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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요논평 ** (2010년 1월 26일) 카뮈의 시대?: "겸손한 반항"의 오만을 넘어서 (수정본)
ahjabie 추천 1 조회 806 10.01.30 12:28 댓글 1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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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1.31 00:29

    첫댓글 아자비님의 화요논평을 오래 기다렸는데, 고맙게 잘 읽고 갑니다....감사합니다. ...

  • 10.01.31 14:53

    훌륭한 사유와 글이군요. 겸손한 사유의 오만을 꿰뚫어 보는 것과 광기의 혁명이라는 양자택일 사이에 작은 길을 찾는 것! 멋지군요. 제가 보기에는, 그러므로 문제는 카뮈의 질문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카뮈의 질문 혹은 절제된 반항이라는 사유를 자기 입맛대로 전유하는 자들의 문제라는 말씀 같습니다. 사르코지와 그 추종자들, 이명박과 그 추종자들 혹은 적의 존재를 명료히 하기를 거부하는 자들, 진정 문제를 회피하는 자들, 그리고 그들의 대립항으로 좌파적 반항들을 그 적과 동일시하는, 선악, 좌우 모든 것을 회의하는 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하는 자들에게 따끔한 글 같습니다. 새로운 길찾기 응원합니다.^^

  • 작성자 10.02.02 04:47

    lulu님/ 처음 인사드리는 것 만으로도 반가운데, - 부지불식간에 그동안 여기저기서 흘리고 다녔던 교만을 통해 요즘 절실히 느끼는 것이지만- 제 부족한 글을 기다리셨다니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격려로 읽겠습니다. 창랑지수님/ 역시 처음 뵙네요. 반갑습니다. '사유'라거나 '멋'까지는 모르겠지만 전반적으로는 요약을 잘 해주신 것 같습니다. 사실 다른 언어로 논문을 쓰는 중에 오랜만에 쓴 글이라 그런지 잘 써지지가 않았습니다. 물론 쉬운 문제도 아니지요. '절제된 반항'과 '광기의 혁명'이라고 구분해 쓰긴 했지만, 역사 속의 현실이 그리 칼에 무우 잘리듯 단정하게 나뉘진 않으니까요.

  • 작성자 10.02.02 05:00

    하지만, 대략 15-20년 전부터 몇몇의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만장일치의 상찬 속에 귀환하고 있는, 전혀 "모호"하지 않고 "부조리"하지 않은 카뮈란- "K.O."라는 표현을 보세요- 카뮈 자신에게조차 목불인견의 광경이었으리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위에서 제가 인용한 핑키엘크로트의 논리가 보여주듯- '선명한' "모호함"과 "부조리"로 현실 속의 부조리를 가리고 정당화하는- 선명한 "도덕적 판단"을 비판하는- "윤리적" 비평/이론의 경향과 짝패를 이루지요.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올 해는 어느 정도 제대로 풀어 놓을 수 있게 될 듯 합니다. 그 때도 응원하실 수 있는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10.02.04 15:36

    재밌게 읽었습니다^^

  • 10.02.06 01:04

    아자비님 답변 감사합니다. ^^ 잘은 모르지만, 카뮈의 절제된 반항이란 개념이 항상 양비론적인 허무주의자들, 혹은 반동적인 기득권자들에게 언제라도 도용당할 위험이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나치즘과 관련한 하이데거 논쟁처럼 말입니다. 우선 절제된 반항이란 말 자체가 역설적이라 어떤 경험이나 상황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이해될 수 없는 듯 보입니다. 위의 그레이스님의 아이디를 보니 트리에 감독의 도그빌과 만덜레이가 떠올라 '방어적 폭력' 혹은 '예외적인 평화적 폭력'이 과연 필연적 한계인가? 라는 고민을 했던 적이 기억납니다. 반대로 카뮈는 절제된 반항이란 개념을 통해 부조리한 모호함을 인정한 것으로 보아

  • 10.02.06 01:18

    현실 조건이나 상황과 관련 없이 삶이나 권력, 기득권에 대한 반항에 있어서 무조적인 광기의 혁명에 복종해야 하는 부분이 있음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모 비유하자면 정신분석학의 죽음충동 같은 무조건적이고 기계적인 행위) 즉, 카뮈의 절제된 반항은 모든 도그마에 대한 백신이 아니라 반항의 어느 지점에서는 도그마에 빠지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뜻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카뮈의 절제된 반항 개념이 그 자체에 이미 크레바스와 같은 무저갱의 잠재력이 내포된 것 같습니다. 다만 공격지점은 그 개념을 오용하는 그들일 것입니다.

  • 10.04.01 18:21

    정말 잘 읽었습니다. 어찌보면, 반MB전선, 혹은 반이명박주의에 관해 설정해야할 '수위'가 무엇이냐는 논쟁에 성찰을 던져주는 글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 작성자 10.04.06 13:04

    박가분/ 잘 읽어주셨다니 다행입니다. 한국상황과의 접점 역시 지적하신 것에 동의하구요. 한가지 덧붙이자면- 이는 언젠가 제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썼던 글의 논리를 가지고 오는 것인데- 반MB전선의 '수위' 조절이라는 문제는 참여정부 시기 노무현에 대한 비판의 '수위'조절이라는 문제와 겹쳐서 읽어야만 그 진정한 함의가 드러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노무현은 '비판적 지지'라는 게으르고 느슨한 개념 때문에 결국 죽음에 이른게 아닐까요? 이명박주의에 대한 "정치적으로 옳은" '비판'들은 이러한 '비판적 지지'의 배다른 형제가 아닐까요? 이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크레바스를 읽어내야 할 것입니다...

  • 작성자 10.04.06 13:18

    창랑지수/ 늦게 읽었습니다만,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특히 "반항"에서, 님께서 "도그마"라고 부르신 것으로의 전이가 "필수적"이라는 부분은 카뮈도 카뮈입니다만 아렌트의 견해와 공명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녀의 <혁명론>과 <폭력론>이 이를 웅변합니다) 둘이 근본적인 의미에서 "자유주의자"로 남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박가분님과 창랑지수님께서 잘 지적해주셨듯이 결국 문제는 어떤 테두리, 혹은 한계와 관련됩니다. 바따이유/푸꼬/발리바르가 세공한 양가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의 사유의 한계이자, 우리의 정치의 한계이지요. "따로 또 같이," 우리는 여기에 서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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