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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 사찰순례 미황사, 다산초당, 백련사 불기 2559(2015) 년 4월 27일
<미 황 사>
첫 번째 순례 사찰인 달마산 미황사 일원은 2009년 9월 18일 명승 제59호로 지정되었으며, 달마산은 삼황(三黃)이라고 하는데 불상과 바위, 석양빛이 조화를 이룬 것을 말하며, 바위병풍을 뒤로 두르고 있는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년) 창건 이후 각종 역사 문화적 유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달마산 경관과 조화를 잘 이루는 풍치 절경의 산사이다. 도솔봉-달마산 능선에서 내려다보이는 남해의 섬과 미황사, 달마산 일대의 수려한 경관, 산능선부에 풍화에 매우 강한 규암층이 길게 노출되면서 발달한 흰색의 수직 암봉들이 병풍같이 늘어서 있어 자연경관이 뛰어난 경승지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있는 절로서 749년(경덕왕 8) 의조(義照)가 창건하였다. 부도밭 가는 길에 숙종 18년(1692)년에 세워진 사적비가 하나 있다. 비문은 당시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지었는데,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를 적고 있다. 신라 경덕왕 8년(749) 8월에 돌로 된 배(石船) 한 척이 아름다운 범패 소리를 울리며 사자포(땅끝마을) 앞바다에 나타났다. 배는 며칠 동안이나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다가오고 했는데, 의조(義照)화상이 두 사미승과 100여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했더니 육지에 닿았다. 배 안에는 금으로 된 사람(金人)이 노를 잡고 있었고 금으로 된 함과 검은 바위가 있었다. 금함 안에는 화엄경, 법화경 같은 경전과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과 40성중·53선지식·16나한의 상과 탱화 등이 들어 있었고 검은 바위를 깨뜨렸더니 검은 소가 뛰어나와 금세 큰 소가 되었다.
그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서, 자기는 우전국(인도) 왕인데 금강산이 일만불을 모실 만하다 하여 불상들을 싣고 갔으나 이미 절이 많이 있어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던 길에 금강산과 비슷한 이곳을 보고 찾아왔는데,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안치하면 국운과 불교가 흥왕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의조화상이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나섰더니 소가 달마산 중턱에서 한 번 넘어지고 또 일어나서 한참 가다가 크게 울며 넘어지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의조화상은 소가 처음 멈췄던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절 이름을 미황사라고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해서 ‘미’자를 넣고 금인의 빛깔에서 ‘황’자를 딴 것이라 한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947호 미황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건물의 공포 모습을 볼 때 18세기 중반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건축시기도 이 무렵으로 보고 있다.
관음사와 미황사 주지스님
미황사괘불탱(美黃寺掛佛幀) 보물 제1342호 이 괘불은 조선 영조 3년(1727)에 탁행·설심·희심·임한·민휘·취상·명현 등이 그렸는데, 본존불을 크게 강조한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또한 녹색과 적색의 밝은 선염(渲染)과 녹두색·분홍·황토색이 사용되어 은은하면서도 환상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가뭄이 들 때 걸어 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를 내리게 한다는 괘불로 근래에도 몇 차례 ‘영험을 증명’한 적이 있고, 심지어 기우제 도중에 비가 쏟아져서 배접이 떨어진 일까지 있다. 1993년에 손상된 괘불을 수리하고 기념행사를 가졌었다. 그림은 독존도 형식이며 머리 양옆에 합장한 부처가 세 분 앉아 있고, 무릎 좌우에는 향로를 든 보살상과 ‘금함’을 든 사자상이 그려져 있어서 창건설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보전 천장에는 일천불의 벽화가 있는데 국내에서 보기드문 수작이다. 특히 천장 곳곳에 그려진 천불의 부처님 때문에 미황사 대웅보전에서 세 번만 절을 올리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부처님이 천 분이시니 세 번이면 삼천 배가 되니 어찌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 있으랴?
대웅보전 어칸(전면의 중앙 칸-현판이 걸려있는)의 앙쪽 기둥머리의 용두(龍頭)로
바깥쪽에 용머리(사진 위 오른쪽)와 법당의 안쪽에 용미(용의 꼬리, 사진 위 왼쪽)가 장식되어 있다.
명부전 명부전 안에 있는 10대 시왕을 조각해 모신 사람은 '자화상'이 국보로 지정되어 유명한 공재 윤두서다. 그가 명부전에 10대 시왕을 모신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어 절 근처에 있던 은행나무를 베어 10대 시왕을 조성했는데 그 후 신기하게도 10명의 아들을 보았다 한다. 더욱 믿지 못할 일은 시왕 중 네 번째 시왕의 두 눈 크기가 실수로 서로 다르게 조각되었는데 그의 넷째 아들도 눈 크기가 달랐다 한다.
응진당(應眞堂) 보물 제1183호 석가모니부처님, 좌우에 아난, 가섭존자가 모셔져 있고 16나한상, 인왕상, 시자상, 동자상 및 불패가 모셔져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응진당 내부 벽면에 수묵(水墨)으로 그려진 나한 벽화는 유려한 선맛이 선필(禪筆)의 경지를 보인다. 건축연대는 1982년 대웅전 보수공사 때 대들보에서 나온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대웅전과 같은 해인 1751년 상량(上樑)된 것으로 18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응진당 마당은 사찰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이 응진전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일품이다. 특히 해질 녘 진도와 그 밖의 뭇섬들이 붉은 바닷물 위로 떠 있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다.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 전각이며 산신탱화, 독성탱화, 칠성탱화가 모셔져 있다. 대웅보전 앞 모란
부도전 부도밭은 대웅보전에서 남서쪽으로 동백나무 숲길을 따라 도보 10여분 거리에 자리 잡았다. 여기에서 부도밭은 다시 남쪽과 서쪽 두 구역으로 나뉘어 남부도밭에 21기, 서부도밭에 6기 등 제법 많은 다양한 형식의 부도를 모시고 있다. 이들 부도의 조성 시기는 대부분 18~19세기로 추정된다. 남부도밭은 창건설화에 전하는 통교사 터로 알려져 있다.
설봉당대사(雪峰堂, 1678~1738)부도 설봉당대사는 서산대사의 4대 법손으로 법명이 회정(懷淨)이고 자가 윤중이며, 호가 설봉인 그의 속성은 조씨이며 낭주[영암??] 사람이다. 그는 16세에 머리를 깎고 화악 문신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죽음에 이르러 "사람의 나고 죽음이 주야가 바뀌는 이치와 같거늘 무엇이 슬프더냐"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겼다. 浮雲來無處(부운래무처) 去也亦無蹤(거야역무종) 細看雲去來(세간운거래) 只是一虛空(지시일허공) 떠다니는 구름 온 곳이 없듯 가는 곳 역시 자취가 없네. 구름 오고감을 자세히 살펴보니 단지 하나 허공일 뿐.
미황사사적비(美黃寺事蹟碑) 비신(碑身)은 크기가 높이 280cm, 폭 129cm, 두께 33cm이다. 이수는 용을 얹은 조각이다. 이 비문을 지은이는 민암(閔? ; 1636∼1694)인데 자는 장유(長孺), 본관은 여흥으로 이조참판 민응협(閔應協)의 아들로 숙종 때 함경 관찰사, 대사헌 등을 지내다 후에 우의정까지 올랐다. 비문을 쓴 이는 수리 이우(李? ; 1637∼1693)인데 자는 석경, 호는 관란정, 본관은 전주로 인흥군(仁興君 ; 영조 12남) 영(瑛)의 아들이다. 앙선군(郞善君)에 봉(封)함을 받았다. 그리고 이 비는 조선 숙종 18년(1692)에 두인(杜忍) 스님이 세웠다.
<다산초당>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정약용은 여유당 등의 여러 호를 가지고 있으며 유형원과 함께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쌓기도 했다.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강진에 유배되어 적거생활하시는 동안『목민심서』『경세유표』등 5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 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유적의 중심이 되는 다산(茶山)은 초당이 있는 뒷산을 지칭하며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 이 산 기슭에 머물고 계시면서 뒷산 이름인 다산(茶山)을 자신의 호로 써 왔다. 다산초당은 원래 작은 초가집이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허물어진 것을 1958년 해남윤씨 후손들이 다산유적보존회를 조직하여 기왓집으로 새롭게 지었다. 다산초당이 있던 곳에 세워진 기왓집은 5칸 도리단층으로 지어져 있다. 2칸은 뒤가 거실이며, 앞이 마루로 된 소박한 남향집인데, 처마밑에는 원판이 없어져 뒤에 완당의 글씨를 집자한 ‘茶山草堂’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백 련 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백련사에 대한 사적은 1432년(세종 13) 윤회(尹淮)가 저술한 《팔도지리지 八道地理志》와 정약용(丁若鏞)의 《만덕사지 萬德寺誌》 등에 나타나 있다. 만덕산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하였다. 이 절은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이 창건하였으며, 중요한 수도도량으로 면모를 달리한 것은 1211년(희종 7) 요세(了世)가 크게 중창한 뒤부터이다.
요세는 천태종계(天台宗系)의 승려로서 고승 지눌(知訥)과 깊은 친분 속에서 지눌과 함께 송광사에 머물다가, 1208년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었고, 강진에 살고 있던 최표(崔彪)와 최홍(崔弘)·이인천(李仁闡) 등의 권유로 만덕산에 자리를 잡고 그의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가람 80칸을 짓게 하였다. 이 역사(役事)는 1211년부터 1232년(고종 19)까지 21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당시 목백(牧伯)이 지극한 정성으로 재물을 보시(布施)하였다고 한다. 절이 완공되자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結社)를 맺었다. 이것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이다.
백련결사운동의 중심사찰인 백련사는 고려시대 8명의 국사(원묘국사, 정명국사,
원환국사, 진정국사, 원조국사. 원혜국사, 진감국사, 목암국사)를 배출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8명의 대사(소요대사, 해운대사, 취여대사, 화악대사,설봉대사, 송파대사, 정암대사, 연파대사)가 배출되었다.
고려 말에는 강진지방이 세 차례의 왜구침입을 받았을 때 이 절도 함께 폐허화되었다. 조선 세종 때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보호를 받아 주지 행호(行乎)가 불타버린 가람을 복원하였다. 그 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였으며, 그때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조계종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하여 종세(宗勢)를 키우고 있을 때, 이 절은 천태사상에 입각한 결사도량(結社道場)을 개설하여 침체한 불교중흥을 꾀한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외세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절 주위에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을 행호토성(行乎土城)이라고 한다. 현재의 절 또한 그때 쌓은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시왕전(十王殿)·나한전(羅漢殿)·만경루(萬景樓)· 칠성각·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다. 그 밖의 사중유적(寺中遺蹟)으로는 만덕산 백련사사적비와 원묘국사중진탑(圓妙國師中眞塔)이 있다. 이 밖에도 절 주위에는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의 동백림과 정약용이 신유사옥 때 강진으로 귀양와서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하고 차를 끊여 마시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백련사를 가리켜 ‘남쪽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여 동백 또한 곁들여서 수목이 싱싱하게 푸른 모습이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한만큼 주위의 경관 또한 아름답다.
대웅보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1760년 큰 불이 일어나 대웅보전이 소실되자 월인당 총신스님에 의해 1761년 4월 8일 불사를 시작해서 1762년 4월 13일 대웅보전을 완성하게 됩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써 각 추녀마다 네 개의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두 개의 주두(柱頭)는 용두(龍頭)로 장식한 다포집 건물이다. 대웅보전의 편액은 특이하게 공포를 가운데 두고 두 개로 나누어져 있는데, '대웅'과 '보전'을 세로로 쓰고 두 개의 판을 나란히 붙였다. 글씨는 조선의 명필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이다. 이광사는 당시 신지도에 귀양와 있었는데 해남의 대둔사, 그리고 이곳 백련사의 승려들과 교류를 많이 가졌다고 한다.
멀리 강진의 구강포 앞바다
만덕산 영천수에 차를 마시고 선(禪)에 들면 고려 8국사와 조선8종사의 숨결이 들리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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