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1762(영조 38) ~ 1836(헌종 2))
조선의 실학자. 자는 미용.송보, 초자는 귀농, 호는 다산.삼미.여유당.사암, 시호는 문도. 천주교 교명은 요안. 본관은 나주, 이승훈의 처남. 어려서 아버지에게 경사를 배우고, 76년(영조 12) 상경, 이듬해 이익의 유고를 보고 민생을 위한 경세의 학문에 뜻을 두고 이벽에게서 서학을 배웠다. 89년(정조 13) 문과에 급제, 가주서를 거쳐 이듬해 검열이 되었으나 천주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이 공서파의 탄핵으로 해미에 유배, 10일만에 풀려나왔다. 곧 이어 지평.수찬이 되고, 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연천 현감 서용보를 파직시켰으며, 이듬해 동부승지.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 사건에 연루, 금정도찰방으로 좌천, 그 뒤 부사직.곡산부사.병조참지.형조참의를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 사업에 유득공. 박제가 등과 함께 참여했다. 99년 공서파로부터 서학 문제로 탄핵을 받자 자명소를 올리고 사직, 01년(순조 1) 신유박해때 장기로 유배된 뒤에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강진에 이배되어 유배지의 다산 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에서 19년간 경서학에 전념, 학문적인 체계를 완성하고 많은 저술을 했다. 18년(순조 18) 이태순의 상소로 풀려나와 고향에서 저술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그의 학문체계는 사상적으로 유형원과 이익의 주류를 계승하여 유학의 정신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다분히 양명학적인 데로 기울어지고 있으며, 이이의 주자학적인 실천윤리와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 북학파의 사상을 흡수, 집대성했고 이기론에 있어서 이황과 이이의 학설을 합성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翁)·태수(苔)·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안.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 출생. 1776년(정조 즉위)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 정약용 연보 >
1762년 6월 16일, 경기도파주군 초부면 마현(馬峴), 지금의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정재원(丁載遠)의 네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다. 이해에 아버지가 어지러운 정계를 떠나 시골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으므로 어렸을 때의 자를 귀농(歸農)이라고 했다. 나중에 미용(美庸), 송보(頌甫)로 바꿨다. 관명을 약용(若鏞)이라고 했다.
1765년,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1768년 이 무렵에 지은 시가 전해진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었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일세."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1770년 11월 9일, 어머니가 죽었다. 마마병의 여독으로 눈썹 위에 상처를 입어, 호를 삼미(三眉)하 하였다. 열 살 이전에 지었던 글들을 묶어서 『삼미집』 이라고 했었다.
1771년, 관직을 물러나 집에 있게 된 아버지로부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배웠다.
1776년 2월 22일, 승지 홍화보(洪和輔)의 딸과 결혼하였다. 아버지가 호조좌랑으로 복직되었으므로 서울로 이사갔다.
1777년, 매부 이승훈과 이가환을 통하여 성호(星湖) 이익(李翼)의 유고를 얻어 읽고 그를 사숙하였다. 가을에 아버지의 임지인 화순으로 따라갔다.
1781년, 서울에 과거를 치렀으나 떨어졌다. 7월에 딸을 낳았지만 닷새 만에 죽었다.
1782년, 서울 창동으로 집을 사서 이사하였다.
1783년 2월, 초시(初試) 합격, 4월에 회시(會試)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회현방에 이사하여 재산루(在山樓)에 거처하였다. 9월에 큰아들 학연(學淵)이 태어났다.
1784년 여름, 정조 임금께 『중용강의 (中庸講義)』를 바쳤다. 형 약현(若鉉)의 처남인 이벽(李蘗)에게 천주교에 대한 얘기를 듣고 책 한 권을 보았다.
1786년 7월, 둘째 아들 학유(學遊)가 태어났다.
1787년, 중희당(重熙堂)애 불려가서 정조 임금으로부터 「병학통 (兵學通)」을 하사받고, 아울러 「겸유장재 특사차서」(兼有將才 特賜此書)라는 교(敎)를 받았다.
1789년, 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3월에 초계문신(抄啓文臣), 5월에 종7품 부사정(副司正), 6월에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 겨울에 한강 배다리를 만드는 규제를 만들어 공을 세웠다.
1790년 2월, 정9품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3월 8일, 벽파(僻派)의 탄핵으로 서산군 해미현에 유배되었다. 13일 유배지에 이르렀지만 19일에 귀양이 풀렸다. 9월 정6품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서 정5품 사헌부 지평에 올랐다.
1791년 5월, 정언이 되고 10월에 다시 지평이 되었다. 겨울에 『시경강의』 800여 조를 바쳐 정조 임금의 칭찬을 들었다.
1792년 3월,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4월 9일, 아버지가 임지인 진주에서 죽었다. 겨울에 왕명을 받아 『수원성제 (水原城制)』를 지어 바쳤다. 기중기 원리를 이용하여 총경비 10만냥 중 4만 냥을 절약하였다.
1794년, 아버지의 상을 마쳤다. 7월에 정5품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다.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의 명을 받고 연천지방을 순찰하였다. 이때 목격한 비참하고 부패한 현실이 사회시를 짓게 된 계기가 되었다. 12월에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다.
1795년 1월, 정3품 동부승지에 오르고 2월에 병조참의가 되었다. 3월에 우부승지가 되었다. 「주문모신부사건」에 연좌되어 7월에 충청도 금정 찰방(종6품)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성호유고 (星湖遺稿)를 정리하였다.
1796년 10월 규영부(奎瀛府) 교서(校書 5품에 해당)가 되었다.
1797년 윤6월, 천주학을 신봉한다는 죄로 종3품 황해도 곡산부사로 좌천되었다.
1799년 4월에 정3품 병조참지, 5월에 형조참의가 되었다. 6월에 노론벽파 (老論僻派) 의 무고에 의해 『자명소 (自明疏)』를 올리고 사직하려 했다.
1800년 봄, 처자를 데리고 광주군 마재 시골집에 내려갔다. 왕명으로 다시 올라왔지만 6월 28일에 정조임금이 승하하여 다시 시골로 내려갔다. 당호를 여유당 (與猶堂)이라고 하였다.
1801년 2월 9일 정원의 논계로 옥에 갇혔다. 3월 경상도 장계로 유배되었다. 이때 둘째형 약전(若銓)은 신지도로 유배되었고,
세째형 약종(若鐘)은 감옥에서 죽었다. 10월에 「황서영백서사건」으로 다시 붙잡혀서 11월에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갔다.
1803년, 강진에서 석교(石橋)로 자하산(紫霞山)으로 옮겨 다녔다.
1805년 겨울, 큰아들 학연이 찾아왔기에, 관은산방(寬恩山房)에서 「주역」, 「예기」 등을 가르쳤다.
1808년 봄에 강진군 만덕리 귤동에 있는 윤박(尹博)의 다산초암(茶山草庵)으로 옮겨 왔다.
1817년, 「목민심서(牧民心書)」 저술에 착수하였다.
1818년 봄에 「목민심서」 48권이 이뤄졌다. 8월에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귀양이 풀려서 다산을 떠났다. 9월 14일에 마재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1822년, 회갑을 맞아 스스로 묘지명을 지었다. 글벗, 제자들과 함께 금강산을 다녀왔다.
1827년 10월에 윤극배(尹克培)가 모함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마침내 죄 없음이 드러났다.
1836년 2월 22일, 진시(辰時) 초에 마재 자택 정침에서 조용히 죽었다. 4월 1일, 여유당 뒷동산 (지금의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 묻혔다.
1910년 7월 18일, 정2품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를 문도공(文度公)이라 하였다.
1934-38년, 정인보, 안재홍, 김춘동이 교정한 『여유당전서』 76책이 신조선사에서 간행되었다.
< 다산 정약용과 차 이야기 >
다산 정약용은 '실학(實學)의 집대성자'이며, 조선후기 다인이었다.
다산은 1762년 남인에 속하는 관료학자 정재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산이 다인으로서 유명해진 것은 1800년을 전후로 하여 당시 반대파에 몰려 20년 가까운 귀양살이를 하면서 부터이고, 귀양지 중에서도 강진의 귤동 뒷산 즉 다산(茶山)이라는 山의 초당(艸堂)이 유명하다. 다산이 귀양살이를 하던 귤동 뒷산에는 차나무가 야생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산이름이 다산이 된 셈이고, 지리적으로 지리산 일맥(一脈)인 관계로 자연적으로 차나무가 번식된 것인지 그 이전에 귤동에 차를 사랑하는 선비가 있어 차나무를 옮겨 심은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다산초당(茶山艸堂) 부근에는 차나무가 무수히 야생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다산은 저술하는 틈틈이 이 차나무를 돌보고 재배했다고 한다. 그리고 초당 뒷편 바위 틈을 파서 약수터를 만들고, 그 이름을 약천(藥泉)이라고 했다. 또 초당 앞 뜰에는 크고 널찍한 바위를 옮겨다 놓고, 그 바위에서 차를 끓였다. 그 바위 이름이 바로 차조(차 부뚜막)이며 그 앞으로 대나무가 무성하고 소나무 사이로 남해 바다가 건너 보인다고 한다.다산은 아득한 하늘가 절역(絶域)에서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서 있다"고 독백하였다. 아득한 절역에 홀로 서 있는 다산은 차로써 그 고독을 이길 수 있었다. 다산에서 나는 차와 약천의 간석수를 차조위에서 끓여 마사면서 "시원하기 마치 안개를 머금는 듯 하다"고 했다. 다산의 저술 중 실학에 관계된 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했지만 많은 시문과 차시도 발견되어진다.
초의 스님과는 초의 스님이 23세때 다산과 교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다산의 차생활은 차라고 하는 것이 지극히 순(純)하고 고요한 음료에서 흘러 나오는 천둥, 번개 소리가 삼국시대 신라의 화랑정신으로 화한 것이라고 보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실학의 집대성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차와 실학의 일체화를 볼 수 있다.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조선 시대의 실학자, 문신. 호는 다산(茶山)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실용 지학·이용 후생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 공담을 배격하고 봉건 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벼슬살이하던 득의의 시절, 제2기는 귀양살이하던 환난 시절, 제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 자적하던 시절이다. 제1기는 22세 때 경의진사가 되어 줄곧 정조의 총애를 받던 시절로서 암행어사·참의·좌우부승지 등을 거쳤으나, 한때 금정찰방·곡산부사 등 한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학문적 업적은 그리 대단한 것은 없으나 16세 때 이미 서울에서 이가환·이승훈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에 접하였고, 23세 때에는 이벽을 통하여 서양 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유학 경전에 관한 연구로는 <내강중용강의>, <내강모시강의> <희정당대학강의> 등이 있으며, 기술적 업적으로는 1789년 배다리의 준공과 1793년 수원성의 설계를 꼽을 수 있다. 1801년 2월 정조가 죽은 후 세력 다툼의 와중에서 체포·투옥되면서 그의 득의 시절은 막을 내렸다. 제2기는 1801년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 북도 포항 장기에서 시작한 유배 생활이다. 그 해 11월에 전라 남도 강진으로 이배될 때까지 9개월간 머무르면서 <고삼창고훈>, <이아술> <기해방례변> 등의 잡저를 저술하였으나 서울로 옮기던 중 없어져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이배된 강진에서의 유배 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 체계를 완성했다. 특히 1808년 봄부터 머물은 다산 초당은 바로 다산학의 산실이었다. 귀양에서 풀린 그는 제3기에는 회갑 때 <자찬묘지명>을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하였다. 그는 유배 생활에서 향촌 현장의 실정과 봉건 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습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유배의 처참한 현실 속에서 개혁의 대상인 사회와 학리를 연계하여 현실성 있는 학문을 완성하고자 하였다. 총 500여 권을 헤아리는 그의 <여유당전서>에는 유명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가 포함되어 있다. <경세유표>는 당시 행정 기구와 법제 및 경제 제도를 대폭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것이고, <목민심서>는 현 국가 체제를 인정한 위에서 목민관을 중심으로 한 향촌 통치의 운영 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흠흠신서>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옥사에 대해 통치자의 인정·덕치의 규범을 명확히 하고자 저술되었다. 그는 유형원·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일컬어진다. 세상을 떠난 뒤 규장각 제학의 벼슬이 내려졌다.
◈ 수원성(水原城)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곽. 화성(華城)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흙으로 된 읍성이었으나 1794년(정조 18년)에 새로이 성곽을 쌓음으로써 둘레가 4, 424m이고, 넓이는 약 206만㎡에 이른다. 이 성곽은 정약용의 서양식 축성법에 기초를 둔 성제(城制)에 따라 설계되었다. 공사에는 거중기 등의 기계를 활용하였고, 재료로는 돌과 벽돌을 사용하되 규격화한 점이 특색이다. 성곽의 주요 건축물 가운데서도 특히 팔달문, 장안문, 창룡문, 화서문, 서장대, 남장대, 화홍문, 방화수류정 등이 유명하다. 사적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저서를 총정리하여 한데 모은 문집. 문집명은 정약용의 당호인 여유당에서 따왔다. 154권 7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성진 편저, 정인보·안재홍 교열. 1936년 신조선사에서 간행하였다. 정약용은 정치·경제·법률·의학 등의 각 방면에 깊은 지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신학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 저서가 500여 권에 이르렀는데, 이 책에서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아언각비> 등에서 <시율(詩律)>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총망라하고 있다. 모두 7집으로 되어 있다. 차례를 보면, 제1집은 시문집 25권 12책, 제2집은 경집 48권 24책, 제3집은 예집 24권 12책, 제4집은 악집 4권 2책, 제5집은 정법집 39권 19책, 제6집은 지리집 8권 4책, 제7집은 의학집 6권 3책으로 되어 있다. 제1집에는 1, 312수에 이르는 시가 실려 있는데, 14세 때 작품인 <회동악>을 비롯해 유배지에서 풀려나 고향에 머물렀던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행해진 시작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제2집인 경집은 <대학> <중용> <맹자> <논어> 등 사서와 <시경> <상서 <춘추> <주역> 등 사경으로 되어 있다. 제3집인 예집은 예에 대한 저술로서 관혼상제 가운데 상례에 대한 저술이 가장 방대한 양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크리스트 교도들에 의한 상제례 경시 풍조에 의한 영향으로 짐작된다. 제4집은 악집으로 진시황의 분서 때 없어진 <악서>를 다시 찾기 위하여 여러 경서에 흩어져 있는 글들을 모아 엮어 놓은 것이다. 제5집 <정법집>에는 현실적인 개혁 의도가 담겨 있는 국가 제도론인 <경세유표>와 목민의 도리를 역설한 <목민심서>, 목민관의 주요 임무의 하나인 형사에 대한 행정을 따로 서술한 <흠흠신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6집 지리집에는 <강역고>와 수로 주변의 지리서인 <대동수경>이 있다. 의학집인 제7집은 <마과회통>과 부록인 <의령>이 수록되어 있다. 1962년 문헌 편찬 위원회에서는 이 전서에 빠진 다산의 병서인 <민보의(民堡議)> 3권과 보유 1권을 덧붙여 이를 <정다산전서>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그리고 1970년에는 경인 문화사가 <여유당보유전서> 5책을 추가해 영인본을 출간하였다.
◈ 목민심서(牧民心書)
문신이자 학자였던 다산(茶山) 정약용이 고금(古今)의 여러 책에서 지방 장관의 사적을 가려 뽑아 지방관의 도리를 깨우쳐 주려고 지은 책. 필사본 48권 16책으로 규장각 도서이다. 이 책은 정약용이 57세 되던 해에 지은 것으로서, 그가 신유사옥으로 전라도 강진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중 유배가 풀리던 해인 1818년에 완성되었다. 이는 저자가 가장 원숙해 가던 때에 이루어진 저술로 그의 많은 저서 중 대표적인 것이다. <경세유표(經世遺表)>가 정부 기구의 제도적 개혁론을 편 것이라면, 이 책은 지방관의 윤리적 각성을 위하여, 농민과 섬 주민의 생활 실태· 벼슬아치들의 부정·토호(土濠)들이 저지르는 폐단 등을 일일이 들어 논한 것이다. 내용은 모두 12편(篇)으로, 각 편을 6조(條)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엮었다. 먼저 1편부터 4편까지의 네 편은 목민관의 기본 자세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설하고 있는데, 첫째 목민관 선임의 중요성, 둘째 청렴·절검의 생활 신조, 셋째 민중 본위의 봉사 정신 등을 들고 있다. 다음 5편부터 10편까지의 여섯 편은 <경국대전>의 6전에 의하여 목민관의 실천 정책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두 편은 수령의 실무에 속하는 빈민의 구제와 수령이 임기가 차서 교체되는 과정을 적은 것으로서, 벼슬길에서의 선종(善終)을 지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부패한 사회상을 엿볼 수 있고, 사회·경제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경세유표(經世遺表)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지은 책. 정치 제도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개혁의 의견을 구체적으로 적은 다음에 고금의 실례를 들어 보인 내용이다. 1810년(순조 1년)에 있은 천주 교도 박해 때 전라도 강진에 귀양가 있는 동안에 지은 것으로,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흠흠신서(欽欽新書)
조선 정조 때 정약용이 지은 법정에 관한 책. 30권 10책의 사본으로 순조 22년(1822년)에 간행되었다. 형벌에 관계되는 일은 사람의 목숨에 관한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가볍게 다루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그 임무를 맡은 관리들이 유의할 점을 적은 내용이다. <정다산 전서(丁茶山全書)>에 수록되어 있으며, 한국 법제사와 사회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 아언각비(雅言覺非)
정약용이 지은 어원 연구서. 3권 1책으로, 1819년(순조 19년)에 간행되었다. 약 200항목에 달하는 수목, 약, 식물, 의관, 악기, 건축물, 어류, 지리, 곡물 등의 이름과 어원을 밝혀 놓았으며, 와전된 것과 쓸 데가 모호한 것을 바로잡아 놓았다. 1911년 경성 고서 간행회에서, 1912년에는 광문회에서 각각 중간하였다.
◈ 마과회통(痲科會通)
조선 순조 때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마진(痲疹 : 홍역)의 치료에 관하여 편찬한 의학서. 6권 3책으로, 이몽수의 <임신방>, 허준의 <벽역신방>, 조성준의 <급유방>, 이경화의 <광제비급> 등 마진에 관한 연구들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부록에는 ‘종두방서’를 실어 제너의 종두법을 소개하였다.
◈ 민보의(民堡議)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쓴 국방 체제에 관한 책. 강진에서 유배 중이던 1812년에 저술하였으며, 민보 제도를 논한 병서로서 필사본이다. 3권 1책.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 조선의 농촌 사회는 군사적으로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 양난을 겪은 뒤 군제를 다시 정비하려 했으나 근본적인 변화 없이 상민의 군역 부담만 커지고 고역이 됨에 따라 국가 방위 체제의 문제점이 표면화되었다. 또 관료 조직 전체가 재정 궁핍과 행정적 부패 속에서 허덕이고 외침에 대해서는 극도로 겁약했다. 실제 평안도 농민 전쟁의 소문과 왜구의 침입이 있으리라는 유언 비어가 남해안 지방에 퍼지자 많은 백성들이 피난을 가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에 정약용은 어떻게 하면 농민들이 침략을 당하더라도 스스로 단결하여 자신들을 보호하고 적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중요 지역마다 산성을 쌓고 그 곳을 전시 대피소 및 유격전의 거점으로 이용하는 산성 중심의 농민 자위 체제를 구상하여 제안했다. 즉 병란이 일어나면 적이 사용할지도 모르는 식량과 가산 일체를 가지고 산성으로 집결하여, 식량 조달이 불가능한 적에 대하여 장기 저항전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위 체제는 원칙적으로 관권의 개입 없이 단지 일반 백성들의 자율적 통제하에 운영될 것이었다. 전시에 농민들의 자위 및 항전의 거점으로 이용될 이러한 산성을 그는 민보라고 불렀다. 이 민보에 의한 농민 자위 체제는 이미 명나라의 변경 지방에서 시행된 적이 있었고, 민보의 설치와 운영 방식에 관한 책자가 명나라 말의 군사 자료 총서인 무비지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정약용은 이 저서를 참고로 하면서 실제적인 사항들은 조선의 지리와 임진 왜란의 경험에 비추어 독자적으로 재구성하였다. <민보의>에 의한 민보 방위론은 19세기 이후 재야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어초문답> <민보집설> <민보신편> 등의 민보 방위 저서가 나타났다.
◈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
조선 정조 때의 문신·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의 시문 및 저술을 총망라한 전집. 활자본이며, 156권 4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1936년 정인보(鄭寅普)·안재홍(安在鴻)의 교열로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하였다. 전질 154권 67책의 방대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대본으로 하여 1960년 문헌 편찬 위원회에서 민보의(民堡議) 1권 1책과 저자의 연보 1권이 빠진 것을 채워 넣어 <정다산 전서(丁茶山全書)>라는 이름으로 사진으로 복사 인쇄하고 출판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문집(詩文集)에는 부(賦)와 시(詩)가 약 2, 500수나 수록된 것을 비롯하여, 대책(對策)으로 지리책(地理策)·십삼경책(十三經策)·문체책(文體策)· 인재책(人才策)·전선(戰船)·조운(漕運)·황정(荒政)· 농업(農業)·율도량형(律度量衡)·전폐(錢幣) 등의 책문(策文)과 헌의(獻議)·소차(疏箚)·원(原)·설(說)·장계(狀啓)·논(論)· 변(辨)·잠(箴)·명(銘)·송(頌)·찬(贊)·서(序)·기(記)· 발(跋)·제(題)·서(序)·묘명(墓銘)·비문(碑文)·제문(祭文)· 뇌문·유사(遺事)·행장(行狀)·전기(傳記)·증언(贈言)· 가계(家誡)·서간(書柬)·강학기(講學記)·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등의 잡문(雜文) 및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에 잡찬집(雜纂集)으로 문헌비고간오(文獻備考刊誤) 1권, 아언각비(雅言覺非)·이담속찬(耳談續纂)·소학주관(小學珠串) 등 2권, 경집(經集)으로 대학공의(大學公議) 1권, 대학강의(大學講議) 1권, 중용자잠(中庸自箴) 1권, 중용강의 1권, 맹자요의(孟子要義) 2권, 논어고금주 10권, 시경강의(詩經講義) 3권, 시경강의 보유(補遺) 1권, 상서고훈서례(尙書古訓序例) l권, 상서고훈 7권, 매씨서평(梅氏書平) 4권, 춘추고징(春秋考徵) 4권, 주역사전(周易四箋) 8권, 역학서언(易學緖言) 4권 등이다. 예집(禮集)으로 상례사전(喪禮四箋) 16권, 동 외편(外篇) 4권, 상의절요(喪儀節要) 2권, 제례고정(祭禮考定) 1권, 가례작의(嘉禮酌儀)와 예의문답(禮儀問答) 1권, 풍수집의(風水集疑) 1권 등이다. 그리고 악집(樂集)으로 악서고존(樂書孤存) 4권, 정법집(政法集)으로 민보의(民堡議) l권, 경세유표(經世遺表) 15권, 목민심서(牧民心書) 14책, 흠흠심서(欽欽心書) 1권, 지리집(地理集)으로 강역고(疆域考) 4권, 대동수경(大東水經) 4권, 의학집(醫學集)으로 마과회통(麻科會通) 6책, 의령(醫零) 1권 등이다. 보유(補遺)로 저자의 현손 규영(奎英)이 엮은 연보(年譜) 수사본 1권이 별책으로 영인되어 있다. 이상의 많은 분량의 저서는 정약용이 우리 나라의 철학·정치·경제·법제·역사·지리·국방·과학 및 그 밖의 모든 학문에 걸쳐서 뛰어난 견문과 지식으로 문헌을 통하여 증거로써 설명함과 더불어 실학적(實學的)으로 집대성한 국학 연구의 기본적 교본(敎本)이다. 그러나 이 전서에는 고본이 흩어져 없어지고 수록되지 못한 것도 있으며, 전서의 원본 가운데에도 6·25 전쟁으로 일부 흩어져 없어진 점 등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 전서 가운데 <목민심서>, <흠흠심서>· <아언각비>, <민보의>, <경세유표>, <강역고> 등은 각기 단행본으로 여러 곳에서 한글로 번역·간행되었다.
◈ 이담속찬(耳談續纂)
중국 명나라의 왕동궤가 지은 책 <이담>에 우리 나라 고유의 속담을 증보한 책. 1권 1책으로 되어 있으며 다산 정약용이 엮었다. 내용은 170여 조의 중국 속담과 210조의 우리 나라 속담으로 되어 있다. 우리 속담은 모두 8자의 한자로 표현하였으며, 그 아래에 한문으로 그 뜻을 적어 놓았다. 당시의 우리 속담을 집대성한 것으로 특히 민속학 연구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고 있다
◈ 대학공의(大學公議)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대학(大學)>을 주석한 책. 필사본이며, 3권 1책이다.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초계 문신(抄啓文臣)으로 뽑힌 저자가, 1814년(순조 14) 때 다산초당에서 저술한 것으로, 처음 <대학>의 작자에 대한 여러 가지 설과 <대학>이 세간에서 유행하고, 또 사서(四書)의 하나로 들게 된 내력 등을 적은 다음, 본문의 각 절(節)을 들어 그 밑에 저자 자신의 의견을 기록하고 이를 의(議)라고 하였다. 그밖에 안설(案說)·인증(引證)·고정(考訂)·기사(記事) 및 답난(答難) 등을 붙이고, 중요한 대목은 도식을 만들어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대학공의>는 정약용의 저서를 한데 모아 정인보(鄭寅普 1892∼1950)·안재홍(安在鴻 1891∼1965)이 교열하여 1936년 신조선사에서 간행한 154권 76책으로 구성된 문집, <여유당전서> 제2경집(經集) 제1권에 들어 있다. 경집에는 이외에 대학강의(大學講義) 1권, 중용자잠(中庸自箴) 1권, 중용강의 1권, 맹자요의(孟子要義) 2권, 논어고금주 10권, 시경강의(詩經講義) 3권, 시경강의 보유(補遺) 1권, 상서고훈서례(尙書古訓序例) l권, 상서고훈 7권, 매씨서평(梅氏書平) 4권, 춘추고징(春秋考徵) 4권, 주역사전(周易四箋) 8권, 역학서언(易學緖言) 4권 등이 수록되어 있다.
◈ 대학강의(大學講義)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대학>을 강의한 내용을 기록한 책. 필사본이며, 1책으로 되어 있다.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힌 저자가, 1798년에 왕명으로 국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창덕궁의 희정당(熙政堂)에서 <대학>을 강론하고 문신들이 질문하는 데 대하여 응답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희정당은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에 있으며, 보물 제815호로 지정되어 있는 건물이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 왕의 특명으로 시관(試官)과 강원(講員)들이 모여 일반 서당에서의 강학의식(講學儀式)을 논의하였다. 책에 이때의 문답도 기록되어 있다. <대학강의>는 정약용의 저서를 한데 모아 정인보(鄭寅普 1892∼1950)·안재홍(安在鴻 1891∼1965)이 교열하여 1936년 신조선사에서 간행한 154권 76책으로 구성된 문집, <여유당전서> 제2경집(經集) 제2권에 들어 있다. 경집에는 이외에 대학공의(大學公議) 1권, 중용자잠(中庸自箴) 1권, 중용강의 1권, 맹자요의(孟子要義) 2권, 논어고금주 10권, 시경강의(詩經講義) 3권, 시경강의 보유(補遺) 1권, 상서고훈서례(尙書古訓序例) l권, 상서고훈 7권, 매씨서평(梅氏書平) 4권, 춘추고징(春秋考徵) 4권, 주역사전(周易四箋) 8권, 역학서언(易學緖言) 4권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규장각 도서이다.
◈ 맹자요의(孟子要義)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맹자(孟子)>를 풀이한 책. 필사본, 9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장각 도서이다.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어 있던 1814년에 저술한 책으로 <여유당 전서> 제2집 5, 6권에 수록되어 있다. 서설은 모두 5절로 되어 있는데, 그 중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기>의 견해에 따라 맹자가 자사(子思)에게서 직접 배운 것이 아니라 자사의 문인으로부터 수업을 받았다는 것, 둘째, 맹자의 아들인 자거(子車)에 대한 것, 셋째, <맹자>의 저자가 맹자 자신일 것이라는 문제에 관한 것, 넷째, <맹자> 이외에도 다른 책이 4편 있다는 것, 다섯째, 조기(趙岐)·정항(鄭亢)의 해설에 대해서 변론한 학설을 싣고 이어서 작자 자신의 견해도 함께 싣고 있다. 본문 '주석'은 <맹자>의 전문을 풀이한 것이 아니라, 주자의 <맹자> 해석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만을 선별하여 풀이하고 있는데, 고금주의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으려는 정약용의 기본 태도가 보인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기나 주희가 주장하는 만승 천자설(萬乘天子說)을 부인하면서 만승이 진(晉)·제(濟)와 같은 제후임을 증명하고 있다. 둘째, 성(性)이 기호(嗜好)라는 새로운 이론의 근거를, <맹자>의 동심인성(童心忍性)과 이목구체(耳目口體)의 기호의 성(性)이라고 한 데서 찾아내고 있다. 셋째,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흉년에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과 같은 것이고, 또한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다. 넷째, 고대 중국의 하·은·주에서 실시한 정전법이라는 토지 제도는 토지를 정방향으로 만든 후에 실시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정에 맞도록 했다는 것이다. 다섯째, 선악이라는 것은 역행(力行)에 있어서 기질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주자의 인의예지 선천설(仁義禮智先天說)에 대한 후천적인 실천 의지가 중요한 것이라고 했으며, 목민자의 실천 의지와 인(仁)을 강조하였다.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을 통해 정약용은 주자의 토지 개혁설과는 달리 <맹자>의 정전법을 현실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당시의 지주 위주로 된 토지 제도의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조선 시대 후기의 실학자인 정약용이 <논어>에 주석을 붙여 지은 책. <여유당전서> 제2집 제7권부터 16권에 걸쳐 실려 있다. <맹자> <대학> <중용>과 함께 4서의 하나인 <논어>는 성인으로 존경받는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책으로서 우리 나라에서도 선비라면 반드시 배워야 하는 중요한 고전이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이 <논어>에 대한 주석서를 펴내기도 하였다. 정약용은 호를 다산이라고 하며, 유형원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 학풍을 계승하고, 연암 박지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의 기술 도입론을 과감하게 받아들여서 방대한 저서를 지어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였다. 또 시에도 재능이 뛰어나서 어릴 때부터 사실적이고 애국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다. <논어고금주>는 정약용이 그의 제자인 이강희와 윤동 등과 함께 여러 해에 걸쳐 자료를 수집하여,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때인 1813년 겨울에 완성하였다. 신유 사옥은 신유 교난이라고도 하는데, 순조 1년 때인 1801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사건을 말한다. 정조 15년 때인 1791년에 일어난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해사옥 이후로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묵인하자는 신서파와 이를 반대하는 공서파가 대립하였다. 정조가 왕위를 지키고 있을 때에는 천주교도들에게 관대한 입장을 취하여 교인의 숫자가 한때 1만여 명에 이르렀으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정순 대비가 수렴청정(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행하는 것으로, 나이가 어린 왕이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대신 정치에 관한 모든 사항을 맡아 하는 것을 말한다)을 하게 됨으로써 상황이 바뀌었다. 노론과 벽파는 공서파와 결탁한 다음, 시파와 신서파를 공격하기 위하여 정순 대비를 등에 업고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이 사건으로 정약용의 매부인 우리 나라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약용도 그의 형인 정약전과 함께 귀양 보내졌다. 이 책 제목의 고금주라는 것은 <논어>에 관한 이전까지의 모든 주석서를 모아 놓았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중국의 한나라 때의 주석인 고주와 송나라 때의 주석인 신주 등 모든 주석을 총망라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정약용은 이 책에서 고금주 외에도 175장에 달하는 많은 분량의 글로써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 부분은 책의 첫머리에 원의 총괄이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는데, 여기서 정약용은 주자의 심성론적 인설(仁說)과 충서 이덕설(忠恕二德說), 심덕설(心德說)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나타내고, 인(仁)과 서(恕)와 덕(德) 세 가지를 들어 실천 윤리적 유교의 본질을 밝히고 있다. 한편 이 책에는 부록으로 <논어대책>과 <춘추성언수>가 실려 있다. <논어대책>은 정조 15년 때인 1791년에 지은 것이고, <춘추성언수>는 <춘추>와 <국어> 등 <논어> 이외의 책에서 믿을 만한 공자의 말들을 뽑아서 실은 것이다.
◈ 시경강의(詩經講義)
조선 후기 실학자로 알려진 다산 정약용이 <시경>에 대하여 조목별로 해설을 덧붙인 책. 정약용이 <시경강의>를 저술하게 된 것은 1791년 정조가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의 오경 가운데 하나인 <시경>에 대하여 궁금한 것을 조목별로 상세히 물은 것을 강의 형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원래는 12권 4책으로 구성되었으나 지금은 3권 1책만 남아 있는 필사본이다. 지금 보존되고 있는 3권 1책은 정약용이 1808년 전라 남도 강진의 다산 초당에서 완성하였다. 책머리에 실려 있는 정약용의 서문에 의하면, 자신이 활 쏘기 시험의 성적이 좋지 않아 그 벌로 창덕궁 북쪽에 있던 훈련도감의 분영인 북영에서 숙직하고 있을 때 정조가 <시경>에 대하여 물은 800여 개의 항목에 대하여 응답한 것이다. 정약용은 <시경강의>에서 먼저 정조의 물음을 기록하고 각 항목마다 한 자 내려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였다. 이 때부터 20년이 지난 뒤 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하던 중에 당시의 기록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다시 이를 보완하였다. 권1에서는 정약용의 서문에 해당하는 자서와 <시경>에 대해 전체적인 견해를 담은 총론, 주남(周南)에 대한 질문과 해설을 기록하고 있다. 권2부터는 <시경>의 차례에 따라 각 항목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싣고 있다. 보유는 먼저 보유를 쓰게 된 까닭을 소개한 자서와 총론으로 국풍(國風)과 주남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소개하였다. 또, 소서(小序)와 시경육의(詩經六義)에 대한 여러 유학자들의 주장과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그 밖에 보유의 뒷부분에서는 다시 일시(逸詩)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는 여러 경전에 흩어져 있는 신궁·이수 등 일시의 구절을 엮어 이를 설명한 것이다. 말미에 보유를 받아 쓴 무인 이정이 수집한 <한서>에 인용되어 있으나 아직 크게 알려지지 않은 구하고(九夏考)를 함께 소개하였다. 정약용은 선진 수사학을 실학의 사상적인 토대로 여기고 경전 연구에 많은 집착을 하였다. <시경강의>는 정약용의 경전 연구의 한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현재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 주역사전(周易四箋)
조선 후기의 학자 정약용이 주자의 <주역본의>에 근거하여 주역 사법을 풀이한 책. 24권 12책으로 된 필사본이다. 저자가 강진에 유배되어 있을 때인 1808년(순조 8)에 4차례의 수정 작업을 거쳐 간행되었다. 1804년(순조 4) 주역을 주석하여 갑자본을 지었으며, 이어 1805년에는 갑자본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을축본을 지었다. 다음 해에 병인본을 펴냈고, 1807년 이학래로 하여금 병인본에서 빠져 있거나 잘못된 글자를 바로잡게 하여 정묘본을 지었다. 1808년 최종적으로 정묘본의 정밀하지 못한 사리와 그릇된 상의를 바로잡아 무진본을 완성시켰다. 저자는 주역 사법을 추이·물상·호체·효변으로 나누어 풀이하고, <주역>의 독서 요지를 서술하였는가 하면, 도표와 함께 괘사의 사상을 해설하고, '용안'이라 하여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이 책은 역학적인 접근 방법으로 사물의 본질과 이치를 연구하고 자신을 수양하려 하였던 정약용의 실학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