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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髙敬命) | |
출생 | 1533년 |
사망 | 1592년 충남 금산 |
사인 | 전사 |
국적 | 조선 |
별칭 |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시호는 충렬(忠烈). |
학력 | 1558년 식년시 문과 갑과 1워(장원). |
직업 | 문신, 정치인, 작가, 의병장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김씨 |
자녀 | 고종후, 고인후 |
부모 | 아버지 고맹영 |
친척 | 장인 김백균 |
고경명(髙敬命, 1533년 ~ 1592년)은 조선 시대의 문인·의병장이다.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1552년(명종 7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모두 합격하고, 1558년(명종 13년) 식년시 문과에 갑과 1위로 장원급제한 뒤 관직은 동래부사에 이르렀다.
생애
초기 활동
1533년 광주 압보천에서 대사간 고맹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1552년(명종 7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동시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58년(명종 13년) 식년시 문과에 갑과 1위로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전적에 임명되고, 이어서 공조좌랑이 되었다. 이어 형조좌랑·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1년 사간원헌납이 된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를 거쳐 1563년 교리가 되었다. 1563년(명종 18년) 인순왕후의 외숙인 이조판서 이량의 전횡을 논할 때 교리(校理)로서 이에 참여하여 이량을 공격하였지만 장인 김백균이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에 무슨 일인지 좌죄되어 [울산] 군수가 되고 만다. 그해 11월 사헌부가 그를 탄핵한다.
울산 군수 고경명(어려서부터 재주가 있다는 이름이 있더니 일찍 외과(巍科)에 올랐으나 부박하고 허황되고 교만하고 협기(俠氣)가 있었다. 그 아비 고맹영, 장인 김백균과 함께 이양을 섬겨 청현직(淸顯職)을 얻었다.)은 앞서 간인들을 제거하던 날에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대의(大議)에 참여하였으니 의당 조심하여 누설하지 않았어야 할 터인데 마음씀이 반복 무상(反覆無狀)하여 장인 김백균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내어(언문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으니 더욱 간사하다.) 이양에게 전하도록 하였으니 지극히 간휼(奸譎)합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관작을 보존하고 있으므로 물정이 분개하고 있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사헌부의 탄핵을 명종이 승인, 곧 파직되었다.
복직과 관료 생활
1571년(선조 4년) 선조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서용하려 하였으나 사림파 언관들의 맹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1581년(선조 14년) 동인의 반대를 견뎌내고 복직, 그해에 영암 군수로 재등용되고 이어서 종계 변무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훈구파의 자제라는 비방에도 불구하고 율곡 이이가 그의 능력을 인정해주어 발탁함으로써 관직에 머무를 수 있었다.
1582년 서산군수로 전임 되었는데, 명사원접사(明使遠接使)에 임명된 이이의 천거로 그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이어서 종부시첨정에 임명되었다. 1583년 한성부서윤·한산군수를 거쳐 예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4년 사복시첨정이 된 뒤 성균관사예를 거쳐 순창군수로 재직 중 1588년 파직되었다.
1590년 승문원판교로 다시 등용되었다.
임진왜란과 최후
1591년 동래 부사로 있다가 서인이 제거될 때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갔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전라도 광주와 장흥 등에서 모집한 6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임금을 지키러 의주로 가던 중 금산에 집결하고 있던 왜군과 싸우다가 아들 인후와 같이 전사하였다.
사후
이후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시, 글씨, 그림에 뛰어났으며, 저서에는 《제봉집》,《서석록 瑞石錄》, 《유서석록》 등이 있다.
저서
《제봉집》
《서석록 瑞石錄》
《유서석록》
가족
증조부 : 고자검(高自儉)
할아버지 : 고운(高雲)
아버지 : 고맹영(高孟英)
어머니 : 서걸(徐傑)의 딸
부인 : 울산김씨
장남 : 고종후(高從厚)
손자 : 고부립(高傅立)
손자 : 고부언(高傅言)
차남 : 고인후(高因厚)
손자 : 고부림(高傅霖)
손자 : 고부천(高傅川)
손자 : 고부집(高傅楫)
손자 : 고부량(高傅良)
삼남 : 고준후(高遵厚) - 요절
사남 : 고순후(高循厚)
오남 : 고유후(高由厚) - 요절
육남 : 고용후(高用厚)
장녀 : 박숙(朴橚)에게 출가
외손자 : 박충렴(朴忠廉)
외손녀 : 노상용(盧尙龍)에게 출가
장인 : 김백균(金百鈞)
[네이버 지식백과] 고경명 [高敬命]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김천일(金千鎰)
김천일(金千鎰) | |
출생 | 1537년 |
사망 | 1593년 |
국적 | 조선 |
별칭 | 자는 사중, 호는 건재(健齋), 시호는 문렬(文烈). |
학력 | (1653년 별시(別試) 병과(丙科) 7위 |
직업 | 문신, 의병장 |
자녀 | 김상건(아들) |
김천일(金千鎰, 1537년 ~ 1593년)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이다. 자는 사중, 호는 건재(健齋), 본관은 언양이며,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생애
1537년 전남 나주군에서 진사(進士) 김언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이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573년(선조 6년) 학행으로 발탁되어 군기시 주부가 되었고, 이후 용안현감과 강원도·경상도의 도사를 역임하였다. 사헌부 지평 때 상소를 올렸다 좌천되어 외직으로 나갔으며, 1578년(선조 11년) 임실 현감을 지냈다. 이후 담양부사·한성부 서윤·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 나주에서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박광옥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호소하고, 5월 6일 의병을 일으켰으며, 평안도를 향하다 왜적과 전투를 벌이며 수원 행산고성을 거쳐, 8월 전라병사 최원의 관군과 함께 강화성으로 들어갔다.
그 공으로 장례원 판결사가 되고 창의사의 군호를 받았다. 왜군의 점령하에 있던 한성부에 결사대를 비밀 잠입시켜 싸우거나, 한강변의 여러 왜군진을 급습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군대가 개성으로 오고 있을 때, 이들에게 지형과 적의 형편 등을 알려 작전을 도왔다.
왜군이 남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자, 이를 추격하여 1593년 음력 6월에 절도사 최경회 등과 진주성에 주둔하였다. 1593년 명나라와 왜국 간에 강화가 제기되었을 때 이를 반대했다. 그 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이 대군을 이끌고 성벽을 넘어 들이닥쳤으나, 아군은 화살이 떨어지고 창검이 부러져 대나무 창으로 맞서 싸우다가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그의 아들 김상건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이후에 증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 추증되고, 1618년(광해군 10)에 증 의정부 영의정이 가증되었다. 나주의 정열사, 진주의 창렬사, 순창의 화산서원, 태인의 남고서원, 임실의 학정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이다.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김천일은 의만 높고 재주가 없어서 졌다.”고 평가하였다.
가족 관계
할아버지 : 김윤손(金潤孫)
아버지 : 김언침(金彦琛)
어머니 : 이감(李瑊, 양성 이씨)의 딸
부인 : ?
아들 : 김상건(金象乾)
저서
《송천집》, 《건재유집》 등이 있다.
조헌(趙憲)
조헌(趙憲, 1544년 ~ 159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 의병장이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렬(文烈). 본관은 배천(白川). 성혼의 문인이다[1].
생애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조헌은 5살 때에 글을 읽는 등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효성이 있고 유순했다. 집은 가난하였으나 12세 때부터 김황(金滉)에게 시와 글을 배워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567년(명종 22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에 속하였다. 이후 정주(定州)교수로 3년간 있으면서 그곳 선비의 풍속을 일신시켰다. 파주 교수로 옮겨 성혼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니 성혼은 사양하면서 감히 사제 간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년) 홍문관 정자(正字)로 왕의 불공이 옳지 않음을 말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의 문물과 제도의 따를 만한 것을 조목별로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후에 박사(博士), 호·예 2조 좌랑, 전적(典籍), 감찰 등을 거쳐 경기도 통진(通津) 현감으로 다스리다가 법을 어긴 궁노비를 취조 중 장살(杖殺)하고 부평에 귀양 갔다. 1581년에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전라도사로 나가 소를 올려 연산군 때의 공안(貢案)이 민폐가 되므로 개혁할 것을 청하고 이율곡 등의 선비들과 친분을 유지하였다.
1582년에는 보은 현감으로 소를 올려 노산군(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할 것을 청했으나 모함을 받아 파면되었다. 1586년 조정에서 학제(學制)를 수정하고 각도 제독(提督)을 창설할 때 공주(公州) 제독이 되어 선비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니 찾아드는 선비가 많았다. 이때 또 소를 올리는 한편 정여립의 행패를 따지고 공격하였으나 관찰사가 화를 두려워하여 여러 번 물리치므로 벼슬을 내놓고 옥천(沃川)으로 돌아갔다.
1589년에는 대궐에 엎드려 소를 올려 시정(詩政)의 장단점을 철저히 논하였는데 광론(狂論)이라 하여 삼사의 배척을 받고 드디어 길주(吉州)로 귀양 갔으나 그해 겨울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다 하여 석방되었다. 이렇듯 조헌은 철저한 유교적 입장에서 많은 개혁안을 상소하고 정론(正論)을 폈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등을 보내와서 명나라를 칠 것을 전달하여 임금과 신하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상소를 올려 겐소 등을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경하여 왜군을 대비할 책을 상소했으나 정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시골에 내려가 왜란에 대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과 함께, 호서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보은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였으나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의 시기로 홍성 지방에 옮겨가서 또 의병 천여 명을 모집했다. 이때 왜군은 청주에서 진을 치고 있어 관군이 여러 번 패하였는데, 승장(僧將)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여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등 전과를 세웠다.
곧이어 의주로 북상하기 전에,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게 되었다. 그때 당시 금산(錦山)의 왜군이 충청도 일대로 세력을 넓힐 기세라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영규와 함께 금산을 향해 가서 왜군에게 함락된 금산의 10리 밖에 이르렀다.
당초 호남 순찰사 권율과 합세하여 적을 협공할 약속이었으나 권율로부터 그 기일을 미루자는 편지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왜군은 이미 조헌이 거느린 의병의 약점을 알고 역습해 왔다. 그의 군사는 역전 분투하여 왜군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으나 많은 수를 대적하지 못하여 조헌과 7백의사가 전멸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을 회복하게 된다.
사후
1604년(선조 37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1609년(광해군 1년)에 그의 사당에 '표충(表忠)'이라는 액이 하사되었으며, 1754년(영조 30년)에 영의정으로 추증, 문묘에 종사되었다.
평가
유학자로서의 면모는 아래와 같다.
1572년(선조 5년)에 왕의 불공(佛供)을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 문물제도 중 따를 만한 것을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1581년(선조 14년) 공조좌랑에 임명, 전라도사로 나가 연산군 때 정해진 공안(貢案)의 개혁을 청하였다.
1582년 보은현감으로 소를 올려 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을 세워 표충할 것을 청하였다.
1589년 대궐에 엎드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론(極論)하다가 귀양갔다.
1589∼1591년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보낸 사신을 죽일 것을 청하고 왜적 대비책을 상소하였으나 거부되었다.
금산 전투에서 700의사(義士)와 함께 전몰하니 그 충성심은 길이 추앙받았다.
고경명·김천일·곽재우와 함께 임진 4충신(壬辰四忠臣)의 한 사람이다.
관련 작품
《징비록》 (KBS1, 2015년, 배우:강인기)
칠백의총(七百義塚)
대한민국의 사적 | |
지정번호 | 사적 제105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
소재지 |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52-1 |
제작시기 | 조선 |
칠백의총(七百義塚)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고경명, 조헌, 영규 대사를 비롯한 700여 명의 의사가 묻힌 묘역이다.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위치해 있으며, 1963년 사적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1592년 8월 조헌은 승장 영규(靈圭)가 이끄는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한 후 금산을 점거하고 호남지방으로 진격하려는 왜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공주로 돌아왔으나 조헌이 전공을 세우는 것을 시기한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들이 뿔뿔이 흩어져 그 수가 700여명으로 줄었다. 조헌은 700의사를 이끌고 금산으로 진격하게 되고 음력 8월 18일의 제2차 금산싸움에서 의병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 이곳에 유골을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이라 하였다. 유임이 순의비를 건립하고 종용사를 세워서 해마다 음력 8월 18일 전사일을 기념했고, 정충대절의 절주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말기에 그 역사적 사실을 없앨 목적으로 파괴하였으며, 해방 후 지방의 관공서와 지방민 등이 순의비와 종용사를 재건하여 그 사적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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