본(日本)이 “교지(交趾)” 땅을 마음대로 침략(侵略)하여 약탈(掠奪)하고, 교지(交趾)의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니 제(帝)가 중신들에게 말하는 것이 위 내용이다. 여기서 『교지(交趾)』는 현재의 베트남 땅을 말하는 것이다.
● 네이버 백과사전. 중국의 역사와 지리 : <교지(交 趾)>
《 BC 111년 한(漢)나라 무제(武 帝)가 남월(南 越)을 정복하고 이 지역에 교지군(交 趾 郡)을 포함한 영남구군(嶺 南 九 郡)을 설치함으로써 그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영남구군을 통할하기 위해 “교 지 자 사 부(交 趾 刺 使 部)”도 설치하였다. 203년 “교지 자사 부”는 ‘교주(交 州)’로 개칭되었으며,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때는 교지(交趾)현이 설치되어 825년까지 존속하였다. 명(明)나라 때 영락제(永 樂 帝)는 “호 계 리(胡 季 剺)”정벌을 내세우고 “베트남”에 출병하여, 1407년 이 지역을 명(明)나라에 병합(倂合)하면서 이곳에 “교지승선포정사사(交 趾 承 宣 布 政 使 司)”를 설치, 통치하였다. 1427년 명(明)나라는 이 지역에서 일어난 “려 이(黎 利)”의 독립군과 싸워 패배하자 이곳의 식민(植民)통치(統治)를 포기(抛棄)하고 독립한 베트남을 “교지(交趾)국”이라 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 유럽에서는 베트남왕국을 “고친차이나[交 趾 支 那]”라 하였고, 뒤에는 통킹의 정 씨[鄭 氏]에 대항한 광남(廣 南)왕조의 남부지방을 지칭하게 되었으며, 19세기 후반 이후는 메콩 삼각주를 포함하는 프랑스 직할 식민지를 가리키게 되었다.》
● 위 현대의 역사해설 보다 그 이전, 이미 원나라 때 이곳 “교지(交趾)”의 땅은 “왜(倭)”의 땅이 되었다는 것이며, 그 이전(以前) 이미 이곳은 “왜(倭)”의 땅이었으니, 원(元)에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글로 계속>
2011년 07월 20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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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에서 152째 줄에서 '실제 열도(列島)의 지형지리(地形地理)는 서(西)쪽은 높고, 동(東)쪽은 낮은 지형(地形)으로 되어 있으며...' 라고 쓰시고는 위에서 182째 줄에서는 '현 열도(列島)의 지형지리(地形地理)를 보면 동(東)쪽은 높은 산악지형이며, 서(西)쪽은 낮은 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라고 하였네요. 두 문장에서 모순이 생깁니다.
그리고 가야의 김수로왕 이야기와 사마태(邪馬台)국을 다스린 히미코 여왕을 담은 일본 고대사와 스리랑카의 비자야 왕 이야기를 참고하면 잘 맞아들어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왜왕은 사마태국에 산다고 하였고 왜를 다스리는 왕은 여자라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비자야 왕의 설화를 보면 왜의 영토에 인도 동부쪽과 스리랑카가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다>는 말은 옛 역사서(북사) 에 기록되어 있고, 현 열도의 지형은 반대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