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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답사코스
강화역사관--석모도--강화도 초지진----정족산 전등사,정족서고-고려왕궁지
인천시 강화군은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유적과 전등사, 화개사, 보문사 등의 사찰, 마니산과 참성단 등 산과 섬, 바다가 어우러진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둘러볼 곳이 유난히 많은 강화군은 호국의 전적지가 모인 곳이기도 하며 고려 고종 이후 외적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뒤 39년 동안 머물렀다.
더구나 강화도는 조선 땅이 유린될대로 유린되어 숙대밭이된 임진왜란 때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으니 전쟁 후 선조가 4대 사고 중 유일하게 불타지 않았던 전주 사고의 서적들을 이곳 정족산 사고로 옮긴 것도 강화도가 비교적 안전하기 때문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또 갖은 곡절끝에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정조대왕은 통치체제를 정비한 이후 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책들과 왕실의 유물들 중 영원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상징물들을 보다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천해의 요새였던 강화도에 특별서고인 외규장각을 설립했다.
정조6년 건물이 완성되어 왕실의 책보, 어필, 주요 서책 등 762종 4892책이 이곳으로 봉안되었고 정조가 죽은 후 창덕궁의 규장각은 단순히 도서를 관리하는 기구로 전락했지만 강화도의 외규장각만큼은 그 역할이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말 우리의 것을 다 빼앗기고 말았으니.....
역사의 고장 강화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는 각종 문화재 등을 살펴보자.
▲가는 곳마다 산재해 있는 돈대와 보, 진= ‘지붕 없는 박물관’ 강화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명칭이 돈대와 보, 진이다. 돈대·보·진은 둔전병(평시에는 경작을 하고 전시에 동원되는 병사) 등이 주둔하던 군사지역이라고 한다.
돈대(墩臺)는 돌을 원기둥형으로 쌓아 곳곳에 총구나 포대 등을 설치하고 10명 내외의 소규모 병력이 외침을 막던 곳으로 지금의 해안초소 정도의 의미다. 보(堡)는 돈대가 서너 개 모여 이룬 것으로 요즘 군대로 치면 중대, 진(鎭)은 그 상위 개념인 대대라 보면 된다.
특히 고려시대의 성을 광해군 10년(1618)에 보수, 효종 9년(1658)에 완성한 광성보에는 이런 돈대가 세 곳 복원돼 있다. 숙종 5년(1679)에 만들어진 광성돈대는 사거리 700m의 홍이포 등이 설치돼 있다.
광성보 오른쪽에는 조선군 지휘관인 어재연 장군과 병사들이 미국 군대와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손돌목돈대와 강화해협에 용머리처럼 쑥 내민 암반 위에 설치된 용두돈대가 있다.
용두돈대는 사실 돈대의 성격이라기보다 적의 침입을 미리 알기 위해 만들어진 것을 돈대 형식으로 재구성한 곳이라 한다. 당시 점령당한 손돌목돈대의 처참한 장면, 손돌목돈대의 외부 모습, 용두돈대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광성보 안에 팻말로 전시하고 있다.
이 밖에 광성보에는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순국 영령들을 기리는 신미순의총을 확인할 수 있다. 강화군에는 현재 5진·7보·53돈대(용두돈대 제외)가 복원돼 있다.
돈대는 해안가 높은 언덕위의 요새다.
강화에는 5진 7보 53돈대가 있어 그 전체가 하나의 요새역할을 했다.
해안가에서 적을 감시하기 위해 지었기 때문에 돈대들 하나하나가 모두 경치좋은 자리에 지어졌다.
강화를 잘 아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기존 관광지와 다른 모습을 찾고 싶으신 분들은 구석구석 숨어있는 돈대를 하나하나 찾아가는 즐거움도 느껴보는것도 좋을거 같다.
선사유적
강화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강화지석묘가 있다.
강화는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고인돌이 혼재하는 지역으로 130여기의 고인돌이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강화읍역사탐방
39년간 고려왕궁이 있었던 고려궁지에서는 외규장각을 발굴하고 있으며 강화산성 북문에 오르면 멀리 북녘땅이 보인다.
특히 성공회강화성당은 한옥으로 지어진 성당으로 동,서양 두 문화의 아름다운 만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강화도령 원범이(조선 25대 철종)가 살았던 용흥궁도 한번 들어가 보고, 강화도조약을 최종 조인한 연무당 옛터에도......
강화역사관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사건의 전적지 및 군사유적지를 돌아보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던 선조님들의 호국의 얼을 되짚어보는 코스입니다. 여행에 나서기 전에 강화역사관에 들러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사건에 대해서 알아두시면 여행이 더욱 알차진다
보문사 석실
보문사석실
석실 안에 봉안된 23불의 나한상은 눈썹바위의 마애관음보살좌상과 더불어 보문사의 대표적 성보문화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문사가 관음신앙의 성지인 동시에 나한신앙의 대표적 도량이 된 것은 바로 이 석실에 있는 나한상 때문으로 보아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석실 및 안에 봉안된 나한상이 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높다. 또한 이 석실은 우리 나라에 흔치않은 석굴사원이기도 하다. 석굴사원의 예는 경주 석굴암, 경북 군위의 삼존석굴, 강원도 속초의 개조암(開祖庵) 등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몇 되지 않는 귀중한 예이다.
이 석실의 역사는 곧 보문사 창건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 전설에 따르면 창건 후 14년 뒤인 649년 신라 선덕왕 때 어부들이 고기잡이 나가다 그물에 걸려 올려진 석불상들을 이곳 동굴에 안치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곧 이때부터 석실이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뒤의 역사는 알 수 없고, 조선 시대 후기에 들어서인 1812년(순조 12)에 한차례. 그리고 1867년(고종 4)에 다시 경산(京山)화상이 석굴을 보수했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1958년 춘성(春城)선사가 석굴 내부를 좀 더 확장하며 개수하였다. 최근에는 1980년 정수(靜守)스님이 내부를 다시 확장하는 한편 지금의 불단(佛壇) 뒤와 옆에 있는 석탱화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다음으로 석실의 구조를 보면, 내부는 천연 동굴을 확장하여 만들었고 입구에 무지개 모양을 한 3개의 아치형 홍예문(虹?門)을 달았다. 석굴 안은 면적이 30평으로 꽤 널찍한 편이다. 늘 이 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기도음이 끊이지않고 이어지고있다.
석실을 들어서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전부 22불의 성상(聖像)을 모셔 놓은 불단이다. 석실이니만큼 다른 불전과는 달리 불단 및 닷집이 전부 돌로 커다랗게 만들어진 것이 특이하다. 연꽃이 조각된 불단 위에 닷집이 달린 전각 형태의 불전(佛殿)이 있고, 그 안에 아래 위 두 줄에 걸쳐 감실(龕室)이 마련되었으며 여기에 22불의 석상이 봉안되었다.
석상의 22불의 석상(石像)은 아마도 전설에 전하듯, 어부들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 봉안한 석상 그대로인 것으로 보인다. . 석상의 크기는 전부 30cm 안팎이다.
불단 뒤에는 1982년의 불단 조성을 기념한 <보문사석굴법당연기문(普門寺石窟法堂緣起文)>과 <법화경약모게(法華經略摹揭)>가 새겨져 있다. 연기문은 기현(奇玄)스님의 글이고, 게는 법화경의 내용을 베낀 것으로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의 글씨다.
한편 근래 이 석상들의 재질(材質)을 조사한 결과 우리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이 아닌 인도에서 나오는 석재임이 확인되었다고도 한다.
불단 좌우로는 인등(引燈)이 있고, 불단 왼쪽 벽에는 석조 신중탱이 걸려 있다. 이 석조 신중탱과 불단 뒷벽에 커다랗게 조각된 탱화는 1980년 조성된 것이다
보문사 관음마애좌상
보문사가 관음 도량의 성지임을 가장 잘 상징하는 성보문화재로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멀리 서해바다가 한 눈에 조망되는 등 경치가 장관이다. 특히 낙조(落照) 경관은 아주 일품이어서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붉은 해와 노을을 쳐다보노라면 종종 그야말로 무아지경 불심(佛心)의 경지에 들곤 한다.
이 관음좌상은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에 있는 계단을 따라 한 10분 가량 올라가면 나오는 낙가산 중턱의 눈썹바위 아래에 새겨져 있다. 절에서부터의 거리는 약 1km가량 된다. 오르는 길이 제법 가파르기 때문에 계단은 지그재그 식으로 놓았다. 이 불사를 기념하는 `관음성전계단불사공덕비'가 중간에 놓여 있다. 계단이 놓여졌다고는 하나 눈썹바위로 올라가는 길 자체가 워낙 급한 까닭에 한달음에 올라갈거리는 못된다. 가다 보면 제법 다리에 힘도 들고 허리가 뻣뻣해지기도 한다. 이럴 때 `관세음보살'을 마음속으로, 혹은 나지막이 외우며 올라가노라면 문득 어느새 관음보살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마애관음좌상은 1928년 배선주 주지스님이 보문사가 관음 성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이화응(李華應)스님과 더불어 이곳에 새긴 것으로, 크기는 높이 920cm, 너비 330cm에 달하는 거상(巨像)이다.
크기를 척수로 환산하면 높이 32척에 너비가 11척이 되는데, 이것은 곧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관음 좌상 약간 비스듬히 나 있는 바위면에 새겨졌는데, 위의 바위가 마치 지붕처럼 돌출되어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관음부처님을 가려 주고 있다.
관음 좌상의 양식을 보면,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모아 정성스레 정병(淨甁)을 받쳐든 채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얼굴에 비해 다소 크게 느껴지는 코 입 귀는 투박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서민적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도 푸근해지 며 정감이 간다. 또 부처님 얼굴에 빠짐없이 있기 마련인 백호(白毫)도 이마 사이에 솟아 있다.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불의(佛衣)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도록 입는 통견(通肩)을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연화대좌 왼편, 그러니까 관음을 바라보아 오른쪽에는 `조불화응선사(造佛華應禪師)'가 그리고 그 반대편 위패 모양으로 새긴 구획 안에도 `화엄회상필부사왕중(華嚴會上八部四王衆)·나무화엄회상욕색제천중(南無華嚴會上欲色諸天衆)·화엄회상호법선신중(華嚴會上護法善神衆)' 등의 글씨가 세 줄로 새겨져 있다.
이 관음상은 비록 작품이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이곳이 관음 도량의 성지인 동시에 기도(祈禱) 성지임을 나타내는 상징성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이곳에서 정성으로 기도 드리면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 없다 하여 지금도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인대
천인대(千人臺)는 길이 40m, 폭 5m의 큰 바위로, 나한 석실과 범종각 사이 서쪽으로 나 있는 계단 위 널찍한 평지에 있다. 이 천인대에 관해서는 절의 창건 무렵 인도의 한 큰스님이 이 바위에 불상을 모시고 날아온 것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그 뒤 이바위는 법회 때 설법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는데, 바위 위에 1,000명이 능히 앉을 수 있다고 하여 천인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보문사맷돌
맷돌은 옛날 절의 스님들이 취사용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석실 입구 오른쪽 삼성각 올라가는 계단 옆 화단에 있다. 석재는 화강암인데, 전체적으로 돌 다듬은 솜씨가 부드럽고 또한 조각도 정밀한 편이다. 둥근 모양을 한 밑부분으 주연(周緣)에는 흠이 널찍하게 파여져 있고, 맷돌질로 잘게 으스러진 음식물이 밑에 받치는 그릇에 흘러 잘 담아지도록 홈통도 적당한 너비로 파여 있다.
윗돌은 얇게 조성되었으며 역시 주연에 굵직한 테를 양각하고 그 양쪽을 파 놓아 그곳에 자루를 끼워 맷돌을 돌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맷돌은 웃돌, 곧 상대석만 남아 있는데 이 보문사 맷돌은 웃돌 뿐만 아니라 아랫돌, 곧 하대석까지 완전하여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크기도 지름 69cm, 두께 20cm나 되어 보통의 것보다 두 배 가량 된다. 이 맷돌이 이용되던 시절 보문사가 얼마나 많은 스님과 신도들로 성황을 이루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전체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 시대 후기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인천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각종 문화와 함께하는 마니산 산행=강화군 서북단의 마니산(486m)은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 마니산보다 더 유명한 높이 6m의 제단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 전해진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전한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다. 여러 번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제단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下壇)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上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경주의 첨성대와 비슷하다.
고려와 조선왕조는 때때로 이곳에서 도교식 제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성단을 단군시대의 종교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일제시대에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가 생기고 난 이후에는 민족의 성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전의 성화는 이곳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붙이고 있다.
참성단이 과연 단군의 제천단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강화도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있고, 단군과 연관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상고시대에 무시못할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상고시대에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아마도 참성단은 이 시기부터 제천단으로 축조 이용해오다가 삼국시대 이후 도교가 들어오면서 별에 대한 제사(祭祀)도 아울러 행하여 온 것으로 짐작된다
마니산은 백두산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사이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팔도에서 기(氣)가 가장 세기로 유명하다. 참성단(塹城壇)은 서기전 (BC)2283년에 단군왕검이 직접 제단을 쌓고 손수 제천보본(祭天報本)의 전통윤리를 수범(垂範)했던 곳으로 우리 민족과 한울과의 연결고리 구실을 해주던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의 원리를 간직한 제천 단이다.
조선조 숙종 26년(1700) 5월에 강화유수 최석항(崔錫恒)이 중축을 기념하기위해 중수비(重修碑)를 참성단 동쪽에 세웠으며 그 비문은 지금도 현존해 있다.
참성단은 단순한 제단이 아니고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 될 수 있는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이 서린 천단(天壇)으로서 천지신명의 감응을 얻고 근본에 보답하는 보본의 윤리를 깨우쳐 주는 신령스러운 곳이다
마니산은 일제에서 해방과 더불어 우리민족사에 기록되어야할 역사적 사실이 바로 마니산 성화 전수의 사적이다.단기 4403년(1946)광복 제 일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서울의 세 명산인 남산 북악,안산에서 3일간의 봉화제전을 거행하면서 횃불을 지폈다.
그 당시 광복절 전야인 오후 6시에 단애종사가 채화하여 성화전송단 대표 손기정시로 하여금 임시 정부주석 백범 김구선생에게 전송되어 남산에 마련된 봉화대에 점화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 횃불을 민족성화로서 보본의 역사성이 깃든 제천단인 마니산 참성단으로 전수 시키기로 하고 그해 10월3일(음력)개천절을 기해 그날 아침 6시에 마라톤 선수인 함기용에 의해 마니산으로 전송되었다.
당시 민정장관인 민세 안재홍이 일르 받아 점화함으로서 전국민의 축전으로 제천의식을 성대히 봉행하게 됐다. 지금도 전국체전때 민족화합을 다짐하며 메인 스타디움을 환하게 밝혀주는성화가 마니산 참성단에서 채화되고 있다. 천제를 올리며 오르내리던 918개의 계단을 ..이 계단은 삼국시대의 임금들이 천제를올리기 위해 다녔다고 한다. 참성단으로 오르는 단군로는 서해바다의 풍광을 한눈에 바라볼 수있다
정족산 전등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의 삼랑성(三郞城) 안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중창기문(重創記文)에는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로, 1266년(원종 7)에 중창된 이래 3, 4차례의 중수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확실하게 단정짓기는 어렵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1337(충숙왕 6), 1341년(충혜왕 2)에 각각 중수되었다고 하나 당시 전등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1605(선조 38), 1614년(광 해군이중심이 되어 재건하기 시작해 7년 만인 1621년 2월에 완성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다. 이 사고장본(史庫藏本)은 1909년 서울로 옮겨져 조선총독부 분실(分室)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707년에는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별관을 또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했다. 그뒤에도 1749, 1839, 1855, 1871, 187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래까지 대규모의 중수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다. 이때 대조루(對潮樓)를 비롯해 양곡을 보관하는 정족창(鼎足倉)·석량고(石糧庫) 등의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1912년 일제강점기 때 강화·개성 등 6개군에 있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승격되었다. 또한 이 절의 뒤편에 있는 정족산의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신성시되는 점이 주목된다. 경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원건축인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을 비롯해 명부전·삼성각·향로각·적묵당·강설당·범종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과 전등사의 말사인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된 조선시대의 법화경판(1544)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경판은 6·25전쟁 때 파주에 있었던 모부대에서 1매를 가져가 현재 104매만 남아 있다. 그밖에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대웅전에서 사용했던 작은 옥등 등이 있다.
전등사 /전등사대웅전(조선 중기), 보물 제178호, ...
전등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178호. 1916년 해체·수리할 때 발견된 〈양간록 樣間錄〉에 따르면 이 건물은 1605년에 일어난 화재로 일부가 불타버린 뒤 1614년 12월 또다시 불이 나 완전히 소실된 것을 당시 사승(寺僧)이었던 지경이 이듬해에 재건하기 시작하여 1621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한편 1855년(철종 6) 화주(化主) 규형(奎瑩)에 의해 대웅전이 중건되었다는 〈전등본말사지 傳燈本末寺誌〉의 기록과 지붕을 덮었던 기와의 명문 중에 1876년(고종 13) 효월화주(孝月化主)가 대웅전과 약사전의 지붕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어 이 건물의 건립연대는 조선 중기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 기둥의 네 귀퉁이 위에는 추녀를 받들고 있는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전등사 /전등사약사전(조선 중기), 보물 제179호, ...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179호. 이 건물의 창건연대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지붕의 막새기와 중에 1896년 대웅전과 함께 기와를 중수했다는 명문이 있고, 또 건물의 구조나 양식으로 보아 대웅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규모가 작은 건물이다.
전등사 /전등사동종(중국 북송), 보물 제393호, ...
전등사의 종각에 있는 중국 북송시대의 종. 보물 제393호. 높이 164cm, 입지름 100cm. 몸체에 새겨진 '大宋懷州修武縣百巖山崇明寺紹聖丁丑歲丙戌念三日鑄鐘一顆'라는 명문에 의하면, 원래 중국 허난 성[河南省] 회경부 수무현 백암산에 위치한 숭명사에 있던 것으로 1097년에 주조된 것이라고 전한다. 이 중국 종이 어떤 경위로 전등사에 전해지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말 군수물자 수집 때 강제로 빼앗겼다가 8·15해방 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철제로 만들어진 종으로 우리나라 범종과는 달리 정상에 음통(音筒)이 없고 다만 2마리의 용이 서로 맞대고 있는 용뉴(龍鈕)가 달려 있으며 그 주위에는 복련의 연꽃무늬를 돌렸다. 중국 원나라 장인이 만든 고려시대의 개성연복사종(1346)과 매우 유사하며, 11세기 이후 특히 조선시대에 유행하게 되는 중국 종의 시원적인 양식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몇 개의 중국 종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완전하게 해독하기 어려우며, 명문에 종이 주조된 지방이나 절·연대·시주인·장인(匠人) 등의 이름이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초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안산의 초지량에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것에서 처음 비롯되었는데 1666년에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되었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다.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였다
초지진
고려궁지
고려 고종 이후 외적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뒤 39년 동안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