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홍 (영암읍 역리 生, 전 동강대학교 교수(경영학박사), 코리아․서티모르 문화교류센터 총재, 늘빛 문화교육연구소 이사장, 영암군 노인대학장)
요즈음 밤이 되면, 최근에 구입한 전자식 지구본에 펼쳐진 별자리를 보면서 잠들 때가 많아졌다. 하늘의 별무리에다 신화에 나오는 동물이나 인물의 이름을 붙여 놓은 별자리인 큰곰자리, 사자자리, 백조자리, 카시오페이아자리, 오리온자리 등을 찾다보면, 대우주의 섭리에 젖어 어느새 꿈나라로 향하게 된다.
어렸을 때, 내 고향 영암의 밤하늘은 지구본을 통해 본 별보다 더욱 총총하고 영롱한 별들이 깨알처럼 박혀 빛나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모래알처럼 쏟아질 것 같은 별무리들, 동쪽에서 서쪽으로 섬광을 그리며 떨어지는 별똥별의 아름다움과 맑은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의 장관은 형언할 수 없이 신비스러웠다.
보름달이 둥그렇게 떠오를 때에는 숨바꼭질과 ‘강강수월래’도 하고 ‘붕실박질’도 했다. 붕실박질은 일종의 수건 숨기는 놀이로 노래 부르는 것이 벌칙이기에 한층 흥겨운 놀이였다.
뿐만 아니라, 별빛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서 철부지인 우리들은 국군과 인민군으로 편을 갈라 뒷동산에 있는 ‘범바위’를 무대삼아 전쟁놀이를 했다.
날이면 날마다 모이는 곳 도청거리. 영암읍(당시 영암면) 역리의 도청거리는 고목(팽나무)과 샘터가 있는 마을의 중심지였다. 바로 건너편에는 무서운 어르신이 살고 있었다. 그분의 별명은 ‘죽에빼레’이시다. 그 어르신의 모습을 봤다는 친구가 없다. 그러나 밤늦게 도청거리에서 놀던 아이들이 평상시 보다 늦어지면, 어김없이 뇌성벽력 같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신다.
“이놈들아! 그만 놀고 집으로 안 갈래?”
그 어르신은 우리들에겐 무서운 존재였다. 왜냐면, 큰 소리로 집으로 갈 것을 예고한 후 당장 헤어지지 않으면, ‘죽에빼레’란 알 수 없는 말로 우리들을 휘어잡았으니까….
어르신의 연세를 당시 60~70세로 친다면, 고인이 되셨겠지만 현재 120세는 족히 됐을 것으로 사료된다. 지금 생각하니, 그 어르신은 대단한 리더십을 발휘한 큰 바위와 같은 분이란 생각을 해본다.
단 한번 모습을 본 적이 없지만, 그 어르신께서 쓰신 비장의 카드 ‘죽에빼레’란 말은 무엇일까? 철부지 우리들은 당시 무슨 뜻인지 모르고, 큰 소리에 주눅이 들어 무조건 놀이를 멈추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때 쯤 몇몇 친구들이 작당하여 그 어르신 집 앞에서 ‘죽에빼레, 쭉에빼레~’하고 놀려댄 후 달아났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죽에빼레’란 ‘죽여버려’란 그 어르신 나름대로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며칠 전, 시내버스 편으로 모임 장소에 가는데 바로 앞좌석에서 학생으로 보인 남녀가 보기에 민망스런 짓을 하고 있었다. 승객들 중 어느 한사람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뒷좌석에 있던 필자는 대뜸 ‘학생! 버스 안에서 무슨 짓이야!’하고 나무랬다. 그 학생은 곧장 자세를 바로 했다. 1년 전, 어느 날엔 20대 안팎으로 보인 남학생 2명이 시내버스 주차장에서 음식을 먹은 후, 봉지를 길에다 버리고 발바닥으로 뭉개고 있었다. 필자는 그들을 큰소리로 꾸중하고 바로 옆에 있는 휴지통에 오물을 집어넣으라 했더니, 순순히 따라 주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때, 어린아이를 업고 있던 아주머니가 다가와 ‘아저씨! 그렇게 하지 마셔요. 큰일 날 수 있어요.’ 하면서, 용기(?)있는 어른으로 봐주는 것 같았다. 세상이 이렇게 되어야겠는가?
갈수록 비뚤어져 가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 모르쇠와 기억이 없다는 등 ‘닭 먹고 오리발만 내미는 세상’이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된다. 곳곳에 어른이 있어야 한다. 잘못되어 가는 것을 바로 잡아 일깨워 줄 존경할 수 있는 어른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예전엔 내 고향 영암을 들를 때마다 왠지 고향이 아니라 타향에 온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길거리에 나서면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또 낯선 도로가 많아 옛 골목길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아니다.
영암군노인대학 학장에 취임한 이후 어르신들을 모시고 함께 하면서 고향에 대한 느낌과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경로당을 찾아 세상 돌아가는 얘기와 먹거리, 볼거리, 건강관리 등 맞춤식 강의를 할 때의 즐거움과 보람이란 어떻게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 여기저기 경로당 어르신들께서 나의 손을 붙잡고 정담을 나누고 싶어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럴 때 ‘행복한 사람’인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필자는 평소에 관계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홍익인간’과 ‘비겁하지 말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왔다. 그 중, 홍익인간은 할아버지께서 이름 끝 자 홍(弘)의 뜻을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이자 교육이념인 홍익인간과 관련지어 설명해주신 적이 있었기에 뇌리에 깊숙이 각인된 정신적인 모토이고, 비겁하지 말자는 언제 어디서든 떳떳해야겠다는 생활신조다.
여생(餘生)은 자투리 삶이요, 본생(本生)은 당연히 살아야 할 삶이라고 한다. 하여, ‘100세 시대’에 아직 남아 있는 25년의 세월을 여생 아닌 본생으로 ‘나눔의 삶’을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영암신문 yasinmo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