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와 자기 포기의 어린아이 같은 개념>
-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에 대한 성숙한 이해보다 더 중요한 개념은
없다.
☎ 거짓되고 해로운 몇 가지 자아와 자기 포기의 개념
1. 자기 소멸
-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나 나는 그대로 살아 있으며 없어지거나 흡수되거나 녹아진 것이 아니다.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구원의 최고 절정은 우리가 하늘에 이르러 영원토록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신앙에서는 우리가 거기에 이르면 당신과 나의 자아됨은 소멸되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 그분에게서 당신에게 주어진 당신의 에고는 영원히 당신 마음에 심겨져 잇고, 자아됨도 영원하고 멸망되지 않으며 파괴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없애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것과 교제하실 수 있으며 하늘에서 새롭게 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지옥에 두심으로 그에게서 멀리 두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존재한다. 성 버나드가 “그것은 지옥에서조차 타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은 이 근본적인 자아됨을 연구하여 그렇게 쓴 것이다.
- 영성의 최고점에서라도 자아의식이라는 인간의 선물을 잃지 않아야 한다.
2. 자기 멸시
- 자기 부인을 자기 멸시로 착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서 자기 사랑의 알맞은 부분을 찾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 사랑을 죄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다.
- 예수님은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자기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사랑처럼 성숙과 온전함과 거룩함에 필수적인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내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자존과 존경 그리고 고결과 주체성 안에 자신의 자아됨을 붙드는 자기 수용과 자기 사랑을 필요로 한다.
- 에베소서의 위대한 결혼장에서 남자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5장 28-29절)을 읽게 된다. 존 웨슬레는 에베소서 45장에 주석을 달면서 “자기 사랑은 죄가 아니며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라고 썼다. 자기중심적인 것으로 이기주의는 죄이며, 이것은 사랑이 왜곡되고 곡해된 모습이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 자기 부인이나 자기 포기를 자기 경멸이나 자기 멸시로 생각하게 되는 함정에 빠지지 말라. 이것은 심지어 자기 무시로도 치닫기까지 한다. 교만함과 자기중심의 반대는 자기 무시나 자기 멸시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인 것이다. “내가 살지만 내가 아닌 것” 바로 이것이다. 나는 살아 있지만 자기중심이 아니며 자아로 가득한 에고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가득 차고 그리스도 중심의 에고이다. 신앙생활의 목표를 자기 비하나 무시로 삼지 말라. 성 어거스틴은 놀라운 것들을 많이 얘기했지만, 또한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육체와 성과 자아에 대한 극단에서 우리가 벗어나는데 100년이나 걸렸다. 그런 실수 중 하나는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상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의 차이점은 이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을 멸시함으로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후자(하나님의 도성)는 자기를 멸시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잘못되었으며 매우 비성서적이고 우리 대부분이 사는 태도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허울 좋은 거룩함을 통해서 신성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죄책감에 억눌린 경건과 기쁨을 잃은 자기 부정 그리고 맘에 없는 선행을 행하고 있다. 자기 멸시는 우리를 자기중심과 교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자기중심과 교만으로 이끌어간다.
- 자기 멸시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교만의 문제에 대한 해답도 아니다. 실제로 그것은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심리학자 카렌 허니는 “자기 증오는 교만의 떨어질 수 없는 친구이다. 이것 없이는 당신이 그것을 가질 수 없다”라고 말했다. 자기 죄의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의무적으로 행한 고행이나 선행의 발전된 모습으로 얼마나 자주 나타나는지 모른다. 더 놀라운 것은 자기 정죄가 ‘선한 양심’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 “너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는 자기 무시가 아닌 자기 사랑이 대인 관계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자기 무시는 굴종과 굴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현실의 올바른 어려운 문제들에서 회피하려는 수단일 수 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에게 자기 무시란 영적, 정신적 협박과 고문의 기막힌 도구가 된다. “당신은 너무 당신 생각만 해” 이 한마디로 그것이 당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면 당신은 그것이 원하는 대로 조종되고 놀아날 수 있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은 사랑이다. 당신의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라하고 당신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이들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지 말라. “네 대신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예수님은 “네 몸을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요구하는 건 자아의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능력에 찬 자아이다.
3. 자기실현
- 낙관주의의 팽창과 더불어 요즘에 나타난 또 하나의 부적당한 자아에 대한 대응은 바로 자기실현이다. 이것은 “자기를 인정하고 표현하라”고 우리를 일깨워 준다. 이 사조에서는 자기 포기란 없고 오직 자기 개발만 있을 뿐이다. 이 해결법의 요인 중 하나는 아마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멸시로 극단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진실과 효과를 갖고 있다기보다는 자아에 대한 문제의 해답으론 비성서적이다. 루터교의 상담자 알란 로이터는 「누가 자기는 괜찮다고 말하는가?(When Says I'm OK?)」라는 재미있는 책을 썼다. 로이터는 이 낙관주의에 대해 칭송을 보내면서도 그것의 부당성을 밝혀내고,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자아를 회피하는 또 다른 구실로서 거짓 우상이 되어 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소리 없이 접근해서 당신 삶 중심에 자아를 심어놓는다. 자아는 하나님에게서 독립되어 있고 ‘그분이 필요치 않다.’라고까지 선언하는 무서운 병에 거리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 중심을 맞추게 한다. 종교적인 모습으로건 이교도의 모습으로건 간에 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자아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우리를 유치한 자기중심적인 면에 고정시키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정한 성숙을 가로막는 것에 불과하다.
4. 자기 포기
- 자아와 자기 포기에 대한 어떤 거짓되고 미성숙한 이해는 개인에게 자기만족, 자기의, 자기 과시를 남겨놓아 스스로의 영광을 구하게 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가기 포기가 아닌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활 전반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만 내적인 그의 자아에서는 예외로 둔다. 이것은 성령님만이 이것을 밝히실 수 있을 만큼 교묘하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려 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려는 의욕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는 사람과 천사의 방언으로 순교하듯, 믿음으로 산을 옮기며, 가난한 자에게 모든 것을 나누어 주며, 순교처럼 그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기도 한다. 포기되지 않은 자아는 그의 권좌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희생의 봉사에서 절정을 이룬다. 수천 마일을 다니고 바다를 건넜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선교사들을 종종 보아왔다. 마지막 단계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말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였고,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롬6장5-6절)을 뜻한다.
-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포기하고 내 삶의 중심을 그분께 드려 그분의 권위 밑에 나 자신을 바칠 때만이, 나는 내 모든 자아와 더불어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진정한 자존감과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자기 사랑을 갖게 된다. 또한 진정한 자아, 그 최대의 능력을 연마하고 수용하며 깨닫고 실제화할 수 있게 된다. 이 순서를 거꾸로 뒤집을 수는 없다.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 되심으로 나도 진정한 내가 될 수 있다. “나를 찾았다.”라는 노래처럼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그분이 되시기 전에 진정한 나는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중심이 될 때 나는 그 중심 위에 설 수 있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나를 좋아할 수 있게 된다.
-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더 낮게 무릎 꿇을수록 나의 유일한 자아는 더 크게 일어선다. 그리스도께 종으로 속함으로써 나는 자유하게 되며 비로소 진정한 나를 알게 되어 나를 좋아할 수 있게 된다. 자아는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되려는 시도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신과 나는 진정 되었어야만 했던 자신들이 되는 것이다.
- 바울은 얘기했다. “내가 사는 것 아니요”라고. 이 말은 내가 사라지거나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이제 내 안에 계시고, 내 삶은 내 안에 사는 그리스도의 삶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