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에 일이 없었으면 글을 썼겟지만 제가 밤샘일이 있어서 세벽 네시까지 일하느라고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글을 올리고자 했던 이유는 개념의 정립때문입니다. 개념이 정립되지 않고서는 율법에 대한 토론이 결코 본질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네 율법은 마땅히 지켜야할 하나님의 말씀이고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유익하고 지키면 후손에게도 복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키면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흠이 있을수 없습니다. 완전 무결하고 선한것입니다. 율법이 본질상 선하고 아름다운것이며 지켜야할 마땅한 하나님의 법이라는것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자는 단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이 왜 인간에게 주어졌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선하기 때문에 이것을 지키라고 준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율법을 지킬만큼 인간이 선하고 이것을 지킬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문제는 이 선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수 있는 자가 단 한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준 목적이 이것을 지켜서 하나님의 복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혼동할만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곧 율법을 준 목적은 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보자면 범죄한 자에게 죄를 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곧 죄를 죄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모든 인간은 다 죄를 지었음으로 죄인입니다. 이 죄인들에게 죄를 더한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율법이 없어도 망할 인간들에게 왜 율법을 주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망할 인간들을 더 망하게 하는것이 율법이라는 것인데 이미 망해서 더 망할것도 없는 자를 더 망하게 하는 법이 율법이다. 라는 것은 참으로 모순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히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죄가 더한곳에 은혜가 크다고 말입니다. 곧 죄를 더해준것은 율법인데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더 커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우리에게 준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려고 준것입니다. 곧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사함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 은혜를 더하려고 율법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곧 율법은 예수그리스도를 알게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로 가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의 목적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입게하는 것이라면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에게는 율법의 목적이 달성된 것입니다. 죄를 깨달아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고 은혜안에서 거룩하게 됨으로 복을 받은 자들은 이제 율법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것임으로 율법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죄를 짓게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되는 것입니다.(이 카페 회원들은 율법에서 벗어나면 죄인이 되는것처럼 착각들을 하고 계셔서 대화가 안됩니다. 이부분에서 가장 심각한 견해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죄가 더한곳에 은혜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은혜를 더 하려고 죄에 거할수 없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은 율법에서 벗어났지만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는 율법이 주는 범죄에 대해서 죄를 더하는 것에 대해서 해결함을 받았다는 의미지 율법의 내용과 의미에 있어서 율법을 벗어나 방종해도 되는 자격을 얻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믿는 자들은 율법이 가지는 정죄기능에서 정죄함을 받지 않게 되었는데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고해서 율법에서 자유로와지고 맘대로 범죄를 저질러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가 사는것이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임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를 범죄함에 둘수 없으니 이젠 더욱더 정결하고 깨끗하며 정직하고 순결하게 살아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게 된것입니다.
이 의무는 율법이 주는 의무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이 지켜라! 라고 할때 그것을 지키는것은 수동적인 것입니다. 곧 시키는데로 하는 것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의무는 능동적인 의무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행하여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발적 순종과 자발적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것입니다. 이것을 성령님이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하토브님같으신데....이점에 있어서 저는 동의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성령님이 율법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행하게 한다! 라고 표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발적 순종과 자발적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갈때 그것을 돕는 분이 성령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령안에 행함으로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게 된다는 것은 어불 성설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악함으로 육체를 벗어던지지 않는한 결코 죄에서 자유로울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몸이라고 할지라도 의를 사랑하는 영을 가지고 있으니 그 영의 인도함을 받아서 양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자들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특성입니다. 구원받은 이들은 죄를 범하면 마음이 아프고 상실감으로 하나님앞에 나오기가 어려워짐으로 회개하고 정결케 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런식의 신앙생활들을 하게 됩니다.
처음 신앙을 가졌을때는 과거의 습관들 악습들 죄악된 모습들을 쉽게 버릴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해가고 자라가게되면 자발적인 순종과 자발적 의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적에서 볼수 있는 것입니다. 이삭을 바칠때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의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을 성령하나님께서 강제로 한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스스로 순종하여 하나님께 나아갔고 그것을 도우시는 분이 성령하나님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을때 성령님이 돕지 않았다면 아내를 바로에게 뺏길수 있는 사황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성령의 인도함으로 살았다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바로에게 아내를 아내라고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를 속이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연약함을 아시고 도우셨고 그렇게 도움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되고 깨닫게 됨으로서 점점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게 된것입니다.
이것을 성령하나님이 아브라함안에서 온전히 행했다고 표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에 가능했겠지만......아브라함의 선택을 하나님은 존중했고 잘못된 선택을 했을때는 간섭하셨다는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히 로버트처럼 조종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성령님을 통해서 완전히 통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율법을 새기고 그것을 가지고 인간을 통제시키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죄를 범해도 성령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영은 의롭게 산다는 말도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생명을 얻게된 후에는 지혜와 지식이 생기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은사들을 받아 하나님의 선한뜻을 분별하게 되는것이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뜻을 분별하게 되면 그것을 행할수 있게 되는데 그것을 우리의 의지로 할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의 의지로 죄를 범했을때는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것이고 선을 행했을때는 칭찬과 상급이 있습니다. 징계도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주는 것이고 상급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주는 것입니다.
말세에 심판할때가 오면 믿는자는 그 선한 행실로 심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들은 그 악한 행실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게 하셨지만 우리의 의지까지 하나님이 장악한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존중하시고 우리의 의지로 선택하는 것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이렇듯 믿는 자들에게는 더이상 율법이 믿는 자들을 매일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정죄할수도 없고 매일수도 없고 결국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율법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해방되었지만 더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하는 것이 또한 의무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계명을 지키는것은 바로 내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개념을 좀더 잡으려면 율법이라는 것이 시내산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법이라는것을 먼저 인정해야 할것입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약속의 언약이 바로 율법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첫언약입니다.
이 첫언약이 율법입니다. 시내산 언약이 율법이라는것을 부정하면 율법에 대한 토론을 할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지킨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율례와 계명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의 법입니다. 생명의 법입니다.
아브라함이 지킨 법은 행위적 언약인 율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약속의 언약인 그리스도께서 오실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믿음이 바로 계명을 지킨것이라는 말입니다. 도덕적으로 선하고 도덕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고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니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내주시겠다는 후손 창세기에서는 이삭이 나오지만 성경전체적으로 볼때는 그리스도를의미하는 이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의이고 이것을 지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과 계명을 지킨것이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하고 시내산 언약의 불순종은 그 차원이 다른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천엇약/율법)은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순종함으로 열국의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히브리서 9장 15절 말씀을 잘 새겨 들어야 할것입ㄴ다.
첫언약을 범한 죄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새언약으로 오신분이신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영원한 기업의 언약을 얻게 하려고 하심이라!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야 율법과 복음을 제대로 이해할수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할렐루야~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너무 좋고 훌륭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무엇을 반박하시나요?
제가 열심히 정리해 본 바로는, 하토브님의 주장은 율법으로 구원받으라 하지 않습니다. 다만, 구원받은 자들이 성령를 좇아 사는데 있어서, 율법을 연구하고 적용하면 큰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인도가 대부분 율법의 본질을 벗어나지 않고 이루어가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기능중 정죄를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이끄는 첫번째 기능이 있다면, 하토브님의 주장은 율법을 통해 성령의 인도를 더욱 세밀히 받는 유익을 말하는 율법의 두번째 기능입니다.
제가 볼 때, 님은 두번째 기능에 대하 이해가 부족하신 것 같습니다.
파수꾼님~ 빛의아들님이 등록한 게시물 본문에 "너무 좋고 훌륭한 말씀입니다."라고 했는데,
댓글은 전혀 다른 방향인듯 합니다. --;; .... 파수꾼님은 정말 이상한 사람 같습니다. --;; (끝)
님 바보 아닙니까?
제가 이곳에서 바보라 이야기 한 사람 님이 두번째입니다.
윗글은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대한 연구와 적용이 성령의 인도 받는데 주는 유익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맞는 글을 가지고 전혀 문제가 없는 다른 글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되시죠?
님은 율법의 첫번째 기능을 가지고 두번째 기능을 비판하고 계십니다.
님이 한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니, 누가 뭘 반박하겠습니까? 반박한다면 님이 잘못 표현한 지엽적인 것을 이야기 하겠죠.
그러면, 님은 또 왜 본의를 이해해 주지 못하고 오해하냐고 생각할 것입니다. 님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 주장으로 하토브님이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을 반박하십니까? 그러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면 율법의 두번째 기능을 반박하십니까? 꼭 첫 아들이 둘째 아들(동생)에게 넌 아빠 아들이 아니라 하는 것 같습니다.
파수꾼님~ 빛의아들님이 쓴 게시물 중 빨간색 부분을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율법에서 벗어 낫다는 주장을 한다고 해서 모두가 무법주의는 아닙니다.
율법의 조문에서 벗어난 뒤에가 문제이겟지요. 성령을 좇냐, 육신을 좇냐? 그것은 매우 개인적인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만 거기서 율법의 내용이 많은 유익을 준다는 의미이지 율법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죠.
그런 감정적인 표현에 매이면 절대 토론 중 본론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만약 감정이 상해서 이렇게 끝까지 고집을 피우시는 것이라면 님의 그릇이 어느 정도 크긴인지 알겠습니다.
만약 감정이 아니고,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곳 카페의 사람들이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1.죄를 깨달아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고 은혜안에서 거룩하게 됨으로 복을 받은 자들은 이제 율법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것임으로 율법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2.우리가 자발적 순종과 자발적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갈때 그것을 돕는 분이 성령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3.율법에서 해방되었지만 더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하는 것이 또한 의무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계명을 지키는것은 바로 내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위 내용인데
2.번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먼저이고 우리가 행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요
3.번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칭함인지요 ?
빛의 아들님 너무 정리를 잘해 주셨네요
<그것은 약속의 언약인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믿음이 바로 계명을 지킨것이라는 말입니다 >
이렇게 정리하니 믿음과 계명이 분리되지 않네요
이순님의 주장이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고 빛의아들님도 말하는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율법이 아니라 성령의 법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장 16절)