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숨은 명산을 찾아서
홍천 약수봉(558.6m)
산보다 높은 문화, 역사의 고봉
500년 전 '월인석보', 수타사 사천왕 뱃속에서 발견
마침내 기회가 왔다
설악산을 오가다 보면 홍천 우회도로변에 수타사입구라는 팻말이 보인다. 수타계곡 또한 그 명성이 자자하여 설악산을 오갈 때면 '언제...수타사엘 한 번 들러야 할텐데... 하며 매번 지나치다가 마침내 기회가 왔다. 등산만을 목적으로 약수봉을 가기엔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대개 공작산과 연계하여 코스를 잡는다. 그러나 그것은 종주할 때의 얘기고, 약수봉 산행은 수타사를 빼고 생각할 수 없다. 신라 성덕왕(708)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영서지방의 가장 오래된 고찰로서 산세가 아름다워 일월사라 부르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세조 3년(1457)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옆에 큰 냇물이 흐른다 하여 수타사라 했다는 사실은 그렇다 치자. 허나 월인석보를 배에 품고 계셨던 사천왕님을 생각하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수타사 '생태숲 교육관'에 들러 설명을 듣고 자료도 받았다. 관계자는 "저 위에서 주차료를 받으니 생태숲을 보러 오신 분들 절반이 발길을 돌린다"고 안타까워 한다. 교육관 주차장은 무료지만 협소하고, 그 위 주차장에서는 3000원의 주차료를 받는다. 우리는 주차료를 내고 사찰 안가지 갈 요량으로 사찰 입구를 통과하는데 요금을 징수하는 담당자가 주차료 내라는 말을 안 한다. '취재차 온 걸 신통력으로 아시나보다'고 웃으며 무사통과했다. 꼭 한번 오고 싶었던 수타사 방문에 이렇게 환대를 받다니...
사천왕상 뱃속에서 500년
수타사 경내를 둘러보노라니 월인석보에 얽힌 여러 사연들이 머리를 스친다.
1446년 수양대군(세조)은 어머니 소현왕후가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해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한글로 번역하여 석보상절을 펴냈다. 이를 읽은 세종은 기뻐하며 이듬해 각 2구절에 노래가사를 붙여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세종이 죽고 왕위를 계승한 문종(수양대군의 형)마저 일찍 죽자 나이 어린 단종(수양대군의 조카)이 왕위를 계승했다. 세조는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아들 도원군이 요절하는 슬픔을 맞았다. 세조는 죽은 선왕과 세자의 명복을 비는 뜻에서, 선친의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하고, 거기에 자신의 석보상절을 주석으로 달아 통합본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월인석보'다.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의 앞 두 글자를 딴 것이다.
1459년에 간행된 월인석보는 부왕과 세자의 명복은 비는 일이었다. 허나 그 이면에는 세조가 왕권을 잡기 위해 어린 조카를 비롯해서 수많은 신하를 죽인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고, 권력 무산이란 허무감을 극복하려는 행위로 보는 시각도 있다. 월인석보는 24권으로 추정되지만 확인된 것은 12권이다. 이중 권 17, 18 두 권의 책을, 수타사 사천왕님이 500년 넘게 뱃속에 품고 계셨던 것이다. 일월사가 수타사로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의 자리에 새로운 터를 잡았던 때가 1457년이다. 또한, 도원군이 요절하자, 그 슬픔을 극복하고자 세조가 '월인석보' 편찬작업을 시작한 때도 1457년으로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모두가 보살 탓이야"
이런저런 생각이 교차하면서 수타사 경내를 어슬렁거리자 동행한 정종원 팀장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빨리 올라갔다 와야 오늘 백우산까지 취재할 수 있다구요!" 채근한다. '그렇지! 우리가 가야할 곳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바로 저 약수봉 정상이지!' 서둘러 옥수골로 향했다. 옥수암 앞마당엔 승용차가 한 대 서 있고 나이든 보살이 한 분 계셨다. 등산로가 어디냐고 묻자, 손을 들어 작은 계곡을 가리킨다.
'등산이 허락된 지 오래지 않아 아직 때가 묻지 않앗군...' 내심 즐거워하며 희미한 계곡길을 따라 20분 올라가니 갑자기 데크가 나타났다.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데크로 진입하여 오른쪽? 왼쪽? 망설이다가 왼족으로 방향을 잡고 데크를 따라갔다. 데크를 벗어나 다시 희미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니 능선이 나타났고 그 능선이 주능선일거라 생각했다. 우리는 옥수암골을 정확히 올라온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와동고개로 조금 내려갔다가 514봉을 넘으면 옥수봉 정상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일단 봉우리를 넘었다. 그런데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져야 할 등산로가 급사면으로 계속 내려가기만 한다.
"어? 뭔가 이상한데?" 지도를 펼쳐 우리가 왔던 길을 더듬어 보니, 옥수골로 올라온 것이 아니라 샘골과 옥수골 사이의 작은 계곡으로 올라온 것이다. 그러니 457봉을 넘어 와동리 수대골로 내려가고 있었다. 일단 되돌아 올라왔다. 내려간 고도의 절반쯤 다시 올라 8부 능선까지 왔을 때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희미한 길이 보였다. "와동고개로 바로 질러갑시다." 간단하게 생각하고 들어섰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 길은 멧돼지 길로써 곧 사라져버리고, 잡목과 바위지대가 섞인 급경사 사면이 나타났다. 이리저리 헤매면서 각개약진으로 봉우리를 횡단하는데 30분을 허비했다. 서로 웃으며 와동고개에 도착하니 박상준 대장과 구미모 대원의 선글라스가 없어졌다. 다행히 박 대장의 선글라스는 정 팀장이 주웠는데 구미모 대원 선글라스는 결국 약수봉에 묻었다. 사천왕의 뱃속이라면 500년은 까딱없을 텐데... 그날 저녁은 박 대장이 쐈다.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에 도착하니 옥수암에서 올라오는 정규 등산로가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고생 원인을 옥수암 보살에게 뒤집어 씌웠다. "망할 놈의 보살. 옥수암 앞마당에 주차해 놓고 등산객 다니는 게 싫어서 우리에게 엉뚱한 길을 알려준거야!" "그래, 맞아! 보살 때문이야!" "등산로는 옥수암 앞마당을 돌아 오른쪽에 있을거야!" 우리 중에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데크를 만나면 오른쪽으로 가라
하지만, 우리의 결정적인 실수는 5부 능선을 가로지르는 데크를 만났을 때였다. 왼쪽이 아닌 오른쪽으로 갔어야 했다. 데크가 왜 그곳에 설치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데크는 산허리를 가로지르므로 오른쪽(동쪽)으로 데크를 따라가다 등산로로 올라갔으면 됐었다. 558m 수타사 뒷산이라는 방심의 대가는 1시간의 시간낭비와 선글라스 한 개였다.
동굴약수는 기대했던 만큼의 감흥은 없었다. 정상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최단코스인 귕소로 내려섰다. 귕소에서 수타사에 이르는 수타계곡은 설악산 계곡을 걷는 기분이다. 등산로는 약수봉쪽으로 나있고 군데군데 데크도 설치되어 있다. 상류에 마을과 농지가 있어서 계류는 맑지 않았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
*산행길잡이
수타사주차장-(20분)-옥수암-(45분)-와동고개-(10분)-동굴약수 입구(약수 왕복 10분)-(30분)-정상-(30분)-귕소-(40분)-용담 경유 수타사-(20분)-수타사주차장
노송 군락과 천년고찰 수타사 그리고 생태공원
약수봉은 한강기맥 태기산 방면에서 갈라져 나온 맥이 홍천의 명산 공작산을 일구고, 5km 서쪽으로 더 뻗어 홍천강과 덕지천 합수점인 당뿌리에서 그 기운을 마무리하는 산이다. 산 이름의 유래가 된 동굴약수와 사행천의 물길이 바뀌면서 자연스레 생겼던 습지에다 최근 생태공원을 조성한 것도 특징이다.
약수봉은 높지 않으면서도 깊은 산에 온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원점회귀 산행은 3시간이면 충분하다. 공작산과 연계한 종주산행을 많이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약수봉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 약수봉 산행계획을 세울 때는 수타계곡과 더불어 유서 깊은 수타사 그리고 수타사 뒤를 감싸고 조성된 생태공원을 함께 둘러봐야 의미가 있다. 간단한 산행을 통해서 울적함을 달래거나 기분전환을 하고 싶을 때 보약 같은 산이다. 코스는 옥수암골~정상~귕소~수타사~생태공원을 추천한다.
*교통
대중교통 서울-홍천:동서울, 상봉터미널에서 수시. 인천에서 12회, 춘천에서 19회.
홍천-수타사:택시 15분. 버스 3회 또는 좌운리행 버스(6회)로 동면 속초에서 하차, 수타사까지 도보 2.5km. 수타사-홍천 나올 때는 택시 이용. 홍천0당뿌리는 택시 이용, 5분.
승용차 중앙고속국도 홍천나들목-일반국도 44번-지방도 444번(또는 406번)-수타사 또는 일반국도 5번, 44번, 56번을 이용해서 홍천-지방도 444번-수타사.
*잘 데와 먹을 데
홍천읍내 방면 홍천그랜드호텔 033-434-8951, 관동모텔 434-4111, 알프스모텔 433-7739.
수타사 방면 수타계곡돌집 436-4641, 종점식당 436-5620, 감자바우식당 436-0751. 모두 민박 가능하며 민물매운탕, 백숙 40,000원.
*볼거리
수타사 사천왕상 뱃속에 500년 간직되었던 '월인석보' 권17, 18이 발견된 천년 고찰. 범종(보물), 삼층석탑, 홍우당부도, 676년에 흙으로 만든 소조사천왕상, 1762년에 그린 영산회상도, 1776년에 그린 지장사왕도, 봉황문, 후불탱화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월인석보'는 월정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436-6611.
공작산수타사 생태공원 덕지천 상류 옛 물길 자리에 홍천군이 조성한 생태고우언으로 전통사찰과 생태를 조화시킨 새로운 관광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430-2636. http://www.ecogongjaksan.kr
글쓴이:이규태
참조:약수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