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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례 한글화 원칙과 지향점* / 이도흠 | ||||
특집 | 불교의례 이대로 좋은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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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그럼에도 아직 불교의례는 한국 대중의 몸과 가슴과 삶에 녹아들지 않고 있다. 완전히 한국화하지 않았으며, 참여와 공감에 의하여 의미를 공유하고 깨달음과 중생구제의 회향에 이른다는 불교의례의 목적과도 완전히 부합하지 못한 채 스님들의 ‘모노드라마’로 행해지고 있다. 대개 스님 혼자 한문으로 된 의식문을 읽고 대중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 채 예배를 하다가 끝낸다. 강요된 의례는 정서적 에너지를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킨다. 참여도가 떨어지는 의례는 의미의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맥락을 무시하는 의례는 삶과 현실마저 소거한 것이기에 대중의 고통 치유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며, 이는 결국 대중의 외면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을 지양하려면, 무엇보다도 의식문을 한글화하고, 의례를 현대 대중의 삶의 맥락에 맞게 변용하여 행하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 지향점이 분명해야 하고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작업을 해야 한다. 그에 대해 알아본다. 이에 통일된 불교의례와 법요집의 한글화 필요성이 교계 안팎에서 제기되었다. 특히, 1994년 개혁종단 출범 이후 통일법요집 편찬이 주요 종책사업으로 상정되어 1995년 3월에 통일법요집 편찬 사업을 시작하여 1998년에 처음으로 《석문의범》 등 기존의 교본들을 참고하여 《통일법요집》을 발간하였고, 2002년 수정증보판을 내놓았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어렵기만 했던 종단 의례의식의 적지 않은 부분들이 통일되었다. 하지만 종단 의례의식이 우리말보다는 대부분 한문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되어, 《반야심경》 등 의례에 염송할 경전에 대해서는 이미 1920년대부터 비범한 능력으로 탁월한 한글번역을 한 운허 스님의 번역을 참고하고 의식문을 번역했다. 윤독회와 감수를 거쳐 지난 2005년 3월 21일에 《한글통일법요집Ⅰ 천도다비의식집》을 발간하였고, 이어서 2006년 8월 21일에 《한글통일법요집》을 완간하였다. 하지만 《한글통일법요집》에 대한 일선 사찰의 활용도가 낮고, 집전에 알맞은 운율 및 번역어의 문제점이 대두되고 불완전하고 잘못된 번역어가 산견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개정판 한글통일법요집의 편찬이 필요하다고 보아, 2008년 1월 29일에 각 분야의 전문가를 망라하여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산하에 한글법요집 편찬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새로 개정작업을 추진하였다. 가칭 《한글표준법요집》(이하 《표준본》으로 칭한다)은 조계종 통일법요집(2002)을 모본으로 《한글통일법요집》(이하 《통일본》으로 칭한다)을 개정하거나 보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2008년 2월 12일에 ‘한글법요집 편찬연구위원회’ 위촉식과 첫 회의를 가진 이후 매달, 혹은 격주로 윤독회를 진행하였다. 이 연구위원회에서 필자와 이성운 박사가 《천수경》을 비롯하여 한문으로 된 경전과 의식문의 번역을 담당하였다. 포교원에서 번역할 분량을 할당하여 이메일로 보내주면, 이를 필자와 이성운 박사가 받아서 한문 원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다시 이메일로 보냈다. 포교원은 이를 한문 원문, 필자의 번역, 이성운의 번역을 병렬로 배치한 표를 만들어 인쇄한 후 매달, 혹은 2주에 한 차례씩 열리는 한글법요집 편찬연구위원회에 올렸다. 번역자인 필자와 이성운 위원을 포함하여 포교원 연구실장, 위원인 인묵 스님, 법안 스님 등이 참여하여, 때로는 《통일본》과 제방의 선행 번역본이나 기존의 교본 등을 참조하며 번역된 것을 한 구 한 구, 독회하며 검토하여 전원 합의로 번역문을 채택하고 확정하였다. 한글 문장이 확정되면, 채택된 번역이 현장에서 거부감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음보인가, 운곡이 적합한지를 의식 전문 위원들이 검토하여, 한글 독송에 맞는 염송법을 개발하고, 구체적이면서도 알기 쉬운 집전 방법을 마련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글 번역문이 운곡에 맞지 않으면 이를 다시 위원회로 상정하였고, 위원회는 이를 다시 검토하고 확정하였다. 이후 몇 차례 공청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단 《표준본》에 들어갈 전체 경전과 의식문의 번역과 검토를 마치고 문안을 확정하였다. 이후 이를 의례위원회와 의례위원회 실무위원회에서 재논의를 하고 있다. 의례위원회의 실무위원회는 한글법요집 편찬연구위원을 중심으로 하되, 의례위원회와 포교원, 교육원의 스님을 포함시켰다. 인묵 스님을 위원장으로 하여 허정 스님, 법상 스님, 화암 스님, 주경 스님, 정오 스님, 법안 스님, 미등 스님, 태경 스님, 혜일 스님, 이성운, 박상률, 윤소희, 고명석, 그리고 필자가 참여하고 있다. 의례위원회와 실무위원회의 논의가 끝나면 종회를 거쳐 한글로 이루어진 표준 불교의례문을 출간할 예정이다.
아무리 훌륭한 번역이라 하더라도 원문을 벗어나면 오역이다. 《표준본》은 대중들이 쉽게 알 수 있는 한글로 번역하되, 한문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하였다. 한글 번역은, 특수한 불교 전문용어를 제외하고는 중학생 정도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낱말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이다. 한문 원문의 한 글자마다 놓치거나 생략하지 않고 그 글자의 뜻과 한문 문장의 문법, 통사적 구조 등에 맞게 번역하되, 축자적 의미를 떠나 전체의 뜻을 한글로 올바로 전달할 수 있는 최적의 낱말을 택하려 노력하였다. 예를 들어, 〈산왕당〉 중 가영(歌詠) 부분에서 “영산석일여래촉(靈山昔日如來囑)”에 대해 《통일본》은 “오랜 옛날 영산회상 여래 부촉 받으시고”라고 번역하였다. ‘영산’은 장소 부사, ‘석일’은 시간 부사, ‘여래’가 주어, ‘촉’이 동사이다. 이것을 제대로 살리면서 이해할 수 있는 한글로 바꾸면, “그 옛날 영산에서 여래의 부촉 받아”이다. “만리백운청장리(萬里白雲靑嶂裡)/ 운거학가임한정(雲車鶴駕任閒情)”에서 《통일본》은 “수만리에 흰구름과 깊고푸른 산속에서/ 학 이끄는 구름 수레 한가로이 지내시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학 이끄는 구름 수레’의 성분이 주어인지, 부사어인지, 목적어인지 분명하지 않아 해석의 오류를 내재한다. ‘장(嶂)’은 ‘높고 가파른 산’을 뜻한다. “萬里白雲靑嶂裡”는 “수만 리에 걸쳐 구름 사이로 높고 푸른 산이 첩첩한 곳에”를 가리킨다. 우리 민족의 호흡인 3·4조의 운율에 맞춰 “수만리 구름사이 높푸른 산속에서”로 번역한다. “雲車鶴駕任閒情”의 경우 “학 이끄는 구름수레 한가로이 지내시네”로 번역하고 있는데, “雲車”와 “鶴駕”가 수식관계가 아니라 병렬관계이고, 결구(結句) 전체가 승구(承句)를 받고 있으며 대구를 이루고 있다. 이를 고려하여 “학타고 구름타고 한가로이 거니시네.”로 옮겼다.
위는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雲興寺本) 중 야부도천(冶父道川)의 〈금강경송(金剛經頌)〉이 종송에 실린 것이다. 《금강경오가해》(無比 스님 역해본)도 마지막 구를 “배에 가득히 허공만 싣고 달 밝은 데 돌아오도다”라 번역하였고, 《통일본》도 이와 유사하게 “빈 배 가득 달빛 싣고 무심하게 돌아오네.”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이는 다른 법요집이나 이를 게재한 대부분의 책, 심지어 이를 패러디한 시조나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문장에서 ‘공(空)’이 ‘재(載)’라는 동사의 주어가 될 수 없고, 부사로 봄이 타당하다. 직역하면 “가득한 배에 아무것도 싣지 않고 달 밝은데 돌아오도다.”이다. 가득한 배인데 아무것도 싣지 않았고 달빛 속에 돌아온 것이니 그 배엔 달빛만 실릴 뿐이다. “배에 가득 훤하게 달빛 싣고 돌아오네.”로 해석하는 것이 원래 뜻에 가깝고 시의 이미지도 살리는 길이다. 뜻으로 보아도, 강가에서 고요히 낚시하고 있는 어부는 자연과 하나가 된 인간이자 대상과 합일을 이룬 주체이다. 이 경지에 이르느냐 이르지 않느냐가 바로 진정한 어부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이라 할 정도로 상즉상입(相卽相入)의 범아일여(梵我一如)는 어부의 드러난 실체이다. 사람이 상즉상입의 경지에 올라 삼라만상을 바라보면 그는 부처이다. 어부가 부처라면, 물고기는 바다에 널려 있으며 포획을 기다리는 것이니 중생의 의미를 갖는다. 물고기가 중생이라면 중생이 부처에 낚임은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해탈을 이룸이다. 낚시는 자비행이며 배는 자비행을 이루는 방편이다. 그럼 물고기가 물지 않음은 무슨 의미인가? 중생은 본래 청정하며 그들 마음속에 이미 부처가 자리 잡고 있다. 중생이 곧 부처요, 중생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으로 본래 청정하다. 그런데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그 하늘을 가리듯, 일체의 중생이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미혹에 휩싸이고 망심(妄心)을 품어 진여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세계를 분별하여 보려 한다. 일체의 중생이 망심이 있음으로 해서 생각할 때마다 분별하여 다 진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空)이라 말하지만, 만약 망심을 떠나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다. 중생의 마음은 본래 하늘처럼 청정하고 도리에 더러움이 없기에 중생은 경계를 지어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본래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더러운 것처럼 무명에 휩싸여 욕계, 색계, 무색계의 3계란 경계를 지어 세계의 실체를 바라보니 이 경계는 허망한 것이다. 이 모두 마음의 변화로 인하여 생긴 것이니 만일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곧 다른 경계가 없어지고 중생 또한 본래의 청정함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중생은 부처의 구원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어부가 달빛만 싣고 돌아옴은 당연한 일이다. 빈 배는 모든 것이 원래 공(空)함을 나타낸다. 바다와 배, 어부와 물고기, 진(眞)과 속(俗)의 경계,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공하다. 그렇게 깨닫고 보니 달빛 아래 차별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삼라만상이 빛난다. 그러니 빈 배는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의상대사의 〈법성게〉 중 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시간에 대한 화엄철학의 연기론을 밝힌 부분으로 ‘사무치다’로 해석하는 것은 의상의 화엄철학의 시간론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이는 하나가 일체이고 일체가 하나이고, 작은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머금은 것처럼 시간 또한 영겁의 시간이 찰나에 담겨 있고 과거의 과거에서 미래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구세(九世)가 하나임을 뜻하는 것이다. 지금 필자가 글을 쓰고 독자들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도 인연에 따라 구세가 한순간에 겹쳐진 것이다. 과거의 과거는 예로부터 낙산사 터에 관음보살이 상주하던 일이며, 과거의 현재는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서 낙산사를 세운 일이며, 과거의 미래는 이로 모든 중생이 관음보살의 대자대비를 통해 구제를 받을 어느 날이다. 현재의 과거는 의상의 행적과 사상을 좇는 일이요, 현재의 현재는 의상의 사상을 논하는 바로 이 순간이요, 현재의 미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의상의 사상을 재평가하고 재해석함에 따라 달라질 내일이다. 미래의 과거는 멀리는 낙산사에 관음보살이 나투신 때로부터 오늘 이 순간을 비롯하여 미래의 어제에 이르기까지의 순간이며, 미래의 현재는 이 낙산사에서 다시 의상의 사상과 실천을 떠올리는 바로 그 순간이며 미래의 미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아우러져 다시 달라질 미래의 내일이다. 과거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 미래, 현재의 과거, 현재의 현재, 현재의 미래, 미래의 과거, 미래의 현재, 미래의 미래-구세를 의상대사의 말씀과 실천의 행적에 담겨 있는 진리가 인연에 따라 회통(會通)하고 있으니 이것이 십세(十世)이다. 그러니 이의 올바른 번역은 “한량없는 오랜시간 한생각에 담겨있고/ 찰나순간 한생각이 무량겁에 걸쳐있네/ 구세십세 서로겹쳐 어우러져 돌아가며/ 혼란하지 아니하고 따로따로 이뤄졌네.”이다. 한문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한다는 제1원칙을 지키는 범위에서 한글로 번역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쉬운 말로 번역하여 대중들도 경전과 의식문에 담긴 부처님의 말씀과 마음을 이해하고 소통한다는 취지를 살려야 한다. 기존의 《통일본》에서 한자의 음만 읽던 부분도 한글로 뜻을 풀어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경우 뜻이 잘 통하지 않는다. 이를 다음과 같이 쉬우면서도 뜻이 통하도록 번역하였다.
4) 메타포는 ‘취의(tenor)’와 ‘매체(vehicle)’를 살려 번역한다 메타포(metaphor)란 ‘지절(志節)→국화’처럼, Μεταϕορἁ(metaphorἁ)에서 기원한 것으로, “유(類)에서 종(種)으로, 혹은 종에서 유로, 혹은 종에서 종으로, 혹은 유추에 의하여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하는 것이다.” 비교론에서 은유는, 동그랗다는 유사성에 바탕을 두고 ‘보름달’에서 ‘엄마 얼굴’을 떠올리는 것처럼, 다른 두 개념이나 대상 사이에서 양자 사이의 유사성이나 차이를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유추하여 한 대상이나 개념을 다른 대상이나 개념과 견주어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상호작용론에서 은유는, ‘별–조국 광복’에서 ‘별’을 천체의 일종으로 읽지 않고 은유임을 인식하여 ‘어두운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 조국 광복의 염원을 품음’이라고 해석하고 이 해석이 다시 별의 이미지로 해석자의 가슴에 물결치는 것처럼, 어느 한 편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취의(tenor)’와 ‘매체(vehicle)’, 또는 ‘틀(frame)’과 ‘초점(focus)’ 사이에서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벌어지는 의미작용이자 해석의 과정이다. 이에 반하여 레이커프(Lakoff)와 존슨(Johnson)은 인간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체가 은유적이라고 본다. 조지 레이커프는 “일상생활의 모든 관습적인 언어, 어휘로 이루어진 모든 정의는 축자적이지 은유적이 아니다.”라거나 “은유는 남에게 배울 수 없는 것이며 천재의 표징이다.”라는 기존의 주장을 뒤엎는다.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있어.” “우린 다시 되돌아갈 수 없어.” “우린 길에서 벗어났어.” “우리 이제 제 갈 길을 가자.”라고 흔히 말한다. 이는 ‘사랑은 여행이다.’라는 뿌리은유(root-metaphor)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인간이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여행’이라는 구체적 경험과 비교하여 양자 사이의 유사성을 유추하였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은유를 사고나 행위가 아니라 언어만의 특질이라고 간주하여 인간이 은유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은유는 일상생활, 그것도 언어가 아니라 사고와 행위 속에 속속들이 스며 있다. 인간은 일상의 개념체계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그 개념체계 자체가 본질적으로 은유적이다. 레이커프와 존슨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과정은 거의 은유적이며 개념 체계는 은유적으로 구조화한다. 이런 의미에서 은유는 표현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개념화의 방식이다. 은유는 (인간의) 개념 체계에 지도를 그리는 (일상언어와 사고가) 교차(하는) 영역이다. 더 나아가 오소우스키(Osowski)는 “은유가 사람들이 다른 차원의 추상화를 동시에 작동하도록 하는 구조적 장치이다.”라고 주장한다. 캐시 셔(Kathy Schuh)와 커닝햄(Donald Cunningham)은 ‘땅속줄기’의 자질과 ‘리좀(rhizome)’을 유사성의 유추로 연결하여 리좀의 특성을 역동성, 이종성(異種性), 무한한 연결망, 무위계성, 불파열성, 안과 밖이 없음, 수다한 출구 등으로 설명한다. 땅속줄기라는 구체적 사물을 통해 리좀이라는 난해한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은유는 사고를 촉진한다. 메타포가 이런 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를 사용하여야 시적 압축이 되고 미적 체험이 가능하게 되므로 메타포를 풀어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다만, 고대 사회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메타포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연결되지 않으므로, 현대 사회에 맞게 변용될 필요가 있다.
다른 부분도 차이가 나지만, 《통일본》에서 “암실아손(暗室兒孫)”에 대해 풀어서 “어리석고 미한 중생”이라 번역하였다. 이는 글자 그대로 풀어서 해석한 것인데 그럴 경우 해석의 폭과 깊이가 좁혀지며, 시적인 감상과 미적 체험이 불가능해진다. 어두운 방이 무명(無明)의 세계, 무지의 세계, 화택으로 이루어진 사바세계를 뜻하는 것도, 어린 것들이 아직 무지한 대중을 뜻하는 것도 21세기의 맥락에서도 통한다. 어둔 방이라 해야 방안과 방 밖이 속(俗)과 진(眞), 중생과 부처, 깨달음과 무명으로 의미를 확장한다. 어둔 방이 갖는 이미지도 해석을 하면 사라진다. “어두운 방의 어린 것들”이란 메타포로 놔두고 ‘해석의 지평’을 열어두는 것이 좋다. 의식문의 소(疏)와 유치(由致) 등은 변려문의 문체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말로 번역하게 되면 대구와 대조, 승체 등 문체의 미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말로 번역하더라도 원문의 구조와 미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6) 3·4조나 4·4조의 율격에 맞게 번역한다 우리말에서 시적, 종교적 대상으로 삼는 것, 예를 들어 “[神], 하늘, 해, 달, 별, 산, 꽃, 구름, 용, 나무, 범, 곰, 새” 등은 모두 1, 2음절이다. 우리말은 굴절어이기에 여기에 조사가 붙어 3음절이나 4음절이 된다. 그러기에 한국인은 3·4조나 4·4조에서 가장 평안함과 낯익음을 느낀다. 와카[和歌]에서 하이쿠[俳句]에 이르기까지 일본 시가가 7·5조로 이루어졌다면, 향가에서 속요, 시조에 이르기까지 한국 시가는 3·4조나 4·4조로 이루어졌다. 3·4조와 4·4조의 율격은 먼저 평안함과 낯익음을 주어 대중이 누구나가 참여하게 한다. 이로 그치지 않는다. 반복적인 평안하고 낯익은 율격은 계속 이어지면서 대중은 집단적으로 공감하고 의례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면 뇌 속의 쾌락중추가 지속적으로 자극을 받으면서 내 몸의 800여 개 경락이 우주의 질서와 조응하게 된다. 이러면서 정서적 에너지가 점점 고양되고, 마침내 정점에 이르면서 나와 바깥 세계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지극히 황홀하고 평안한 상태에 이른다. 이 순간에 진과 속, 중생과 부처의 경계 또한 무너지며 영적 체험을 하거나 깨달음에 이른다. 불교의례의 한글 번역문은 음보에서는 안정적이고 장중한 4음보 시조 및 가사체와 역동적이고 경쾌한 3음보 민요체를 혼용하되, 율격에서는 3·4조, 혹은 4·4조를 따르는 것이 좋다. 이에 의식문은 3·4조, 혹은 4·4조로 번역하는 것이 한국 대중에게 가장 평안함과 낯익음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될 수 있는 한 이에 따라 하되, 이것이 해석을 구속하는 틀이 되는 것은 지양하였다. 《천수경》을 비롯하여 경전과 의식문을 거의 모두 3·4조나 4·4조로 번역하였다. 장엄염불의 게송 가운데 몇 가지를 예로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7) 간결하게 번역한다 경전과 의식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을 우려하는 이들은 글자 수가 대폭 늘어나는 것을 염려한다. 하지만 한글로 번역해도 글자 수가 대폭 늘어나지 않도록 간명하게 번역한다. 가령 상단 유치의 경우 기번역본은 437음절인 데 비해 한글로 번역해도 332음절에 지나지 않으며 유치 전반부만 비교해도 177음절 대 136음절이다. 《천수경》만 하더라도 전체를 한글로 독송하더라도 14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문장을 통합하여 반복 서술을 피하는 번역을 채택하여 10%~30% 정도의 음절 수를 줄일 수 있었다.
‘변위(變爲)’는 부처님의 가지를 받아 청정수를 감로다로 전환하는 것을 뜻한다. 직역하면 《통일본》이 맞겠지만, 아래와 같이 번역해도 의미의 왜곡이나 탈락이 없다. ‘감로다로 삼아’ ‘감로다로 바꾸어’ 등의 논의가 있었지만, ‘청정수를 감로다로’라고 생략해도 그런 뜻이 담겨 있으므로 간략하게 축약하였다.
8) 불교 술어는 번역하지 않는다 이미 익숙해졌거나 많은 뜻을 압축하여 한글로 옮길 경우 의미의 혼동을 불러오는 ‘오온’ 등의 법수와 법상용어, 불교 술어나 관용구는 번역하지 않는다. 9) 원문에 틀린 한자는 보정한다
석문의범 이래 진묵겁(塵墨劫)이라 널리 쓰이고 있으나 이는 필사상 진점겁(塵點劫)의 오기라고 봄이 타당하다.
《통일본》을 보면 (부처님이) 부처님의 해인삼매에 깊이 들어가서 부사의한 여의 진리를 마음대로 나투신다고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해인삼매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통일본》이 채택한 저본에는 ‘들다’의 동사를 찾을 수도 유추할 수도 없다. 전통 한문 독해에서 하듯이 조동사를 ‘능히’ 유의 부사로도 풀지 않고 그렇다고 ‘깊이’로 의역했다고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통일본》의 저본으로는 ‘부처님의 해인삼매에서(가운데에서)’ 정도의 번역밖에 얻을 수 없다. 둘째 구는 부사의한 여의 진리를 나투신다고 했다. 진리를 설한다고 해야지 진리(를) 나투신다는 표현이 적합하지는 않다. 다라니(진언)에는 신비한 힘이 담겨 있어 독송하는 것만으로도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 이 신비한 힘은 진언의 소리로 표현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진언은 범어를 한문으로 음차한 것이기에 원래 소리와 차이가 있다. 진언은 범어의 원음과 가깝게 읽되, 한글의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함이 옳다고 본다. 단, 범어에는 필자가 문외한이다. 덕산 스님의 《범어식 천수다라니 발음 찾기》(운주사) 등을 참고함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교의례를 몇몇 스님만이 독점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과 마음을 그럴 수 있는 사람만이 장악하자는 것이다. 이제 불교의례는 대중화를 지향하여야 한다. 어린이들이 절에 와서 부처님께 경배하며 그중 한 어린이가 목탁을 두드리며 의례를 행하면서 거룩한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한국 불교의례의 목적지일 것이다. 불교의례는 한국화와 한글화를 지향하여야 한다. 한문은 해석이 어렵기 때문에 특정한 사람만이 그에 다가갈 수 있고 대중을 소외시킨다. 선진국도 거의 20%에 달하는 데 비하여, 우리나라의 문맹률이 1% 이하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것은 한글과 교육열 덕분이다. 보통 사람들이 단 하루 만에 배울 수 있는 문자는 한글을 제외하고는 아직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글화함은 99%의 대중이 경전과 의식문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알파벳은 미국이나 영국의 유명인 가운데에도 자기 이름의 철자를 적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문자와 소리가 일치하지 않는다. 반면에 한글은 세상에서 가장 쓰기 쉽고 읽기 쉽고 배우기 쉬운 문자이자, 24개 글자를 조합하여 1만 2,768개의 음절을 만들어 온갖 삼라만상이 내는 소리를 그에 가깝게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문자이다. 겔브(I.J. Gelb)에 의하면 수메르의 그림글자(기원전 3,100년)가 셈 말의 소리마디 글자(기원전 1,700년)로 발전하는데 1,400년, 셈 말의 소리마디 글자가 그리스말(기원전 900년)의 음소글자로 바뀌는 데 800년이 걸렸다고 한다. 영국의 언어학자 샘프슨(Geoffrey Sampson)은 모든 시간을 뛰어넘어 세계에서 유일한 소리바탕 글자(feature system, 音韻資質文字)로 창조된 것이 바로 한글이라고 지적한다. 경전과 의식문을 한글화한다는 것은 단지 우수한 한국 문자로 교체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샤피어–워프의 가설대로 언어는 세계의 형식을 규정한다. 같은 대상을 두고도 낱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표상하는 세계와 의미는 다르다. 한글화한다는 것은 한국인이 사유하고 표상하는 세계로 대체함을 의미한다. 한글화함으로써 비로소 한국인은 자신의 사유체계로 경전과 의식문에 담긴 진리를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스스로 주체가 되어 우리말로 부처님 전에 공양하고 예경을 올릴 때 비로소 한국 불교는 사상과 의식과 실천과 표상이 하나가 되는 지평이 열릴 것이다. 경전과 의식문은 머리로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 부처님의 마음에 다가가야 한다. 가슴으로 느끼는 데 의미와 함께 수사와 율격과 같은 형식적 장치가 중요한 구실을 한다. 북소리처럼, 쾌락중추를 지속적으로 자극하여 정서적 에너지를 고양할 때 대중들은 공감하고 범아일여의 황홀한 체험을 하게 된다. 한문은 중국인의 정서와 호흡에 부합하는 중국 문장의 수사와 율격에 따른 것이기에, 경전과 의식문을 3·4조와 4·4조로 바꾸어 한국인의 정서와 호흡에 맞는 수사와 율격을 부여함이 좋다. 그럴 때 대중들은 의미를 새기고 감동하고 고양되면서 부처님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다. 앞으로 디지털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절에서 의례를 행할 때, 부처님을 디지털 영상, 3D 입체영상이나 홀로그램으로 띄우고 한글 음성이 나온다면 그것이 바로 화불(化佛) 아니겠는가. 대중들이 얼마나 빨리 감동과 몰입과 정서적 고양에 이르겠는가. 종단에서 종책으로 스마트폰용 경전과 의식문을 만들고 이를 불교의례로 실연한 것을 동영상에 담고 이를 여러 버전으로 활용한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보급한다면, 스마트폰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누구나 불교의례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기존 것의 번역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21세기 오늘 대중들이 살고 있는 삶의 맥락에서 불교의례문을 다시 창조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의 말씀과 마음에 부합하되, 기존 의식문에서 완전히 환골탈태하여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의례와 삶과 마음을 하나로 아우르는 길이리라. 이제 한글 불교의례는 우리가 함께 가꾸어 나가야 할 한국불교의 중요한 자산이자 삶이다. 귀찮더라도 《반야심경》 한글본을 준비하고, 화면으로 띄우고, 안 되면 각자 스마트폰으로 받아 한글 불교의례를 곳곳에서 실천하자. 곧 출간될 《한글표준법요집》(가칭)이 문제가 많고 일정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졸작이라 하더라도 일단 함께 참여하여 수정하고 보완하며 공동으로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나아가 다 함께 21세기 오늘의 대중 마음과 몸과 삶에 부합하는 새로운 의례문을 창조하자. ■ |
첫댓글 이교수님 근년 활약이 대단하십니다...같은 재가불자로서 부끄러울 뿐 입니다...나무아미타불
한글화 작업도 좋지만 저는 한문교육이 더 강화되면 어떨까 싶습니다. 문장의 의미로 봐선 한자만의 독특한 깊이가 있기 때문인데요. 저는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한자교육이라고 봅니다만^^
감사합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