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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향 진도의 큰 뿌리인 절대 명인 박종기
오늘에 진도를 예향이라 일컫게 함에서 “소치는 화선(畵仙)이요, 종기는 악선(樂仙)이다.” 로 불리고
그야말로 신기에 이른 젓대(대금-진도에서는 절대라고 불렀음) 명인으로서 우리나라 대금산조의 창시자며,
그간에 “아리랑 타령” “아롱 타령” “산아지 타령”등으로 각기 다른 후렴들과 함께
여러 가지로 전하던 타령들을 <진도 아리랑>으로 정형화시킨 곡을 만들어
오늘날 진도아리랑이 되게 했다는 설이 유력한 대금 국수 박종기 선생에 대해 알아봅니다.
< 방송국에서 절대를 부는 박종기의 사진. 출처:대금산조 창시자 박종기 평전 표지>
진도는 예부터 노동요 및 노동풍물을 비롯해 세시풍속과 관련된 걸궁, 매구굿 등이 활발하게 전승 되어 왔고,
당골이라는 대를 잇는 무속을 통해 전승 되어 온 무속음악이 독특한 형태로 이어 내려오면서
더욱 그 뿌리와 저변을 튼튼히 해 왔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영향들은 1759년(영조 35년) 『여지도서』에 “장악원 악공 1명, 악공보 10명, 악생 2명이
진도의 관속으로 있었다.” 라는 기록과, 1871년(고종 8년) 『진도부 읍지』에 “취수(吹手) 12명,
기녀 4명이 관속으로 있었다.” 라는 기록들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력을 바탕삼아 박종기 선생 같은 명인이 나올 수 있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오늘날의 많은 인간문화재와 명창들이 대를 이어서 나오는 뿌리가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박종기(朴鍾基, 1879년 ~ 1939년 또는 1880년 ~ 1947년)선생은
먼젓번에 얘기한 국악인 김성녀 중앙대 국악대학장의 외할아버지인 박동준의 오촌 당숙이 되고,
진도 씻김굿 인간문화재 박병천의 작은할아버지가 되며, 김대례 인간문화재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선생은 진도 밀양 박씨 중시조 청제공 파의 후손으로 대를 이어 내려온 당골래(세습무)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 고종 때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1896년부터 1907년까지 1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진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가 1907년에 쓴 『은파유필(恩波濡筆)』의 기록에 "노래, 춤, 가야금,
퉁소, 젓대 할 것 없이 모두에 능한 예인" 이라 칭송한 박덕인이 박종기 선생의 아버지가 됩니다.
박종기는 우리나라 국악계의 큰 거목이기에 그에 관한 기록들은 중앙에도
한국 정신문화 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비롯해 태극출판사의 <대세계백과사전>과
누리틀 사전인 <엔싸이버 백과사전>, <위키 백과사전>등 거의 모든 백과사전에 올려져 있고,
국악예술인명감 편찬위원회 편저 <국악 예술인 명감>과 한겨레신문의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70>,
또 문화재 전문위원이고 한국고음반연구회 회장인 이보형 회장의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7)>,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관장의 글과 조선 성악연구회 기록, 또 각종 국악 음반의 표지등에도
수많은 기록이 산재해 있습니다.
< 진도 민속 전수관 뜰의 잡초 속에 방치 된 박종기 선생 추모비. 사진제공: 진도읍 포산 출신 김일문 >
향토 기록물들 중에는 진도 문화원 기록과 향토 사학자 박병술, 허옥인, 박주언 님의 기록물들과
진도 민속 전수관 앞뜰에 세워진 <대금 국수 박종기 선생 추모비>의 비문을 제가 접하였으나
이 모든 기록물들이 생몰에서부터 발자취에서 구구 각색이며 어느 것도 딱 부러지게 확실하다 믿기
어렵게들 되어 있었기에 답답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2007년)에 나온 민속원 펴냄 이진원 지음의 <대금산조 창시자 박종기 평전>에
어느 정도의 답답함을 풀 수 있는 기록과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기록들이라 세세한 내용들을 사학자도 아니고 전문 지식도 없는 제가 시시비비를 가려
논할 위치도 아니고 다만 향우 여러분이 잘 모르시는 박종기라는 분의 발자취에 대해서
이런 기록들을 참고해 개략적이나마 알려 드릴까 합니다.
< 진도 민속 전수관 뜰의 추모비 앞과 뒤. 사진제공: 진도읍 포산 출신 김일문>
여기에 대금국수(大琴國手)라는 한문의 금자가 거문고 琴자로 현악기에 쓰는 금자이고 피리인 대금(大笒)은 첨대 笒자로 써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 琴 = 거문고 금자로 가야금(伽倻琴), 칠현금(七絃琴), 마두금(馬頭琴), 소해금(小奚琴), 수금(竪琴), 양금(洋琴), 월금(月琴), 철현금(鐵弦琴), 해금(奚琴), 호금(胡琴) 등 줄이 있는 현악기에 씀.
※ 笒 = 첨대 금, 속찬 대 함, 대 이름 잠.
*대를 재료로 만든 대금(大笒), 중금(中笒), 소금(小笒) 모도가 이 첨자럴 씀*
일단 추모비 비문에 보면
[국악인 박종기 옹은 나르는 새를 젓대 소리로 멈추게 했다는 일화를 남긴
이 나라 대금 시나위의 일인자였다.
공은 1879년 12월 12일에 임회면 삼막리에서 아버지 박기순(朴基順)씨와 어머니 김사현(金寺玄)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39년 10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공은 이 고장의 예술적 바탕에서 홀로 익힌
재질만으로 서울에 진출해 진도 아리랑 등 많은 곡을 음반에 취입해 소개했는가 하면
고향의 재질있는 후배들을 중앙무대에 진출시켜 진도가 국악의 고장임을 입증시켰다.
우리는 이 같은 공의 공훈을 그리며 고장 사람들이 이 명예와 전통을 이어갈 원천을 삼고자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기록과 증언들로 볼 때 박종기 선생의 아버지인 박기순(일명 박덕인)은
부인이 위에 언급된 김사현 말고 두 번째 부인으로 함양박씨가 있었는데
이 박 씨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일 확률이 더 높습니다.
또 다른 기록들에 나오는 “박종기는 박덕인(德仁)의 서자”라는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도
충분히 그렇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곳도 진도 문화원 기록과 향토사에는 의신면과 진도읍이 혼재되어 나오는데,
비문의 삼막리 출생은 아니고 의신면이나 읍에서 출생한 뒤에 삼막리로 들어가서
살게 되었음이 더 유력한 것으로 믿어집니다.
또한 사망 연도도 비문에는 1939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1947년 등으로 되어 있으나
1941년에도 2월 7일부터 7월 31일 까지 20회에 걸쳐 경성 방송국에서 방송한 기록이 있으므로,
호적에 올라 있는 1941년 10월 30일 사망(증손자뻘인 박환영-박병천 인간문화재 아들의 증언)이
신빙성이 높다 하겠습니다.
< 삼막리 마을 사진. 사진제공:내고향 진도카페 하태모 >
아주 까마득히 먼 옛일도 아닌데 이렇듯 불확실 한 점이 많은 것은 선생의 처지가 당시만 해도
천시받던 당골래 출신이었고, 사진 찍기도 싫어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버지 덕인 옹이
훤칠하고 좋은 인물이었던데 비해 자신의 절름발이에 보잘것없이 왜소하게 여겨지는
외모 때문은 아니었나? 여겨지기도 하고 자손들도 가난에 허덕이다 보니
선생의 자료들을 귀히 여기고 모을 여력이 없었기에 오죽하면 선생의 유품인 절대를 엿장수에게
판 것을 동네 분이 되사서 보관했다는 얘기까지도 전해 옵니다.
선생의 손자들이 현재 제주도에서 살고들 있다 하니 관심 있는 분들이나 사학자들께서 하루빨리
그들과도 교류되어 더 세월이 흐르기 전에 자료들이 더 사라지기 전에 선생의 확실한 발자취와
자료들을 모으고 확실하게 정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책에 나와 있는 박종기 선생 사진들. 출처:대금산조 창시자 박종기 평전>
생몰 현황은 그렇고
선생은 아버지 덕인 옹이 50여 세 때 쉰둥이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어머니가 편찮으시자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 병구완을 했고 형인 종현(鍾現)이 몹쓸 병에 걸리자
자기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주어 살렸다고 하며, 이러한 효성과 우애가 알려져서
광무 10년인 1906년 그의 효행에 감동한 유림의 천거로 국가에서 내린 효행상장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합니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믿기 어려운 실화라 여겨지지만 선생은 어머니를 위해 넓적다리 살을 자른
상처 때문에 그 후유증으로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았다 하며 국가가 내린 효행상이 기록으로
전하니 안 믿을 수도 없는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 덕인 옹은 선생의 손을 잡고 3년 동안을 30리 길을 걸어
부인의 묘를 찾았다고 하는데 이 시기에 어머니의 묘 앞에서 절대를 분 것이 득음의 계기가
되었으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훗날 “절대라믄 박종기요 ○○이라믄 누구” “절대는 박종기”
“出天之孝 出天之樂(하늘이 내신 효자요 하늘이 내신 음악인)” 이라는 말들의 뿌리가 되었다 하겠습니다.
<삼막리 대나무밭 모습. 사진제공:내고향 진도카페 하태모 >
삼막리에는 하씨 문중의 큰 대밭이 있는데 선생에게는 마음대로 대를 벨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
그 대밭의 대를 베어 직접 퉁소와 절대를 만들어서 불었다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선몽(先夢)이 있어 가 보니 푸른 대밭 속에 황죽이 한 그루 있어 이를 뿌리째 파다가
절대를 만들었는데, 밑뿌리 부분에 혹 같은 것이 있어서 벌어질 것 같아 얼마나 단단히
조여 매었던지, 그 뒤로 진도에서는 무슨 일을 야무지게 하는 걸 보면 “종기 절대 맨들데끼 한다.”
라는 말이 생겨 났으며 그렇게 붙들어 맨 황죽 절대는 그야말로 명품이었다 합니다.
선생은 20세가 넘도록 삼막리에서 절대와 퉁소의 명인이었던 아버지 덕인 옹에게서
음악을 배웠고 하미마을 후박나무 아래 샘과 그 뒤편 제각에서 절대와 퉁소를 불었으며,
친척이 되는 칠전의 박헌일 에게 서도 대금을 배웠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 후박나무 아래 샘터. 사진제공:내고향 진도카페 하태모 >
그러던 선생은 5촌 조카인 박동준(김성녀 중앙대 국악대학장의 외할아버지)의 주선으로
서울로 올라오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중앙무대의 활동이 시작되었답니다.
서울에서의 활동들은 경성방송의 방송출연들과 수많은 레코드 판의 녹음과 조선성악연구회의
활동 등으로 가히 눈부시다 할 정도였으며, 지금에 와서 대금산조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대금 산조를 만들어서 선생의 제자인 한주환을 거쳐서 이생강 서용석으로 이어지는 대금산조
계보의 창시자로 박종기 선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주환 말고도 박종기 선생의 걸출한 제자로 한범수(한범수류 대금산조)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선생의 위상이 짐작되시리라 봅니다.
< 선생의 사후에 다시 녹음된 음반의 표지>
그리고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 간에 진도에서 “아리랑 타령” “아롱 타령”등으로
각기 다른 후렴들과 함께 여러 가지로 전하던 타령들을 <진도 아리랑>으로 체계를 정리해서
정형화시킨 곡을 만드신 분으로도 유명하다 하겠습니다.
중앙의 활동도 빛나지만 진도에서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았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깊었으며 탁월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결코 오만하거나 우쭐대지 않았다는
고운 심성들이 전해지는 분입니다.
추모비의 글에도 나와 있듯이 후학들을 서울로 이끌어 주시는 등 실로 진도 국악의 선구자였고
개척자였고 창시자였으며 진정한 예인으로써 마지막으로 선생의 가시는 모습도
피를 토하면서까지 연주하던 진도 아리랑을 다 마치고 절대를 손에 꼭 쥔 채로 운명했다고 전해집니다.
연도와 시기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완도에 가서 각혈하고 쓰러져서 운명한 것으로 집약되며, 선생이 운명하자 당시에 이례적으로
군민장을 치러 선생의 마지막을 보내 드렸다고 하니 그를 아끼고 사랑한 진도 군민들의 마음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
< 대금산조 창시자 박종기 평전 >
이상 짧은 지식에 두서없이 옮긴 글들을 마치면서 궁금한 점들은 여기 사진도 나와 있는
<대금산조 창시자 박종기 평전>을 구해서 읽어 보시고(교정을 안 봤는지 곳곳에 오타가
많았습니다만) 저의 이 글에 사실과 차이가 있는 점 들은 댓글 달아 주시면 나름대로 공부해
알려 드리고 너무 많아서 못다 한 이야기들은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질~디 짐~시로 어설푼 글 읽어 주셰가꼬 무쟈게고맙구만이라. 조병현.
*** 비문에
1939년 10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로 댜 있능 것얼
평전 책에 1939년 8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로 잘못 적힝것도 몰루고 고대로 욍겠다가
오눌 아적에사 발견하고 인자사라 바로 수정 했구만이라.
그랑께 고노무 책이 오타 투셍입디다마넌 자료 가치넌 만항께 비싼돈 아깝지넌 안합디다.
9월 27일 오전 이전에 스크랩하신 분덜언 이 점 꼭! 참고 하시쇼! 꼭! 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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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읽었습니다 너무나 소중하기에 자료가 더디게 있나보네요
누군가 꼭해야할 일이지만 엄두가나지않아 (모루기도하구요) 생각하지도 못한일을 이렇듯 알기쉽게 정리하니 많은 공부가 됩니다
자료넌 많하고 구구각색이다봉께 요참에도 책이랑 음반이랑 찾고 구하니라 돈도 시간도 솔찮이 디렜구만이라. 지주에 살고 있다는 후손덜하고 연락되므는 쪼깐이라도 유품이나 생몰에 관항것덜 잘 챙개 두라고 전해 주시쇼!
감사 합니다.
조병현 선생님, 덕분에 박종기 명인에 대하여 다시 공부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부족한 글에 칭찬 감사합니다. 추모비가 잡초로 접근하기 에럽게 방치 됭것도 안씨럽구만이람짜. 우리가 매랍씨 예향이라 함시로 그 근본도 잘 간수 못 한다므는 으찌께 예향이 잇어지까? 꺽정 댜람짜.
좋은 자료를 찾아내셔서 올려주심 감사드립니다.
금메! 으짜다가 지가 이런 것까장 손 대게 되능가 우리 각시 눈치 봐 쌈시로 하는 지서리구만이라.
저도 처음보는 자료 입니다 ^*^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자료덜 찾니라고 여그저그 발품에 시간품에 잔 고상언 했제만 일반 향우 아니 음악(국악이 아니고 걍 우리 음악이여라) 한다넌 진도출신 양반네덜도 잘 몰루넌 현실이 너머 안타깝등만이라. 진도럴 예향이라 칭하넌 뿌렁군데라.
온아칙에 중요한 오타(지가 아니고 고노무 책에가 잘 못 써져가꼬라)낭 것얼 발견하고 고챘싱께 몬차 스크랩 해 가신분덜언 글 맨 아래 ***된 덧글 참고하시쇼! 감사합니다.
참으로 대단하고 훌륭한 자료입니다. 유익하게 활용하겠습니다.
2013년.
진도의 삼막리 하미마을에선
'박종기'생가살리기 운동을 전개합니다.
사셧던 집은석목 이영종(공예작가,석,목부작)씨가 매입을하여
역사적 자료등을 준비하여,
후반기부터
추가자료 수집,홍보등의 준비에 돌입하엿으며,
이는 삼막리 하미마을 '장전미술관'과
하미노인회,청년회,부녀회,출향 동민들의 합작품으로 진행합니다.
더불어,
하미마릉에 태어나신 "예술인"탑을 건립하여 역사속의 에인의탯자리임을 자랑할려합니다.
현재,22명 이상의 작가들을 배출한 '하미마을'의 자긍을 후세에 전하고,
전국의 에인 명품 마을로 자리매김할수있는 터반이 되도록 형님의 크나큰 조언과 현장지도를 부탁올립니다!
고맙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