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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조선의 무예다, 무예도보통지 |
▣방송 : 2011. 9. 15(목) 22:00~22:5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나 영 PD ------------------------------------------------------------------------
문(文)의 나라 조선에서 탄생한 동북아 최고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한중일 3국의 무예를 총망라한 이 무예서의 제작은 임금 정조(正祖)가 총지휘를 맡고 당대의 문장가 이덕무, 박제가와 전설적인 무사 백동수가 실무를 담당했다.
수록된 무예는 칼, 창, 권법, 마상무예 등 24개 항목. 정조는 조선 최초로 무(武)의 통일을 이룬다.
그가 《무예도보통지》를 통해 실현하려 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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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조선의 무예서, 한·중·일 무예고수들을 사로잡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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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에 중국의 무기인 월도가 기록돼 있다. |
지난달 대만에서 열린 동북아체육사학회. 한·중·일 무예를 비교하는 세미나 현장에서 《무예도보통지》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1790년 조선에서 탄생한 무예서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무예도 포함하고 있었다. 자국의 무예가 한국의 무예서에 상세하게 설명된 것을 보고 적잖이 놀라는 분위기였다. 며칠 후, 대만의 한 무술 도장에서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대만의 무예 전문가 양청룽 교수에게 《무예도보통지》를 보여준 뒤, 대만과 한국 무예 전문가의 장창(長槍) 대련이 이뤄졌다. 대만식 장창과 한국의 무예도보통지식 장창의 승부!
“무예도보통지는 좋은 책입니다. 군대에서 군사들이 무예를 익히는 교과서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내용이 풍부하고 완벽합니다” -타이완 원화대학 국술과, 양청룽 교수
《무예도보통지》가 동북아 무예고수를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
■ 《무예도보통지》 전격 분석! 조선의 군사는 어떤 무예를 익혔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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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에 표현된 무예 동작. 상세하고 입체적이다. |
▲ 마상무예 그림을 그대로 재연한 모습 |
《무예도보통지》는 단순한 병법 이론서가 아닌 실전훈련서로 평가받는다. 병사들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전투 동작을 하나하나 그림과 글로 해설했다. 조선의 손꼽히는 화원(畵員)들이 그림을 그려, 동작은 보다 입체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됐다. 전쟁에 쓰이는 무기의 종류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칼을 이용한 베기 / 낭선, 장창을 이용한 찌르기 / 편곤, 곤봉을 이용한 내려치기 등 세 가지 무기 사용법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역사스페셜>은 당시 조선 병사들이 익혔던 무기의 파괴력을 실험하고, 전투 시에 이용했던 원앙진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재연해 《무예도보통지》의 우수성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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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는 왜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지시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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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후, 잦은 암살의 표적이 된 정조. 호위무사 강용휘도 정조 암살을 노린다. |
1776년 임금의 자리에 오른 정조는 암살의 표적이 된다. 죄인으로 취급받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의 아들이었기에 궁궐을 장악한 정치 세력에게는 마뜩잖은 존재였다. 1785년, 정조는 호위부대 장용영을 설치한다. 자신의 신변 보호와 정국 안정, 나아가 왕권 확립이 목적이었다. 이후 탄생한 책이 《무예도보통지》다.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무예서는 1598년 임진왜란 때 탄생한 《무예제보》. 전란의 와중에 무예의 필요성을 인식한 선조(宣祖)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무예서다. 그 후, 1759년 사도세자가 만든 《무예신보》가 계보를 잇는다. 《무예도보통지》는 앞서 만들어진 두 무예서를 종합하고 새로운 무예를 추가한 조선의 마지막 무예서다. 기존의 18가지 무예에 6가지의 마상무예를 더해 24개 항목으로 집대성했다. 한국 무예서의 결정판이다. 장용영에서는 이를 일종의 무예교과서로 사용하고 군사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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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예도보통지》,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정조 사상의 정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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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에 일본의 무기인 왜검이 포함돼 있다. |
▲ 편찬에 참여한 백동수(백영숙)는 문(文)과 무(武)를 두루 갖춘 인물로 평가받는다. |
정조는 문(文)과 무(武)를 겸비한 선비를 원했다. 《무예도보통지》의 집필자로 규장각 검서관인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장교인 백동수를 기용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문으로 대표되는 규장각과, 무의 중심기관인 장용영이 만나면서 비로소 문무의 조화가 실현된 것이다. 이덕무와 박제가가 실학자라는 점은 책의 실용적인 측면을 한층 부각한다. 일본의 왜검과 중국의 쌍수도 등, 적의 무기를 상세히 기록하면서 실제 전투에서 상대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도록 했다.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모두 서얼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왕명 편찬 작업에 서얼을 등용한 것은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파격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따로 언해본을 두고 신분, 지역을 가리지 않고 보급했다. 덕분에 한자를 모르는 병사도 무예를 쉽게 익힐 수 있었고 백성도 무예를 가까이할 기회를 갖게 된다. 무예를 독점한 집단의 기득권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왕권을 장악하겠다는 정조의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무예도보통지》는 단순한 무예서가 아닌, 정조의 이상을 반영한 시대의 역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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