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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브님의 글을 읽으니 전반적인 내용에서는 저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코끼리를 보고 있는데 나는 엉덩이 부분을 말하고 있다면 하토브님은 얼굴부분을 말하고 있는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든 저렇게 보든 율법이라는 본질을 보는 눈은 동일하다는것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것은 하토브님의 주장이나 내 주장이나 거기서 거기고 모양은 같으나 보는 시각이 조금 다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토브님께서 저보고 성령의 역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령님은 항상 율법을 준행하십니다! 다만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항상 성령님을 좇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기 신자는 성령님을 수시로 배반하고 떠나며 죄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님이 율법을 준행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수시로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는 것이며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성하면서 이러한 시행착오는 크게 줄어들어 가며 성령님을 꾸준히 쫓아가게 됩니다. 성도가 율법을 지키려 하거나 준행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좇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율법 준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토브님이 이렇게 설명해놓은것을 저는 그저 단순하게 성화라고 표현해 놓은것입니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하토브님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을 율법이라는 말로 대체 했을 뿐입니다. 왜 저는 율법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쓸까요?
그것은 율법이라는 단어가 갖는 문제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키라고 준 성경책을 의미합니다. 곧 모세오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방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들이 너무나 많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포괄적으로 볼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처럼 우리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것을 원하시는 것이 바로 율법의 근본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하토브님은 이 율법의 근본 정신에 입각해서 율법을 지키게 한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것이고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거룩하신 성품을 닮아가는것에 성화를 통해서 죄와 멀리하며 하나님을 닮아가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고 믿음의 자녀는 그 길로 가게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문제는 제가 율법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말씀에 율법은 할례를 받은 자들에게 준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하게 살게 하기 위한 법입니다. 결국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으니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하고 그것이 율법이라면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당되는 모세오경이지 이방인들에게 해당되는 법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큰 틀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바로 거룩한 삶이고 경건한 삶이니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 된 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거룩하고 죄와 멀리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와 하토브님의 주장에는 큰 차이점이 없습니다. 단지 율법이라는 단어를 쓰는것을 제가 좀 거부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율법 시대에도 당연히 죄사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희생의 모형인 여러 희생제사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바로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전제 등 수많은 제사들이었습니다. 그것들마저도 이스라엘이 충실히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모든 것을 친히 담당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 희생을 담당하셨고 성취하셨으며 그것의 효력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 제사법이 성취완료로서 폐해졌다고 말하는 것이며 남아있는 도덕법이 바로 준수 사항인데 인간이 못하므로 성령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수고하심으로 우리안에서 성취해가신다는 뜻입니다.
율법에는 제사가 있었고 제사를 통해서 죄를 사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인생들이 다른 짐승에게 죽음을 전가함으로서 내대신 짐승을 죽여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것을 깨닫게 하고 죽을수 밖에 없는 존재들임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게 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바로 제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제사는 온전히 죄를 사하는 권세가 없습니다. 일시적인것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충실히 행하지 않아 에수님이 십자가를 지신것이 아닙니다. 이점에 있어서는 하토브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성경과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짐승제사 피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가 아닙니다. 인간을 창조할때 죄인으로 창조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피제사를 좋아하면 인간 창조때부터 피제사를 드리게 하겠지요. 본래 피제사를 좋아한것이 아니지만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일수 없으니 짐승을 억지로라도 죽여서 인간을 구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으로는 안될것을 아시고 미리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실것을 짐승제사를 통해서 알려주신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제사를 드림으로 더이상 짐승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 안에 있으면 더이상 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아있는 도덕법의 준수사항을 말씀하시는 하토브님의 견해에 이점에 있어서 저와 차이점이 있습니다.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준수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들에게는 율법을 준수해야할 의무나 도덕법을 지켜야할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이 의무로부터 해방입니다. 자유입니다. 할례자들이나 무할례자들이나 이들을 통제하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허락하신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인간이 도덕법을 행할수 없다는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안에서 성취해간다는 말은 전혀성경과 다른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의를 대신담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하나님은 적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될때 성령님을 믿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의지해서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해서 죽으신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성령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은혜는 곧 죄에 대해서 죽는것과 의에 대해서 다시 사는것을 적용한것입니다. 우리안에서 성취해 나간다는 말은 결국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음으로 거룩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것으로 그것은 제가 누차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성령님이 담당한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담당하신것이고 이것을 적용하시는 분이 성령하나님이십니다. 도덕법을 성령하나님이 대신 담당해서 우리는 죄를 지어도? 성령하나님은 도덕법을 지키도록 하신다 라고 표현하는것으로 결국 은혜 무법주의자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나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말하는 하토브님이나 별반 다를것없는 것입니다. 은혜주의자들도 성화되어가며 죄와 멀어져 간다고 하고 있고 율법주의자들도 결국 율법을 지킬수 있도록 점점 성령님의 역사를 맛보고 살게 된다는말.....둘다 똑같은 말입니다.
율법중에서 도덕법은 정죄기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옛 사람을 죽게합니다. 그 도덕법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사망이 되지만 거듭난 사람에게는 성령님께서 그것을 준행하시므로 인도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의거한 죄사함의 근거위에서 성령을 좇아 행할 때 도덕법 계명들이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많은 사람들, 웨슬레, 스펄젼, 침례교 신앙고백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토브님은 율법의 기능가운데 제사기능과 도덕법기능을 설명하고 있으면서 도덕법기능이 정죄기능이 있으니 그것이 옛사람을 죽게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중에서 도덕법이나 제사법이나 이것을 제가 표현하기를 상벌의 율법과 속죄의 율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두가지다 결국에는 죄를 사하지 못하고 죄를 범한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죽게 만드는 법으로서 율법중에서 정죄기능을 가진 법만이 사람을 죽이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만약 제사법이 정말로 사람을 살렸다면? 바리새인들같은 자들도 제사를 드림으로 결국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세인들이 드린 제사가 과연 온전한 제사였고? 죄를 사하는 능력을 가진 제사였을까요? 하나님이 받기 싫은 제사 아니었습니까? 결국 율법의 제사기능조차도 인간을 구원하는데 실패한것입니다.
율법 자체는 선하고 훌륭한 법이지만 인간을 구원하고 살리는법이 되지 못하는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입니다. 율법의 정죄기능은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을 해결하신분이 예수그리스도이고 이것을 적용하시는 분이 성령하나님이십니다. 성령하나님이 거듭난 사람에게 도덕법을 준행하게 하는 인도자라는 말은 전혀 성경과 다른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의 의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함으로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것이 성령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라고 하는것과 의미가 같다면 성경적인 해석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오경에 나오는 율법의 도덕법을 준행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다. 라고 말하면 그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는 것입니다. 모세오경의 율법서를 지키게 하는 분이 성령하나님이다? 저는 율법의 전부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찌 성령님이 지키게 한다는 말입니까?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여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그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것을 율법을 지켜 행했다고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켜 행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려고 애썼다고 표현해야 맞는 것입니다.
웨슬레 스펄젼 같은 사람들이 모세오경의 말씀을지켜 산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만으로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믿는 자의 자아를 구원해주고 해방시켜주지 못하였다는 뜻이지, 마치 성령께서 율법으로부터 자아를 해방시켜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의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에 대한 설명은 한번도 하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사망의 법을 지키라고 늘 명하셨다는 뜻이 되며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은 그 사망의 법을 지키려고 무모한 노력을 계속했다는 뜻이 됩니다.
율법을 사망의 법으로 오해하는 것이 은혜무법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율법은 악법이라는 인식이 아주 강하게 깔려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성령께서 율법을 준행하시리라는 믿음을 그런 자들이 가질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부터 해방시켜주었다는 말은 결국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켜주었다는 말입니다. 하토브님은 은혜론자들이 율법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그러므로 죄를 맘대로 져도 된다는 말로 저를 곡해하고 잘못 해석하고 있는데요!
은혜론자들이 설명하는것은 율법 자체에서의 해방이 아닙니다. 율법의 기능인 정죄의 기능 곧 죄를 죄있다고 한 것에 대해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고 죄인의 결과는 사망이니 이 사망으로부터 구원한다는 것은 결국 율법의 정죄기능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고 그들은 모두 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수 밖에 없습니다. 이 죄를 규정하는 법이 율법인것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율법이 되지요. 이 율법의 정죄에서 부터 해방이 바로 성령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고 이제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되었으니 율법아래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정죄기능에서 자유한것입니다. 곧 죄사함을 받았음으로 더이상 정죄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인것입니다. 그런데 하토브님은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났다고 표현하는 은혜론자들을 율법자체에서 해방된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것을 좀 아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율법 자체는 그 본질은 거룩한 법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는것을 세부적으로 나눈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악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킬수 없는 인간에게는 사망의 법일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율법의 진정한 의미가 바로 내면적으로 마음의 상태, 믿음, 순종을 다룬 것임을 모르십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율법의 더 중한바 공의와 긍휼과 믿음을 실행하고 버리지 말라고 명하신 말씀인 줄을 기억하십니까? 즉 율법 안에 공의와 긍휼과 믿음이 포함되었고 그것이 율법의 대의였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 수훈은 율법은 사망의 법이니까 버리고, 이제 산상수훈을 지켜라 하신 말씀이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의미와 깊이와 높이와 그 길이와 거룩함과 순전함과 장엄함과 위대함을 설명해주러 왔노라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하토브님의 율법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은혜론자들도 똑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인간이 알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율법은 사망의 법일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죄인이 될수 밖에 없음으로 심판을 벗어날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율법은 사망의 법이 아닙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하여야 할 법인것입니다. 이 법은 강제하는 법이 아닙니다. 꼭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율법의 문자 그대로 행하는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는 하토브님의 주장과 똑같은 주장입니다.
구약의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님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들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받고 그것을 문자그대로만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을 알아야 하는데 알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수 없는 이유는 바로 성령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만국에서 제사장 나라가되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전하고 이방인들을 짐승취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전하여 그들이 지켜 행하게 했다면?? 이스라엘은 지금처럼 이방인들에게 저주받으며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것은 인간 본질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어쩔수 없는 것이지요.
여기 토론 자들은 자꾸만 율법이 외면적인 것이고 성령의 법은 내면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스펄젼의 글에는 동의한다고 말합니다. 스펄젼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 스스로가 간음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만 “여자를 보고 그 여자에 대해 음욕을 품는 자는 그의 마음 속에 그녀에 대해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고 구주께서 말씀하시기까지 음란한 정욕이 그 교훈에 대한 범법이라는 것은 그들의 생각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것은 악의 생각도 죄이며. 더러운 상상은 마음을 오염시키고 방탕한 소망은 지극히 높으신 자앞에서 죄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분명히 이것은 율법의 취소나 폐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멀리까지 미치시는 절대주권과 그것의 꿰뚫어보는 능력에서 난 훌륭하신 설명이었습니다
성령하나님으로 거듭난 자도 옛사람속에 살고 있으니 결국 곤고한 자들이고 이들은 율법을 지킬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성령하나님안에 있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고......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고 그렇게 사는것이 믿음의 삶인것입니다. 율법을 지켜 행한다는 말의 의미를 너무 강조하다보면 율법주의자가 될수 있습니다. 하토브님의 말씀에서 율법의 의미가 제가 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너무 율법을 강조하니 저는 좀 짜증나려고 합니다.
문제는 율법 폐기론자들이 율법의 진정한 의미, 곧 내면적 의미와 영적 의미를 거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토브님이 말하는 내가 율법 폐기론자라면 저야 말로 율법의 진정한 의미 내면적 의미 영적인 의미를 너무 잘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자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율법 자체로 구원을 얻게 하는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킬수 없다는것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구함으로 그리스도를 힘입어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것입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죄에대해서 죽고 의에대해서 다시 살게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것이 바로 율법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몽학선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율법 자체가 그렇게 내면적인 탐심 금지(출 20:17)와 이웃사랑(레 19:18) 온 몸과 온영혼을 다하여 하나님 사랑(신 6:4-9)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사망의법이고 성령의 법은 생명의 법이라는 구분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이 흔히 말할 때의 율법은 이미 성전제사가 십자가 희생으로 대체된 나머지의 도덕법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제사가 빠진 도덕법만은 죄사함이 없고, 정죄기능과 인도기능, 예언기능 밖에 더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율법자체가 사망의 법이라는 악법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망의 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대한 온갖 악평은 진정한 성령 순종을 크게 제한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사람이 결코 지킬수 있는 법이 아닙니다. 그 내용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은 결코 그 내용또한 지킬수 없습니다.
하토브님은 율법의 내용을 말씀하고 있지만 그 내용조차도 인간은 지킬수 없음으로 율법은 결국 인간에게 죽음만 안겨주는 죄를 죄있다고 정죄하는 법이 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죄하는 법이 생명의 법이 될수 없지요. 너에게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이 어찌 생명을 주는 법이 될수 있겠습니까!
믿지 않는 자들에게 율법은 사망의 법입니다. 인간에게 율법은 사망의 법일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이 어찌 구원을 줄수 있다는 말입니까?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율법은 결코 희망이 될수 없습니다.
예수안에 있는 자들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결국 예수밖에 있는 자들은 이미 정죄를 받은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때 그리스도가 없었을때는 이미 정죄를 받아 죽은자들입니다. 산자들이 아니라 죽은 자들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그러므로 율법은 사망의 법입니다.
이미 사람을 죄있다고 하고 죽은자로 만들었으니 사망의 법 아닙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법이 아닙니다. 왜? 이 사망의 법이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때문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사망의 법이랑 똑같다고요? 그럼 사망의 법을 지켜서 생명의 성령의 법을 얻게된것입니까? 율법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은 인간들이 율법으로 다시 살았다고요? 어떻게 그렇게 될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이를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망의 법이 생명의 법이라고요? 성령의 법은 거듭난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산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에게 죄에서 해방되어서 곧 죽음에서 벗어내 생명을 얻은자들에게 주는 법입니다. 이법이 성령의 법입니다.
죽은 영을 살리는 법입니다. 성령하나님이 우리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살리신 법이 율법이라고요? 성령의 법이 율법입니까? 저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우리를 죽은자로 만든 율법인데? 그 법이 우리를 살린 성령님의 법이라니?????? 이런 논리적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하토브님의 주장은 믿는 자들가운데서 통할만한 이야기지 믿지 않는 자들 우리가 본래 믿지 않았을때 구원받지 못했을때 생명의 법이 생기기전에 이미 사망선고를 받아 죽어있었을때 율법이 생명의 법이 될수 없는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율법은 사망의 법이요 죽이는 법이요 죄를 죄로 인정하게 하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하토브님.......님의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는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님의 주장은 100% 맞습니다. 틀린주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만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은 왜 전한합니까?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입니다.
믿지 않는자들에게는 복음을 제대로 알려야합니다. 그 복음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 죄를 죄로 정하는것이 율법(양심)입니다. 이 양심의 화인맞아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 성령님의 역사를 구하는 것입니다.
살리는 영의 성령하나님께서 율법의 저주아래(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은 상황)에서 우리를 살리시고 죄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의안에서 살게 하신것을 알리는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이제 너희는 살았으니 율법을 지켜 살아라! 이렇게 전도하겠습니까? 성경에서 복음 전하는 방법이 이겁니까? 복음을 전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으니 이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역사하는 도덕법을 열심히 지켜서 하나님이 원하는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 이렇게 전하는것이 복음입니까?
복음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으니 그로 말미암아 죄에 대해서 죽고 이제 하나님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어 다시 살아난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살아야한다. 라고 전하는것이 복음입니까?
하토브님의 글은 고작 믿는 자들에게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먹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중심을 님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제가 볼때 님은 님이 아는 지식으로 믿는 자들을 올무에 빠뜨리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것같습니다.
믿는 자들은 더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아래 있다는것을 알면서 어떻게든 그들을 은혜아래로 끌어내려서 율법아래 두고 싶어서!! 이렇게 말을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것 말입니다.
은혜아래 있으면 도덕불감증에 걸려서 무법한 자가 되고 율법아래 있어야 착한 사람이 된다?? 이런식으로 믿는 자들을 은혜아래 두지 않고 율법아래로 끌고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토브님 님은 믿음의 자녀로서 할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님의 주장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근본이 다릅니다. 성경은 율법으로 살수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사망의 법입니다. 제대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첫댓글 "만약 제사법이 정말로 사람을 살렸다면? 바리새인들같은 자들도 제사를 드림으로 결국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세인들이 드린 제사가 과연 온전한 제사였고? 죄를 사하는 능력을 가진 제사였을까요? 하나님이 받기 싫은 제사 아니었습니까? 결국 율법의 제사기능조차도 인간을 구원하는데 실패한것입니다."
실패했다고 하시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피제사로 실패했다면 구약의 백성이 어떻게 구원을 얻겠습까?
말씀하시는 의도는 알겠지만, 그런 주장은 비성경적입니다.
모형을 믿어도 그리스도를 믿은 것 아니겠습니까?
율법의 제사기능은 언제나 그리스도 믿는 자를 구원했습니다.
율법의 제사가 성공했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필요합니까? 구약의 피제사는 분명 죄사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회성입니다. 구약의 백성들도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걸 아직도 모르셨습니까?
님이 하신 말씀 다 맞습니다.
그런데 "결국 율법의 제사기능조차도 인간을 구원하는데 실패한것입니다" 라는 표현은 어디에 내 놓아도 문제가 될 수 있는 발언입니다. 님의 의도는 알겠지만 크게 문제가 될 표현은 다듬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바꾸기 싫으면 바꾸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여러 사람들과 갈등을 초래할 표현이라는 것에 대해 님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도 무척 노력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쓰는 표현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아웃라인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극단적인 표현을 씁니다.
극단적인 표현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아웃라인을 벗어날 때는, 글을 읽는 이들이 반감을 가지게 되고, 중요하지 않은 지엽적인 문제에 얽매어, 본론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서론에 매이게 됩니다.
저는 이번 토론이 여러가지로 서론에 매여 본론에 들어가지도 못한 토론이라고 봅니다.
이 글은 제가 정독해보았는데 우선 전체 큰 프레임에서는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습니다. 제가 율법으로 구원얻는다거나
성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들어가면 많은 오해들의 기둥들로 세워져 있음을 보게됩니다. 예를들면 율법이 사망의 법이라는 인식이 우선 잘못입니다. 이런 글에 의하면 구약시대의 모든 선지자들도 구원을 못얻은 것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극단적인 평가입니다.
이 글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망의 법을 주면서 자꾸만 지키라고 한 심술쟁이 악신으로 보입니다. 실제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문제였습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안에 있지 않은 자들에게는 사망의 법입니다. 그것을 님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것같습니다. 율법 자체는 선하지만 인간에게는 구원을 줄수 있는 그런 법이 아닙니다. 율법은 정죄하고 심판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은 단지 정죄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이 글에 대한 반론은 좀 시간이 걸려도 천천히 정리하여 해드리겟습니다. 제가 위에 새로 올려놓은 짧은 글을 읽으시고 답해보시면 진전이 나올 것입니다.
<< 모형을 믿어도 그리스도를 믿은 것 아니겠습니까?
율법의 제사기능은 언제나 그리스도 믿는 자를 구원했습니다 >> 중요한 지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