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진교의 사기촌(沙器村) 새미골(井戶鄕) 요(窯)의 주인인 도예가 최정간씨가 이도(井戶)의 고향을 새미골로 밝혀내고 확정짓기까지 4백년이란 긴 세월동안 진교는 도자기와 차를 잃어버린 남해안 바닷가 한적한 갯마을이었을 뿐이다.
역사의 장에서 밀려난 진교, 진교는 사실상 임진왜란이 있기 전까지는 기후나 지리적인 여건으로 봐 우리나라 다도문화를 꽃피웠던 곳이다.
진교를 중심으로 그 서북쪽은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심게 했다는 차밭이 있는 지리산, 지리산 준령이 남으로 뻗어내려 낙남정맥(洛南正脈)의 시원지에 진교는 자리하고 있다. 2억 5천만년이나 나이를 먹어 화강암의 풍화작용으로 차완(茶碗)의 태토(胎土)로는 제일로 치는 철분이 듬뿍 섞인 백토를 무진장 만들어 놓은 곳이다.
차나무가 자라기에 안성맞춤인 기후와 토질에서 다기를 굽는데 둘도 없는 흙이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는 곳이다. 동쪽 8킬로 떨어진 곳에는 차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천(泗川)의 다솔사(茶率寺)가 있고 서쪽 또한 차의 고장이자 차사로 많은 차승(茶僧)을 배출한 순천(順川)의 송광사(松光寺)가 있는 땅이다.
남쪽 또한 코앞에 있는 노량해협을 건너면 지금도 다정리(茶丁里) 다천(茶川) 등 차의 옛 지명이 그대로 남아있는 남해군(南海郡)이 앞을 막고있다.
현재 진교면 버스정류장이 있는 시장은 일제시대 간척사업으로 매립되기 전에는진제포(辰梯浦)라는 도자기 무역항이었다. 진교에서 나오는 도자기가 진제포 선창에서 배에 실려 대마도로 또는 구주(九州) 등 일본 각지로 떠났고 임진란이 끝나 왜군이 철수할 때 안(安), 정(鄭), 이(李), 하(河)씨 등 22개의 성시를 가진 80여 도공이 진제포를 통해 강제로 끌려갔다. 한치의 틈도없이 주위를 빙둘러 싸고 있는 차의 고장이 이곳이다.
일본 교도(京都) 대덕사에 보존되어 있는 이도차완을 두고 오래전부터 日人들은 그 발생지를 "경남 김해나 진주일 것이다."란 추정을 해왔다.
일본에 현존하는 고라이(高麗)차완의 명칭이 대부분 생산지나 수출항의 지명이 붙어있다. 때문에 이도는 정(井)자나 호(戶)자만 붙어있는 지명이면 모두가 한번씩 이곳이 고향이라고들 했왔다.
새미골이 있는 자리는 이곳의 토박이 이성규씨가 오래점부터 살고 있는 집 뒤쪽 감나무밭과 산 언덕 주위인데 이곳에는 잡초와 더불어 온 비탈에 파편들이 흩어져 있다.
72년에 이곳을 답사한 야시모도(香本不苦治)씨가 쓴 <조선의 도자와 古도요지 답사기>란 책에는 "이곳 진교 도요지는 4세기~ 6세기~ 16세기로 추정된다.파편조각의 특징은 도자기 마디가 높고 외부와 내부 허리부분은 매화열매 껍질 색깔로 퍽 아름다웠으며 형태는 꼭 이도차완을 닮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이곳을 찾는 일인들이 수십명씩 떼를 지어 이 파편을 가마니나 배낭에 넣어 마구 가져갔다. 처음에는 예사로 취급했으나 계속 가마니로 반출되자 마을 주민들의 신고로 출입을 제한했다. 급기야는 <경상남도 기념물 24호>로 지정 보호하게 됐다.
이곳이 이도차완의 고향이란 결정적인 단서를 얻어낸 이는 진주 대아고등학교 교장이었던 박종한씨였는데.....
이도(井戶)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학자들간의 주장이 서로 엇갈렸다.
*당시 조선과 무역을 통해 가져간 정호삼랑(井戶三郞)의 성을 따 붙혔다는 설.
*당시 일본서 열린 차회의 명칭이 이도차회였다는 설.
*전북 정읍지방에 있는 요(窯)에서 나왔다는 설.
*흙으로 만든 그릇에 유액을 바르니 흙에 옷을 입힌다하여 옷의(衣)자와 흙토(土)를 합하면 의토로 읽어지나 세월이 흐르며 본음이 변하여 이도로 됐다는 설.
*그릇 표면벽의 짝짝 갈라진 균열의 모양이 꼭 새미정(우물정.井)자 형을 닮았다는 설.
*조선 무역항구에 샘이 있어 이 샘의 이름을 따 이도라는 등 이도차완은 4백여 년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이 베일을 최정간씨는 시원하게 풀어버렸다.
결론부터 먼저 얘기하면 진교는 가락(駕洛)시대부터 각종 토기를 구워온 도자기의 고향이었다. 현재 일본에서 국보로 대접받고 있는 이도 차완은 임진왜란 전에 이미 이곳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자 조선 도자기에 욕심난 일본은 소위<차완전쟁>이라는 임진 왜란을 일으켰다.
진교 새미골의 도자기는 물론 도공까지 수난을 당하며 진교의 도자기는 임진왜란과 함께 종말을 맞고 만다. 최씨는 우선 지명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고서를 통해 고증을 해냈다. 진교의 도자기와 무역을 한 일본 오사까 사까이항을 비롯 도쿄 구주 등옛 무역항을 찾아 도자기 파편을 수집했다. 국내 또한 경남북 전남북 등 옛 도요지를 전부 답사, 파편을 모아 흙의 성분을 분석 비교한 끝에 확실한 결론을 얻었다.
일본인 학자들 또한 *틀림없는 이도차완의 도요지*라고 결론을 내렸다.
지난 86년 1월과 2월호 일본의 도예전문잡지<도설(陶說)誌>는 이도차완에 관한 한 한국인의 글을 한번도 싣지 않다가 *이도차완 생산지에 관한 신연구*라는 제목의 최씨의 글을 소상하게 게재했다.
<동국여지승람>-진주목조(晋州牧條)에는 "새미골에 조선시대 초인 14세기 말에서 16세기까지 진주목 관하에 도기소를 두었다. 새미골은 진주목 곤양군에 속한다."고 쓰여있다.
곤양군에 속해있던 새미골은 1914년 한일합방 때 곤양군이 폐군되고 하동군에 소속되어 버렸다. <세종실록 지리지>-진주목조에는 "주(州) 남쪽 반룡진(盤龍津)에 도기소가 있는데 오로지 누런 용기만 만드는데 하품(下品)이다." 라고 쓰여있다.
여기의 반룡진이란 진교의 옛 지명이다. 진(辰)은 미리진자로 용이란 뜻이다.
1900년까지 사기촌에는 진제포(辰梯浦)란 포구가 있었고 한일합방 후 일인이 이 일대를 매립하여 간척지로 만드는 바람에 지금은 시장터가 되어 버렸다.
이 진제포 또한 <일본서기>-가락국기條에 "대마도에서 구주(九州) 평호(平戶) 대판(大阪)까지 연결되는 항로"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시대에도 사기촌의 새미골요가 일본의 주문을 받고 그릇을 만들어 사(私)무역이 성행된 곳이었다.
이같은 증거는 또 사기촌에서 8km 떨어진 다솔사의 다솔사기에도 근거를 두고있다.
이렇게 해서 진교에 자기요가 있었다는 역사적 뒷받침은 됐고 여기다 진교면 사기촌의 속명이 새미골로 밝혀졌다.새미골의 샘은 한문으로 泉이고 샘을 일어로 이도(井戶)라고 표기한다. 골이란 골짜기 마을이니 곧 향(鄕)이라 새미골은 곧 이도향(井戶鄕)으로 밝혀낸 것이다.
이도차완의 인기가 높아지자 일본은 진제포를 통해 새미골 그릇을 많이 수입해 갔다.
현재 일본에 있는 차완의 명칭이 대부분 수출항 지명인 김해 웅천(진해) 보성 고창 무안 계룡산 등으로 되어 있다.
신비에 쌓인 이도차완의 베일을 벗겨낸 지금 진교는 우리나라의 새로운 차유적지로 부상하고 있다. 15세기 다도문화의 극치를 이루었던 진교 사기촌 새미골은 이제 젊은 최씨를 필두로 21세기 다도문화의 구심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차문화 유적지 발췌문헌-김대성의 <차문화 유적답사기 상,중,하>(도서출판 불교영상刊)
오늘로써 차문화 유적지는 그만 올립니다. 차후에 또 좋은 자료가 있으면 올릴 것을 약속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